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6 17:46 수정 : 2013.02.12 14:43

 
영화 ‘장고‘
영화 ‘장고‘
미국의 영화감독 퀜틴 타란티노가 아는 영화 기호는 딱 두 개다. 인용따옴표와 느낌표.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이러니!’를 영화로 제작하기 위해 이 두 가지를 쉴 새 없이 반복한다. 타란티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겉멋만 든 흉내꾼, 가벼운 허풍쟁이, 경박한 잘난체꾼, 오랜 거장의 작품을 자기의 배설구로 이용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한편 타란티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아마 나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그를 ‘대중 영화의 주 전원에 연결된 기묘한 변압기’ 같은 존재로 본다.

 기나긴 영화사를 망라하는, 허섭스레기이면서도 한편으론 숨겨둔 보물 같은 영화들이 타란티노의 에너지 원천이다. 2012년 개봉한 <장고: 분노의 추적자>(원제 Django Unchained)를 비롯해 타란티노의 손꼽히는 작품을 보면, 그는 사회갈등을 과장하며 그러기 위해 갈등의 모든 면을 다루려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인종차별이 몇 세기 동안 지속된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자. 과거에는 인종차별을 당하는 누군가의 삶에 대해 묘사하는 것이 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이런 영화는 경험치를 넘어서는 수준의 공포를 전달하려고 한다. 하지만 타란티노식 영화는 사안의 심각성을 표현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이미지를 끌어온다. 1960∼7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이탈리아에서 제작한 미국 서부시대 배경 영화)부터 70년대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흑인의 삶을 다루는 영화 장르) 스릴러물, 할리우드의 무성영화 및 퀜틴 타란티노 자신의 혼합기법(Mashup)에 이르기까지 인종차별에 관한 이미지를 다양하게 활용한다.

 아마 당신은 불편한 기색으로, 타란티노는 이야기의 본질을 전달하기보다 영화가 줄 수 있는 스릴에 더 집착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는 단지 관객의 피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 미국 흑인이나 유럽의 유대인 또는 우마 서먼(영화배우)을 끊임없이 폭력에 노출시킨다고 말이다. 영화를 보면 이 비난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유혈과 폭력이 난무하는 모든 작품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비난의 근거가 무너진다. 타란티노가 베끼거나 미화한 작품이 다양한 평가를 받듯이.

 냉소적인 사람들이 매번 “이건 영화일 뿐이야”하고 말하는 반면, 갑갑한 도덕주의자들은 관객이 영화와 현실을 혼동할까 안절부절못한다. 모두 틀렸다.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감독 찰리 채플린·1914)가 나왔을 적부터 관객은 이미 영화란 감독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종의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국가의 탄생>(감독 D.W. 그리피스·미국 남북전쟁 배경의 서사극·1915) 같은 영화도 있다. 당시 시대상황을 날카롭게 다룬 이런 유의 작품을 보면서, 관객은 영화 관람이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좋아했다. 목숨을 걸고 무엇을 위해 도전하는 내용의 영화를 높이 평가했다. 인기 있는 명화는 우리를 영화 속 신비한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동시에, 우리 삶의 본질적인 무언가를 건드리는 작품이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도 바로 그런 영화다.

 

