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9 02:41 수정 : 2013.02.01 11:31

10일 북한 주민들이 평양 만수대 언덕에 있는 김일성(왼쪽)·김정일 동상에 참배한 뒤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평양/AP 뉴시스
 말이 통한다고 다가 아닌가 봅네다

 지금이야 남한 사회의 정보공유가 비교적 자유롭다 보니 북한의 열악한 경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나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다. 북한의 경제 사정은 20여 년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동구 공산권이 몰락하면서부터 위태롭게 기울기 시작해, 급기야 ‘고난의 행군’(1990년대 중반 대량 아사를 겪던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에 따른 대량 탈북 사태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상당수 북향민(공식법률용어는 ‘북한이탈주민’)들은 배고파 죽어가는 혈육들을 위해 식량을 구해보려는 일념으로 얼어붙은 두만강을 가슴 졸이며 건넌 이들이다. 당시만 해도 그 길이 두 번 다시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북한 체제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비법월경자’ ‘배신자’라고 낙인찍었으며, 중국 당국의 거듭되는 강제 북송의 공포를 견디다 못해 온갖 우여곡절 끝에 한반도 남쪽까지 오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북향민들은 2만4천여 명에 달한다. 그러나 북향민들의 이런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남한에서 겪는 일상의 소소한 어려움은 더욱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제 날’의 북한 사람들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았던 북향민들이 오늘날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살면서 겪는 어려움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 특히 당혹스러운 것으로 치자면 ‘언어’ 문제가 가장 크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조상 대대로 써왔는데도, 분단이라는 비극으로 오늘날 웃지 못할 희비극(요즘 남한 젊은이들의 말로 ‘웃픈’ 일)이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내친 김에 이와 관련해 내가 겪은 수많은 사연들 중 두 가지만 털어놓으려고 한다.

 

 짜장면의 추억

 10년 전, 산 설고 물 선 경북 안동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할 때의 일이다. 당시 내가 일하던 식당은 주방에만 5명, 홀에 5명이 근무하는 웬만한 중소기업과 맞먹는 대형식당이었다. 북적이는 손님들로 595.㎡(180평) 가게 안을 팽이처럼 쉼 없이 돌아야 하는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때는 여름이었다. 연이은 무더위에 모두가 예민해져 있는데, 사장님께서 모처럼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으라며 돈을 주셨다. 주방 이모가 가장 신나셨다. 하나 둘 세어보니 나까지 전부 10명이었다. 중국집 전화번호를 막 누르려는 순간 주방장님이 “나는 곱배기로 주문해줘!”라고 외치셨다. 나는 알았다는 손짓을 하고 서둘러 짜장면을 주문했다.

 40분쯤 흘렀을까. 중국집 배달원이 “배달이요!”라고 호기롭게 외치며 먹음직스러운 짜장면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주문한 대로 정확히 11그릇이었다. 음식값을 치르고 돌아오니 가게 식구들의 의아한 눈길이 모두 나한테 쏠린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뭐가 잘못되었냐”고 물었다. 가게 식구들이 모두 한 그릇씩 가졌는데도 한 그릇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아 , 이건 주방장님이 곱배기로 주문하신 거예요.”

 남은 한 그릇을 주방장님 앞에 갖다 드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주방장님이 물어보셨다.

 “곱배기 주문하지 않았나요?”

 “곱배기 주문해서 두 그릇인데요.”

 또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사태를 파악한 주방장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기 남쪽에서는 곱배기가 두 그릇이 아니라, 500원을 더 주면 추가로 면을 더 얹어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아하, 그랬구나!”

 단어 하나에도 엇갈리는 남북한의 문화적 차이를 생생하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북한에서는 곱배기가 ‘똑같은 것이 하나 더 있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의사에 대한 오해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북한과 남한의 직업 차이를 절감했던 일이다. 인구 16만 명을 조금 웃도는 전형적인 소비도시인 안동에 처음 정착했을 때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보는 북한 사람이, ‘피부도 빨갛고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인 게 참으로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이것 저것 궁금한 것도 많았을 것이다. 

 “북한에서 부모님 직업이 뭐였어요?”

 “두 분 다 의사였어요.”

