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2:14 수정 : 2014.07.03 11:16

아침 6시20분. ‘오늘 하루 힘차게’라고 말하듯 알람이 잠을 깨운다. 몇 년 전만 해도 바로 일어났는데, 요즘은 꾀가 난다. 1957년생인 규완씨도 나이는 속일 수 없나보다. 비몽사몽 씻고 나서 자고 있는 아들을 깨운다. 중학생인 둘째를 등교시키려면 7시15분에 집에서 나가야 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아침 식사를 할 거란 사실은 빤히 알지만, 부모는 뭔가 먹여서 보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과일을 깎아 아이 입에 넣어준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좀처럼 먹으려 하지 않는다. 누굴 닮아 이렇게 고집이 센지 모르겠다.

큰아들이 외출하는 날이면 아침은 더 분주하다. 몸이 불편한 큰아들에게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해서다. 요즘은 많이 좋아져서 스스로 잘하는 편이라 도울 게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아침부터 힘 빼는 아들이 안쓰러워 이것저것 챙겨준다. 힘은 들지만 행복하다. 남들에겐 평범한 이 일상이 규완씨에겐 너무 감사한 일이다.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했던 나

마냥 행복한 탄생의 순간도 역경을 맞을 때가 있다. 첫아이는 의료사고로 뇌손상을 입었고 둘째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이상이 있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던 첫째를 지극정성으로 키워 대학에 보내고 빠른 대처로 둘째까지 지켜낸 기적의 연출자는 아버지, 규완씨다. 한겨레 신소영
1990년 4월22일은 규완씨의 인생이 바뀐 ‘그날’이다. 1981년에 처음 만나 7년 연애 끝에 결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사랑의 결실이 태어난 날이었다. “초산이어서 일찌감치 대학병원에 입원했어. 출산 전날까지도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건강했지. 간호사가 뭘 귀에다 대고 뱃속에서 네가 노는 소리를 들려주었단다.” 부부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그런데 출산 당일에 문제가 생겼다.

“엄마는 난산으로 힘들어했고, 산부인과 과장은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 의사가 없었지. 분만실에는 인턴만 남아 있었어. 근데 너는 출산 도중 머리가 산도에 끼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인턴은 어쩔 줄 몰라했지. 엄마 말로는 그냥 힘만 주라고 했다는 거야. 그 상황에서 너는 산소 중단으로 뇌손상을 입어서 장애가 생기게 된 거야.” 나중에 담당 의사는 산소 중단 시간이 약 13분이었다고 밝혔다. 그가 병원 쪽의 안내로 중환자실에 갔을 때, 아기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양팔에 2개, 양다리에 2개, 이마에 3개의 주삿바늘을 꽂고 있었다.

뒤늦게 최선을 다했지만 아이를 원상태로 되돌릴 순 없었다. 당시 병원 쪽 소견은 생존 확률이 반반이고, 생명을 잇는다 하더라도 식물인간이 되거나 부모를 못 알아보는 저능아가 될 것이며,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화가 난 그는 면회를 신청해 병원장을 만났다. 병원장은 일부 금전 보상과 평생 치료 정도를 보장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구체적인 내용은 병원 쪽 법률 대리인과 상의하라고 했다. 규완씨는 당시를 떠올렸다. “그 상황에서 병원의 의례적인 보상이 싫었어. 아이의 건강상태를 원상회복하라고 주장했지. 의사들의 인간적인 사과와 의료사고 인정도 요구했고.” 하지만 병원은 “의료사고는 수술 중 정전 등과 같은 경우이고, 최고의 의료 혜택을 제공받지 못한 것은 의료사고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병원 쪽의 협상 요구를 거절하고 소송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고는 만류를 뿌리치고 아이를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왔다.

