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0:03 수정 : 2013.01.09 14:18

브라질 태생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가 독일 주간지 <슈피겔>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현 교황 요제프 라칭어(베네딕토 16세)와의 불화,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방문해 함께 기도했던 이야기 등을 유창한 독일어로 풍성하게 펼쳤다. 인터뷰는 브라질 페트로폴리스 인근에 있는 보프신부의 집 정원에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자로 일컫는 레오나르도 보프는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다. 그가 가족과 함께 사는 곳은 에덴동산을 방불케 한다.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파피루스 나무가 무성하다. 연못에는 잉어가 뛰놀며 마구 자라난 풀밭에서는 닭들이 꼬꼬댁 활개를 친다.

자연석으로 지은 보프의 집은 브라질 남부 도시 페트로폴리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다. 집에는 책이 빽빽이 있다. 그중에서 적어도 80권은 보프가 직접 썼거나 펴낸 책이다.

브라질의 작은 마을 콘코르디아 출신인 그는 2013년 74살이 됐다. 아이가 11명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조상은 북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한다. 1958년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브라질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970년 뮌헨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브라질로 돌아오자마자 보프는 가톨릭교회 당국과 마찰을 겪게 된다. 그가 카를 마르크스의 명제까지 펼쳐가면서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착취를 일삼는 남미의 군사독재 정권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992년에는 바티칸의 종용으로 결국 사제직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후 초청 교수로 리사본(포루투갈)·살라만카(스페인)·바젤(스위스)·하버드(미국)·하이델베르크(독일) 대학을 방문해 강의와 강연을 했다. 리우데자네이루대학에서의 강의를 끝으로 대학에서 물러난 보프가 현재 가장 주력하는 일은 사회사업과 환경보호 활동이다. 현재 정부의 비공식 자문직을 맡고 있는 그의 영향력은 은퇴이후에도 이전과 다름 없다.

“<슈피겔> 앞에서는 내가 좀 조심해야 돼. 마지막으로 <슈피겔>과 인터뷰한 게 약 20년 전인데, 당시 추기경이던 라칭어가 그걸 보고 얼마나 노발대발하던지, 원” 하며 혀를 차는 보프의 독일어는 여전히 유창하다. “하지만 뭐, 나로서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슈피겔 교수님, 내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브라질을 방문합니다. 만약 교황의 초청을 받는다면 가실 겁니까. 간다면 무슨 얘기를 할 생각이십니까.

보프 그럴 리는 거의 없어요.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로선 토론을 기피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내가 전할 메시지는 분명해요. “신자들에게 겁주고 두려움을 퍼뜨리는 일, 이제 그만 하십시오. 원칙주의적인 가혹함에서 벗어나십시오. 교리 교사 노릇 그만하고, 이제는 신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목자가 되어주십시오. 그것이 교황의 가장 중요한 직분입니다” 하는 거지요. 하지만 교황이 내 말을 받아들이리라 기대하지 않아요. 그가 폰티펙스(교황)로 선출됐을 때 내가 한 말이 있어요. “이 교황을 좋아하기는 참 어려울 거다”라고. 라칭어가 교황직을 수행해온 지난 7년 동안 나한테 용기를 불어넣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모든 게 더 나빠지기만 했지.

슈피겔 비판의 요점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보프 교황은 세계 교회에 ‘새벽이 도래한다’는 느낌을, ‘이제 새로 출발한다’는 분위기를 확산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순종하라, 오로지 순종하라고만 요구하는 바람에 오히려 새 출발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교황의 제1 관심사는 바티칸이라는 권력기구를 공고히 하는 거예요. 국외 순방 때면 침울한 표정으로 “피임약? 안 돼.” “여성 사제직? 안 돼.” “동성 연애? 안 돼” 하면서 늘 같은 옛 노래를 부르지요. 정작 참된 신학적 문제는 그냥 지나쳐버리면서 말입니다.

슈피겔 참된 신학적 문제라면 어떤 게 있습니까.