 갑작스런 대결로 시작 

 이 영화 역시 타란티노답게 갑작스런 대결로 시작한다.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는 인물이 등장해 밑도끝도 없이 위험천만한 대결을 펼친다. 텅 비다시피 한 곳에서 벌어지는 결투는 황량함을 더한다. 개척시대 서부의 외딴 황야, 한밤중에 노예로 사로잡힌 흑인들이 한 줄로 행진한다. 이때 어디선가 괴상한 인물이 어둠 속에서 나타난다. 말쑥하게 차려 입고 정성 들여 수염을 정리한 남자다. 그는 말 타는 재주를 자랑하면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소개한다. “프리츠.” 억양이 살짝 강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영어다. 매우 세련된 그는 미국인 노예 감시인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노예 감시인들은 잔인하고 무식한데다 단음절로 된 짧은 답만 하며 ‘그놈이 그놈 같아’ 구별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1천 명의 서부 사람을 봤다면, 노예 감시인 같은 부류를 1천 번 본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방인 치과의사(비록 더 이상 시술은 하지 않지만 과거의 직업으로 묶어두는 것을 이해해 달라)인 킹 슐츠 박사는 머리가 좋은 유럽인이다. 쾌활하고 지적인 배우인 크리스토프 발츠가 연기했다. ‘빵!’ 옛날 영화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 패하고, 슐츠는 노예를 한 명 얻는다. 그 노예가 장고(제이미 폭스)다. 처음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의 왼쪽 눈을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끔찍한 흉터를 빼고는 그저 사슬에 묶인 무리 중 가엾은 한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멋지게 단장한 장고는 1만 명 중에서 눈에 띌 만큼 말끔해졌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는 이처럼 범상치 않은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복수심에 가득찬 장고는 그저 누구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던 노예 신분에서 탈출한다. 어중이떠중이 미국인 무리에 비하면 슐츠는 장난스럽고 우월해 보인다. 타란티노는 다시 한번 그가 차용한 영화들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차용한 영화보다 강단 있게 이야기를 풀어 간다. (슐츠가 자신은 현상금을 노리는 사냥꾼이라고 위풍당당하게 마을 전체에 비밀을 밝힌 것만 봐도 그렇다.) 그의 연출은 활기가 넘친다. (슐츠의 발언에 대한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배경에 있던 한 여성이 기절하는 것이야 그렇다 해도 어떤 주민은 목발을 짚고 뛰어다니기까지 한다.) 그의 창조자적 성격을 감안할 때, 슐츠 역시 일종의 쇼맨십이 강한 인물이다. 그가 현상범을 잡으러 갈 때나 그의 조수가 된 장고에게 지시할 때, 슐츠는 인물의 캐릭터를 깨지 않으면서 역할을 즉흥적으로 이끌고 간다.

 이와 같은 자기 확인 방식을 통해 슐츠는 주변 환경과 멀찌감치 거리를 둔다. 마치 타란티노가 틀에 박히고 현실에 기반을 둔 영화에서 떨어져나온 것처럼 말이다. (자막에 나오는 사건의 시점은 1858년, “남북전쟁 2년 전”이다. 우리에게 <장고: 분노의 추적자>가 역사적 사실 언저리에 있다는 정도의 귀띔만 해줄 뿐이다.) 그러나 거리를 둔다고 현실에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슐츠가 장고를 살 때 피로 계약을 맺고 나서, 시대에 뒤떨어진 우스개에 씁쓸함을 담아 “최상급이군”(“Sold American”*)이라고 외친 것은 진심이었다. 현상금 사냥꾼이 된 장고가 그의 첫 번째 현상금을 요구할 때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성경을 들고 다니며 채찍을 휘두르는 감독관은 노예가 쏜 총알이 그의 가슴팍에 박히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앞으로 고꾸라진다. 장고는 차분하게 말한다. “죽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군.” 솔직담백한 표현법이 마치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의 마지막 말 같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며 엄숙한 기쁨을 담아 “죄 많은 땅의 범죄는 피로써만 씻어낼 수 있다”고 했다.

 폭스는 영민한 배우다. 차가운 분노를 담아 대사를 치는 걸 보면 티가 안 날 수도 있다. 영화 마지막까지 폭스는 조심스럽고 단호한 남자(슐츠에 비하면 정상적인 남자라고 할까) 장고를 연기하며, 웃기는 부분은 슐츠에게 맡긴다. 영화는 점점 장고 중심으로 흐른다. 앞 부분의 몇 장면은 그리피스 감독의 악명 높은, 한밤중에 복면 쓰고 말 탄 채 폭력을 행사하는 큐 클럭스 클랜(KKK·미국 극우 비밀 결사 단체))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역사적으로 20년의 시차가 있지만 무슨 상관이랴.) 볼거리가 끝나면 줄거리가 이어지는데 이번에는 KKK 회원들을 ‘수다쟁이에 말다툼이나 하는 머저리’로 만들어 조롱한다. KKK의 상징인 하얀 이불보 아래 있는, 기억도 안 나는 남자 한 명은 조나 힐이 연기했다. 장고는 그의 아내(케리 워싱턴)가 억지로 팔려가 헤어지게 됐다는 사실을 밝히고, 두 명의 현상금 사냥꾼은 잠시 돈벌이를 멈추고 그녀를 찾기로 한다. 그들은 미시시피로 건너간다. 미시시피라는 글자가 커다랗고도 불길하게 화면을 지나간다. 이제 재미있는 부분은 지나갔다.