“화가 나서 ‘어차피 고치지도 못하는 거 내 자식이니 내 품에 데리고 있다가 보내주는 게 낫다’고 소리치며 병원 문을 나왔지. 하지만 퇴원 뒤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어. 지인들이 사준 아기 옷을 입혀서 너를 눕혀놓고 클래식 음악만 들려주었지. 엄마한테도 ‘얘는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안 된다니 편안히 음악이나 들려주면서 기적이나 바라자’고 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때 그는 아들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면증까지 생겼다. 얼마 못 산다는 생각에 우유도 작은 통으로 샀다. 큰 통으로 사면 다 먹지 못하고 죽을까봐서.

당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살릴 필요가 있는가’ ‘실험용으로 미국에나 보내지’란 얘기를 들었고, 어느 의사는 신생아가 스스로 죽는 방법에 대해 은밀히 충고해줬다.

“포기할 수 없어서”… 아버지가 낳은 기적

“그런데도 너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 식구 모두가 의술이 발달한 미국 이민을 추진했어. 이때부터 신문과 방송에 제보하기 시작했지. 지인들은 여론 형성이 중요하다고 조언해줬어. 사건을 몇 차례 외부에 알렸고, 언론에 보도됐지. TV 취재도 약속돼 있었어. 그즈음 MBC <뉴스데스크>에서 뇌손상 치료가 가능하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방송을 미루고, 서울대병원과 가톨릭병원으로 갔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게 너에게는 전화위복이었지.”

이후 아이의 주 치료병원은 서울대병원으로 바뀌었다. 약 1년 동안 강원도 춘천에서 서울로 통원치료를 했다. 집에서는 할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었다. 치료는 재활에 초점을 맞춰 진행됐다. ‘보이타 치료’(사지나 몸통의 일정한 감각 유발점을 자극해 기거나 뒤집는 등의 반사 동작을 유도해내는 물리치료법)도 했다. 그러다 치료 기간이 길어지면서 더는 통원치료가 어려워지자 서울대병원에서 추천한 지방 정형외과로 옮겨 계속 치료했다.

통원치료 당시, 아이를 데리고 다닌 건 규완씨였다. 공무원인 아내가 돈을 벌긴 했지만 살아가기엔 팍팍했다. 그래서 그도 생활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봤고, 기술직 공채(7급)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한국통신(옛 전신전화국)을 퇴사한 지 2년 만이다. 맞벌이를 하는 바람에 아이는 동네 아줌마들이 어머니를 도와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창 일하고 있는데 규완씨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전화해서는 애가 소리를 듣는 것 같다는 거야. 문이 닫히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고.” 그전에 규완씨 가족은 아이가 듣는지 보는지를 몰랐다. 그런데 듣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으니 설레었다. 그날 밤 딸랑이를 들어 아이의 귀에 대고 흔들었고, 아이는 반응했다. 며칠 뒤엔 풍선이 떨어지는 걸 본 아이의 눈이 깜빡였다. 이렇게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확인하자마자 널 데리고 서울대병원에 갔어. 의사가 뇌 사진을 찍어 과거 사진과 비교해보더니 기적이라고 하더라고.”

불편한 몸으로 낮 동안 아이를 돌보던 규완씨 어머니께서 1995년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맡길 곳을 찾다가 병원과 학교가 함께 있는 경기도 광주의 삼육재활병원을 알게 됐다. 아이는 1995년 12월부터 그곳 생활을 시작했고, 병원 치료와 학업을 병행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약 13년 넘게 생활했다.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너를 데리고 집에 오는 게 일상이 되었지. 그동안 주말에 너를 못 본 것은 딱 두 차례였던 걸로 기억해. 그러니 재활원 생활 적응과 재활치료와 공부는 네 몫이었어. 근데 내가 재활원을 방문할 때마다 재활원 관계자들과 선생님들은 네 칭찬을 많이 했지. 공부도 알아서 잘해줬고. 고마울 따름이지.”

아이의 병원비는 매월 120만~130만원이 들었고, 외박비 등을 고려하면 한 달에 150만원이 들었다. 한 달 봉급이 거의 다 들었으니 생활은 딱 먹고살 만한 정도였다. 힘들게 키운 큰아들은 대학에 학부수석으로 입학해 언론학을 공부하고 있다.

