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6 02:21 수정 : 2013.03.07 15:36

영화 <링컨>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을 연기한 아일랜드 출신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다시 한번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링컨 역으로 사상 첫 3번째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작품 속 인물로의 감정이입과 이해, 정치인 링컨의 자화상, 그리고 5달러 지폐에 그려져 있는 유명인물을 연기하는 어려움에 관해 그에게서 직접 들어본다.

영화 <링컨>
‘아니, 앵글로 아이리시가 미국의 우상을 연기한다고?

좀 뻔뻔한 거 아니야?’ 처음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에이브러햄 링컨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이 배우는 매번 맡은 배역의 인물로 완전히 용해해버리는 바람에, 한 영화에서 그를 만난 사람은 다른 영화에서는 그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를 구부정하고 어눌한 자세의 링컨으로 알고 있었는데, 영화 바깥에서 보니 완전히 딴판이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몸집이 탄탄하다. 사이클 선수 타입이다.

그는 지금 뉴욕의 리츠칼튼 호텔 18층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 겨울이라 하기엔 터무니없이 따뜻한 어느 월요일, 저 멀리 아래로는 센트럴파크가 보인다. 공원의 스케이트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까만 점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인간들이 하얀 링크로 몰려 들고 있다.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기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멋져 보이는 걸 겁니다”라고 말한다.

차이트 루이스, 영화 <링컨>을 보면 옛날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잘 훈련된 요즘 정치가들과는 너무 달라서요. 당신이 연기한 내향적이고 서툰 인물이 지금과 같은 시청각 문화라면 도대체 정치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루이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텔레비전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텔레비전을 거치면 모든 것이 상투적 문구, 단순한 그림으로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런 사람들도 설 자리가 있다면 참 흥미로운 사회가 될 텐데 말이지요. 사실 한나라의 수도에는 성격이 강하면서도 자신을 억제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가가 그런 경우겠지요. 그러나 이런 부류가 사업가들처럼 번지르르하게 말을 꾸며 하는 바, 그만큼 링컨도 자기 식으로 자신의 판단력을 사용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교에 서투르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악관을 방문한 인사들 중 어떤 사람에게는 링컨이 의도적으로 서툴고 신랄한, 그러면서도 귀여운 데가 있는 익살꾼 노릇을 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차이트 그런 사이비 정치인 같은 사람들을 상대할 만큼 링컨이 참을성이 있었을까요.

루이스 그는 누구보다도 참을성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 적합하다고 확신하고 있던 그 리듬을 철저히 유지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바로 그 성격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 되곤 했지요.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전부 손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링컨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모두 고려하는 사람으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절대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문제와 끈질기게 씨름하되, 그렇다고 신경과민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고와 의도의 명징함에 도달하기 위해 고투하는 논리학자 같은 태도로 문제에 접근했습니다. 그는 유클리드 원론을 혼자 공부해서 깨우친 사람입니다. 나도 그 원론을 배우려고 좀 시도해봤는데, 오, 그것은 아주 어려운 내용이에요.

차이트 링컨에게 심취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만난 인물 중 링컨만큼 좋아한 사람은 일찍이 없다고 했는데.

루이스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직접 만나보지도 않은 인물을 그렇게 좋아한 적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차이트 한데, 링컨에게 감탄하는 정도가 아니고 사랑까지 하게 된 이유가 뭔가요.

루이스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간성은 인류의 내면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역설과 갈등, 사랑스러움과 잔인성이 모두 그 안에 있어요. 이것이 종합된 결과, 연약한 인간에 대한 그의 깊은 연민이 형성된 겁니다. 그 역시 자신이 저 약한 존재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말입니다.

차이트 그런데 그에게서 우울증 흔적도 본 것 같습니다.

루이스 내가 연기한 링컨에게 그런 건 없어요. 그럴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링컨이 심각하게 사념에 빠질 때가 많아 그런 인상을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때는 대개 그가 당면 과제에 관해 뭔가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을 때가 분명해요.

차이트 평소 일하는 방법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생각 속으로 완전히 몰입하는 링컨의 성향과 상응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루이스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인물을 놓고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아보겠다고 한다면 정말 외람된 일일 겁니다. 그러나 소소한 몇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띄기는 하더군요. 내가 연기하는 모든 역에서 그런 걸 조금씩 느끼는 것 같아요. <나의 왼발>에서 왼발을 제외한 전신마비의 젊은이를 연기할 때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순결의 시간>에서 1780년대 뉴욕 상류층 변호사를 연기할 때,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에서 유전개발자를 연기할 때.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예요.

