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4:53 수정 : 2014.07.03 14:53

‘명사. 스포츠 용어. 주로 발로 공을 차서 상대편의 골에 공을 많이 넣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다. 11명이 팀을 이루며, 골키퍼 외에는 손을 쓰면 안 된다. 발 외에 머리와 가슴 등을 사용할 수 있다.’

꼭 100년 전, 1914년 7월28일을 기억해보자. 인류 역사상 첫 ‘세계대전’이 그날 시작됐다. 그해 12월, 전쟁의 포화 속에 파묻힌 유럽의 서부전선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눈이라도 내렸던가? 참호에 웅크리고 앉아 서로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있던 독일과 영국·프랑스 젊은이들이 잠시 총을 내려놓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한편에서 캐럴을 불렀고, 반대편에서도 답가가 들려왔다.

이윽고 용기 있는 젊은이 몇몇이 나섰다. 총 대신 선물 꾸러미를 손에 쥐고 상대편 진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크리스마스이브와 당일엔 대담해진 젊은이들이 ‘제3지대’로 나와 말을 섞었다. 음식을 나눴다. 전사한 동료들의 주검을 함께 묻었다.

누군가 ‘공’을 들고 왔다. 처음엔 자기 편끼리 찼다. 나중엔 ‘국가 대항전’을 벌였다. ‘극단의 세기’의 서막을 알린 그 참혹한 전쟁터에서 함께 축구를 했다. 저 유명한 ‘크리스마스 휴전’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11일에야 막을 내렸다. 4년 3개월 14일 만의 일이다.

공을 가지고 하는 경기는 많다. 골을 많이 넣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도 여럿이다. 그 가운데 유독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체계화한 축구가 인류의 가슴을 사로잡은 이유가 뭘까? 바야흐로 월드컵이 한창이다.

프로선수를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약 3억 명이 정기적으로 축구경기를 뛴다. 단일 리그로 최대 관중 동원력을 자랑하는 건 미식축구 리그 NFL(한 해 약 1730만 명)이지만, 프리미어리그(1370만 명)·독일 분데스리가(1300만 명)·스페인 라리가(1150만 명) 등 유럽 3개 리그만 합쳐도 ‘절대 강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해진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프로축구 20개 구단이 2012~2013년 시즌에 벌어들인 돈만도 약 74억달러에 이른단다.

‘아름다운 게임, 추한 비즈니스.’

영국 시사·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6월7일치에서 축구의 현주소를 이렇게 표현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부패 스캔들에 휩싸인 국제축구연맹(FIFA)을 꼬집은 게다. 축구의 ‘아름다움’과 그를 둘러싼 ‘추한 상혼’의 실체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을 만나려면 제법 먼 길을 떠나야 한다. 먼저 아프리카 대륙 중서부, 기니만에 접한 땅 코트디부아르로 가보자.

2002~2007년 코트디부아르 내전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가 된 코트디부아르는 1960년 8월에야 독립했다.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초대 대통령이 이끈 신생 공화국은 각종 농산물과 원자재의 수출로 서아프리카 최대 부국으로 떠올랐다. 독립 이후 20년 동안 코트디부아르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0%를 웃돌았다. 아프리카 대륙 비산유국 가운데 최고치였다.

1980년대 들어 세계적 경기침체로 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위기가 닥쳐왔다. 때맞춰 극심한 가뭄까지 겹치면서 코트디부아르 경제가 휘청였다. 국채는 삽시간에 3배나 늘었고, 수도 아비장에선 범죄가 들끓었다. 1990년 공무원을 중심으로 부정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총파업이 벌어졌다. 잠잠하던 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했다. 건국 이후 일당 지배체제를 이어온 부아니 대통령도 다당제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집권 33년여 만인 1993년 권좌에서 숨을 거뒀다.