영화 '장고'
영화 '장고'

 ‘나치 경관’에서 착한 현상금 사냥꾼으로 

 영화는 점점 긴장을 더해간다. 장고는 흑인 노예상으로 가장해, 남부 제일가는 증오의 대상이 된다. 재미는 가라앉았다. 이제부터 캘빈 캔디(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그의 흑인 감독관인 스테판(사무엘 리 잭슨·현대판 빈민가에서 욕지거리를 해대는 아저씨 같은 역할)이 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캔디는 스스로 문화적(프랑스말은 한마디도 못하면서 ‘무슈 캔디’라고 불러주면 좋아한다)이라 여기는 냉정한 악질 농장주다. 저녁 식사 때마다 캔디의 어깨 뒤에서 서성대는 스테판은 캔디와 함께 노예들을 철저히 감시한다. 캔디의 협박을 메아리처럼 전달하면서, 더 열심히 일하라고 독촉하고 다닌다. 영화의 분위기와 색감도 어두워진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로드 무비로 가다 실내에 갇혀, 이야기가 흐르는 방식도 넓은 배경의 기습적 구성에서 밀실공포를 유발하는 서스펜스로 전환한다.

 이는 타란티노가 자주 쓰는 오래된 기술의 징표다. 주인공이 내면의 사악함을 상대 인물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슐츠는 양심의 가책 없이 사람을 사고팔면서 반성하지 않는 캔디에게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본다. 장고가 스테판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는 것은 한층 더 괴로운 일이다. 두 사람은 거칠고, 교활하며, 굴복을 모르는 면에서 꼭 닮았다. 하지만 장고는 속으로 노예제도에 대해 절대 반대하면서, 세상에 비치는(당분간 스스로에게도) 모습은 스테판의 철저한 동업자다. 폭발 직전의 상황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장고와 슐츠는 상대편의 두 배우를 서로 따라 하면서 자신의 현재가 됐을지도 모를 최악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두 남자는 자신이 평범함을 넘어선 뛰어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 속은 참담할 만큼 평범하다.

 나는 더 이상 이 대결을 즐길 수 없었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보면서 유일하게 꺼려지는 부분은 폭발이다. 폭발의 상황에 이르자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아마 보통을 넘어서는 인물인 슐츠가 이제야 이야기에서 빠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빠져야만 했다. 이야기의 구성상 장고는 마지막 시련을 혼자 견뎌야 했다.

 타란티노의 영화 <배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에서 유대인을 사냥하는 나치 경관으로 출연해 영화를 이끌어간 배우가 이번에는 착한 독일인 슐츠로 나왔다. 그에게 남아 있는 악당의 이미지를 씻어버리려고 돌아온 것이다. 그는 장고와 그의 아내에게 예의를 차렸고, 그의 선행은 니벨룽겐의 전설에서 배운 것이라며 공을 돌렸다. 그는 캔디의 가족 중 한 명이 나름의 상류층 문화를 소개하자 독일 문화에 대해 목이 터져라 소리 높여 변호한다. “베토벤 좀 그만 연주하세요!” 슐츠는 더 이상의 모독은 참을 수 없다며 소리친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의 규칙을 깨고 캐릭터를 벗어났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의 캐릭터는 진화했다. 장고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연기를 하는 동안 발츠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에서 벗어나 상대 배우에게 기대하지 않은 반응을 끌어내며 배역에 깊이를 더했다. 지금까지 그가 시도해보지 않은 것을 넘어서는 도박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럼 장고는 어떻게 진화했나?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배우 제이미 폭스는 장고의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오직 한 가지만 원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한 가지 방법(거친 자기절제)만 연마하는 남자를 연기했다. 그렇게 일편단심인 사람이 현실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연기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4막을 밋밋하게 만들었다. 타란티노의 성공 비법은 영화의 공식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절정은 한번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 순간 나는, 타란티노는 무엇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한 흑인이 노예의 속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싸울 때의 감정? 아니면 <배스터즈: 거친 녀석들>에 나왔던 크리스토프 발츠의 변신?

 만약 타란티노가 발츠를 더 중요하게 여겨 폭스의 역할에 더 깊이 파고들 수 없었다면, 이 영화가 흑인 옹호주의 영화라는 시선에 반하는 것이다. 의심을 제기하고 보니, 계속 의심스럽다. 진정성 결여의 의심은 <장고: 분노의 추적자>라는 게임을 하면서 타란티노가 감수한 것이다. 그런데 스크린에 드러난 결과로 판단하자면, 타란티노는 게임에서 이겼다.

글 스튜어트 클래언스 Stuart Klawans <네이션> 영화 평론가

 번역 하수정 위원

 ⓒ The Nation

 * Sold American은 1930년대에 럭키 스트라이크라는 담배 광고에 나오는 말이다. 담뱃잎을 경매할 때 “팔렸네. 미국인에게!” 하고 외치는데, 미국인은 항상 최상급의 담뱃잎을 산다는 의미다. -역자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