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3:03 수정 : 2014.07.03 13:03

원전을 가동해 전기를 만들어내는 경제활동의 자유는 헌법상 인격권의 핵심보다 낮은 위치에 놓여야 한다. 일본 ‘원전 메이커’ 소송의 최초 아이디어 제공자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재일조선인 2세 최승구씨다. 한겨레 길윤형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원전 대참사를 겪은 일본에서 지난 1월 매우 흥미로운 재판이 시작됐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원자로를 만든 히타치, 도시바, GE 등의 사고 책임을 따져묻기 위한 이른바 ‘원전 메이커’ 소송이었다. 그동안 원전 사업자인 도쿄전력이나 사고 대응에 허둥댄 간 나오토 정부의 무능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많았지만, 원자로를 만든 제조사의 책임까지 논의를 확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소송의 아이디어를 처음 제공하고 현재 소송 실무를 총괄하는 이는 뜻밖에도 일본인이 아닌 재일조선인 2세 최승구(69)씨다. 일본 탈핵운동의 중심에 재일조선인이 활동하고 있는 게 다소 뜻밖이란 필자의 말에 그는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번 소송을 생각해내고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며 껄껄 웃었다. 나이가 들어 정치의식에 눈뜨게 되는 재일조선인 청년들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나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에 들어가 통일이나 민주화 투쟁 등 정치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데 견줘, 그는 도쿄 남부의 가와사키라는 공업도시의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국민연금 가입, 아동수당 지급, 대기업 취업 차별 철폐 등 일상의 소소한 차별들과 투쟁해왔다. 그는 “어찌 보면 남들과는 좀 다른 특이한 인생을 살아온 셈”이라고 말했다.

최씨의 인생 역정은 크게 3막으로 구성된다. 그는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던 194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재일조선인들의 삶의 애환을 그린 영화 <박치기>(2004)에 등장하는 소년들처럼 “특별히 민족의식에 눈을 뜬” 젊은이는 아니었다. 일본의 초·중·고를 졸업해, 일본어를 쓰며 평범한 일본의 청소년으로 자랐다.

조청련·민단 아닌 그냥 재일조선인

“제 아버지 함자가 최인환입니다. 일본명으로 사이토 하치로라고 했죠. 고향은 황해도 신천입니다. 아버지는 11살에 만주에 갔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혼자 일본으로 넘어오셨다고 합니다. 해방 이후 오사카에서 복싱클럽을 운영하셨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프로레슬러 리키도잔(역도산)이 평안도 사람이잖아요. 두 분이 같은 이북 출신이라는 인연도 있어서 아버지는 리키도잔 같은 재일조선인 스포츠인, 예능인과 교제가 많았습니다. 일본말과 한국말 둘 다 잘하셨는데, 읽는 것이나 쓰는 것은 잘 못하셨죠.”

별다른 민족적 자각 없이 학창 시절을 마친 그는 3수 끝에 1968년 도쿄 미타카시에 있는 국제기독교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시험을 볼 때도 본명인 ‘최승구’ 대신 일본식 이름인 ‘사이토 가쓰히사’를 사용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학교에 다닐 때 이를 드러내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 친구들은 저를 일본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의 인생 두 번째 막은 우연찮은 계기로 찾아왔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일본 중부 미에현에서 전국의 재일조선인 기독교 청년들이 모이는 여름캠프가 열렸다. 그는 “국제기독교대학에 다니고 있어 별 생각 없이 캠프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저명한 재일동포 목사이자 인권활동가인 이인하(1925~2008) 목사와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을 계기로 그는 이 목사가 목회를 하던 가와사키 교회로 가서 동포 청년들과 어울리게 됐다. 토요일에 대학 기숙사를 나와 교회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예배를 보고 학교로 돌아오는 생활이었다. “교회에 가면 같은 또래의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잖아요. 그게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처음으로 저를 사람들 앞에서 최승구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민족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 그의 인생을 뒤바꾸는 ‘히타치 사건’과 조우하게 된다.