부아니의 급서로 정권을 장악한 것은 당시 국회의장이던 앙리 코난 베디에였다. 베디에는 1995년 10월 야권의 분열 속에 재선에 성공한 뒤 본격적으로 권력 기반 다지기에 나섰다. 그는 당시 코트디부아르 인구의 약 26%를 점하고 있던 외국계 이주민의 선거권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종족 갈등을 부추겼다. 특히 부르키나파소 이주민이 많은 북부 지역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차별은 군부 내에서도 이뤄졌다. 결국 1999년 로베르 구에이 참모총장이 군부 내 반대세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듬해 치른 대선에서 ‘인민전선’을 이끈 로랑 그바그보가 당선됐다. 하지만 부모 모두 코트디부아르 출신인 자만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선거 직전 법령을 급조한 게 화근이었다. 무슬림 인구가 많은 북부 출신 알라산 우아타라 후보는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내전의 씨앗이 뿌려진 게다. 2002년 9월19일 기어이 내전이 시작됐다.

2004년 하반기로 넘어가면서, 전면적인 교전은 사실상 멈췄지만 반군이 장악한 북부와 정부군이 장악한 남부로 갈라선 코트디부아르의 정세는 여전히 휘발성이 강했다. 내전은 2007년 3월4일에야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4년 5개월 11일 만의 일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다시, ‘크리스마스 휴전’의 기적을 떠올려보자.

드로그바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디디에 이브 드로그바 테빌리는 1978년 3월11일 아비장에서 은행원 부모의 맏이로 태어났다. 코트디부아르 호황기의 끝자락이었다. 그는 5살 나던 해 프랑스에서 프로축구 선수 생활을 하던 삼촌 미셸 고바에게 맡겨졌다. 삼촌은 부모에게 “디디에한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단다. 부모는 함께 갈 형편이 못 됐다. 아이는 혼자 이역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아이도 울고 엄마도 울었다. 드로그바는 2007년 2월 영국 <옵서버>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한곳에서 가장 오래 산 게 태어나서 5살까지 살았던 아비장이다. 그 뒤 지금까지 14차례 옮겨다녔다. 처음 프랑스 삼촌한테 간 게 1983년이었다. 도착해선 매일 울기만 했다. 프랑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다.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 들어선 ‘향수병’은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고향의 흙냄새, 낡은 집의 풍경, 다정한 이웃들, 함께 뛰놀던 친구들….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3년 만이었다. 귀향한 드로그바는 매일 지칠 때까지 동네 주차장에서 축구공을 차고 놀았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위기는 3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 코트디부아르를 휘감은 경제위기로 부모가 동시에 일자리를 잃었다. 살길이 막막해졌다. 11살 소년은 다시 프랑스의 삼촌 집으로 향해야 했다. 1989년의 일이고, 이번엔 울지 않았다.

1991년 마침내 부모와 동생들도 프랑스로 날아왔다. 부모는 2년여 천신만고 끝에 파리 외곽에 자리를 잡았다. 15살 드로그바도 마침내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1993년이었다. 동네 유소년 클럽에서 공을 차던 소년은 골 넣는 재주가 남달랐다. 이를 눈여겨본 지역 준프로팀이 냉큼 데려갔다. 고등학교를 마친 드로그바는 대학에 진학해 회계학을 전공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21살 청년이 된 드로그바는 1999년 첫 프로선수 계약서에 서명했다. 프랑스 2부리그 르망이었다.

시작이 좋진 않았다. 잦은 부상으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무렵 첫아들 아이작이 태어났다. 드로그바는 <옵서버> 인터뷰에서 “아이작이 태어난 게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 나 스스로를 일으켜세우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첫 시즌에 30경기에 출전해 7골을 넣었다. 이듬해엔 부상으로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세 번째 시즌에 다시 21경기에 나서 5골을 넣으며 재기했다. 이 무렵 1부리그 하위 팀 갱강에서 이적을 제안했다. 2001~2002년 시즌 중반이었다. 그는 이적 뒤 11경기에서 3골을 넣었고, 강등권이던 갱강은 1부리그에 남을 수 있었다.

다음 시즌, 드로그바가 마침내 화려한 날갯짓을 시작했다. 34경기에 나서 17골을 넣었다. 갱강은 창단 이래 가장 좋은 성적(리그 7위)을 거뒀다. 명문 올림피크 마르세유에서 드로그바를 찾았다. 갱강에 두둑한 이적료를 안기고 팀을 옮긴 그는 다음 시즌 19골을 몰아넣으며 ‘올해의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5골을 몰아쳤다. 더 큰 무대가 성큼 다가섰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첼시가 거액의 이적료를 제시했다. 단 한 해를 보냈지만, 올림피크 마르세유의 홈구장에는 드로그바의 유니폼이 지금껏 걸려 있다.