나 자신과 내가 탐구하게 될 또 하나의 인생이 마치 두 개의 혈관처럼 눈앞에 떠오릅니다. 두 혈관은 따로따로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데, 내게는 둘을 함께 묶을 수 있는 위치점이 눈에 들어오지요. 두 핏줄 사이를 가는 끈으로 연결하고, 두 혈관을 잡아당겨서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1cm씩 두 개의 혈관을 점차 가까이 가져갑니다. 양쪽이 다 둥실둥실 떠다니기 때문에, 그 삶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그 삶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감정이입과 이해의 과정입니다. 어쨌든 두 핏줄이 결국엔 어느 한 점으로 모이게 되는데, 바로 이 점에서 나는 나를 놓아버립니다. 링컨도 이 과정이 가능했습니다. 외람되지만 그와 나 사이에 이 연결점이 존재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아, 이 연결점들이 조금만 더 크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이트 연기 중에 극중 인물과 완전히 하나로 용해되는 나머지, 신체 언어조차 완전히 변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링컨의 모습을 보여줄 시청각 자료가 하나도 없었을 텐데요.

루이스 잘된 일이죠. 자료가 없으니 누구도 내게 “그건 그렇지 않았어”라고 주장할 수 없잖아요. 나는 지금까지 연기해오면서 그런 힌트를 참고하지 않았는데, 그거야말로 웃기는 일이겠죠. 극중 인물에 숨을 불어넣기도 전에 이미 어떤 방식으론가 죽여놓은 셈이니까요.

차이트 독서를 많이 하는 걸로 압니다. 책에서 도움이 될 만한 사항을 찾아내기도 하는지요.

루이스 독서와 상상 두 가지를 겸비해야 하지요. 자유롭기 위해서는 상상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독서할 때 중요한 게 뭔가 하면, 언제 책을 놓아야 할지를 아는 겁니다. 평생 동안 링컨에 관한 책만 읽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책을 천천히 읽는 편입니다. 그래서 사전에 책을 신중하게 선별해야 합니다. 멋지고 좋은 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링컨을 연기하기 위해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 정치 체계의 토대가 잡히기 시작했는지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 방면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거든요. 이 나라의 건국이 노예제도와 함께 시작되었지요. 노예제도라는 인류의 끔찍한 죄악이 존속할 수 있었다는 건 아메리카라는 국가가 탄생하면서 범한 심각한 실수였습니다. 이 사안과 관련해서 링컨이 맞닥뜨린 진퇴양난의 문제는, 이 국가의 약점을 제거할 때 야기되는 직접적인 영향이었습니다. 미합중국을 건국한 인사 중 많은 이들이 집에서 노예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 폐지라는 문제와 직면해서 갈등을 느끼는 정도는 개인별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당시 모두에게 분명했던 건, 영국 정부 세력에 공동으로 대항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이 문제는 일단 치워놓고 다음 세대로 넘겨야 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스필버그 감독.
차이트 이 영화는 한 개인의 역사를 그런 역사의 파노라마 속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스필버그 감독은 역사적 기념물이 아니라 인간 링컨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 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링컨의 가정 내 갈등이 역사적 사건들과 결합됩니다. 그리고 링컨은 양쪽 궤도에서 모두 무리를 감수하며 자기 힘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국면에 이르게 되지요. 국무회의 중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는 장면과 아들의 얼굴을 때리는 장면. 묘한 유사성을 보이는 두 모티브가 등장하는 게 바로 이때입니다.

루이스 나는 그 점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재미있군요. 이 두 장면은 내가 생각해낸 것입니다. 두 장면이 서로를 반영하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는 없었어요. 나한테 이 장면에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라고 말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요. 어쩌면 토니 쿠시너의 대본에는 아들 로버트의 뺨을 때리는 방향이 지문으로 써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차이트 평소 소심하고 꼼꼼한 이 인물의 용린을 건드린 인상을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무섭게 폭발하고 마는.

루이스 그가 참고 지탱해온 갈등이 그만큼 컸단 얘기가 되겠죠. 그래서 남들이 이제야 그를 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그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자기 성격의 완전히 다른 면을 내보이는 겁니다. 분명 링컨은 화도 잘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금세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일단 화가 나면, 그 정도는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이 늘 티격태격하면 결국 노예제 폐지를 입법할 마지막 서너 표를 얻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쳤을 때, 그가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차이트 민주주의라는 게 그런 거지요. 바로 이때 누군가가 나서서….