“1970년이니 대학교 3학년 때입니다. 박종석이란 재일조선인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의 대기업인 히타치제작소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시험을 볼 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통명(일본식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후 이 사실이 드러나 입사 취소 통보를 받게 되죠.” <아사히신문>을 통해 이 사실을 접한 최씨는 박종석을 찾아가 그의 재판을 지원하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 최씨가 처음으로 일본 사회를 상대로 조선인 차별 문제의 시정을 요구한 것이다. 히타치 사건은 이후 일본 사회가 조선인 차별 문제를 각성하는 중요한 사회적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일본에서 히타치 재판이 진행되던 중 그는 대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한국은 유신체제가 막 시작되려던 1972년 봄이었다. 1년 동안 서울대 어학당에 다니며 우리말을 익힌 뒤, 이듬해인 1973년 봄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처참했습니다. 독재정권의 탄압에 교회도 언론도 학생운동도 억눌려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대학 학부에 다니던 후배 한 명이 저에게 ‘형, 잠시 동안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하더군요. 며칠 뒤 우연히 <기독교방송> 뉴스를 듣는데 ‘지금 서울대에서 학생 데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깜짝 놀라 학교에 가보니 학생 200여 명이 정문에 모여서 애국가를 부르며 독재정권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 무리에서 며칠 전 저에게 말을 건 후배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본격적인 유신 반대 투쟁이 시작됩니다.”

최씨는 이후 일본을 거점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던 지명관·오재식·김영복 등 기독교계 인사들의 강력한 권유로 대학원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온다. 1974년 설립된 재일한국인문제연구소(RAIK)의 초대 간사 역할을 맡기 위해서였다. 이후 최씨는 지난 40여 년 동안 “재일조선인의 인권 실현은 일본 지역사회의 변혁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 아래 가와사키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재일조선인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치열한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눈에 띄는 정치적 활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부 동포들은 생활 속의 차별을 바로잡자는 최씨의 투쟁에 ‘동화주의’라는 비판을 퍼붓기도 했다.

원전 제조사 면책조항… 한국도 같아

그리고 3·11 후쿠시마 원전 참사와 함께 예상치 못했던 그의 인생 3막이 오른다.

“사실 저도 3·11 참사가 나기 전까지 원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사 이후 기독교인의 양심으로 원전은 생명에 반하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원전 사고의 심각성을 알리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일본 우익들이 ‘왜 조선인이 설치는가, 일본에서 나가라’고 하더군요. (웃음)”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뒤 그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후쿠시마 제1원전 4호기 원자로를 제작한 히타치였다. “제가 오랫동안 히타치 투쟁을 해왔기 때문에 원전 제조사인 히타치에 눈길이 가더군요. 히타치 문제를 고민하면서 일본 원자력손해배상법에 원전 사고가 났을 경우 원전 제조사의 책임을 묻지 않는 ‘면책조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미있게도 한국의 같은 법에도 똑같은 조항이 있더군요.” 원전 사고가 났을 때 모든 책임을 사업자가 떠안아 결과적으로 원전 제조사에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면책조항’은 흥미롭게도 한·일 양국 모두에서 법 제3조에 포함돼 있다.

이후 탈핵을 향한 그의 운동은 자연스럽게 그가 몸담고 있는 일본의 기독교 공동체, 그리고 그가 평생 교류해왔던 한국 기독교 단체와의 연대 활동을 통해 진행된다. 우선 그는 2011년 5월 ‘원전체제를 따져묻는 기독교인 네트워크’(CNFE)를 결성한다. 이 무렵 그의 관심을 모은 것은 한국과 몽골이었다. 당시 한국에선 이명박 정부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대한 원전 수출을 성사시킨 뒤 사회적으로 ‘원전 수출’이 화두로 떠올랐다. 몽골과 관련해선 일본 정부가 자국에서 생산한 사용후 핵연료의 최종 처리장을 몽골에 건설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 기독교계에 연락해 “기독교인의 양심으로 한국 정부의 원전 수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현지의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2011년 10월 몽골을 방문하기도 했다. 2011년 11월11일에는 한국·일본·몽골·미국의 교회들이 중심이 돼 ‘원전제로아시아행동’(NNAA)이라는 모임이 결성된다.

