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2:31 수정 : 2014.07.03 12:31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는 서울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기레기’ 언론들은 뉴스에서 세월호를 지웠지만, 개별자들은 기억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1심은 패소였고 2심은 승소였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이야기다. 그사이 25명의 동료 곁에는 국화꽃이 놓였다. 남은 자들은 산 자와 소통할 ‘사랑의 김밥’을 말았다. 죽은 자를 기억하고 산 자에게 기억되기 위한 남은 자의 기억투쟁이었다. 하지만 기억은 올곧게 내 것이 아니었다. “공장 안에서 씨익 웃는 동료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트에서 작업복을 입은 동료가 눈인사를 하는데도 기억나지 않았다.”1 해고 6년, 기억은 녹슬었다. 그들은 2심의 ‘정리해고 무효’ 판결을 기억투쟁의 종착지로 여기고 싶었다. 이마를 죄던 머리띠를 풀고 옛 공장의 노동자로, 쉰내 나는 조끼를 벗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돌아가는 출발지이기도 했다. 종착지이자 출발지는 그러나 사쪽이 대법원에 상고함으로써 기착지로 변했다. 그들은 다시 기억되기 위해 투쟁의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정리해고 무효 소식은 사람들의 몸에 ‘사건 종결’로 각인돼 그들을 기억 밖으로 밀어냈다. “쌍용차 문제 다 해결된 거 아니에요?” ‘땀나는 건 초여름 날씨가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질문’이었다.2 해고 6년, 그들은 빠르게 잊혀졌다.

잊혀지는 건 사람과 사건만이 아니다. ‘5월 광주’의 공간은 1997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되레 잊혀짐의 과정 속에 있다. 상징적 공간인 광주는 물리적 공간인 5·18 국립묘지 5만여 평 안에 갇혔다. 그곳은 구 묘지와 달리 거대한 기념탑을 필두로 잘 정렬된 잿빛 묘비들이 종횡으로 각을 맞추고 있다. 정돈된 아름다움이 주는 뭉클함은 정작 규모가 주는 위압감과 형식이 주는 조화로움일 뿐이다. 감동은 방문객들 중 나이 든 사람들이 희생자들과 관계 맺은 민주화의 이미지에서, 30년이 지나 머리가 희끗해진 유족과 동료들의 추모 눈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매년 5월18일 현직 대통령이 국립묘지를 참배하느냐 마느냐에 의미를 두고 있다. 누구의 기억이 공적 영역으로 들어갈지를 두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이제 제도화된 5월 광주는 박제화된 민주화의 성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잊혀진다는 것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말처럼 가장 두려운 것은 ‘잊혀지는 것’이다. 과거형인 5월 광주도 현재형인 쌍용차 해고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어디 그뿐이랴.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경남 밀양의 할매,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하청노동자, 활동보조가 필요한 지체장애인 등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잊혀지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피해자들의 아우성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몸부림은 어떤가. 꽃다운 293명의 생명이 주검으로 돌아왔고(6월28일 현재 11명의 생명이 아직 차디찬 바닷속에 있다),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노동자가 거리에 있고,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할매들이 밀양에 있지만 그들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 두 달이 지난 지금 청계광장·청와대 앞 함성은 어떤가? 광화문 광장의 월드컵 응원 함성은 드높기만 하다.

역설적으로, 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따로 있다. 바로 기억돼야 할 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이다. 대형 참사나 학살, 차별의 공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억할 의무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은 과거의 사례를 볼 때 자명하다. 그들의 의무는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픈 경험으로부터 벗어나 기억을 지우고 살아가는 것이다. 5월 광주의 피해자들이 학살 현장을 잊을 수 없어 악몽을 꾸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어 눈물로 말하고, 연좌제의 폭력 앞에 공포를 느껴온 세월에 대한 보상은 망각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작가 프리모 레비나 장 아메리가 생의 끝을 자살로 마무리한 것처럼 그들은 이미 수용소를 떠났지만 수용소의 이미지는 평생 그들의 의식을 좀먹는다.