보프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렇게 고통이 만연한 세상을 놓고도 자비로운 아버지를 자처하는 하느님에 대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가 처한 이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감수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할 것인가 하는 선택으로 이 질문은 이어집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남미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알 만큼 압니다. 교회는 예수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예수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가난한 사람 중에도 가난한 사람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죽었습니까? 예수가 나이 들어 자연사한 것 아니잖아요. 늙고 힘이 달려 죽은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런 예수의 후손인 교회라면, 그 교회는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는 움직임과 자연스레 한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일상 생활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해서 말이 먹힐 것 같습니까? 현 교황은 교회를 위한다면서 되레 교회의 목을 조이는 천사 역할을 하고 있어요.

슈피겔 베네딕토 16세는 개혁보다는 사목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보프 교리에 관한 문서만으로, 교리에 입각한 자세만을 고수하면서 신자들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카리스마가 없어요. 카리스마 타입이기보다는 좀 수줍은 성격에 머리가 뛰어난 교수라는 편이 옳을 겁니다. 공직 수행을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접촉하는 게 매우 어려운 듯한 인상도 주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왠지 늘 거북하고, 그러느니 차라리 책상에 앉아 학문적 일에 천착하는 게 훨씬 편할 텐데 말입니다. 그가 늘 침울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슈피겔 꼭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반 신자들과 만나는 행사에서 대개 좋은 평판을 남겼거든요. 독일과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의 날’ 행사는 두 번 모두 성공적으로 끝났고, 2007년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교황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특히 청소년들이 교황을 좋아하죠.

보프 젊은이들에게 영성적 동경이 있어서 그런 거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열광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실체가 없는 거품 현상 비슷하지요. 교황이 생각하는 그대로의 교회라면 사람의 일상적 삶에 아무런 도움을 줄 게 없어요.

슈피겔 1962년 제2 바티칸 공의회 때 도발적 질문을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기존 반현대적, 방어적 정신 자세를 앞으로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완전히 쇄신해 오늘날의 세상을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나설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게 누구였는지 아시겠어요.

보프 나였으면 딱 맞을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바로 요제프 라칭어였죠. 그가 한 말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어요. 아, 미안합니다. 내가 얘기의 초점을 흐려놓았다면….

슈피겔 그때 공의회에 참석한 라칭어는 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행동했을까요. 그때 왜 격렬하게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을까요. 교회의 새 출발에 동조했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 교회 개혁가들을 억압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

보프 그때는 그게 독일 주교들 사이에 보편적 의견이었어요. 내가 라칭어를 안 지 4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가 전에는 전혀 달랐어요. 지금보다 지적으로 열려 있었고, 가까이하기도 훨씬 쉬웠지요. 교리주의적 면도 없었고. 그런데 라칭어가 정말 개혁가였는지, 아니면 전략상 이유로 잠시 방향을 그렇게 잡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슈피겔 뮌헨 수학 시절 유명한 신학자 카를 라너의 제자로 논문을 쓰셨지요. 당시 라칭어 교수가 논문 출판을 지원해줬다고 들었습니다. 즉, 베네딕토 16세는 교수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프 맞는 말입니다. 그에게 감사할 일이 참 많아요. 그는 내 박사 학위 논문을 칭찬했지요. 그래서 그 논문이 출판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애를 써줬어요. 1만4천 마르크나 되는 거금을 지원비로 받았는데, 라칭어 덕분이었죠. 이 일을 계기로 우리 사이에는 일종의 우의 같은 것이 생겼어요. 그땐 1년에 한 번, 성신강림절 때마다 만났어요.

슈피겔 그러다가 라칭어 교수가 바티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두 분 관계가 소원해진 겁니까.

보프 그렇진 않아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1년 그를 교황청 신앙 교리성의 원장으로 임명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를 축하했습니다. 그가 이 직무를 맡게 되어 아주 기쁘다고 글을 써 보내기도 했지요. 나는 그에게 큰 희망을 걸고 있었거든요.

슈피겔 그다음엔 어떻게 됐나요.

보프 교황이 되고 나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워요. 다만, 로마로 간 다음에 그와 비슷하게 퇴보한 사람들을 그 외에도 몇 번 본 적 있어요. 이를테면 ‘바티칸 바이러스’라고나 할까, 뭐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곳에 간 사람들에게 당장 옮아버리는. 어쨌든 간에 이 바이러스가 라칭어를 좀먹어버린 건 분명해요.

