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4 16:45 수정 : 2013.01.0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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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 육군 태풍부대 경계병들이 철책선 근무를 서고 있다. / 뉴시스
 #1.

 2006년 3월 18일 밤 11시쯤 강원도 고성군의 한 바닷가. 육군 22사단이 경계 근무를 맡고 있는 해안 철책 절벽 아래에서 갑자기 불빛이 여러 차례 깜빡였다. 소초에서 무료하게 경계 근무를 서던 정상운(가명·26)씨는 화들짝 놀랐다. 철책 아래 바닷가는 민간인 통제 구역이기 때문에 불빛 신호를 보내는 사람은 표류한 남쪽 주민이거나, 북한에서 넘어온 군인 또는 민간인일 것이다. 3월이지만, 전방의 초봄은 몹시 추웠다. 강풍 소리가 파도 소리와 겹쳐 스산하게 윙윙 울렸다. 그리고 정씨의 머릿속도 윙윙 울렸다.

 정씨는 즉각 “불빛이 보인다”고 소대 지휘관실에 보고했다. 소대장이 휴가를 갔기 때문에 행정보급관인 상사, 그리고 하사와 순찰병이 헐레벌떡 소초로 달려왔다. 하사와 정씨, 순찰병은 총을 장전하고 수류탄을 든 채 철책 뒤에서 엄호 대기했다. 상사는 총을 든 채 철책 입구인 통문을 열고 들어가 살피다 해안가에서 사람들과 마주쳤다. 상사는 총을 겨누며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하고 경고했다. 긴박한 순간이지만 정작 눈앞에 보인 건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자 1명과 아이 2명이었다. 그 뒤에 있던 남자 2명 중 1명이 갑자기 “에이씨, 다시 돌아가자” 하며 역정을 냈다. 상사는 이들이 민간인임을 확인하고,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자 그들은 곧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1t이 채 안 되는 배를 타고 3m 높이의 파도를 넘어 남쪽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귀순 의사를 밝혔다.

 

 #2.

 최근 군은 수조 원대의 대규모 무기 도입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정신전력 등 군 기강 확립에는 소홀해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군 관계자는 “최근 유격이나 야간 행군 등 힘든 훈련을 앞두고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병사들이 중대에 한두 명씩 나온다”며 “‘왜 내가 군에 입대해 나라를 지켜야 하는가’ 등에 대한 자발적인 동기 유발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2012년 10월 10일치 <조선일보> 6면

 우리 군의 전방 경계 태세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허물어뜨리는 일이 자꾸 발생하고 있다. -2012년 10월 16일치 <조선일보> 6면

 

 2012년 10월 2일, 정씨가 근무한 강원도 고성 22사단에서 북한군 병사가 철책을 넘어 일반 전방 소초(GOP)의 생활관 문을 두드려 귀순한 이른바 ‘노크 귀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나온 언론보도다. <조선일보>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언론이 비슷한 뉘앙스로 군의 ‘기강 해이’와 ‘경계 허술’을 거론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정청래 민주통합당 의원은 군이 북한군 귀순자에게 한 첫 조처가 심문이 아니라 라면을 끓여준 사실을 거론하며 군의 안일함을 비판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군의 ‘허위 보고’라는 명백한 절차상의 문제가 드러났다. 하지만 허위 보고가 발생한 근본 원인에는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군의 기강 해이와 경계 허술에서 그로 인한 국민의 안보 불안이라는 형식 논리에 따른 일방적 질타와 호통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국회라는 무대와 그 무대를 조명한 언론을 통해 별 4개(대장)를 단 1군 사령관의 울먹이는 모습이 연출됐고,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그리고 군대 갔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전방 부대 병사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야말로 죽어났을 것이다. 어떤 병사는 휴가를 빼앗겼을 것이고, 어떤 병사들은 야간 근무를 서고도 잠을 자지 못하고 ‘기강 해이’에 대한 징벌적 성격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병사들이 왜 북한군 병사가 노크할 때까지 그를 발견할 수 없었는지, 만약 북한군 병사가 귀순이 아니라 위해의 목적으로 침투했다면 안보가 불안한 게 아니라 현장에 있던 병사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는 데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노크 귀순’이란 사건만 희화해 논란이 되고, 조명 밖의 병사들은 배제됐다.