이 모임을 결성한 최씨가 가장 먼저 힘을 기울인 것은 ‘원전 메이커’ 소송이었다. 그는 “원전 제조사의 책임을 묻는 소송이 가능한지 여러 변호사들에게 물었지만 답변은 시원치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소송의 담당 변호사가 된 시마 아키히로 변호사만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며 협력의 뜻을 밝혔다. 일본 원자력손해배상법을 보면, 원전 사고가 발생할 때 배상 책임을 지는 것은 원자력 사업자이고(제3조), 그 밖의 사람들은 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제4조)는 규정이 포함돼 있다. 원전 사고의 책임을 원자력 사업자에 집중시키는 이른바 ‘책임집중제도’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일본은 물론 전세계 모두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자로를 만든 제조업체는 사고 이후 어떤 비판도 받지 않았고, 어떤 사죄의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습니다. 그뿐입니까.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베 신조 총리의 후원을 받아 원전 수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요. 이런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고민에서 시작된 게 이번 소송입니다. 자동차가 매연을 발생시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면 당연히 자동차를 만든 회사에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나 원전에선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후쿠시마 원전을 만든 GE·히타치·도시바의 책임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모두 사업자인 도쿄전력의 잘못만 말하고 있습니다.”

한·일·미·몽골 등 세계시민 원고단 모집

대략의 법리가 구성되자 최씨는 이 소송을 일본 시민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시민과 함께 추진한다는 의미로 ‘세계시민 1만인 소송 원고단’을 모집하기로 결심한다. 한국에서는 ‘아시아평화시민네트워크’가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한·일 시민들은 2013년 6월과 10월 두 나라의 핵발전소 지역 투어를 시작으로 연대감을 키웠고, 이후 ‘세계시민 1만인 소송 원고단’ 한국추진위원회도 발족했다. 지난 1월 1차로 제출된 원고는 일본인 1058명과 해외 32개국 357명을 더한 1415명, 이어 3월10일 2차로 접수된 원고는 일본 387명과 해외 2326명을 합친 4128명이었다. 한국에서 참여한 수는 무려 909명에 이른다. 소송의 구체적인 내용은 법원에 원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제조사의 책임을 면책하는 ‘집중책임제도’가 위헌임을 확인하는 것과, 그로 인해 원전 제조사들이 원고들에게 정신적 피해 보상금(1인당 100엔)을 지급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최씨가 보기에 세계의 원전 시스템은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구성돼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5개 나라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아래 핵무기를 독점하며, 그 외의 국가들에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권리’라는 명목 아래 원전 건설을 적극 권장한다. 그러면서 원전의 원천 기술을 가진 미국 등 선진국의 제조사 책임은 각국 법규에 의해 면책된 상태다.

“일본 에도시대 말기에 미국의 흑선이 와서 개항을 강요하지요. 일본은 불평등조약을 맺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뒤,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맺어 자신이 받은 것을 그대로 조선에 강요합니다. 한국과 일본도 베트남·터키·요르단·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에 원전을 수출한 뒤, 사고가 났을 때 자국 제조사의 책임을 면하는 법을 만들게 하겠죠. 즉, 원전 제조사의 책임을 면책해주는 제도를 통해 핵의 피라미드가 완성되는 겁니다.”

비핵권은 인격권

그는 이번 소송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이 원자력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인 ‘비핵권’(No Nukes Rights)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비핵권의 구체적인 내용은 지난 5월 말 후쿠이현 지방재판소의 오이 원전 3~4호기의 ‘재가동 금지’를 선언한 판결문에 명확히 제시됐다. 재판소는 “일본의 법 제도 아래서 인격권(비핵권과 거의 같은 의미)을 뛰어넘는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인격권을 침해할 구체적 우려가 있는 경우엔 침해 행위를 금지해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소는 이어 “원전 가동은 전기를 만들어내는 수단인 경제활동의 자유에 속해 헌법상 인격권의 핵심보다 낮은 위치에 놓여야 한다.

대규모 자연재해나 전쟁을 제외하면 이 근원적 권리(인격권)를 광범위하게 박탈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원전 사고밖에 없다. 구체적 위험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금지가 인정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일본에서 원전 제조사의 책임을 면책하는 법 조항에 대한 위헌판결이 나온다면 무책임하게 원전을 해외에 수출하려는 원전 제조사들도 큰 부담을 갖게 될 것”이라며 “면책 제도를 깨뜨려야 현재 추진되는 세계적인 핵 확산을 틀어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가서 오랜 지인에게 이 소송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저나 히타치 투쟁을 함께 해온 박종석은 한국에도, 일본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이죠. 그 때문에 국가라는 큰 틀을 넘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쭉 생각해왔습니다. 그런 제 사고방식이 이번 소송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원전 사고는 국적이나 민족과 관계없는 인류 전체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가와사키(일본)=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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