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8:52 수정 : 2013.01.08 18:52

종합격투기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해는 2004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도 외국 무대에 도전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2004년은 국내에 종합격투기 대회를 개최하는 대회사가 처음 생긴 해이기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에 대회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대회사들이 너도나도 이종격투기대회 이름을 걸고 난립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특히 거품이 꺼지고 대회사가 한 곳만 살아남자, 독점에 따른 횡포도 수없이 생겼다.

그런 우여곡절과 상관없이 오로지 운동만 하는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어원진이다.

어원진은 아마추어 레슬링에서 국가대표를 지낸 선수다. 이후 종합격투기 도장을 운영하던 정진체육관에서 레슬링 사범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선수로까지 나섰다. 특히 2004년 11월 스피릿MC 인터리그2 대회에서 미들급 우승자가 된 후 주목받기 시작했다. 어원진은 이듬해 국내에서 열리는 글래디에이터(일본 격투기 대회)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글래디에이터 쪽은 이미 경기하기로 정해진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출전 취소를 통보했다. 당시 친밀하게 지내던 또 다른 국내 파이터를 출전시키기 위한 것으로, 전체 대진표를 짜는 ‘일본 중견 격투기 단체’(CMA·Centural Martial arts Association)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다. 뒤늦게 사실을 안 CMA는 미안한 마음에 당시 일본의 마이너 무대인 DEEP에 어원진의 경기를 추천했다.

어원진은 DEEP 무대 출전 준비 중 뒤늦게 오퍼를 한 스피릿 쪽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것이 화근이 돼 어원진과 그의 동료들이 소속된 정진체육관은 국내 무대에서 경기를 뛰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격투기계의 규정을 따져볼 때 말이 되지 않는다. 먼저 오퍼를 한 곳이 있고 그 오퍼를 받아들이면 추후 오퍼를 한 곳이 경기를 잡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스피릿은 어원진의 체육관에 괘씸죄를 적용해 아무도 출전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어원진은 일본 무대로 떠났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창욱 종합격투기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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