 

뿌리 깊은 ‘허위 보고’ 악습  

 북한에서 넘어온 주민 5명은 온몸이 바닷물에 젖어 있었다. 정씨를 비롯한 22사단 사병들은 일단 그들을 취사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보급품 중에서 옷을 꺼내 갈아 입혔다. “그러고선 라면을 끓여줬어요. 그 밤에 취사 장비를 돌리긴 어려우니까요. 일단 안정시켜야 했고, 그래야 무슨 이유로 귀순했는지 물어볼 수 있잖아요.” 곧 기무사 사람들이 왔고, 22사단 사병들은 북한 주민들의 신병을 인도했다.

 하지만 소대는 22사단 상부에 허위 보고를 해야 했다.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사람들이 해안에 당도하기 전까지 발견하지 못한 것은 철책 경계가 무너진 치명적인 실수로 취급된다. 그날 밤 소대는 강풍에 고장 날까 싶어 야간 열상감지장치(TOD)를 철수시켰다. TOD는 한 대에 1억9천만 원 정도 하는 고가의 장비다. 장비가 손상되면 줄줄이 징계를 받는다. 게다가 TOD가 없었어도, 수km 먼 바다까지 비춰볼 수 있는 제논 라이트가 있었다는 점 역시 경계 소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는 고스란히 부대 책임자의 잘못으로 여겨 문책을 받고, 장교들이 생명줄로 여기는 인사 고과 점수가 깎인다. 그리고 병사들은 징벌성 훈련을 받는다.

 소대는 북한 귀순자들이 해안에 상륙하기 전 바다 위에 있을 때 제논 라이트를 통해 발견해 귀순을 유도했다고 상급 부대에 보고했다. 곧 표창이 내려왔고, 30개 표창장은 사단장과 영관급들에게 대부분 돌아갔다. 허위 보고가 상습이 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숨어 있다.

 사실 북한에서 민간인이든 병사든 귀순자가 자주 내려온다. 그렇지만 산악길로 이어져 있는 260km 휴전선을 빈틈없이 경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씨가 근무하던 소대가 맡은 해안 경계와 땅 위의 철책 경계 섹터는 좌우 5km 정도다. 소대 인원은 20여 명이다. 8명이 1분대를 이뤄 낮 시간대 경계 근무를 서고, 8명씩 2개 분대가 돌아가면서 야간 경계 근무를 선다.

 “이 인원으로 5km 길이의 철책을 넘어오는 사람을 모두 파악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게다가 군에선 ‘전방 주시보다 후방 주시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교들의 순찰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죠.”

 전방 GOP 병사들의 주 임무인 경계 근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지도 않는다. GOP 병사들의 주 임무는 경계 근무와 함께 철조망 수리, 주기적으로 감시용 돌 고아 올리기, 통신선 정비 등이다. 하지만 평소 쓸데없는 제초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하고, 멀쩡한 창고도 명령에 따라 다시 청소해야 할 때가 많다. 특히 상급 부대에서 사단장이 순시를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한 달 전부터 영관급 장교들이 계급 순서대로 한 명씩 내려와 청소 점검을 한다. 그럴 때면 한 달 내내 청소다. 사단장이 와서 “천장이 누렇네”라고 한마디 하면 생활관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하고, “화장실 문이 삐걱댄다”고 하면 멀쩡한 문도 뜯어내 수리한다. 바닷가에서 오리발이 하나 발견되면, 그날부터 전 부대가 ‘A형’(최고 경계 수준) 상태로 돌입해 전 근무지를 훑고 다니며 섹터를 수색한다. “그러니까 밤새 근무를 선 사람도 낮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는 거죠. 집중력이 생길 수 없습니다.”

 혹여 있을지 모를 침투 작전에 대비한 안전 장치는 정작 찾기 힘들다. “대부분 귀순자가 넘어오지만, 만에 하나 1명의 북한군이 몰래 침투 작전을 벌인다면 철책 감지 센서를 장착하거나 생활관 잠금 장치 등을 설치하는 것으로 안전 대책을 세워놔야겠죠. 하지만 병사의 안전, 뭐 그런 건 안중에도 없습니다.” 군이 철책 감지 센서 장착 등을 추진한다는 ‘GOP 과학화 사업’은 몇 년째 소리만 들릴 뿐 실행되지 않고 있다.