세월호에 가린 또 다른 개별자들이 복원을 꿈꾸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복판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농성했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다. 국가와 자본이 공공성과 사유재산 보호라는 명분 아래 개별자를 억압하고 배제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라고 했다. 선한 사람들이 기억 대신 침묵한 대가는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이다. 정치권은 세월호 참사의 간접적 원인인 관피아(관료 마피아)를 척결하기 위한 일명 ‘김영란법’(부정청탁 금지법) 처리를 또다시 미뤘다. 여야는 세월호 참사 뒤 공직 비리 척결 여론이 높아지자 김영란법을 잠깐 만지작거렸을 뿐이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기습적으로 밀양에 행정대집행을 실행했다. 지방선거 직후 월드컵 등에 여론의 관심이 쏠린 사이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기 위해 4개 첨탑 부지의 농성장을 철거했다. 기업들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는 법은 속속 입법 예고됐다. 행정규제기본법 개정안은, 세월호 참사가 선박 연령 제한 완화, 해운사 안전점검 보고 의무 축소 등 규제 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기업의 이윤을 보호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세월호 참사 딱 두 달 만에 한국 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인지를 전광석화처럼 보여준 일들이다.

기억될 권리, 기억할 의무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먹고사니즘’으로 바쁜 와중에 우리는 왜 기억할 의무까지 져야 하는가? 도대체 기억할 의무는 어디까지인가? 이는 제48차 유엔인권소위에서 채택한 프랑스 인권변호사 루이 주아네의 ‘인권침해 가해자의 불처벌 문제’ 보고서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주아네의 보고서에 담긴 원칙들은 알 권리, 정의를 추구할 권리, 보상에 대한 권리 등이다. 정의를 추구할 권리와 보상에 대한 권리가 피해자의 기억될 권리라면, 알 권리는 직접 관련이 없는 개별자들의 기억할 권리에 가깝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권리, 진실에 대한 권리는 개별 피해자 또는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들만의 권리가 아니다. 알 권리는 또한 집단적인 권리로서, 장차 피해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역사에 다가가는 것이다. 알 권리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기억할 의무’로서, 국가가 당연히 취해야 할 의무이다. 그 목적은 수정이나 부정의 이름으로 역사가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겪어냈던 억압에 대해 아는 것은 한 민족의 역사적 유산의 일부이며 그런 것으로서 보존돼야만 한다. 이것이 집단적 권리로서의 알 권리의 주요 목적이다.”3

보고서에 따르면 기억할 의무는 본디 국가의 의무다. 홀로코스트 가해자인 독일의 청산 노력이 기억할 의무를 나름 충실히 이행한 사례다. 1970년 폴란드에서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게토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사실 브란트는 나치에 저항한 이로 나치의 만행에 사과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한 기자는 그의 행동을 이렇게 평했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을 필요가 없는 그가.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꿇지 않았던 사람들, 감히 무릎을 꿇을 용기가 없어서, 무릎을 꿇을 수 없어서, 무릎을 꿇지 않았던 사람들을 대신해서.”4

20세기 세계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홀로코스트라면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은 5월 광주일 것이다. 기억할 의무를 대하는 한국 권력자의 모습은 독일 권력자의 모습과 정반대였다. 5월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수괴’ 전두환은 지금까지 5월 광주에 사과도, 5월 영령들에 참배도 하지 않고 있다. 되레 구속 2년 만에 죄를 사면받았다. 2205억원의 추징금도 533억원만 내고 “29만원밖에 없다”며 버티고 있다. 그는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꿇지 않았던 사람 중 한 명이다.

미디어는 어떤가. 뉴스에서 보도되는 5월 광주의 정신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졌다. 권력자들은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을 국가 정체성과 자신들의 지지 기반 강화를 위해 사용했다. 미디어는 권력의 입만 바라보고 그들의 정치적 담화를 마치 5월 광주의 정신인 양 포장해서 생산했다. 그들은 피해자와 중재자·심판자의 정체성을 오가며 파편화된 5월 광주의 기억을 긁어모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하고 있다.5 요즘 말하는 ‘기레기’의 과거 버전이다.

