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3:27 수정 : 2014.07.03 13:27

폐간이 확정된 잡지 <라이프>의 마지막 호 인쇄를 앞두고 현상실 직원이 표지사진 필름을 잃어버렸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에서 말이다. 다급해진 현상실 직원은 원본을 가진 사진작가를 찾아 멀리 여행을 떠나고 우여곡절 끝에 표지 사진 필름을 간신히 손에 넣는다. 16년 동안 일했던 회사를 퇴사하던 날 그는 가판대에서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표지로 실은 <라이프> 마지막 호를 발견한다.

발행 중단 선고를 받았지만 <나·들> 마지막 호 준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행됐다. 평소처럼 차분한 분위기에서 누구를 인터뷰할지 논의했고, 결정했고, 섭외했다. 그리고 거절당했다. 상황이 다급해졌다. 그때 왠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떠올랐다. 나는 <나·들> 편집진에게 마지막 호에서는 ‘당신들’을 인터뷰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에는 김미영 기자, 김원일 기자, 이재훈 기자(현 <한겨레> 온라인팀), 권우태 전략사업부 과장(당시 창간준비팀), 이지희 객원기자가 참여했다. 지위로 보나 목소리 크기로 보나 발언권의 비대칭을 피할 수 없는 편집장은 제외했다.

-시작 지점부터 이야기해보자. <나·들>을 창간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권우태- 한겨레 내부에서 인터뷰 잡지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대량 부수로 발행하는 데 적합한 형태의 콘셉트였지만 창간 기획 과정에서 방향이 바뀌었죠. 개인적으로는 수익을 줄이더라도 신문의 스트레이트 기사를 탈피하고, 독자들이 매거진화된 콘텐츠에 적응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실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안영춘 편집장은 거기에 사람의 가치를 저널리즘으로 구현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고요. 돌이켜보면 창간 주체들은 수익에 대한 고려보다 종이매체의 미래에 대한 저널리즘적 실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현재의 언론 환경에서 종이매체를 새로 창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모험적인 시도였다. 거꾸로 말해서, 현재의 언론이 저널리즘의 바람직한 어떤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는 구성원들의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훈- <나·들> 창간 과정에 참여한 구성원들이 공유했던 문제의식은, 언론에서 생산하는 기사들의 화자가 정부기관이나 공적 시스템 내부의 인물에 한정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르게 다룬다고 해봐야 르포르타주 정도의 형식이 있을 텐데, 역시 특정한 사건의 ‘피해자’로 타자화된 사람들에게 연민의 눈길을 두는 수준에서 저널리즘이 작동하는 경우가 많았죠. 우리는 사건 이전에 주체로서 그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깊이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구현된 저널리즘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렇게 쓰일 기사의 호흡은 월간지 정도로만 감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건을 통해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사람을 통해 사건을 보자!” 창간 취지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월간 발행의 속도로 사회적 이슈를 좇아가기에 현실적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나.

김원일- <나·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좇는 매거진이 아니었어요. 취재로써 기자가 ‘알고 싶은 것’을 얻는 게 아니라 체험으로써 취재 대상이 ‘말하고 싶은 것’을 담아내는 일이 더 중요했죠. 그러기 위해서는 월간지의 긴 호흡이 반드시 필요했어요. 현실적인 어려움은 속도보다는 오히려 인력 부족에 있었죠. 자체 기사 생산량이 30% 남짓이었고 나머지는 외고로 청탁해야 했기 때문에 마치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처럼 섭외가 중요한 부분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미영- 개인적으로는 취재 대상 선정이 어려웠어요. 사람을 중심으로 만든다고 해도 사회적 사건과의 관련성 속에서 기획하고 발굴하고 취재할 수밖에 없잖아요. 한겨레 내부만 보아도 매체 간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했다고 할 수 있어요. <나·들>은 발행 주기가 길기 때문에 일간지, 토요판,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 중복되지 않는 인물과 이야기를 발굴하는 데 신경 써야 했죠.

-매체의 물적 중심이 종이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창간 당시 온라인을 통한 기사 배포를 최소화하고 종이매체 발간을 고집한 <나·들>은 추세를 완전히 역행했다. 어떤 면에서는 종이매체의 신성성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이 느껴질 정도였다.

