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5 03:58 수정 : 2013.02.06 16:36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1813~83)는 인간적인 결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게 우리를 사로 잡는다. 그의 오페라는 발전소처럼 관객에게 활기를 충전해준다. 탄생 200주년이 된 바그너의작품과 생애를 재조명한다.

바그너의 초상화. 한겨레 자료
따지고보면 바닥에서부터 겨우 반 인치 정도 높이일 뿐이다(영국 속어로 ‘반 인치’는 ‘훔치다’라는 뜻이다). 혼수 상태에 빠진 것도, 망상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야트막히 공중을 부유하는 이 순간이 제발 끝나지 않기를! 전세계의 문화도시 중에서 독일 바이에른주의 바이로이트시에 있는 ‘바이로이트 오페라 극장’의 녹색 언덕만큼 이 염원을 강렬하게 불러일으키는 곳이 또 있을까. 대여섯시간에 걸쳐 바그너 음악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관객은 마치 공기 중에 떠 있는 듯한 기분에 흠뻑 젖어든다. 세상이 문득 장난감처럼 작게 여겨지고, 바이로이트 오페라 극장 건물은 한 톨 빵 부스러기에 불과해 보인다. 바그너를 둘러싼 수군거림이며 호들갑스러운 비명 같은 것이 모두 잠잠해진다. 중요한 건 오로지 그의 음악을 들으며 경험한 것, 즉 관객의 뇌리에 남은 그림과 소리의 울림뿐이다. 하이너 뮐러가 연출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발트라우트 마이어가 이졸데의 죽음의 연가를 부르는 동안 배경 무대가 황금빛을 내면서 커다란 입방체로 점차 확대되어가는 장면이 바로 여기 해당하리라. 파트리스 셰로의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는 대단원의 한 장면이 인상 깊게 기억될 것이다. 신, 난쟁이, 영웅들이 모두 합세해 무대 앞쪽 경사면을 걸어 내려와 관객을 코앞에서 빤히 쳐다보면서 “바로 당신들을 말하는 겁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들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신들의 황혼>에서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하는 장송곡에서는 분노와 온화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한스 노이엔펠스가 무대에 올린 <로엔그린>에서 백조의 기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백조가 겅중 걸음으로 기사의 뒤를 좇을 때 무대는 “오, 기적, 기적이다. 지금까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기적이야!”라는 합창단의 우렁찬 노래로 가득차면서 진동한다.

모차르트보다 격정적, 베토벤보다 감성적 

모차르트보다 격정적이고 베토벤보다 감성적인 바그너는 사람을 변하게 한다. 모차르트보다 격렬하게 타오르면서, 베토벤을 뛰어넘는 감성으로, 그리고 바흐보다 훨씬 강렬하게 사람을 사로잡는다. 작품의 길이와 소리의 강도만으로도 관객을 장악한다. 예술과 삶의 경계를 흐려 두 세계를 바꿔놓음으로써 보는 이들을 중독시킨다. 축제극과 일상이 완전히 교차하는 경험을 한 뒤 결국에는, 니체의 말을 살짝 빌려오면, 바이로이트 아닌 다른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상태에까지 다다르게 한다(바이로이트 극장 내부에는 실제로 잔디로 뒤덮인 녹색 언덕까지 만들어져 있다). 바그너는 세계관이 될 수 있다. 일종의 신앙 또는 숭배의식까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이념적 간극을 뛰어 넘으면서 실제로 그렇게 된 적도 있다. 동화를 꿈꾸던 왕이자 예술가들의 후원자던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2세가 한 예이다. 현대에 와서는 아돌프 히틀러 치하에서 그랬고, 1968년 이후 이 연출극의 동지 그룹과 적대 그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회복될 수 없을 만큼 반목이 심해진 바그너 ‘왕가’(王家)의 구성원 사이에도 이 점은 다르지 않았다. 기존 전제주의자들과 좌파의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 많은 천재들을 제치고 바그너가 이렇게 무한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간단하게 세 가지를 들어보자.

첫째, 바그너가 표현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는 대표적 분야인 오페라를 자기 표현 수단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장르에서 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생생하게 우리와 조우한다. 둘째, 자기 안에서 용솟음치는 극단적인 예술적 환상을 담기 위해 그에 적합한 극장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바이로이트 극장은 오늘날까지 독일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등대 역할을 한다. 셋째, 바그너에게는 사업할 줄 아는 후손이 있기 때문이다. 코지마와 빈프리트 바그너 이래 지금까지 바그너 집안에는 바이로이트 얘기가 각종 매체 가십란의 단골 손님으로 자리 잡게끔 유도할 줄 아는 인물이 대를 이어 늘 있어왔다. 이 세 가지 조건이 함께 어우러져 바그너음악을 접하는 사람에게 충족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음악이 지닌 아찔한 특성과 대담 무쌍함 없이는 이런 특별한 조건도 별 효과가 없었을 테지만.

