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04 17:45 수정 : 2013.04.08 18:37

바티칸의 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군사독재 정권의 방조자였을까? 37년 전 두 사제가 체포되고 감금당한 사건에 대해 아르헨티나가 교황의 과거사를 묻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최초의 남미 출신 교황이 자국에서 나왔다는 걸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교황명 프란치스코)의 개인사에 대해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언론은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정권 당시 베르고글리오가 했던 역할에 관심을 갖고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베르고글리오의 교황 취임을 계기로 다시 불붙은 이 논쟁은 아르헨티나 내부에 깊게 파인 분열의 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두 예수회 사제의 고문사건에 관해 그동안 여러 문건과 증거물이 수집되어왔다. 이 자료들을 하나하나 짜맞춰 마지막에 얻게 되는 새 교황의 이미지는 가톨릭 교회에서 환영받을 만한 인물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대해 바티칸 대변인 페데리코 롬바르디는 “가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좌익 분자들이 바티칸을 상대로 정치 공세를 펴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 교황청이 이미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으로 토론은 끝난 거예요.”

같은 날 오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느 뒤뜰에서 로돌포 요리오가 입을 열었다. 낡은 재킷을 걸친 이 노인은 동생 오를란도 요리오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정의구현 투쟁을 벌이고 있다. 오를란도는 고문당한 두 예수회 사제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로돌포의 표현을 빌리면 ‘화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로돌포는 한 인권변호사와 함께 오를란도의 감금을 방조한 혐의로 베르고글리오를 고소하는 소송을 준비했다. 서류를 완비해 제출한 게 2005년. 소송은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1976년의 상 황을 로돌포는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군 장군들은 질서를 교란할 위험이 있다고 간주되는 시민들을 가차없이 사냥하기 시작했다. 게릴라, 대학생, 노동조합원, 가톨릭 사제들이 대상이 됐다. 독재가 시작된 지 불과 한두 해 사 이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 무렵 오를란도는 프란츠 할릭스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 스의 빈민 구역 변두리에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기서 비 정치적으로 평화롭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작정이 었다. 당시 두 사제의 상관인 예수회 관구장 베르고글리오 는 이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이 젊은 사제들이 가난한 사람 들과 가까워지면서 군부가 두 사람을 대중을 동원하여 봉 기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인물로 주목하자, 베르고 글리오는 두 사제에게 빈민촌을 떠나라고 경고했다. 상황 이 그들에게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두 사제가 그 구역에 남아 있으려면 자신을 보호해 줄 주교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이들이 보호를 청하기 위 해 주교를 방문했을 때 주교는 후견을 거절했다. 로돌포는 “베르고글리오가 두 사제에 대해 좋게 얘기하지 않았다” 고 말했다. 할릭스 신부는 그의 책에서 “베르고글리오는 우리가 테러리스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고 했다.

1976년 5월 23일 일요일. 중무장을 한 경관과 군인 300명이 할릭스와 오를란도가 살고 있는 오두막을 포위했다. 이들은 두 사제를 사제복의 모자를 뒤집어서 얼굴에 덮어씌운 다음 에스마 해군사관학교로 끌고 갔다. 이곳은 독재정권 당시 최대 규모의 고문소로 이름 나 있던 수감장소다. 두 사제는 거기서 5개월 동안 눈이 가려진 채 큰 쇳덩어리 공이 달린 사슬에 묶여 죄수로 지내야 했다.

 

두 사제가 잡혀가 고문당하던 날

그러고 나서 3~4주 뒤 로돌포를 개인적으로 방문해 “오를란도에게 최악의 사태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바란다”고 말한 사람은 다름아닌 베르고글리오였다. 로돌포는 “베르고글리오가 이중 게임을 한 게 분명하다. 두 사제에게 경고함으로써 바깥세상에는 자기를 보호자로 그려내면서, 뒤로는 이들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다닌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훌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심탄회하고 정직하게 선의를 갖고 서로를 대해왔어요.” 얼마 전 독재자 호르헤 라파일 비델라(종신형 수감 중)가 감옥에서 한 말이다. 군사정권 당시 해군 참모총장 마세라 제독은 교황의 외교사절인 피오 라기 추기경과 정기적으로 만나 테니스를 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직자와 군부가 우호관계에 있었다는 또 다른 예가 있다. 해군 장교가 민간인 예닐곱 명을 비행기에서 산 채로 바다로 떨어뜨려 죽인 사건이 있었다. 그 장교는 그 일을 고해하기 위해 군 사제를 찾아갔는데 “그런 일로 고해할 필요는 없다. 비행기에서 사람을 떨어뜨려 죽이는 것은 기독교적인 방법”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군사평의회는 교회의 이런 아량에 감사를 표하는 뜻에서 주교와 대주교의 특별연금을 보장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 법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1976년 10월, 할릭스와 오를란도는 5개월간의 감금생활을 마치고 석방됐다. 오를란도는 잠시 미국에 가 있었고, 할릭스는 독일로 이주해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베르고글리오는 2010년 처음으로 이 두 사제 사건과 관련해 심문을 받았다. 해군사관학교에서 자행된 고문사건을 처리하는 재판 과정이었다.