김미영- 저는 일종의 역발상이라고 생각해요. 온라인에서 속보가 즉각적으로 소비돼가는 경향은 분명하지만 반대로 깊이와 진정성 있는 기사를 읽고 싶은 독자들의 갈증은 더 심해졌어요. <나·들>은 그런 독자를 타깃으로 만들어진 매체라고 볼 수 있죠.

이재훈- 온라인으로 콘텐츠를 풀 때 두 가지 장점이 있죠. 홍보와 페이지뷰를 통한 수익. 한 달에 최소 원고지 32장 분량의 장문 콘텐츠 20개 정도를 내놓는 <나·들>은 페이지뷰를 통해 수익을 거두거나 온라인 독자들의 반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어요. 득보다 실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콘텐츠가 온라인으로 금방 풀려버리면 종이매체를 구입한 독자들은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독자가 종이로 읽을 때 오히려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매체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단기간에 주목받지는 못해도 장기간에 걸쳐 탄탄한 충성독자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던 거죠.

권우태- 기자가 아닌 기획자로서 제 입장은 좀 달라요. <나·들> 창간 당시 기사를 온라인으로 풀지 않는 판단에 동의했지만 이제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고 보거든요. 예를 들어 성소수자 문제처럼 전에는 잘 통용되지 않던 콘텐츠, 웹에서 읽기에는 너무 길다고 여겨지던 콘텐츠가 무리 없이 소비되는 상황으로 바뀌었어요. <나·들>의 창간 시기가 지금쯤이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이라면 기사를 온라인에 전부 푸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봐요.

이재훈- 동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현재 온라인 부서에 몸담고 있는 저는 커다란 변화의 기류를 느끼고 있어요. 앞으로 네이버나 다음의 뉴스 소비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히 줄어들고 그 대부분을 페이스북이 가져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들> 창간 당시 주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트위터였는데 <나·들> 정도의 긴 콘텐츠를 소비하기에 적당한 매체가 아니었거든요. 트위터의 공유 방식인 ‘리트윗’은 빠르지만 파급력이 크진 않았죠. 최근 <나·들>의 세월호 특집 기사가 페이스북에서 엄청나게 공유됐어요. 페이스북에 걸맞은 콘텐츠를 <나·들>이 생산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저 역시 매체 환경이 변화한 이 시기에 <나·들>의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는데, 급작스럽게 발행을 중단해 아쉽습니다.

-혹시 오늘날 저널리즘의 본질적인 딜레마는 아닐까? 온라인에 적합한 선정성을 갖춘 기사에 대해 독자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질적 노동이 투여된 기사는 여전히 주목받기 어려운 구조의 환경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나·들>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조용한 무관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미영- 새로운 콘셉트의 잡지인 만큼 새로운 마케팅이 필요했는데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게 컸죠. 창간호가 나왔을 때 저는 <나·들> 바깥에 있었는데, 독자로서 첫인상은 ‘너무 재미없다’였어요. 너무 무겁고. 하지만 분명히 훌륭한 기사들이었거든요. 저는 ‘익숙지 않음’에서 오는 거부감일 거라고 생각해요. 기존과 완전히 다른 형식의 기사들이니까요.

김원일- 얼마 전 <뉴욕타임스>의 혁신보고서에 실린 사례가 있습니다. <뉴욕타임스>에서 40장 가까운 기사를 인터넷에 올렸을 때는 독자들이 잘 읽지 않았는데, 다른 인터넷 저널의 기자가 그 기사를 한 장으로 요약해서 올렸을 때는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했죠. 그 요약 기사를 타고 원본인 <뉴욕타임스> 기사로 독자들이 유입됐어요. <나·들>에도 독자에 대한 기사의 소구력을 판단하고 가공하는 전략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어요.

-<나·들>은 외부 필자들에게 콘텐츠 생산의 상당 부분을 맡겼다. 인력 부족으로 인한 고육지책이었나, 아니면 전략적인 이유가 있었나? (지금 이 인터뷰 역시 외부 필자가 <나·들>의 구성원을 인터뷰하는 역전된 상황이다.)