한편 대다수 사람들은 바이로이트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바그너 음악의 경이로움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는 게 사실이며, 이 사실은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페라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것, 뭔가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것, 나이 든 사람들과 과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돼왔다. 게다가 이 분야의 대표적 인물 중 세간에서 곧잘 비웃음거리가 된 게 바로 바그너의 작품이다. 이는 그가 자초한 여러 가지 나쁜 평판도 한몫했다. 질투가 심했을뿐더러 우울증 환자에 (비록 어쩌다 있는 일이긴 했지만) 여장 남자, 간음, 다혈질, 방구석 혁명주의자…. 그뿐인가. 열렬한 유대인 배척자이기도 했다. 이런 악명 높은 음악가에게 오늘날 우리가 굳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을까?

근래 들어 바그너의 음악은 시민적 예술 향유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됐다. 아무리 늦잡아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베트남전쟁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영화에서 바그너의 ‘발퀴레’가 헬리콥터 공격 장면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됐다)이 나온 이후로는 말이다. 그렇게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와 바그너 음악이 표현하는 요체가 과연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제적인 성향이 반영되어서일까, 분노에 눈이 멀어 앞뒤 안 가리고 저주를 퍼부어댈 때의 격렬함 때문일까? 아니면 극장이라는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참된 자아에 눈이 뜬 인간이 그동안 자기를 꽁꽁 묶어놓았던 사회·문화적 밧줄을 전부 풀어서 내던진다는 상상으로 관객이 매료된 것일까?

여장 남자, 간음, 다혈질, 방구석 혁명가

바그너 음악에 대해 무시무시한 해석이 난무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술보가 조금 더 작동할 경우, ‘바그너의 히틀러’(‘히틀러의 바그너’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나 더 첨가하면 효과는 급상승한다. 만약 알라 신을 알기 전에 바그너라는 키 작은 작센 사람을 알았더라면 오사마 빈 라덴 역시 두말하지 않고 바그너 추종자가 됐을 거라는 추측을 슬쩍 흘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둘 중 어느 경우도 발언의 내용이 음악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검증받는 일은 어차피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일단 오페라 극장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관객은 지금까지의 모든 왈가왈부를 넘어서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바그너가 누구인가.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자기 개인의 현실에서 능숙하게 해결하며 산 사람 아닌가. 그런 인물인 만큼, 예술이라는 그릇 안에서 그는 이 두 대립적 요소에 각각 변증법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돈과 사랑이, <탄호이저>에서 베누스베르크와 바르트부르크가,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는 아내에게 배신당한 마르케 왕과 영웅 트리스탄 양쪽이 모두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이렇게 두 요소가 팽팽히 대립하는 데서 비롯되는 극도의 긴장감이야말로 다름아닌 바그너의 마력이자 우리를 매료시켜 빠져나갈 수 없게 포박하는 그의 ‘자기장’이 아닐까. 그런 바그너를 우리는 신으로 추앙할 수도, 악마로 단죄할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닌 미온적 태도로 그를 대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그너 탄생 200주년인 올해에는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축전 창립 당시 자기 음악의 소명으로 천명한 ‘불 치료’1 가 가능해졌으면 싶다. 그 바탕 위에서 바그너 작품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기 바란다.

사회를 개조하는 일이 주변에 다수를 끌어 모으는 일과 혼동되는 경우가 점점 잦아지는 요즈음이다. 정치적으로 권력을 지킨다는 게 고작 모든 사안에서 몸을 사려 일신상 손해 없이 빠져나오는 것을 뜻하는 게 돼버린 지 오래다. 이런 시대에 바그너를 체험하면 우리를 ‘새로운 단호함’으로 이끌어줄지도 모른다. 바그너 음악 감상을 계기로 우리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한 가지를 다시 연습해볼 수 있다. 바로 ‘입장 분명히 취하기’다. 온 가슴과 머리로 우리의 믿음을 밝히는 일 말이다.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제시하고, 그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예술 작품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크리스티네 렘케-매트웨이 Chrstine Lemke-Matwey 일간지 <타게스슈피겔> 편집자, 오페라 평론가

ⓒ Spiegel

번역 장현숙 위원

1 1850년 바그너는 테오도어 울리히에게 쓴 편지에서 ‘불 치료’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다.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물 치료’를 하듯, 병의 원인이 되는 조건을 없애는 불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태워버림으로써 깨끗이 하는’ 바그너의 평소 열망이 반영돼 있다. 이 글에서는 기존 비평 태도를 버리고 그중 가치가 증명된 것만 골라 그 바탕에서 새로운 비평을 하자는 뜻으로도 사용됐다. 역자 주

바그너의 작품 연보

1834 <요정들>
1836 <연애 금지령>
1842 <마지막 호민관 리엔치>
1843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1843 <사도들의 사랑의 만찬>
1845 <탄호이저와 바르트부르크의 노래 경연>
1850 <로엔그린>
1865 <트리스탄과 이졸데>
1868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1876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라인강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
1882 <파르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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