“당신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둘째는 서울 강동구에 있는 작은 산부인과에서 출산했다. 사실 부부는 첫째를 키우는 것도 힘들어 둘째는 안 낳으려고 했다. 그런데 주위에서 동생이 있어야 훗날 아이에게 의지가 된다고 해서 낳게 됐다. 2000년 6월12일 오전에 둘째아들이 태어났다.

규완씨는 기쁜 마음에 지인들과 일가친척들에게 “한턱 낼 테니까 시간 되면 다들 오라”고 했다. 근데 오후 5시 즈음 병원에서 보호자를 찾았다. 소아과였다. 당시 그 병원 3층은 산부인과이고 2층은 소아과였는데, 아버지가 산부인과에서 출산진료를 하면 아들이 소아과에서 신생아 건강검진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의사 말이 심장에서 잡음이 들린다는 거야. 심장 벽에 이상이 생긴 것 같대. 그러곤 신생아 때 그런 애들이 있기는 한데 심각하지 않으니 나중에 정상으로 될 것 같다는 거야.” 의사 말을 듣고 나온 그는 도저히 찜찜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저녁 회식을 포기하고 7시쯤 다시 의사 면담을 요청했다. “근데 그날 의사가 교회인지 성당인지 가서 없었어. 알아보니 그 건물 5층이 의사 집이더라고. 그래서 무작정 기다렸지. 11시쯤 의사가 집에 왔어. 좀더 자세히 물어본 뒤 의사에게 다른 큰 병원에 가봐야겠다며 병원을 추천해달라고 했지.”

그때 마침 의사가 서울아산병원에 친구가 있다고 소개해줘서 다음날 아침 7시에 바로 앰뷸런스를 타고 그곳으로 가 종일 검진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9시, 아기는 출생 3일 만에 위험한 수술을 했다. 다행히 수술 경과가 좋았고, 둘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규완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에 너의 아픈 경험이 도움을 주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현재 작은아들은 국제중에 다닌다.

규완씨는 어릴 적 팔방미인이었다. 그 시절 담임선생님이 없으면 선생님을 대신해서 반 아이들 수업도 담당했다. 또 운동장에서 무슨 시합이나 놀이를 할 때면 친구들이 항상 최우선으로 그를 선택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공부를 잘해 6남매 중 유일하게 서울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그의 인생에 고난이 닥쳤다. 장애를 얻은 큰아들과 심장이 약해 죽을 뻔한 작은아들이 잇따라 태어났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꿈을 버리고, 아이들만을 위해 살았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멋지게 이겨냈다.

그는 퇴직을 3년여 앞두고 새로운 꿈을 꾼다. “평소 좋아하는 과학을 더 공부하고, 나아가 연구 활동을 하고 싶어. 바둑, 낚시, 당구 등을 하며 여가도 즐기고 싶고. 또 나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하고 싶어. 예를 들어 너처럼 불편한 아이들을 돕는 거지. 그게 정말 기가 막힌 삶의 보람이거든!”

나는 그의 꿈을 응원한다. “아버지,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두 아들을 멋지게 키워낸 당신은 기적 같은 이야기의 연출자니까요! 그리고 존경합니다.”

글 심지용 대학생

‘독자의 인연 인터뷰’는 독자에게 열린 지면입니다. 독자가 인터뷰어가 되어 자신의 부모, 자식, 친구, 친척, 동료 등 가까우면서도 정작 궁금한 것을 묻지 못했던 이를 직접 인터뷰하는 형식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히려 못하는 이야기가 많을 수 있습니다. 일상의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인터뷰를 하면 뜻밖에 새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0자 원고지 30장 안팎 분량에, 일문일답이나 수필, 일기 등 자유로운 형식으로 보내주십시오.

보낼 곳 <나·들> 전자우편 계정 na-d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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