권력자의 허언

세월호는 5월 광주의 연장선상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34일 뒤에야 “세월호의 희생을 결코 헛되이하지 않겠다”며 “최종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모든 책임을 해양경찰·안전행정부·해양수산부 등에 돌리고 표적은 청해진해운·유병언에 맞췄을 뿐이다. 결국 ‘네 탓’으로 일관한 대국민 담화였다. 박 대통령은 기억할 의무를 다할 것같이 말했지만 그 뒤 행태는 허언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극단적인 사례는 ‘인사 참사’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 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으로 사의를 표명한 정홍원 국무총리 후임으로 안대희 전 대법관을 지명했다. 그는 6일 만에 ‘수임료 27억원’ 전관예우 논란으로 사퇴했다. 그 뒤 총리 후보로 지명된 문창극은 한 편의 막장 드라마였다. 병역 특혜 의혹, 친일 역사관 논란, 뻔뻔한 해명은 유병언을 제치고 14일간 뉴스를 독차지했다. (박 대통령은 6월26일 끝내 새 총리를 지명하지 않고 정홍원을 유임했다.) 세간에는 청와대가 ‘차떼기’의 주인공인 이병기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를 위해 문창극을 방패막이로 활용했다는 설도 나왔다.

더 가관인 것은 박 대통령이 문창극의 자진사퇴 뒤 한 말이다. “앞으로는 부디 청문회에서 잘못 알려진 사안들에 대해서는 소명의 기회를 줘 개인과 가족이 불명예와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이 발언의 행간을 짚다보면 권력자 특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느낄 수 있다.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의 말을 빌리면 ‘사회귀족’6의 이데올로기다. 사회귀족은 정치귀족과 자본귀족, 교육귀족, 언론귀족 등이 카르텔을 형성해 사회 전 부문을 지배한다. 상호 유착을 통해 그 누구에게도 견제당하지 않는 사회귀족이 ‘군림하되, 책임지지 않는’ 뻔뻔함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7 박 대통령이 자본·교육·언론의 호위를 받으며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찬 국정 운영을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하여 국정 파탄이나 인사 참사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행위이고 사고라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민주공화국 시대에 중세 귀족처럼 행세하며 지배의 성을 쌓고 있을 뿐이다. 다만 여론 앞에 거짓 눈물을 흘려 표를 구한다. 그들은 기억할 의무를 이행하는 것도 선별적이다. 박 대통령이 언론귀족인 문창극을 위한 소명의 기회는 염치없이 챙길지언정, 시민이 피해자인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 규명에는 소홀한 이유다. 그래서 박 대통령의 발언은 허언이 아니라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본심이다.

허언의 결과, 비정상의 정상화

이러한 허언의 결과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사회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는 이를 “비합리성이 합리성이 되고, 탈시스템이 시스템이 되는 사회”라고 말한다. 김 대표의 말을 더 들어보자. “역설적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시스템이 너무 잘 돌아가기 때문에 자유를 허용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요. 근대 민주주의 국가 시스템은 제법 잘 만들어졌지만, 이 시스템을 배반하는 것들, 이를테면 관료주의의 부패, 공공성의 사유화 등 탈시스템적인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뤄지다보니 그마저도 총체적인 시스템처럼 보이게 됐습니다.”8 문창극을 총리에 앉히려 하고, 밀양에 행정대집행을 강행하고, 기업들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탈시스템적인 것이지만 사회귀족에겐 정상적인 행위가 된다. 그사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개별자들이다. 이로 인해 독재에 항거했던 5월 광주나 기업의 억압에 대항했던 노동자는 정상이 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이렇듯 기억할 의무는 본디 국가의 의무지만 국가는 그들을 주변화하고 배제할 것이 분명하기에 이제 개별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는 피해자의 기억될 권리와 개별자의 기억할 의무가 조우하는 지점이다. 또한 ‘잊지 않겠다’는 말이 허언이 되지 않기 위한 산 자들의 실천, 즉 수많은 발화와 응답 과정의 시작이다. 그리하여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권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투쟁”으로 진화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획일화다. 기억투쟁은 서로 다른 개별자들이 이행하는 실천의 집합이다. 그곳에는 승자와 패자, 다수자와 소수자 등 여러 개별자들이 존재한다. 독일 베를린의회 앞에 홀로코스트 기념물이 세워졌을 때 수용소에서 살해당한 집시가, 동성애자가, 폴란드 실향민이 자신들을 기억하는 기념관도 세워달라고 운동을 시작한 것처럼 여러 형태의 실천이 동반돼야 하나의 기억으로 물화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기억투쟁은 독립 또는 종속 변수로, 즉 결정하거나 결정당하는 대상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결합태로 이해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9

