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7 01:22 수정 : 2013.05.07 15:10

프리스턴 전 편집국장은, 대처가 인터뷰 때 너무 조심스럽게 답하느라 애먹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상한다. 한겨레 자료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사망함에 따라 ‘대처리즘’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가디언> 전 편집국장 피터 프리스턴1이 그녀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독일 저널리스트가 여성운동가들에게 화해를 주문한다.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언론이 갖는 최선의 미덕”이라는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시모어 허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가디언> 편집국장으로서 수긍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마거릿 대처가 영국 총리로 있던 11년간 끝없이 그녀의 분노를 부추겼다. 그리고 그녀 또한 원하는 바였다.

대처가 토리당(영국 보수당의 전신)의 대표가 된 건 우연이었다. 원래는 당시 대표 에드워드 히스의 정식 후계자 윌리엄 화이틀로가 추천됐어야 한다. 그러나 화이틀로는 히스와 1차 경선에서 겨루는 것을 거부하고 2차 경선을 기다렸다. 반면 당에서는 1차 경선에서 뛸 도전자를 찾고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후보자인 대처는 대표 출마에 자신감이 있었다. 1차 경선이 끝났을 때, 그녀에게 주어진 표는 화이틀로가 모든 희망을 접어야 할 만큼 많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연이었다.

대처는 얼핏 보기엔 권위적인 사람도 아니고 자의식도 강해 보이지 않는다. 말도 많이 더듬고, 기자들이 짓궂은 질문을 던지면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때면 입고 있는 치마를 자꾸 잡아당기는 버릇이 있었다. <가디언>이 주최한 국제회의에서 대처는 전혀 감명을 주지 못했다. 깊은 인상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조차 말이다. 취임 직후 몇 개월간 그녀의 행정 처리는 그야말로 가련할 만큼 설득력이 없었다. 대처 내각에서 일하던 많은 각료는- 대처는 이들을 ‘나약쟁이’라고 불렀다- 자기들이 느끼는 혐오감을 숨김 없이 떠벌이고 다녔다.


짓궂은 질문에 치마 만지작거리던 여인


초기 대처 정부는 힘이 결여되어 있었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집무 시작 후 가장 짧은 시일 안에 안녕을 고하 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그때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대처의 분노를 돋웠고, 그 결과 아르헨티나는 화를 입었다.

대처가 ‘철의 여인’이라 불리게 된 배경이 단지 1982년 아르헨티나와 조그만 섬을 두고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에 만 있다고 보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전쟁을 시작했지만 신경질적인 그녀가 이렇다 할 만하게 인상적인 사람으로 변 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대처 정부가 아르헨티나 에 주둔한 군사령관에게 지시를 잘못 보내는 불상사가 일 어났다. 군사 고문들이 대처에게 침공을 취소하라고 조언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두 번째 이름은 ‘분노’가 되었다. 같은 시각, 영국에서는 광산 노동자와 정부의 갈등이 고조 되어 있었다. 1984년 노동조합은 파업을 선포했고, 대처는 유혈을 동반한 강경진압에 나섰다. 그녀는 영국의 노동조 합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고 영국을 변화시키려는 싸움 을 전개했다. 대처는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용케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전쟁 기간 중에 신문사를 운영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무척 피로하다. 상대가 아르헨티나든 노동조합이든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다. 권좌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평소 같으면 진실을 말할 사람들조차 전쟁 때는 거짓말을 곧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짓말은 애국심으로 포장돼버린다. 대처가 포클랜드 전쟁을 몹시 망설였음이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저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 뒤 북아일랜드와의 분쟁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대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역할에 녹아드는 연극배우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러운 태도를 방어책으로 사용하려던 기억을 지워버렸다. 자신이 이미 지배자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옳은 적도 가끔 있었다. 예를 들어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런던에서 포옹했을 때다. 그녀를 역사를 주도하는 강력한 인물로 만든 사건이었다.


기사 문제로 오랜 시간 법정 다툼 ‘악몽’


신문사 편집장의 처지에서 보면, 대처는 악몽이 되기도 했다. 정부 관리가 경솔하게 입을 놀리는 바람에 비밀에 부치려던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대처는 감옥까지라도 추적해 그를 잡아냈다. <가디언>이 영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관한 기사를 내려고 했을 때, 그녀는 “IRA에게 여론이라는 산소를 만들어주고 있다”고 비방한 적도 있다. 대처가 보수적 성향의 방송 사회자 세 명을 차례로 임명한 적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자기와 아주 친한 사람의 동생이었다. 대처에게는 인간의 건강한 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과거 영국 정보부 요원 피터 라이트가 쓴 <스파이 잡는 사람>이란 책에 얽힌 얘기를 잠깐 하자. 그는 이 책에서 노동당의 해럴드 윌슨 총리를 실각시키기 위해 꾸민 ‘정보부의 모반’에 관해 이야기한다. <가디언>은 이 사건에 대해 라이트의 서술을 토대로 보도했다. 그러자 대처는 기사를 저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우리에게 오랜 기간에 걸친 소송을 걸었다. 이 법정에서 저 법정으로 끌려다니느라 우리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을 허비했다. 그러나 손해를 본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세상 앞에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대처 또한 국민의 세금을 축내야 했다. 그녀는 확고함과 어리석음을 혼동한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내가 기억하는 대처의 면모다. 그녀는 어리석을 때도 간혹 있는 여성 정치가였다. 우리와 같은 적수를 반항하지 못하도록 몰아댄 여성이다. 사실 그녀나 우리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 데 말이다. 한편, 그녀의 딸이 우리 기자와 연애한 적이 있다. 그래서 대처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어머니로서 대처는 자식을 많이 사랑했다. 다만, 세상에 책 한 권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 여성 전사이기도 했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대처는 매기(마거릿의 애칭)다. <가디언> 편집국에서 인터뷰 때 조심스럽게 답하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무렵 매기는 다른 사람이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면 겁을 먹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자기 역할을 점점 더 능숙하게 해냈지만…. 그리고 자기를 둘러싸고 생겨난 전설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대처를 ‘자신의 약점을 숨기느라 노심초사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소심하고 겁이 많지만 그 겁을 억제하던 여성. 분노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 업무이기 때문이었다.

글 피터 프리스턴 Peter Preston <가디언> 전 편집국장, 번역 장현숙 위원, ⓒ Der Spiegel

1 올해 74살인 프리스턴은 1975년부터 1995년까지 영국의 진보적 일간지 <가디언>의 편집국장을 지냈다. 포클랜드 전쟁과 노동자 탄압에 대해 대처의 반대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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