2004~2005년 시즌 첼시는 50년 만에 프리미어리그 정상에 올랐다. 드로그바는 40경기에 출장해 16골을 터뜨렸다. FA컵 결승에선 리버풀과 연장 접전 끝에 3 대 2로 승리했다. 결승골은 드로그바의 머리에서 나왔다. 첼시는 그해 챔피언스리그에서도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통했다. 이듬해에도 첼시는 승승장구하며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드로그바는 전년과 마찬가지로 16골을 기록하며 첼시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었다. 2002년부터 ‘코끼리들’로 불리는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에서 활약해온 드로그바가 팀을 이끌었다. 2005년 10월8일 코트디부아르는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 진출을 확정지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 축제 분위기로 달아오른 라커룸으로 방송 카메라가 들어왔다. 코트디부아르 전역에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드로그바는 노래를 불렀다. 춤을 췄다. 그리고 카메라를 응시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코트디부아르의 남성과 여성 여러분, 남부와 북부, 중부와 서부의 여러분. 모든 동포 여러분. 저희 대표팀은 오늘 여러분 앞에서 확실히 증명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공통의 목표를 위해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그 승리를 위해, 우리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순간, 드로그바가 무릎을 꿇었다. 대표팀 선수 모두 어깨를 겯고 무릎을 꿇었다. 드로그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파도네. 용서하세요. 파도네. 파도네. 이제 그만 용서하세요.” 코끼리들이 모두 ‘파도네’를 외쳤다. 파도네는 프랑스어로 ‘용서하라’는 뜻이다.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나라, 그 많은 장점을 갖고 있는 코트디부아르가 왜 전쟁을 해야 합니까? 제발,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선거도 합시다. 사는 게 좋아질 거예요. 즐겁게 살고 싶어요. 그러니 총질은 이제 그만합시다. 축구를 하고 싶어요. 총질을 멈추세요.”

어느새 일어선 그가 노래를 부른다. 대표팀 동료들도 한데 어우러져 덩실덩실 춤을 춘다. 코트디부아르 내전의 불씨는 그렇게 잠재워졌다. 드로그바는 지난해 3월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예정된 일이 아니었다. 그저 기회가 생겼고, 해야 할 말을 생각나는 대로 했을 뿐이다.”

축구선수가 멈춘 내전

2006~2007년 시즌 드로그바는 팀 동료 데이미언 더프의 이적으로 비게 된 등번호 11번을 달았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에서만 20골을 포함해 모두 33골을 넣었다.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의 영예는 당연히 드로그바 차지였다. 2007년 3월28일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행사가 아비장의 대통령궁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흰색 와이셔츠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드로그바가 트로피를 손에 들고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제 방식으로, 코트디부아르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께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저와 함께 트로피를 들고 부아케로 가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장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드로그바도 대통령도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아비장에서 북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부아케는 반군의 수도 격이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긴 했지만, 증오와 불신은 여전한 터다. 이틀 뒤인 그해 3월29일 발롱도르를 앞세운 드로그바가 부아케 공항에 내렸을 때, 수많은 인파가 몰려 ‘평화의 사도’를 맞았다. 평소 20분이면 도착할 시내까지 2시간 이상이 걸렸다. ‘피를 마신다’던 북부 사람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를 얼싸안았다. 드로그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6월엔 축구 국가대표팀, 코끼리들 전원이 부아케로 올 겁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2008년 아프리카네이션스컵(CAN) 예선전이 그해 6월3일 부아케에서 치러졌다. 경기장 가득 관중이 들어찼다. 더러는 북부에서, 더러는 남부에서, 중부와 서부에서도 대표팀의 축구를 보러 왔다. 살로몬 칼루가 첫 골을 터뜨렸다. 마지막 골은 주장 드로그바의 몫이었다. 이날 마다가스카르를 상대로, 코끼리들은 모두 5골을 몰아넣었다.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몸으로 느낀, 진정한 화해였다. 다음날 코트디부아르 현지 신문 1면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축구가 불러온 화해, 5년의 전쟁을 5골로 지웠다’.

