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5 04:06 수정 : 2013.02.05 04:19

끊임없는 파산. 늘 도주 상태이면서 가는 곳마다 여자 문제를 일으킨 인물. 바그너의 삶 자체가 독자적 악극이 될 만큼 파란만장했다. 여기 오페라 같은 삶의 막이 오른다.

1850년 8월 26일, 지금처럼 텔레비전이 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날 오후 6시 정각, 전 유럽이 두 사람의 흥미진진한 대결을 생중계로 시청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장장 620km라는 지리적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 한쪽에는 프란츠 폰 리스트가 바이마르 궁정 오케스트라를 앞에 두고 서 있다. 그의 지휘로 오페라 <로엔그린>의 초연이 곧 시작될 것이다. 다른 한쪽에는 ‘백조의 기사’ 전설을 오페라로 창조해낸 작곡가가 자리잡고 있다. 혁명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현재 지명수배를 받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이다. 그는 정치 중립국 스위스로 피신해 휴양도시 루체른의 한 여관에 머물고 있다. 동물학적 관점에서도 사안에 빈틈없이 부합하도록 특별히 고려해 선택한 이 여관의 이름은 ‘백조’다. 지금 바그너 역시 백조 여관의 안뜰 의자에 앉아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을 지휘하고 있다. 물론 그는 가상의 오케스트라와 함께이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너나없이 “에이, 말도 안 돼”라고 한마디할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이건 절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바그너라는 인물의 인생 스토리는 요즘 텔레비전 방송에서 가히 몇 부작 대하드라마로 방영하고도 남을 만하다. 구성으로 보면 <부덴부르크가(家)>와 <정글 캠프> 중간 정도쯤 될까. 윤리성이 좀 몰랑몰랑한 채널에서 특히 좋아할 소재일 것이다. 주인공 남성은 여자만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인물이다. 키가 작은 편인데다 작센 사투리까지 쓰는 잘난 척하는 남자. 도대체 그의 어떤 점이 여자들을 끄는 걸까? 바그너는 ‘에고’(자아)로 똘똘 뭉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걸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혹시 의심을 품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오로지 바그너 자신만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나마도 문을 닫아 걸고 혼자 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은 메시아이며 유례없이 최상의 행운을 점지받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후자의 믿음은 보기에 따라서는 맞는 말이 기도 했다.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바그너는 그해 10월 일어난 라이프치히 전투를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아 루드비히 가이어를 의붓아버지로 맞게 됐기 때문이다. 궁정 극장 배우인 가이어는 바그너를 곧잘 극장으로 데리고 다녔고, 그로부터 얼마 뒤 당대 최고 작곡가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후원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듣는 순간 내면이 온통 뜨거워졌던 경험은 이 어린 유미주의자에게 오페라를 마음 깊이 각인시켰고, 10살의 소년은 작곡가가 되리라 굳게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후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을 접했을 때, 바그너는 자기가 목표로 삼아야 할 인물이 누구인지 뚜렷해진다.

모름지기 거물과 감히 맞서려고 하는 사람이면 적어도 다음 두 경우 중 하나여야 한다. 자기 자신 또한 그 못지않은 거물이든지, 아니면 자신과 세상을 설득해 자기가 거물이라고 믿게끔 만들든지. 그런데 바그너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해당하는 경우였다. 황당하리만치 재능이 풍부하고,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았다. 게다가 무질서에 가까울 만큼 혁신적 인물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과시는 또 얼마나 심한지, 흡사 ‘겸손 유전자 결핍증’에 걸린 장사꾼이 시장 바닥에서 큰 소리로 손님을 불러 모으는 형국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좀 덜 뻔뻔한 인물이었다면 일찌감치 세태의 바퀴에 치여 몰락하고 말았을 게 뻔하다. 바그너는 돈을 관리할 줄 몰랐다. 점잖게 바꿔 말하면, 그의 돈은 모두 호사스러운 생활에 대한 집착과 비현실적 의식 상태 때문에 모두 탕진했다. ‘빚’이라는 말이 늘 꼬리표처럼 그에게 붙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인물의 이름에 먹칠을 해놓았다. 그가 아내 미나와 가방 속에 넣은 개 한 마리만 데리고 리가에서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도주한 것은 채권자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거센 풍랑에 노르웨이까지 떠밀려가 피요르드를 지난 경험 덕분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구상이 떠오른 건 뜻밖의 부산물이었을 테다.

