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04 18:03 수정 : 2013.04.08 17:18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 언론과 대중연설을 통한 선동으로 영웅적 몰락 판타지를 연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겨레 자료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70년 전 스포츠 궁전에서 한 연설을 필두로 ‘제3제국’은 숭고한 몰락에 대해 판타지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미 19세기 군대 전통에 존재하던 것이다.

1943년 2월 18일,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베를린의 스포츠 궁전에서 독일 내 전력을 총동원하기 위해 “총력전이야말로 전쟁을 가장 빨리 끝내는 방법”이라고 외쳤다. 그것은 그의 가장 위대한 연설이라 할 만했다. 바로 며칠 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6군대가 항복을 선언한 때였다. 나치 지도부는 이 전투에서 항복한 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불운한 패배로 미화했다.

같은 해 1월 30일 권력승계 10주년 연설에서 괴벨스는 이미 독일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복’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당시 그는 1910년에 지은 스포츠 궁전 원형 홀에 모인 1만여 명의 청중 앞에서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을 두고 “영웅들의 위대한 희생”이라고 칭송했다.

괴벨스가 명확히 말했듯이, 독일은 승리 아니면 몰락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30분 만에 연설을 끝맺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총통은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중략) 우리는 단호한 결단력으로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구호를 외쳐봅시다. 국민들이여 일어서라, 폭풍을 일으켜라!”

프로이센의 장군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총력전’이라는 용어를 그의 책 <전쟁론>에서 처음 사용했다. 클라우제비츠는 1812년 “모국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위대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몰락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행복한 일”이라고 적었다.

히틀러는 일찍이 클라우제비츠의 이런 주장을 내면화했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 속에 받아들였으며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 전쟁시 연설에서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몰락에 대한 숭고한 이념을 인용했고, 1945년 4월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 직전 남긴 유서에서도 ‘위대한 클라우제비츠’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독일 민족의 명예로운 몰락 이후 찬란하게 빛나는 나치 운동의 재탄생이 도래하기를 희망했다.

최후까지 타협하기 않기

이런 민족 이데올로기는 나치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19세기에 형성되었다. 독일의 해방전쟁 시기에 시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데 위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애국적인 시인 쾨르너뿐만 아니라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 막스 폰 셴켄도르프도 그러했다.

역사학자 르네 실링은 1813~1945년 독일 전쟁 영웅의 역사에 대해 연구했다. 여기서 그는 몰락에 대한 숭배와 관련해 오래된 전통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독일 제2제국과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재빠르게 인기를 얻은 작품에서 영웅적인 생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기수 크리스토프 릴케의 죽음과 사랑>이나 발터 플렉스의 소설 <두 세계 사이의 방랑객>이 그러하다. 독일문학가 귀스타브 뢰테는 1915년 “독일인의 신뢰에서 가장 값진 것은 모든 이들의 망설임 없고 흔들림 없는 지지이다. 이는 지구가 사라질 순간까지 계속될 지지이다”라고 썼다.

1918년 10월 독일이 전쟁에서 패했을 때, 군사령부 최고위층은 황제의 죽음을 생각했었다. 참모 장교들은 당시 프로이센 제국의 황제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전방에서 영웅의 죽음을 연출한다면 패배라는 굴욕을 최소화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제국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1918년 11월 빌헬름 2세는 안개 낀 밤을 틈타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망명했다. 독일 장교들은 이것을 탈영으로 여기고 군주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에리히 레더 해군 제독은 1939년 12월 22일 부대 전체가 스스로 목숨을 끊더라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것이 해군의 의무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독일 전투함은 마지막 유탄이 떨어질 때까지 전원 목숨을 걸고 지든 이기든 싸우라.” 1941년 5월 북대서양에서 비스마르크호가 영국군에 의해 격침되었을 때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도 배와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선원 2016명이 목숨을 잃었고, 오직 115명만 목숨을 건졌다. 생존자들은 린데만이 “국기에 경례를 하면서 강철 같은 의지가 드러나는 자세를 유지했다”고 증언했다. 1943년 12월 북해를 항해하던 샤른호르스트호 선장 프리츠 힌체도 린데만과 같은 선택을 했다. 이 배에 타고 있던 선원 1932명이 얼음같이 찬 바다에 빠져 죽었다.

영웅 미화의 정점 스탈린그라드 전투

몰락의 미화에서 정점을 찍은 것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이다. 소련군에 의해 제6군대가 포위당하자, 히틀러는 군인 26만 명에게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기를 바랐다. 가망이 없다고 판명되면 적군의 손에 목숨을 잃거나, 굶주림이나 추위로 죽거나, 자결을 선택해야만 했다.

이런 선전은 패배를 희생으로 격상시켜 숭고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히틀러와 괴링, 괴벨스는 ‘거룩한 공포’, ‘전능한’, ‘경외심’ 등 종교와 같은 용어를 자주 사용해 체계적으로 ‘현실감 상실’을 이끌어냈다.

