등록 : 2013.05.07 01:24 수정 : 2013.05.07 10:52

대처가 총리로 선출된 날은, 여성해방운동가들이 마땅히 기뻐하고 축하해야 했다. 굉장한 승리가 아닌가. 여성해방운동의 이정표가 될 역사적인 날로서 말이다. 마거릿 대처가 1979년 5월 4일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총리 관저)에 입주했을 때, 그날은 여성해방운동을 위한 위대한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서구 민주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최초의 여성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해방운동가들은 대처가 총리되던 날 런던의 핀칠리1 구역에서 플래카드를 높이 들었다. 플래카드엔 ‘우리는 여성의 권리를 원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우익 여성이 아니다’2라고 써 있었다. 여성해방운동가들의 눈에 대처는 여성이기는 했지만 바람직한 유형의 여성은 아니었다.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알리스 슈바르처는 페미니스트 잡지 <엠마>3에 “그저 거칠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대처는 우익이었고, 남녀평등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여성을 위한 일에 전력한 적도 없었다. 그리하여 대처가 집권한 11년이 끝났을 때 ‘철의 연인’은 여성해방운동가들이 증오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여성운동권에서는 그녀를 ‘투피스 정장을 입은 남자’, ‘남자들의 여자’라고 불렀다. 그녀가 남자들의 세계를 인가해주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남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의미를 내포한 표현이었다.

여성해방운동가들의 증오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초 미국 할리우드에서 대처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 <철의 여인>을 만들었을 때, 영국 작가 제니 앤더슨은 “대처가 여성운동가로 지칭되는 것을 볼 때마다 내 안에서 여성해방운동이 한 조각씩 죽어간다”고 탄식했다. 영국 가수 스티븐 모리세이는 “대처 때문에 앞으로 영국 정치에서 여성이 정상에 오르는 일은 아마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실상 대처가 여성들에게 정치의 문을 활짝 열어주기는커녕 거꾸로 닫아버렸다는 요지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크리스티아네 호프만 Christiane Hoffmann <슈피겔> 기자

번역 장현숙 위원

ⓒ Der Spie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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