 

‘겸손 유전자 결핍증’의 거물

무수한 유전자 결핍이야 그렇다 치고, 이번에는 바그너가 보유한 유전자 쪽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방면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건 과도하리만치 뚜렷하게 형성된 그의 ‘구걸 유전자’로, 바그너는 틈만 나면 이 능력을 활용했다. 그는 왕의 대전에서, 그리고 극장 감독에게, 돈을 대주는 여성들에게, 심지어 자신과 연인 관계인 여성들의 남편에게까지 손을 벌렸다. 한편 관대하기 짝이 없는 독일 작곡가 자코모 마이어베어에게 그가 한 행위는 비열하기까지 했다. 파리에서 이 작곡가에게 당국의 지원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해 결국 보조금을 받았다. 그런데 바그너는 훗날 ‘음악에 나타난 유대주의’라는 역겨운 논문에서 마이어베어를 심하게 중상모략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과는 별도로, 이 논문(1869년 제2판은 내용이 더욱 험악해진다)은 세간에 말이 많았다. ‘아돌프 히틀러가 바그너의 몇몇 생각을 접수해 그대로 반영했다’는 가설을 이 논문이 잘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어베어라는 인물로 돌아가보자. 그는 비록 세상을 혁신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오페라’의 원칙을 제시해 큰 성공을 거뒀다. 그의 성공은 명예에 대한 집착이 큰 바그너를 몹시 화나게 했다. 그래서 바그너는 1842년 거창하기 짝이 없는 오페라 <마지막 호민관 리엔치>를 작곡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목표는 바로 마이어베어 제거였다. 마이어베어가 차지하는 영역에서 그를 쳐버리겠다는 계산이었다.

 

늦잠 덕에 체포되지 않은 혁명가

독일 바이에른주의 바이로이트시에 있는 ‘바이로이트 오페라 극장’ 전경. 위키미디어
그의 재정 상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작센 공국의 궁정 악장으로 추대되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 몹쓸 놈의 돈. 그는 돈이 늘 필요했지만, 돈을 풍부하게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바그너는 ‘어쩌면 국가의 구조를 바꿔야 하는지도 몰라’라고 생각한다. ‘우선 개인 재산을 모두 폐지해야 해. 대신 예술가가 특별 대접을 받게끔 해야지. 우리는 인간 세상을 형성하고 개조해가는 사람들이잖아….’ 이 놀랍도록 자만심 가득한 생각이, 1864년 현실이 되어 그를 찾아온다. 바이에른 공국의 국왕 루드비히 2세가 바그너에게 “향후 영리 행위에서 비롯되는 모든 제약에서 해방시켜줄 것”을 약속했다. 비텔스바흐 왕가의 바그너 열광자 루드비히 2세가 이 말을 한 것은 큰 실수였다. 바그너는 이 약속을 나름대로 해석해 ‘상한선 없는 무상 대출금 보장’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엄청난 지출을 합리화하기 위해 루드비히 2세는 심한 곤경을 겪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바그너는 루드비히 2세에게서 바이로이트 극장 건립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주머니가 다시 텅 비게 되자, 왕은 바그너가 처한 어려움을 곧장 해결해주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아니, 절대로 그래서는 안 돼. 그렇게 끝날 수야 없지. 지원하고 말고!” 즉시 10만 탈러(유럽에서 15~19세기까지 통용된 은화)가 선금으로 지급됐고, 그 덕에 1876년 최초의 바이로이트 축전극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마지막 호민관 리엔치>가 상연된 이후, 바그너가 훗날 바이로이트의 녹색 언덕 위에서 희비가 엇갈린 심경으로 회상하게 될 사건이 몇 가지 일어난다. 국가에 고용된 궁정예술가로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바그너는 주관적 잣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데 격분한 그는 1849년 드레스덴 내에서 진영을 바꾼다. 그때까지 모시던 작센의 군주를 떠나, 그와 적대 관계에 있던 5월혁명군의 참호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는 나름대로 경로를 겪었다. 이전에 바그너는 사유재산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830년 라이프치히에서 자신의 ‘정치적 서곡’이 대중의 조롱거리가 되자, 바그너는 언젠가는 복수하리라 마음먹고 방법을 궁리하던 차였다. 저주에서, 죄에서, 빚에서, 소유에서…. 하여튼 그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늘 막을 내리는 그의 악극처럼, 이 세상도 돈의 저주에서 풀려나 구원되어야 했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혁명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처럼 전문 방화범들과 연합했다. 그들과 함께 활동하고도 봉기가 진압된 뒤 바그너가 체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무정부주의자 모임이 있던 날 늦잠을 자느라 참석하지 못한 덕분이었다. 사족이지만, 자기 편을 버리고 반대편에 합세해버린 행위는 비난받아야 하지만, 음악사 쪽에서는 아마 다행으로 여길 법하다. 지명수배를 피해 스위스로 도피한 그는 피난처에 도착하자마자 ‘예술 혁명’에 관한 이론서 집필에 착수하는데, 거기서 논문 ‘미래의 예술 작품’이 탄생하게 되니 말이다.