2008~2009년 시즌을 마치고, 드로그바는 계약을 2년 연장했다. 2009년 말엔 펩시와 맺은 광고계약금 300만파운드 전액을 기부해 고향 아비장에 대형 병원을 지었다. 내친김에 자기 이름을 딴 자선재단을 만들어 의료·교육 지원사업에 나섰다. 첼시 쪽도, 그가 거쳤던 프랑스의 팀들도 거들고 나섰다. 2009~2010년 시즌 첼시는 다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치고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일궈냈다. 2011~2012년 시즌엔 승부차기 끝에 마침내 챔피언스리그 우승도 차지했다. 당시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은 “내가 보기엔 드로그바 혼자서 첼시에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안긴 것 같다”고 찬사를 보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사흘 뒤 첼시 구단은 공식 성명을 내어 드로그바가 팀을 떠난다고 밝혔다. 팀 동료인 니콜라 아넬카와 함께 드로그바가 옮겨간 팀은 뜻밖에도 중국 슈퍼리그의 상하이 선화였다. 그해 11월 첼시 팬 2만여 명이 참여한 설문에서 드로그바는 압도적 표차로 첼시 사상 최고의 선수로 선정됐다. 첼시에서 보낸 여덟 시즌 동안 드로그바는 341경기에 출전해 157골을 기록했다. 드로그바는 2013년 1월 터키 슈퍼리그의 갈라타사라이로 이적했다.

내전이 막을 내린 뒤에도 평화로 가는 길은 더디기만 했다. 이미 임기가 끝난 그바그보 대통령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계속 대선을 미뤘다. 결국 2010년 대선이 치러졌다. 북부 지역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반군 지도자 출신 알라산 우아타라가 낙승을 거뒀다. 코트디부아르 선거관리위원회도, 유엔 감시단도 선거 결과에 문제가 없음을 인정했다.

그바그보는 권력의 끈을 쉽게 놓으려 들지 않았다. 북부의 몰표를 선거 부정으로 몰아갔다. 2010년 11월28일 다시 총성이 울렸다. 코트디부아르의 두 번째 내전은 4개월 7일 만에 끝났다. 유엔 평화유지군과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은 우아타라의 승리였다. 길지 않은 내전 기간에 줄잡아 3천 명이 숨지고, 50만 명이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그바그보는 체포됐고,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넘겨졌다. 전직 국가수반이 ICC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그바그보가 처음이다.

2011년 5월 우아타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해 9월 우아타라 대통령은 내전의 상처를 씻기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진실·화해·대화 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 11명 가운데는 드로그바의 이름도 포함됐다. 두 차례 내전이 남긴 내상은 깊다. 코트디부아르에선 여전히 보복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취임 초기와 달리 우아타라 정부는 ‘안보’를 이유로 정적을 탄압해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인권단체의 비판을 사고 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제프 블라터의 세상도 요지부동이다. 숱한 추문과 부패 스캔들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음에도, 그는 16년째 제8대 FIFA 회장으로 군림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조제프 ‘제프’ 블라터는 1936년 3월 스위스 발레주 비스프에서 태어났다. 로잔대학에서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고향인 발레 관광청 홍보팀에서 잔뼈가 굵었다. 이후 스위스 아이스하키협회 사무총장에 발탁되면서 자연스레 스포츠계로 눈을 돌렸다.

16년째 ‘FIFA의 황제’ 제프 블라터

블라터가 FIFA에 발을 들인 것은 브라질 출신 주앙 아벨란제가 제7대 FIFA 회장에 취임한 이듬해인 1975년이다. 그는 ‘사회생활’에 능수능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5~81년 FIFA 기술국장을 거쳐, 1981년 사무총장에 취임해 아벨란제 회장이 퇴임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는 아벨란제 회장의 손이자 발이자 입 노릇을 했고, 1998년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블라터 사무총장이 회장 선거에서 지지를 호소하며 10만달러의 뇌물을 제안했다.” 1998년 FIFA 회장 선출 직후, 파라 아도 아프리카축구연맹 부회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를 둘러싼 논란의 시작이었다. 그럼에도 블라터는 건재했다. 2002년엔 단독으로 출마해 손쉽게 재선에 성공했고, 2007년에도 역시 단독 출마로 3선 고지에 올라섰다.