1943년 1월 말, 히틀러는 제6군대가 포위된 상황에서 프레드리히 파울루스를 원수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그를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운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히틀러가 그에게 이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붙인 데는 일말의 기대가 숨어 있었다. 포위 상황에서 항복보다 자결을 택해 다른 장교에게 모범이 되라는 것이었다. 이는 베를린 사람들이 패배한 군대의 지휘관에게 기대하는 바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장교들은 자결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새로운 원수를 발표한 뒤 몇 시간 만에 파울루스와 수많은 군사는 포로로 잡혔다. 이 소식을 듣고 히틀러는 노발대발했다. 스포츠 궁전의 연설이 있기 며칠 전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국민이 우리에게서 ‘항복’이나 ‘굴복’이라는 단어를 다시 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함부르크 출신 역사학자 베른트 베그너가 설득력 있게 설명했듯이, 히틀러는 이를 통해 이미 자신의 몰락 전략을 예고했다.

독일 국민이 전쟁에서 더 이상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은 것은 1944년 가을이다. 미국군이 처음으로 대도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아헨을 점령했고, 라인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이를 입 밖에 내는 사람은 ‘국방력을 흔들고 있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했다. 이 상황에서 선전은 최고조에 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선전의 모델이 되었다. 이전에 제6군대가 볼가강 유역에서 그랬듯이, 이제는 독일 전체가 싸움에 나서 몰락해야 했다.

1945년 3월 19일 히틀러는 군수장관 알버트 슈페어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독일이 패배한다면 독일 민족도 멸망할 것이오. 모든 시설을 우리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우리 민족이 약하다는 것은 스스로 증명되었소. 상류층은 몰락할 것이며, 빈민만 남을 것이오.”

이제는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최후의 승리냐 몰락이냐’로 구호가 바뀌었다. 이를 통해 독일인들은 휴전이나 평화협정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판타지 속에서 그저 끝까지 버티는 일에 대비하게 되었다. 공포에서 나오는 힘이 선전의 원칙이 되었다. 이 원칙은 독일이 패배할 경우 처하게 될 위험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런 구호는 적들이 독일 국민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암시한다. 이 선전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나치에게는 상대방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에 더해 독일 국토는 완전한 파멸이 닥칠 때까지 지켜야 했다. 1944년 3월 8일 발표된 ‘총통 명령 11조’는 전투 지휘관들에게 요새를 떠나지 말고 지킬 것을 의무화했다.

적군에게 포위당하는 최악의 경우에도 요새 지역을 지켜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탈출·항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리고 마침내 히틀러는 1944년 3월 19일 제국 영토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라는 ‘네로 명령’을 발효했다. 눈에 보이는 독일의 모든 산업과 군 수송 및 기반 시설, 나아가 시민조차 파괴하라는 것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제3제국은 노인과 여자, 아이들에게도 자율적인 군 복무와 군사조력 업무를 강요했다. 군사화는 최고조에 달했다. 동시에 전쟁 지휘도 점점 더 극단화되었다. 나치 제국의 지휘관들은 내부의 동요가 있을 때마다 제국의 방어를 강요했고, 이를 통해 통치를 강화했다. 나치당의 사무국장이자 제국 수뇌부의 마틴 보르만의 구호는 명백했다. “승리 아니면 멸망이다.”

1945년 1월 바르테가우의 주도였던 포젠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군인 1만5천 명이 지키고 있었다. 육군 소장 에른스트 마테른은 과연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이 요새를 방어해야 하는지 의심을 품었다. 그러자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는 그를 직위해제하고 에른스트 고넬 육군 소장을 그 자리에 앉혔다. 에른스트 고넬은 “패배라는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다”고 했다.

1945년 이후 판타지는 사라졌다

소련군에 의해 포위된 포젠 요새 군인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구원병이 오거나 도망가는 것이었다. 총사령부는 어떤 구원병도 보내지 않았고, 패배와 탈영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포젠 요새를 둘러싼 마지막 전투에서 1만 명이 넘는 군인이 사망했다. 소련군이 전투 지휘소를 점령하기 직전 고넬은 자살했다. 1945년 2월이었다. 히틀러가 기대한 대로 마지막까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군대 간부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제국의 간부들이 전쟁 말기에 총통의 지시, 즉 자결을 선택했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43명의 나치당 관구장 중 4분의 1인 11명이 자결했다는 것만 확실히 알려져 있다. 요제프 폴트만과 한스 뮐러비텐이 1953년 제시한 수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게슈타포와 친위대가 속한 제국보안본부의 지도자급에서도 47명 중 7명이 자살했다. 장성 중 육군에서 35명, 공군에서 6명, 해군에서 8명, 무장 친위대에서 1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히 1945년 소련군에 점령당한 독일 동부 지방에서 자포자기한 독일인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전쟁의 마지막 한 주 동안 1만 명이 자살했는데, 그중에는 무고한 시민도 있고, 나치 지휘자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자결을 택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그 수가 10만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19세기 군인 전통에서 비롯된 영웅적인 투쟁과 몰락이라는 망상은 1945년 이후 독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를 돌아보는 것은 낯설기조차 하다. 망상 속에서 죽음을 좇은 독일인들은 실재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웠고, 대서양 이편 저편에서 들리는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견뎌내고 있다. 그리고 탈영웅 민족이 되었다. 괴벨스가 스포츠 궁전에서 연설한 지 7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글 볼프람 베테 Wolfram Wette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현대사 번역 이상익 위원ⓒ Die Zeit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