슈피겔 그 일로 아직도 속앓이를 몹시 하시는 것 같습니다.

보프 아, 심리학적 차원으론 들어가지 않기로 하지요. 그거 말고도 나한테는 그를 비판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교황청으로 들어간 라칭어가 나를 그곳으로 불렀지요. 그런데 문제는 초청한 게 아니라 소환했다는 거죠.

슈피겔 바티칸에게 철저하게 거듭나는 교회가 되라고 정면으로 요구하지 않으셨습니까. 페루 신학자 구스타포 구티에레즈와 함께 ‘해방신학’을 처음으로 주창한 것도 그때인 것으로 압니다. 또한 남미 최대의 가톨릭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도발적인 논문과 책을 발행했고요. 그런데 해방신학은 가톨릭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혁명적 운동 아닙니까.

보프 지금까지의 가톨릭 역사에서 교회는 늘 부자들 편이었습니다. 중산층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 발을 맞출 수 있었어요. 그러나 특권이 전혀 없는 하층민들과는 아무런 공통분모를 갖지 못한 채 지내오고 있어요. 착취나 인권 박탈, 억압 같은 현상에 너무나 오랫동안 침묵해왔어요. 항상 지배자와 공범이었죠. 우리 해방신학의 이념은 극빈민층과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형성됐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최하위 단위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조직을 만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론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과정의 배경이 된 전체적 맥락입니다. 1964년 브라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뒤 남미의 거의 전역에서 군사 독재자가 정권을 잡게 됐습니다.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등에 업고 말입니다. 해방신학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확성기’가 되려 했습니다. 성경에 써 있는 것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슈피겔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좀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보프 하느님은 당신의 민족이 고통당하는 걸 보셨고, “압제자의 강압에 대한 그들의 아우성을 들으셨도다”라고 성경에 써 있습니다. 신약성서 누가복음에는 이외에 “강한 자를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신다. 굶주린 자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나는 이 ‘구원’(해방)의 개념이야말로 성경에 담긴 구원의 중심 개념이라고 봅니다. 정치적·사회적·경제혁명적 변화가 요구되는 겁니다.

슈피겔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는 사회혁명가이겠습니다. 교수님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늘 비난받아왔는데요.

보프 물론 카를 마르크스 책을 읽었지요. 교황들도 이 책을 읽으면 좋을 텐데. 해가 될 건 전혀 없어요. 우리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스한테서 배운 건 세상을 보는 시각 정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실제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판단하는 이론적 기준 몇 가지를 거기서 얻었죠.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 가난하도록 억압받는 것임을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이 이론의 토대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존하는 사회주의의 불완전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슈피겔 소비에트연합을 방문하고 나서 그곳의 정치체제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셨는데요.

보프 전체적인 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동유럽 진영의 현재 상황을 내가 좋다고 한 건 아닙니다. 다만, 자본주의 모델과 병행해서 반대 모델이 아직도 존립한다는 걸 나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1980년 가톨릭 대주교이자 해방신학자인 오스카 로메오가 군사정권의 앞잡이에게 사살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남미 국가에서도 가톨릭 사제와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수없이 죽어갔습니다. 내게 마르크스주의는 해방신학 내에서 언제나 부차적인 테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사회사업 같은 걸 마르크스는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습니다. 또 한편, 가톨릭교회가 나름대로 펴고 있는 사회사업은 지금처럼 해선 신자들의 삶에 사실상 도움될 게 없습니다. 현실 문제의 본질과 맞닥뜨리기를 한사코 기피하고 있거든요.

슈피겔 바티칸은 교수님의 주장이 이단적이라며 교수님을 처벌하기에 이르렀지요.

보프 1984년 초 라칭어가 나한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내 책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의 내용에 비판적인 질문을 적어놓았더군요. 그러고 나서 얼마 뒤, 그해 9월이었는데 대화하러 바티칸으로 오라는 정식 소환장이 도착했어요. 내가 불려간 곳은 바티칸 어딘가에 자리한, 아주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심문실’이었어요. 내가 앉아서 기다리던 바로 그 의자에 그 옛날 언젠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앉아서 역시 심문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슈피겔 그런 큰 인물과 연결되다니 영광스러웠겠습니다.