1904년 출범해 올해로 110주년을 맞은 FIFA는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209개국을 회원국으로 거느리고 있다. 유엔 회원국이 193개국이니 그 규모를 가늠해볼 만하다. 회원국별로 축구협회가 결성돼 있고, 이들이 모든 대회를 관장한다. 6개 지역연맹은 대륙별 대회를 주관한다. FIFA는 국제 축구계를 ‘독점’하고 있다. FIFA는 법적으로 비정부기구다. 정부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 비영리단체란 점 때문에 각종 세제 혜택도 받고 있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의 텔레비전 중계권 수수료로 FIFA는 24억달러를 챙겼다. 마케팅 수익금도 11억달러에 이른다. 하긴, FIFA 공식 후원사인 아디다스가 남아공 월드컵으로 벌어들인 공인구·유니폼의 판매 수익은 무려 20억달러였다.

남아공 월드컵이 끝난 뒤, FIFA는 회원국에 모두 1억1500만달러를 분배했다. 대륙별 연맹에도 3천만달러를 나눠줬다. 그해 FIFA는 집행위원회를 비롯한 주요 임원진에게 모두 3450만달러의 보너스까지 챙겨줬다. 2009년에 견줘 1150만달러나 늘어난 액수다. 12억8천만달러는 ‘예비비’로 취리히의 은행 금고에 남겨뒀다. 그러고도 ‘비영리’란 허울을 고집한다. 블라터 회장은 2012년 12월28일 <알자지라>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FIFA는 비영리단체이며, 비영리단체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 ‘예비비’는 언제, 어떤 이유로든 월드컵이 열릴 수 없을 때를 대비한 돈이다. 다음 월드컵이 열릴 때까지 4년 동안 그 돈으로 소규모 대회도 치르고, 축구 인프라 구축 등 개발사업도 진행할 것이다.”

성공적으로 월드컵을 치른 블라터 회장은 2011년 4선 도전에 나섰다. 이번엔 경쟁 후보가 있었다. 카타르 출신 무함마드 빈 함맘 당시 FIFA 부회장이다. 블라터 회장은 “이번에 당선되면 차기 출마를 포기하겠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함맘 부회장은 선거를 불과 일주일 앞두고 부패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는 선거 사흘 전에 후보 사퇴를 전격 선언했다. 선거를 연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지만, FIFA 집행위는 그해 6월1일 투표를 강행했다. 블라터 회장은 203표 가운데 186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4선 고지에 올랐다.

42억달러 주무르는 부패의 상징

월드컵이 없는 해에도 FIFA는 바삐 움직인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나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이 개막하기 전까지, 월드컵이 치러지지 않은 4년 동안 FIFA의 공식 수입은 ‘42억달러’로 기록돼 있다. 같은 기간 FIFA가 ‘축구 저개발국’에 지원한 예산은 7억9400만달러에 이른다. FIFA의 ‘힘’은, 결국 ‘돈’에서 나온다.

그 ‘힘’은 때로 개최국의 국내법을 뛰어넘는다. 2010년 월드컵 기간에 남아공 정부는 이른바 ‘월드컵 법원’을 설치·운영했다. “남아공의 만연한 범죄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FIFA 쪽 ‘권고’를 받아들인 게다. 남아공 일대에 56개 법원이 설치됐다. 판사와 검사, 국선변호인과 통역요원 등 1500명의 인력도 파견됐다. 당시 외국 취재진의 물품을 훔친 혐의로 짐바브웨인 2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체포된 다음날 기소됐고, 그 다음날 ‘월드컵 법원’에서 징역 15년형에 처해졌다.