권우태- ‘탈한겨레’여야 한다는 논의는 했죠. 기존 한겨레와 똑같은 기사를 써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재훈- 저는 고육지책인 부분도 있었다고 봐요. 그렇다고 외부 필자를 정식으로 ‘고용’할 형편은 아니었고 한겨레 내부 인력들이 주체로 참여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외고를 청탁하는 것보다는 필진에게 좀더 깊은 참여를 요구하는 매체를 만들려 했고, 고료 역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수준으로 지급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권우태- 더 안쪽의 이야기를 해보죠. 한겨레에서 <이코노미 인사이트>에 최소 인력을 투입하고 외고 위주의 기사를 실어 저비용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같은 경영 전략을 <나·들>에도 적용했던 거죠. 오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재훈- <이코노미 인사이트>뿐만 아니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도 마찬가지였죠. 사실상 1인 매체로 편집장이 큐레이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취재가 중요한 <나·들>의 콘셉트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김원일- 생각의 차이가 있었죠. 우리는 <나·들>을 한겨레의 흑자 사업을 늘려가는 소규모 다매체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습니다. 온라인 시대의 저널리즘이 걷고 있는 뻔한 길 대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실험을 하는 거라고 봤죠. 광고를 싣지 않고도 매체가 생존할 수준만 된다면 충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였는지도 모르죠.

김미영- <나·들> 정기구독자 수가 최고치로 3500명이 넘었는데, 대대적인 마케팅과 홍보 없이 입소문만으로 거기까지 달성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권우태- 그게 <나·들>의 문제이기도 한데 입소문 외에 한겨레 매체 구독자들의 병독에만 기댄 거죠. 저는 <나·들>을 받아들일 만한 독자는 오히려 한겨레의 기존 수요 바깥에 더 많이 있었다고 봐요.

이재훈- 그렇죠. <나·들>은 한겨레 매체의 기존 독자들이 조금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매체예요. 그게 <나·들>을 창간한 이유기도 하고요. 한겨레가 놓치고 있고, 한겨레가 채우지 못하는 구멍을 적극적으로 메워가기 위한. 우리는 한겨레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한겨레를 내부에서 견제하려는 바람을 가졌어요. ‘실험’은 너무 단순한 표현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진영논리를 탈피해 유동하는 자율적 정치주체들이 거리에 나와 있는데, 그들까지 함께 읽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하려고 <나·들>을 만들었던 거죠. 그런 차원에서 독자층을 외화하는 전략을 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창간호 발간 당시 <나·들>을 홍보하려고 한겨레 본사 건물에 커다랗게 공지영 사진을 걸었는데 저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들>은 한겨레 독자에게 더 읽히려고 만든 게 아니니까요. 사실 공지영 작가가 창간호 표지 인물로서 <나·들>의 가치에 부합하는지도 의문이고요. 그런 곳에 소비할 마케팅 자원을 다른 데로 돌렸으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창간호에서 <의자놀이>의 인용 문제로 논란을 겪던 공지영 작가를 인터뷰해서 난리가 났었다. 만약 <나·들>이 창간 당시 한겨레 바깥의 독자층을 고려했다면 타깃 독자층을 등 돌리게 만든 사건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어로서 논란 당사자였던 나 역시 아직까지 “첫 인터뷰를 왜 그렇게 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자, 이제 그때 일을 좀 회고해보자!

이재훈- 꼭 공지영 작가를 창간호에서 인터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대중성 있는 인물일수록 섭외가 어렵기 마련인데 많은 후보군 인물 가운데 공지영 작가가 선뜻 인터뷰에 응해주었던 거죠. 사람들이 공지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분히 감정적 판단을 내렸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나마 <의자놀이> 사건과 관련한 문제를 제대로 다룬 매체는 <나·들>뿐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의자놀이>는 공지영 생애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나·들> 역시 현재적 이슈를 파헤치기 위한 매체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공지영’이라는 현상을 통해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 했어요. 당시 인터뷰어들이 공지영의 생애 전반을 인터뷰하고 제가 <의자놀이>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는 꼭지를 썼죠. 그러면 거기서부터 토론이 시작돼야 하는 거죠. 그런데 공지영을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 매체가 자신의 정치성을 배반했다는 대단히 표피적인 비판을 받았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매체를 읽지도 않았고 공지영에 대한 편견 위에서 예단을 내리고 문제제기를 했죠. 저는 기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런 비판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3차원 인터뷰’ 대상을 결정할 때마다 <나·들>의 철학과 대중적 필요성이 충돌하는 딜레마를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권우태- 그렇죠. 곽승준 전 미래기획위원장을 인터뷰했을 때는 한겨레 계열 매체에서 어떻게 곽승준을 인터뷰하느냐는 반응이 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피부로 느낀 온도 차이는 컸다. 이명박 정부의 장관급 공무원이던 곽승준 전 미래기획위원장이나, 김영삼 정부의 장관이던 윤여준 ‘정치소비자 협동조합 울림’ 이사장을 중립적인 톤으로 인터뷰했지만 공지영 작가를 인터뷰했을 때처럼 큰 논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독자층의 성격에 대한 파악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정서적 반응 양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는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재훈- 대상이 어떤 논란을 겪고 있다면 오히려 그 대상을 알아보는 게 순서죠. 그러려면 인터뷰를 해야 하고요. 저는 편견이나 선입견, ‘그냥 저 사람 보기 싫다’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그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 느낌에서 나온 비판이 <나·들>이 독자를 잘못 판단한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당시에는 인터뷰어가 아닌 외부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관찰했던 한채윤이 말했다. “창간호 표제로 ‘낮은 데로 임하는 문화권력’을 달았던 건 분명히 잘못이었다. 제목부터 오해를 조장하지 않았나.”