보프 나 같은 보잘것없는 신학자가 유명한 갈릴레이와 같은 운명에 놓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그건 그렇고, 소환에 응해 바티칸으로 갈 때 나는 지적인 토론을 예상하고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정작 일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어요. 심문을 시작하기 직전에 우리 둘 사이에 언쟁이 벌어진 거예요. 라칭어가 화가 나서 펄펄 뛰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바티칸으로 갈 때 해방신학의 동조자인 브라질 추기경 2명이 한사코 나와 동행하고 싶어 했어요. 함께 갔죠. 그리고 그날 라칭어의 질의 응답에 자기들도 참여해 토론하겠다고 한 주교들의 말에 라칭어가 그만 폭발하고 만 거예요.

슈피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보프 바티칸의 전형적인 타협 방식이 사용되었죠. 라칭어는 우선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토론을 허락했어요. 그러나 정작 심문실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었어요. 아무 제재 없이 나를 맘놓고 나무랄 수 있게 말이죠. 아주 점잖게 진행되긴 했지만 화해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어요. “내 생각이 성사(聖事)의 권위 있는 의미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혹독한 비난으로 결국 끝을 맺었어요. 나는 ‘무기한 침묵’이란 징벌과 함께 신학교수 직을 박탈당했어요.

슈피겔 왜 그런 벌을 저항 한번 않고 받아들이셨습니까.

보프 나는 원래 교회가 내부에서부터 변혁하도록 지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교회 규정을 내 나름대로 너무 융통성 있게 해석한 게 실수였어요. 그해처럼 바티칸과 의견 교환을 많이 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교류하면 할수록 처벌은 그만큼 더 강화되고, 내가 쓴 책들에 대한 사전 검열은 더 심해졌어요. 가톨릭신문 <레비스타 보체스>의 주간 자리도 빼앗기고 말았죠. 내가 페트로폴리스에서 운영하던 신학 세미나에서도 손을 떼야 했어요.

슈피겔 바티칸의 추기경 서기장 안젤로 소다노는 교수님을 배반자 유다에 비교했는데요.

보프 그게 한계점이었죠. 그렇게까지 되니 더 이상 버틸 수 없더군요. 1992년 나는 결국 모든 걸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죠. 당시 몸담고 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탈퇴했습니다. 동시에 사제직도 내려놓았죠. 물론 내가 추구해온 테마를 위해 여전히 일하고 있습니다. 참호를 바꿨을 뿐 전쟁 자체를 그만둔 건 아니니까요.

슈피겔 교황 바오로 2세와는 결국 어느 정도 화해가 된 것으로 압니다.

보프 바오로 2세는 라칭어와 달리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신학 이론 면에는 약했지만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문제를 들어주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단지 한 가지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어요. 오랫동안 그 문제를 안고 살았죠. 그러나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난 다음부터는 가장 극단적인 해방신학자라 해도 현존하는 사회주의 때문에 문제를 느끼진 않았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역시 그 무렵에는 사안을 왜곡 없이 제대로 볼 여유를 갖게 됐습니다. 그는 서거 몇 년 전 로마에 있는 어느 브라질 출신 주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제야 비로소 해방신학자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에바리스토 아른스 추기경에게 “억압이 횡행하는 상황에서는 해방신학이 그저 유익한 정도를 넘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12년 3월 28일 쿠바를 방문해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슈피겔 전세계 좌파들이 교수님을 영웅으로 치켜세웁니다. 혹시 도구화될까 봐 걱정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까. 예를 들면 피델 카스트로가….

보프 카스트로는 나를 하바나로 초대해 일주일 내내 전국 방방곡곡으로 데리고 다녔지요. 그러는 내내 우리는 거의 우리끼리만 있었어요. 그에게 쿠바의 부자유한 상황에 대한 내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말했어요.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둘이서 함께 기도도 했습니다.

슈피겔 피델 카스트로하고요. 쿠바 전역에 성탄절 행사를 금지한 게 바로 그 사람인데 기도를 해요.