2014년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도 FIFA는 개최국 브라질을 압박했다. 지난해 5월 브라질 상원은 오랜 논란 끝에 이른바 ‘월드컵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월드컵 기간에 경기장 안에서 주류 판매를 허용하는 내용이 뼈대였다. 브라질에선 2003년부터 축구 경기장에서 주류 판매를 전면 금지해왔다. 술에 취한 관중이 폭력 사고를 일으키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입법을 앞두고 브라질을 잇따라 방문한 FIFA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강변했다. “협상의 여지는 없다. 브라질은 개최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축구장에서 술을 즐기는 것은 관중의 당연한 권리다.” 이로써 FIFA의 오랜 후원업체인 미국 맥주회사 버드와이저는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축구가 ‘국교’나 다름없는 브라질에선 학생과 연금 생활자에 대한 ‘반값 입장료’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FIFA는 여기에 대해서도 ‘FIFA의 원칙에 반한다’며 딴죽을 걸었다. 결국 브라질 정부는 월드컵 기간에 제도 시행을 잠정 중단했다.

블라터 회장을 둘러싼 논란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 세계적인 조직의 수장에 걸맞지 않는 언행이다. 2004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블라터 회장은 여성축구 활성화 방안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성축구는 분명 축구의 미래인데…. 거, 경기복을 좀더 짧게 하면 어떻겠소?”

2018년 월드컵 개최지로 러시아가 결정되자, 영국 대표단이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블라터 회장은 “한심한 루저들”이라고 쏘아붙였다.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결정된 카타르는 동성애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게이팬들이 2022년 월드컵 기간엔 성관계를 참을 수밖에 없게 됐다”며 낄낄댔다. 지난해 12월7일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 행사장에선 전날 숨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참석자들이 1분간 묵념에 들어갔다. 블라터 회장은 묵념 11초 만에 마이크를 잡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부패 추문도 블라터 회장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 유령이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부패 사건으로 FIFA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패한 비영리단체’로 통한다. 브라질 월드컵 개막을 열흘 남짓 앞둔 지난 6월 초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2022년 월드컵 개최권을 따내기 위해 카타르 쪽이 아프리카 대표단 등에 조직적으로 뇌물을 건넸다고 폭로했다.

월드컵이 치러지는 6~7월, 카타르의 한낮 기온은 섭씨 50℃를 넘나든다. 사막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축구를 하겠다는 ‘기특한 상상’은 대체 누구 작품일까? 카타르가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잭 워너 전 FIFA 부회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선데이타임스>는 그가 카타르 업체로부터 120만달러의 뇌물을 받은 의혹이 있다고 전했다. 트리니다드토바고 출신으로 무려 28년 동안 FIFA 집행위원을 지낸 그는 이른바 ‘킹메이커’로 통한다. 1997년 FIFA 부회장에 오른 그는 이듬해 아벨란제의 뒤를 이어 블라터가 FIFA 회장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에도 그는 블라터 회장의 핵심 측근으로 꼽혀왔다. 2006년 12월 워너가 자신에게 배당된 월드컵 경기 입장권 180장을 고가에 팔아넘기다 적발됐지만, 블라터 회장은 워너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다만 “워너 부회장께서 입장권 관리에 좀더 신경 써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워너가 2011년 회장 선거 때 함맘 전 부회장 쪽으로 옮겨가면서 갈라섰다. 그는 곧 FIFA 부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블라터 회장은 어땠을까? 애초 그는 카타르의 월드컵 개최에 대해 “아시아 대륙으로 개최권이 넘어갈 차례다. 아랍권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반겼다. 하지만 논란이 커지자 “일부 판단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다. 대회 기간을 겨울철로 옮기면 어떻겠느냐”고 한발 물러섰다. 그는 2022년 개최지 선정 투표 때 카타르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드로그바의 월드컵과 블라터의 월드컵

디디에 드로그바의 월드컵은 끝났다. 지난 6월25일 C조 예선 세 번째 경기에서 사브리 라무시 감독이 이끈 코트디부아르 코끼리들은 그리스에 2 대 1로 패하며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첫 경기였던 일본전에서 0 대 1로 뒤지던 후반에 투입돼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낸 것이 ‘드록신’ 드로그바의 마지막 기적으로 남게 됐다. 올해 서른여섯, 월드컵에서 그의 우아한 몸놀림을 다시 볼 수는 없을 터다.

제프 블라터의 월드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1년 6월의 약속을 저버리고, 그는 최근 브라질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내년 FIFA 회장 선거에서 5선에 도전할 것임을 공식 선언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게 이유다. 올해 일흔여덟, 그는 벌써부터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기다리고 있다. ‘비즈니스’는 계속된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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