 나는 곧이곧대로 솔직히 대답했다. 그러나 다들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말이에요? 부모님이 모두 의사인데 남한에 왜 왔어요?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열이면 열, 똑같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 도리어 놀란 것은 나였다. 마치 내가 꾸며서 말을 한다는 듯한 반응과 마주할 때마다 영문을 몰라 무척 당혹스러웠다. 똑같이 의술을 펼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북과 남의 처지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러고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동명숙 씨 / 박승화 기자
 북한의 의사는 이름하여 “인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진 당의 보건전사”로서,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다. 따라서 자부심을 가질 수는 있을지언정 여느 노동자들처럼 배급을 타고 월급을 받는 평범한 사무원일 뿐이다. 학적부에 기입하는 부모 직업란에도 그저 ‘사무원’이라고 적는다. 사회적으로도 상위계층이 아니다 보니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어 죽는 의사들이 있었던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남한에서는 의사가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뒤늦게 의사라는 직업이 남과 북에서 얼마나 다른 경제계층에 속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부모님 직업을 묻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이렇게 답하곤 했다.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덤으로, 못미더워하는 눈초리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노동자니까 배급을 못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탈북했을 것이라는,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절차적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가뜩이나 무한생존경쟁의 시장경제 체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삶에서 시시콜콜 묻는 질문에 일일이 답하는 것도 무척 버거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북한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으면 상세히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나라도 알려주지 않으면 누가 그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편견은 서로를 잘 모를 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과 남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차이점들을 직접 몸으로 겪고 있는 북향민의 한마디 한마디야말로 서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나원’에서 3개월 동안 체제 적응에 필요한 기초 이론과 남한 사회의 문화에 대해 가르쳐주지만 지극히 단편적일 뿐이다. 그다지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교육 기간 동안에는 사회에 나가서 이룰 꿈들을 생각하느라 희망에 벅차 있지만, 정작 밖으로 나와 마주하는 현실이 얼마나 냉정한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통계자료에도 나와 있듯이, 북향민들의 삶의 만족도는 사회에 나와서 첫 1년만 최대치에 달했다가 그 뒤 차츰 하향곡선을 그린다. 남한 사회에서 북향민들의 위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궁금한 것이 있어도 어색한 억양 때문에 “쟤 뭐니?” 하는 이상한 시선과 수없이 마주치다 보니 뭘 물어보는 것이 겁날 정도다. 그럴수록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 스스로 마음을 닫는 상황도 적잖게 봤다. 나 역시 적응 초창기에는 꼭 필요한 말이 아니고서는 ‘벙어리’에 가까울 정도로 입을 닫고 살았다. 내가 굳이 말투를 바꾼 것도 입만 열면 “조선족이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들은 북향민과 조선족을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함경도 출신의 억양과 조선족 억양이 오십보 백보 차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네끼리는 말투만 듣고도 조선족인지 아닌지 구분해낸다. 알듯 모를 듯한 미세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가슴 아픈 질문 “무슨 음식 좋아해요”

 살다 보면 누구라도 많은 질문을 받게 된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내 마음을 유달리 아프게 했던 질문이 있다. 북향민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쓰라리게 다가올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지?’

 글쎄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고향은 상당기간 경제적인 궁핍을 강요했던 곳이다. 다양한 메뉴를 골라서 먹기는커녕 나물죽이건 시래기국이건 굶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던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 사정이 극심해진 건 1990년도 초반부터였지만, 전형적인 배급가족이었던 우리 집은 정상적으로 배급을 줄 때조차 양이 넉넉지 않았다. 한창 클 때라 돌이라도 삭힐 나이였던 우리 남매들 때문에 부모님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부식물을 더 구해오느라 시름이 깊으셨다. 현실이 이러했기에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꿈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남한살이 10년차인 요즘에는 같은 질문을 받으면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고기요!”라고 호기롭게 외친다. 어찌된 영문인지 고기만큼은 먹고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남한에 와서 깜짝 놀랐던 것이, 설날이나 국가가 지정한 명절에 겨우 몇 점 맛볼 수 있었던 그 귀한 고기를 지천으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트며 정육점에 넘치도록 쌓여 있는 온갖 종류의 고기들을 보면 생사도 알 길 없는 북쪽의 야위고 앙상한 혈육들과 친지들, 친구들의 모습이 조건반사처럼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북한과 남한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북향민이라면 누구나 겪어보았을 이런 사연들을 가슴속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하나의 인격체인 나를 위해, 온전히 나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북한에서는 변변히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충성만을 끊임없이 강요당했는데 남한에 오니 누가 뭐라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이라 참으로 행복했다.

 그래서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주체사상을 배운 곳은 북한인데 남한에 와보니 오히려 더 잘 구현이 되어 있더라”고 말이다. 이 말을 들은 남한 사람들은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 다시 묻곤 한다. 북한에서 가르쳐준 주체사상은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신이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신에게 있다고 하는데, 굶어 죽어가면서도 ‘장군님 만세’만 부르짖어야 하는 삶이 어디가 주체적이냐고, 반면 남한에서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돈을 벌어서 아파트 대출금도 갚고 관리비도 내고 보험도 넣고 자녀들 교육도 시키고 부모님 노후도 책임지고 있으니 이 보다 더 주체적일 수 없지 않으냐고 설명해준다.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는지, 사람들은 그때서야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북향민 존재의 이유

 지난 2008년 3월 10일치 <조선일보> 기사에 ‘어느 새터민 여성의 쉼 없는 도전기’라는 제목으로 나에 관한 생애 첫 기사가 났다. (당시 어떤 분은 “남한에서는 좋은 일로 기사 나기가 참 어려운데 대단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하나원을 나오면서 다졌던 세 가지 다짐을 실천하며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과 소감을 적어 보낸 것이 정착 성공 수기에 입상하면서 기사화된 것이다. 그 기사를 읽고 14명의 독자가 댓글을 달았다. 그 중에는 이런 댓글도 있었다.

 ‘북한을 포함해서 공산국가의 특징은 국민들이 열심히 일을 안 하고 염치가 없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열심히 일하고 바른 생각을 한다면 우리들의 부정적인 시각을 많이 바꾸어 줄 것 같다.’

 댓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입국한 이래 지금껏 나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것이 남한 사람들에게는 북향민, 나아가 북한 주민들 전체의 모습으로 비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남한에 와서 ‘북한 주민들은 게으르고 무능하고 책임감 없고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편견과 수없이 마주쳤다. 북한 사람이라서 게으를 것이라는 편견을 조금씩이라도 바로잡고 북한 사람들 사이에도 가치관이나 생각이 다른 다양한 부류의 군상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2만4천 북향민들의 또 다른 존재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동명숙 북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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