이재훈-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애초 냉소적인 의미를 담으려고 했던 건데….

김원일-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았죠. 더구나 표지 사진도 웃는 모습이었으니까요.

김미영- 창간호 때 겪었던 논란과 기사가 너무 어렵다는 편견은 끝까지 남아 작용했어요.

-기사가 어렵고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꾸준히 들려온다. 실제로 독자 수요가 한정적인 인문 계간지 수준의 가독성을 가진 기사가 많이 실렸다.

김미영- 사실 저한테도 어려웠어요. 다른 기사들을 읽다보면 내가 쓴 기사가 충분히 어렵지 않은 것 같아서 스트레스를 받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기사가 어렵지는 않았다고 봐요. 그런 평가 역시 어느 정도는 편견이 작용한 게 아니었는지.

이재훈- 신문기자들은 ‘중학교 2학년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써라’는 원칙을 요구받는데, <나·들>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법과 문체로 쓰였죠. 안영춘 편집장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보고요. 기사가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적확한 표현’이 꼭 ‘쉬운 표현’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겁니다. 쉬운 문장으로 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테고 그게 뛰어난 필자의 능력이겠죠. 하지만 그게 어려운 때라면, 비록 수용성이 높지 않더라도 가장 적확한 문장을 고르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그저 많은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타협적인 언어로 쓰이는 매체라면 굳이 안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김원일- 일간지가 ‘중학교 2학년 문장’으로 쓰인다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대학원생의 문장’, <나·들>은 ‘대학생의 문장’으로 쓰였다고 생각해요. 타깃 독자의 차이가 반영된 거죠. 두 번째로 <나·들>의 기사는 난해한 문장보다 사유를 요구하는 대목이 많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진다고 봐요. 마지막으로 <나·들>의 평균 가독성을 확 떨어뜨리는 엄청나게 어려운 꼭지가 몇 개 있었죠! 제목 하나 뽑으려면 몇 번씩 되읽어야 하는 것들.

-하하, 그게 어떤 꼭지였나.

김원일- 마감에 바빠 죽겠는데 원고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말만 해두죠.

-기사에 사유를 요구하는 대목이 많다고 했는데 그게 <나·들>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대부분의 기사에 논평이 강하게 개입돼 있었다. 마치 ‘저널리즘의 객관성’이라는 신화적인 준칙을 내팽개치는 실험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재훈- 저널리즘의 객관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객관화’는 가능하겠죠. 취재는 어떤 사안을 기자가 현장에서 대하고 ‘팩트’를 수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기자의 관찰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 팩트에는 보지 못한 것들이 고려될 수밖에 없어요. 그때 다른 사람의 관점이 나의 관점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바로 ‘객관화’예요. 하지만 객관화 작업을 거친다고 해도 여전히 기사는 주관성의 개입을 피할 수 없죠. 모든 매체가 스스로 객관주의의 정석을 따르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명백한 정치성을 띠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들>은 차라리 그 정치성을 드러내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기사에 논평이 많다는 건 취재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어요. 취재 부족은 논평으로 메우기 쉽습니다. 상근 기자가 겨우 두 명인 <나·들>의 인력으로는 불가피한 점도 있었어요. 훌륭한 취재 기사가 나오려면 기자 한 명이 한 달에 한 꼭지 정도를 맡아 다각도로 접근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객관화 장치를 가질 여력이 없었던 거죠.