산 자들의 실천, 사유의 확장

중요한 것은 사유의 확장이다. 이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용기이고, 억압받는 개별자들에 대한 공감이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는 6월28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또 촛불을 들었다. ‘기레기’ 언론들은 벌써 뉴스에서 세월호를 지웠지만 개별자들은 기억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진상 규명’ ‘박근혜 퇴진’ 구호가 촛불처럼 반짝인다. 여기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진상 규명은 당연히 밝혀야 할 가치다. 그렇다면 박근혜 퇴진이 궁극적 가치인가? 획일화의 위험이 존재하는 ‘닥치고 퇴진’류는 본질이 아니다. 영화 <역린>에서 정조가 말했듯이 사회귀족은 “누구 하나 목 벤다고 쓰러질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청계광장 안에 있다. 세월호 촛불은 박근혜 정부가 쳐놓은 가두리 안의 ‘착한’ 집회다. 나가려는 의지를 거세당한, 말 잘 듣는 투쟁이다. 그래서 청계광장은 제한적인 해방구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인식과 관심>에서 억압과 왜곡된 삶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해방을 상상하라고 했다. “선은 관습적인 것도 아니요 본질적인 것도 아니다. 선은 상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 근저에 놓여 있는 관심, 즉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조건들 아래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것일 수 있는 해방적 관심을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바로 그런 것으로 상상되어야 한다.” 그의 해방 개념을 청계광장에 대비해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그곳에서 나가려는’ 개별자들의 성찰이다. 그리하여 개별자는 인식 주체로 복원되고 사유 확장의 출발점에 선다.

이 시각 세월호에 가린 또 다른 개별자들이 복원을 꿈꾸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복판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들이다. 삼성의 하청노동자인 이들은 번듯한 겉모습과 달리 비인간적인 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생계를 위협받아왔다. 무엇보다 무노조 삼성의 폭압적인 노동정책에 신음해왔다. 급기야 지난 5월18일, 경찰은 서울의료원에 난입해 고 염호석 양산분회장의 주검을 물리력으로 탈취했다. 노조는 “정권의 실세와 삼성이 개입돼 있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개별자들의 복원은 결실을 이뤘다. 이 글을 퇴고하는 6월28일 노사는 합의를 했고, 삼성은 76년간의 무노조 철칙을 포기했다. 이외에 국가와 자본이 공공성과 사유재산 보호라는 명분 아래 개별자들을 억압하고 배제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앞에서 언급한 쌍용차·밀양·소수자부터 강정·용산·콜트콜텍·유성기업·한진중·재능교육·전교조까지…. 그게 ‘세월호 밖 세월호’이든 ‘세월호에 가린 세월호’이든 표현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총체적인 문제들이다. 바로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고, 우리 이웃이 겪고 있으며, 머지않아 우리가 당할 일들이다. 이제 공은 개별자들의 집합인 우리의 몫이다. 우리의 기억투쟁이 세월호을 넘어 억압받는 모든 것들에 공감할 때 사유의 확장은 완성될 것이다.

글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1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페이스북 인용.

2 이창근, 위의 페이스북 인용.

3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 류은숙 글에서 발췌.

4 제프리 K. 올릭, <기억의 지도>, 옥당, 7쪽, 2011.

5 주재원, ‘집합 기억의 재현: 매체 서사로서의 5·18’ 논문.

6 홍세화는 ‘사회귀족’ 용어를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국가귀족’의 개념을 확장해 적용했다. 한국의 사회귀족은 사회 전 부문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관계의 상층만을 차지하는 프랑스의 국가귀족과 다르다.

7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 42쪽, 2008.

8 <나·들> 19호, ‘철학자가 본 세월호 참사 애도’.

9 제프리 K. 올릭, 위의 책 155쪽.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