물론 현대적 악극이라는 착상을 바그너가 이때 처음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일찍이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이나 <탄호이저>, 또는 <로엔그린> 등의 작품을 통해 이미 그는 혁신적 모델을 부분적으로 시험해왔다. 신화를 통해 세계를 탐구하려는 그의 새로운 음악관에 따르면, 작곡가가 대본작가인 동시에 연출가인 것이 이상적이다. 무대감독까지 겸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고. 악극 대본작가라는 소임은 바그너 손에 의해 폐지된 지 오래였다. 26년간 꾸준히 직접 대본을 쓰고 곡을 만드는 작업을 계속한 결과, 마침내 그는 <니벨룽겐의 반지>라는 거대한 괴물을 탄생시켰다. 상연시간만 몇 시간에 이르는 이 자본주의 비판적 악극에는 영웅, 근친상간, 기쁨, 살인, 그리고 체념 같은 요소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이런 광대하고 복합적인 4부작을 작곡하려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서 온전히 가려지고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친밀한 관계의 여인, 이를테면 완벽한 여성 동반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1871년 바그너의 모습을 찍은 사진. 한겨레 자료
1852~55년 스위스에서 바그너의 연인인 마틸데 베젠동크는 남편의 사업을 돕는 유부녀로서, 바그너에게는 연습곡의 뮤즈 정도 비중을 가졌던 것 같다. 얼마 뒤 그 여신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프란츠 폰 리스트의 딸이자 당대 유명한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였다. 뷜로는 이 노골적인 수모를 감수하면서 1865년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직접 지휘했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1870년 결혼하게 되는데, 이때까지 두 사람은 이미 부부로 살고 있었다. <니벨룽겐의 반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가 이 무렵 발표됐다. 그렇다면 바그너의 첫 번째 아내인 미나는 어떻게 되었나? 미나는 1866년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숨지기 몇 해 전, 바그너는 아내를 두고 “아무래도 너무 늙다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의 장례식에도 물론 참석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자신의 신예술 개념에 매우 만족했다. 오페라를 완전히 혁신해버린 셈이다. 새로 도입한 두음(頭音) 규정이야, 사람들이 적응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풍부히 암시해주는 ‘유도 동기’는 신화 줄거리가 복잡하게 얽혀 이해하기 어려울 때 청중에게 그때그때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다. 유도 동기 기법이 아둔한 청중은 물론이요, 머리 좋은 청중에게도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는 것임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사람은 바로 루드비히 2세였다. 그가 <니벨룽겐의 반지> 전반부에 해당하는 <라인강의 황금>과 <발퀴레>를 1869년과 1870년 자기가 통치하는 바이에른의 뮌헨에서 무대에 올리도록 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신의 대작이 그런 식으로 쪽이 떨어진 채 상연되는 걸 원치 않았던 바그너는 이 명령에 불만을 품고 몹시 구시렁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오늘날 바이로이트를 방문하는 순례객들은 이 점을 실로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고명한 ‘리하르트 바그너 축전극’이란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생각은 확실했지만 정작 어디에 축전극장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번잡한 도시에서 상당히 떨어진 한적한 곳이면 극장 위치로 과히 나쁘지 않겠다는 정도가 당시 바그너의 생각이었다. 자신과 같은 거물에게 오려면 좀 애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프랑켄의 어느 시골 지역과 바이로이트가 물망에 올랐다.

 

리스트의 딸과 재혼, 허망한 죽음

바그너가 늘 꿈꾸어왔던 ‘온갖 압력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은 1882년 7월 26일 마침내 실현됐다. <파르지팔>이 바이로이트에서 발표된 것이다. 유난히 긴 이 오페라는 당시 ‘무대 신성 축전극’으로서 무대에 올려졌다. 초연은 빼어났다. 공연이 성공한 덕분에 바그너는 평생 처음으로 채권자의 시달림을 겁내지 않게 됐다. 그러나 이 상황이 그에게 도움이 되진 못했다. ‘구원자에게 구원을’이라는 <파르지팔>의 마지막 표어가 작곡자인 그에게 흡사 저주가 된 격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883년 2월 13일, 바그너는 베니스에서 사망한다.

그는 무슨 일이든 신속하고 능률적이었다. 도망에도, 작곡에도, 음모에도, 작사에도, 추파 던지기에도, 심지어 구걸 편지 쓰기조차 재빨랐던 그가 오랜 방랑을 끝내고 마침내 자리를 잡았는데, 공교롭게도 심장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빚 없다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

볼프람 괴르츠 Wolfram Goertz 언론인·의사·음악가·음악가연구자

번역 번역 장현숙 위원

ⓒ Die 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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