-한겨레가 미국 <허핑턴포스트>와 함께 시작한 온라인 매체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이하 <허핑턴포스트>)는 <나·들>과 대척점에서 시장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실험을 하고 있다. <나·들>의 저널리즘이 숭고한 지점이 있지만 너무 순진했다면, <허핑턴포스트>는 영리하지만 다소 사악한 느낌이다. <나·들>의 발행 중단과 <허핑턴포스트>의 눈부신 출발이라는 운명의 교차점에서 앞으로도 저널리즘이 시장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널리즘은 <허핑턴포스트> 같은 전략 노선 위에서 진화하게 될까.

권우태- 벌써 <허핑턴포스트>가 효과를 입증한 콘텐츠를 따라 만드는 매체들이 생겨나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아직 <허핑턴포스트>가 저널리즘의 단계라고 말할 수는 없죠. <허핑턴포스트>는 다른 매체들과 개념이 완전히 달라요. 모든 시스템과 목표가 페이지뷰, 즉 매출을 늘리는 데 맞춰져 있지요. 팩트만 지킨다면 나머지는 모두 얼마나 많이 노출되느냐를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메인 화면에 걸린 기사에 실시간 반응이 없으면 바로 바꿔 걸 정도입니다. SNS 영향력은 이미 <조선일보>조차 뛰어넘었지만 취재로 소스를 확보하는 게 아니라 다른 매체의 기사를 편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도 하고요. 지금은 시작 단계이니 장기적으로는 고유의 저널리즘을 찾아가야겠지만 영역이 다르기에 <허핑턴포스트>의 성공이 저널리즘 전체를 어떤 방향으로 끌어나가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재훈- <나·들>과 <허핑턴포스트>는 너무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두 사례만 가지고 저널리즘이 나아갈 방향을 논하는 건 난센스입니다. <허핑턴포스트>는 저널리즘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저널리즘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죠. 그냥 <나·들>과 다른 저널리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낫겠어요. 일간지의 저널리즘이 위기에 처했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내용과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세월호 사건에서 그 점이 드러났습니다. 일간지에서 많은 노력과 자원을 쏟아부었지만 대안 매체들이 보도를 주도해갔죠. 신문 저널리즘이 고수하는 정통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나·들>이 선택한 대안은 어찌 보면 퇴행적인 방법이죠. 종이와 거기 담긴 것들의 질감으로 승부를 본 거잖아요. 그건 저널리즘이 일반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에요. <한겨레>에서 세월호 인터랙티브 기사를 만든 게 예가 될 수 있겠죠. 언론인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팩트 정리, 교차 분석, 데이터 검증으로 사건을 A부터 Z까지 독자에게 전달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널리즘이 정통한 가치를 지키면서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플랫폼 구현 방식을 고민하는 게 중요합니다.

-‘3차원 인터뷰’를 오랫동안 맡았던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멀리 유럽에서 마지막 질문을 보내왔다. “<나·들>의 기자로 일한 경험은 어땠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지희- 저는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면서 슬럼프가 왔던 시기에 <나·들>에서 두 달 동안 인턴을 하게 됐어요. 내가 왜 기자를 하고 싶었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어요. 일간지가 아닌 월간지이다보니 학교에서 이론적으로 공부한 것과는 기사 쓰기와 취재 방식의 차이가 굉장히 컸죠. 일간지에서 인턴을 했을 때는 하루하루가 급박하게 돌아갔는데 <나·들>은 취재 전부터 대화와 토론을 오랫동안 나눴죠. 그 과정에서 아이템이 바뀌거나 제가 직접 선택할 수도 있었고요. 기사에 제 목소리와 시각을 반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좋은 경험이 됐어요.