보프 카스트로는 예수회 신부 손에 컸지요. 그래서 신앙에 관한 생각을 한시도 놓아본 적이 없습니다.

슈피겔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도 역시 쿠바를 방문한 적이 있지요.

보프 언젠가 피델이 나한테 그러더군요. 교황들하고는 이야기가 잘 통한다고.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면서. 그래서 내가 한마디해줬어요. “양쪽 다 권위적 정권의 수반들인데,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눈부시게 잘 통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요” 하고.

슈피겔 교수님이 공직을 내려놓으신 다음부터 해방신학은 사양길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만.

보프 교황청 신앙 교리성 원장으로 있던 시절의 라칭어에게 언도를 받은 신학자가 100여 명에 달합니다. 이런 경향은 그가 교황이 되면서 더욱 심해져 거의 강박 상태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는 해방신학의 보루란 보루는 모두 철거해버렸어요. 그 뒤 자기와 생각을 같이하는 부류 중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을 골라 교황청 주요 직책에 하나하나 심어놓은 거예요. 그러나 우리 해방신학자들은 졌다기보다 그래도 이긴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슈피겔 왜 그렇습니까.

보프 정치 속으로,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지요. 2003년 노동조합장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가 브라질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2011년 그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은 게릴라였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입니다. 두 사람은 해방신학의 사고 방식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는 브라질에서 이런 사람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지요.

슈피겔 ‘자본주의는 악의 시스템’이라고 늘 지탄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착취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소수 거대 자본의 축적을 낳고, 반면에 대중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고요. 룰라와 호세프는 매우 참신한 사회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데, 자금 마련을 위해선 울며 겨자 먹기로 친산업적 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 처지지요.

보프 옳은 지적입니다. 두 사람이 가리키는 사회민주주의적 길은 방향이 제대로 잡힌 겁니다. 물론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지만 말입니다. 특히 파벨라(브라질의 빈민가)가 문제예요.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연 파괴입니다. 내가 보기에 환경 문제가 인류의 핵심 테마가 된 것 같습니다.

슈피겔 최근 출간한 책은 ‘환경적 영성’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그런 주제를 논하다 보면 종종 ‘대충대충 논의’, 이른바 비교(秘敎)의 영역에 머무는 위험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요.

보프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나는 대강대강이 아니라 구체적인 안내를 하는 데 힘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에겐 절망에 빠진 지구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합니다.

슈피겔 가톨릭교회라는 조직체를 뒤로하고 교단을 떠나셨습니다. 바티칸이 어려움에 부딪혔다는 소식, 예를 들어 제대로 공개 처리하지 못하는 사제들의 성 스캔들 같은 소식이 들릴 때, 가끔 고소하단 생각이 슬며시 들지 않습니까.

보프 부탁입니다. 그런 유의 얘기는 자제해주세요. 가톨릭교회는 내게 ‘영성의 고향’입니다. 항상 잘되기 바라고 있습니다. 사제의 아동 성학대 건에 대해 한마디하면, 문제는 성욕을 무리하게 억누르는 데 있다고 봅니다.

슈피겔 독신 계율과 성 스캔들이 서로 관계 있다는 말씀인가요.

보프 그렇습니다. 바티칸이 성 스캔들을 자의 반 타의 반 식으로 미적미적 처리하는 건 참 낯간지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슈피겔 이상적인 교회는 어떠해야 합니까.

보프 현 교황이 보기에는 교회는 항구에 탄탄하게 닻을 내린 배 같아야 합니다. 언제라도 검열이 가능하게 말이지요. 교황은 지속성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래서 진실이 아니라 안전을 추구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교회는 바깥에서 활동하기 위해 건조된 배입니다. 항구를 떠나 대양에서 파도와 싸우며 나아가야죠. 필요하다면 항로도 바꿀 수 있는, 그런 배가 이상적 교회입니다.

슈피겔 좋은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글 옌스 글뤼징 Jens Glüsing <슈피겔> 리우데자네이루 특파원, 에리히 폴라트 Erich Follath 자유기고가

ⓒ Spiegel

번역 장현숙 위원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