 

 1~2명을 막자는 경계가 아니다 

 2009년 4월, 이번에는 서쪽 최전선인 1사단에서 북한군 병사가 철책을 넘어왔다. 1사단은 경기도 파주와 문산 일대의 철책 경계를 맡는 부대다. 철책의 일부는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일부는 언덕으로 이어져 있다. 휴전선은 여러 겹의 철책으로 되어 있다. 1사단 전방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일단 GOP가 있고, 첫 번째 남쪽 철책인 통문이 있다. 보통 TV에서 전방 군인들이 순찰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철책이 바로 통문이다. 통문은 높이가 4m 정도 된다. 통문을 넘어서면 민간인 통제 구역이 나온다. 통문부터 다음 철책인 추진 철책(3m 정도 높이)까지 지역을 ‘1단계’라고 부른다. 추친 철책과 군사분계선(MDL) 사이의 지역은 ‘2단계’다. 1, 2단계 지역 병사들은 최전방 경계초소(GP)를 세우고, 매복을 하며, 경계 근무를 서고, 생활을 한다. 그리고 푯말만 있는 MDL을 넘으면 북쪽 땅이 나오고, 바로 북한의 전기 철책이 나온다.

 북한군 하전사(일반병)는 북의 전기 철책을 넘어 MDL을 지난 뒤, 2단계 지역에서 매복 중이던 한국군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곧바로 귀순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군에선 이런 우연한 마주침도 모두 ‘귀순자 유도 작전’이라고 부른다. ‘유도’한 적이 없고, ‘작전’을 벌이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부른다. 인사 고과 점수와 포상 휴가 때문이다. 또한 “작전으로 귀순을 유도했다”고 보고해야 허술한 경계에 대한 문책도 면제된다. 그래서 병사들은 북한군 귀순자를 ‘걸어다니는 휴가증’이라고 부른다.

 북한군 귀순자는 어떻게 전기 철책을 무사히 넘어온 걸까. 2009년 1사단에서 수색대로 근무한 조민수(가명·24)씨는 군 생활 때 읽은 ‘북한군 귀순자 수기’를 통해 그 비밀을 털어놨다. “북쪽의 전기 철책은 귀순자가 내려오는 걸 막지 못합니다. 귀순자 수기 중에 전기 철책 관리병이 쓴 것이 있는데, 북에는 전기가 부족하니까 철책의 전기를 끄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시스템 오류도 잦고요. 한번은 2명이 함께 넘어오다, 1명은 전기 철책을 넘었는데 다른 1명이 철책에 낀 상태에서 전기가 다시 들어오는 바람에 즉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간대만 파악하면 누구든 넘어올 수 있다고 해요.”

 조씨는 그렇기 때문에 철책을 넘어오는 귀순자를 빈틈없이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한국군의 방어 태세와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국군의 방어 태세는 1~2명의 병사가 철책을 넘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중대나 대대 규모 병력이 전면전을 위해 남하할 때 철책에서 시간을 끌도록 만든 방어 태세라는 것이다. “철책은 전면전 때 대규모 병력이 남하하는 걸 지연시키기 위한 장치이지, ‘쥐새끼 한 마리도 못 넘어오게 막는’ 장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같은 부대에서 2008년 3월~2010년 7월 근무하며, 역시 북한군 하전사의 ‘귀순자 유도 작전’을 경험한 김승진(가명·23)씨도 비슷한 설명을 했다.

 “전방 철책 근무를 해본 사람은 철책 경계 근무에서 빈틈없이 모든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압니다. 어떤 곳은 2명이 경계를 서는 소초가 차로 5~6분 거리 떨어진 곳도 있어요. 그런데 굳이 ‘기강 해이’다, ‘안보가 불안하다’고 말하는 까닭을 모르겠어요. 게다가 복무 기간이 2년도 채 안 되는 병사에게, 그것도 온갖 인권 침해에 시달리는 병사들에게 전문성이나 뛰어난 근무를 기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걸까요?”

 이재훈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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