루이스 바로 그겁니다. 지금은 행동을 해야 할 순간이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이 필요한 거지요. 중요한 시점이 되면 민주주의가 원래 자기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만큼보다 약간 무리해서 자기 권력을 끌어내어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진행 과정이 안고 있는 역설인 거지요. 그리고 링컨은 그 때문에 심하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 원인을 제공한 것은 1862년에 발표된 재산 몰수법이었습니다. 반란에 합세한 남부 폭도가 소유한 노예들을 전부 자유인으로 해방시킨다는 법안을 링컨이 승인했던 겁니다. 정작 링컨 자신은 노예 해방의 권리가 의회에 있다고 보지 않았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전쟁이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돌입했을 때는 예외적으로 전시 권한을 발동해, 인신 구속 영장제도를 일시 정지시킨 일도 있습니다. 수감된 사람에게 어느 정도 권리를 보장해주는 이 법을 무력화한 것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이래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권이란 개념, 즉 인간의 근본적인 권리 존중에 명백히 위배되는 처사였기 때문에 사방에서 비난이 쇄도했지요. 하지만 링컨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법원의 검증 없이 구금할 수 있도록 하여 종전을 앞당기고 싶었을 겁니다. 소요와 폭동을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다시는 전쟁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겁니다. 측은지심이 넘치는 링컨이었으니, 그런 큰 목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무리를 감수하면서라도 냉정하고 실용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지요.

차이트 한 인물로 몰입하는 것이 그 역을 연기하는 배우의 감정에 변화를 초래합니까.

루이스 그렇습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 해에 걸쳐 나 자신을 위해 개발한, 나만의 작업 방식입니다. 오랫동안 숙고하는 가운데 알아낸 사실이 한 가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환상을 창조하는 작업은 반 이상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자의식을 잔뜩 부풀려가지고 ‘내가 지금 이 연기를 하는 건 관객들에게 이러저러한 느낌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이미 자신과 상상력 사이에 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상상력이라는 건 대상으로 의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차이트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 중에서 대중의 집단의식에 가장 선명하게 각인된 인물이 링컨이겠지요. 이 영화는 미국의 5달러 지폐에 그려져 있는 인물에 관한 영화 아닙니까.

루이스 내가 이 역을 되도록 맡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시간을 끈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미 국민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모습이 굳어버린 인물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다? 전혀 가망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설사 완전히 굳어버린 건 아니라 해도, 최소한 마비에 가까울 만큼 신화한 인물이었지요. 무엇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건, 그래도 어쨌든 좋은 일입니다.

차이트 미국에서 이 영화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시사회가 열렸죠. 반응이 어땠나요. 중요한 일이 있었다면.

루이스 아 예, 우선 반응은 나쁜 편이 아니었어요. 여러 해 전에 크리스티 브라운 감독의 <나의 왼발>에서 근육이 마비된 환자를 연기할 때와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나는 실제 존재한 인물을 연기하는 경우가 드문데, 그 영화와 링컨이 이 점에서 서로 관계가 있지요. 당시 나는 런던에 살고 있었어요. 그 영화는 비단 아일랜드의 역사뿐만 아니라, 수도 더블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어요. 영화가 개봉되기 전 몇 달간 나를 엄습하던 불안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더블린 사람들이, 모든 아일랜드인이 자기들 것인 어떤 이야기가 자기들이 만족할 만한 방식으로 이야기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를, 그때 간절히 빌고 빌었어요. 지금 이 영화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이 사람을 이 영화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론가 다시 돌려주는구나’ 하는 느낌을 미국 사람들이 받게 된다면, 아니 적어도 이 인물을 지금 다시 탐구해보는 것이 미국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겁니다.

차이트 미국은 이를테면 제2의 고향이 된 셈이지요.

루이스 아내가 미국 사람이고, 아들들도 다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내는 극작가 아서 밀러의 딸이며 배우이자 감독인 레베카 밀러이다.) 연기를 하는 배우로서 나는 여러 곳을 전전하며 일을 합니다. 일 때문에 여기 오게 됐고, 현재 우리 가족은 당분간 살기로 하고 이곳에 일단 짐을 풀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일랜드와 미국 사이를 오갑니다.

차이트 영화 <링컨>에 대한 미 국민의 반응을 경험하면서 지금까지 몰랐던 미국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한 게 있나요.

루이스 특별히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 영화의 해석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미국 사람들의 개방성에 놀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의 해석일 뿐인데 말입니다

글 마리 슈미트 Marie Schmidt 자유기고가

번역 장현숙 위원

ⓒ Die Zeit

다니엘 데이 루이스 1957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자기가 맡은 배역 속으로 마치 유령처럼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버리는 배우다. 1989년 <나의 왼발>에서 반신불수 젊은이를 연기하며 기염을 토했고, 이 영화로 처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2008년 <데어 윌 비 블러드>로 두 번째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짐 셰리든, 마틴 스코세이지,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과 함께 작품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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