자신의 보호를 받는 젊은 두 사제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해 마세라 제독을 방문했다는 베르고글리오의 증언에 이어, 피해자 쪽 변호사가 물었다. “그런데 오를란도와 할릭스가 바로 해군사관학교에 수감되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까?” 베르고글리오는 “여론이 그랬지요”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다 알려진 사실이라는 말이다. 변호사가 되묻는다. “여론이 그랬다고요?” 이건 마치 군대의 어느 부서가 두 사람이 체포된 것을 소문으로 퍼뜨리기라도 했다는 얘기 아닌가? 베르고글리오는 “내가 물어봤더니 그 사람들이 그렇게 대답했다는 얘깁니다”라고 설명을 보탠다. 변호사는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간다.

“그 사람들이 도대체 누군가요?”

“아, 그 영향력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 이름을 말할 수 있는지요? 당시 수용소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물어본 사람 중 그 누구라도 이름이 생각나는지요?”

베르고글리오는 고개를 젓는다.

“교회의 상급자들이었나요? 추기경이었나요?”

“그 모두였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우리가 도움을 청하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친구도 지인도 다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지요.”

자료는 이런 식으로 몇 쪽이나 이어진다. 베르고글리오는 질문을 비켜가기도 하고 질문을 두루 휘감기도 한다.

 

글쎄, 그게 전부 오해입니다

베르고글리오와 이야기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다. 에스텔라 델 라 콰드라는 현재 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가족 중 7명이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경험한 이 부인은 독재정권의 영아 탈취사건(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정권이 정적들을 체포·납치해 실종시킨 후 그들의 영아 500명을 정권 추종자들에게 양자로 넘긴 사건) 재판에 그가 증인으로 출석해서 사건의 전모를 밝혀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베르고글리오는 출석 대신 서면으로 제출한 답변서에서 자신은 1980년대 말에서야 겨우 실종자 자녀들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알려왔다. 에스텔라 델 라 콰드라는 “그가 그 사건을 전혀 몰랐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라며 의아해한다. “외국의 가톨릭 신문조차 이미 1970년대에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대로 주교들 서명까지 받은 광고를 내기도 했는데 말이에요.” 그녀는 베르고글리오에게 이 일에 대해 이모저모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베르고글리오 인품에 대한 신빙성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문건은 아르헨티나의 유명 언론인 오라시오 베르비츠키에 의해 발견됐다. 그는 군사 독재 정부가 저지른 범행의 진상 규명에 관한 책들을 조사하고, 할릭스와 오를란도 사건을 기록하기도 했다.

베르비츠키의 기록은 외무부의 어느 담화를 담은 메모지다. 할릭스와 오를란도가 이미 아르헨티나를 떠나고 난 시점에 있었던 일이다. 이 무렵 할릭스는 독일에 체류 중이었는데, 그새 여권 유효기간이 만료됐다. 그래서 그는 당시 관구장이던 베르고글리오에게 자기 대신 여권 유효기간 연장을 신청해달라고 부탁했다. 베르고글리오는 부탁을 들어줬다. 외무부에서 오르코옌이라는 관리를 만나서 여권 기간 연장 신청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때 그와 나눈 말 중에 베르고글리오는 예전에 이미 사실무근으로 판정된 혐의, 즉 ‘할릭스와 오를란도가 게릴라들과 접촉했다는 말을 했다’고 메모지에 적혀 있다. ‘빈민촌을 떠나라는 명령을 두 사람이 거부했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메모지에는 ‘기록된 모든 사항은 베르고글리오 신부 자신이 오르코옌에게 한 말을 적은 것이다. (여권) 발급 신청서가 인가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베르고글리오의 특별 권고 사항도 여기 함께 첨기한다’고 적혀 있다.

베르고글리오는 자서전에서 “이 모든 것이 오해다”라고 해명한 적이 있다. 외무부 관리에게 “할릭스는 무고하게 체포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뭐라고 말했든 간에 할릭스는 그때 여권 유효기간을 연장받지 못했다. 베르고글리오를 빼놓으면, 당시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은 할릭스일 것이다. 그런데 할릭스는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입을 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이 일을 완전히 마무리했고, 베르고글리오를 용서했다고만 할 뿐이다. 자신이 갖고 있던 문서도 전부 태워버렸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국영방송은 최근 베르고글리오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사제들이 출연해 베르고글리오가 독재정권 때 자신들을 숨겨준 일화를 이야기했다. 교황 취임식 전야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 앞 대성당에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다. 노점 상인들은 온화하게 미소짓고 있는 교황의 모습이 담긴 스티커와 사진을 판매대에 잔뜩 비치해놓았다. 그 물건을 산 아르헨티나인은 더 이상 베르고글리오를 산 게 아니다. 프란치스코를 산 것이다.

글 마리안 블라스베르크 Marian Blasberg <차이트> 기자, 카렌 나운도르프 Karen Naundorf 자유기고가

번역 장현숙 위원

ⓒ Die 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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