김미영- 저는 자진해서 <나·들>로 들어왔어요. 사실 <나·들>이 한겨레 내부에서 기피 부서나 좌천 부서로 인식되고 있거든요, 하하. <나·들>을 보고 나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고, 나도 저런 기사를 써보고 싶다고 느꼈죠. 막상 업무를 해보니 힘들었어요. 최소 원고지 32장 분량의 기사를 써야 하는데 긴 호흡 자체도 어렵지만, 그 안에 적확하게 누군가의 이야기와 서사를 담아내는 게 참 힘들었어요. 많이 배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취재가 기억에 남아요. 2박3일 동안 밀양의 모든 농성장을 돌아다니며 농성하는 분을 한 사람씩 마주 보고 이야기를 들었죠. 일간지 취재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에요. 그때 기자 일이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김원일- 편집회의에서 안영춘 편집장의 깊고 다양한 사유를 따라가는 게 가장 어려웠죠. 회의가 끝나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았어요. 사건이 아니라 인물의 서사를 좇다보니 취재 과정에서 기획 의도와 어긋나는 사실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었죠. 예를 들어 2014년 4월호 특집이 대학 내 인문학 부흥이었는데, 해당 대학의 철학과에 갔더니 그 과 교수 한 사람이 불미스러운 일로 학교의 조사를 받고 있었지요. 기획을 접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기획의 맥락과 직접 연관이 없다고 판단해서 계속 진행했습니다. 편집장이 칼럼에 따로 그 사실을 언급했고요. 사실과 진실 사이의 간극을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입니다.

이재훈- 창간호에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설을 했던 ‘청년백수’ 이영민씨를 제가 취재했죠. 이명박 정부 5년이 지난 시점에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그런 궁금함은 명백한 정치성을 띠고 있지만 직접 만나기 전에는 실제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게 어려운 점이에요. 취재 과정에서 많은 의혹을 느꼈지만 그 즉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어요. 작성한 기사를 보고 누군가 “이 사람은 그냥 정치적 냉소주의자 같은데?”라고 저한테 물었죠. 그렇다면 기획 의도가 담기지 못한 기사를 버려야 하는가? 딜레마죠. 사람을 통해 기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으려는 매체는, 정작 기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지 못하는 매체가 될 수도 있어요. 결국 정치성은 기자 안에 있는 것이고, 그러면 기사를 사람이 아닌 담론으로 밀고 가기 쉬우니까요.

-지난 20개월 동안 <나·들>의 의의를 자평해본다면.

김원일- 인터넷 독립언론 <뉴스타파>가 현상을 치열하게 좇았다면 <나·들>은 사유를 치열하게 좇아왔다고 생각해요. 신문과 비교했을 때 <나·들>은 사건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기사를 담았죠. 그건 신문이 거의 포기하고 있는 부분이거든요. 만약 <나·들>이 성공을 거뒀다면 신문의 기사쓰기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을 텐데 많이 아쉽죠.

이재훈- <나·들>을 통해 기자들이 새로운 글쓰기를 학습하는 장을 마련해보자는 애초의 계획이 실패한 셈이죠. 다른 매체 기자들은 이 실험에 무관심했어요. ‘종이 잡지를 새로 만드는 이유가 뭐냐?’는 의문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토론을 제의하기는커녕 아예 읽어보려고 하지 않았죠. 그래서 <나·들>은 한겨레 내부에서 별동대처럼 유리된 채 자가발전해야 했어요. 지나간 실험을 한겨레 편집국 차원에서 논의해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매체는 발행을 중단하더라도 이 가치 있는 실험과 고민을 함께 사장시켜버리는 것을 저는 견딜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발행 중단을 계기로 ‘이것이 우리의 실패한 실험이었다’를 다른 기자들에게 알리고, 함께 그 이유를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나·들>에서의 내 마지막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다. 외부 필자인 나는 저널리스트가 아니기에 이들 세계의 윤리학적 논쟁에 발을 들일 처지는 아니다. 무엇이 더 옳은지, 무엇이 더 바람직한지, 무엇이 현실적이고 무엇이 미래의 방향인지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일 수 없다. 작가인 나는 심지어 지난 20개월 동안 곁에서 관찰한 이들의 인상을 저널리즘의 언어로 정리해낼 수조차 없다. …아름다워 보였다.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인상보다는 영감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이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어떤 경지를 넘어선 완고한 윤리학은 미학과 구분될 수 없다고 느꼈다.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기자들은 무척 난감해했다. 나는 꼭 인터뷰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이들의 삶을 기록하겠다고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닌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매체의 기자들과 동선 겹칠 일이 좀처럼 없었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벌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가 기록해줄까?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기억해준다는 말인가? 독자에게는 이 인터뷰가 소꿉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람 매거진’의 마지막 인터뷰로 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보다 더 적합한 선택을 떠올릴 수 없었다. 스스로를 ‘내러티브 저널리스트’라고 불렀던 사람들의 자기 서사를 여기 적어 완결시킨다. 독자들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 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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