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9 02:02 수정 : 2013.01.08 15:59

인천 용현119안전센터 소방대원의 화재진압 출동 모습 / 박승화 기자
 지난 6월 30일 1시 19분. 인천 연수구의 한 아파트 15층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이 아파트에 사는 김아무개(52)씨는 함께 일을 하는 큰아들과 술을 한 잔 한 뒤 안방에서 잠을 자다 거실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연 순간, 폭발과 함께 화염이 거세게 방으로 밀려들어왔다. 김씨는 온몸으로 버텨 문을 닫았다. 초여름 더위 때문에 큰아들이 거실에서 잠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김씨는 큰아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작은아들의 행방도 알 수 없었다. 소방대가 고가 사다리차를 타고 베란다 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김씨는 반쯤 정신을 잃었다.

 1시 28분. 인천 남부소방서 용현119안전센터 소속 김진수(34) 소방사는 119관제센터로부터 원거리 지원 출동 명령을 받았다. 화재 현장 관할 소방서의 구급차가 모자란다는 얘기였다. 김 소방사는 3.7㎞를 달려 명령 접수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김씨는 구조돼 응급구조 침대에 누워있었다. 김 소방사는 그를 받아 안았다. 러닝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김씨는 온통 그을린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김씨는 기도를 통해 잔뜩 연기를 흡입해 산소포화도가 91%를 기록했다. 산소포화도는 혈액의 헤모글로빈이 산소와 결합하고 있는 비율이다. 97~100%면 정상이고 95% 이하면 생명이 위험하다.

 김 소방사는 인공호흡을 하고 온몸을 주물렀다. 산소포화도는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지만, 빨리 병원으로 이송해야 했다. 하지만 김씨가 갑자기 흥분하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안에 있다”고 소리지르고 온몸을 바득바득 움직여 사고 현장으로 다시 달려가려고 했다. 제어가 되지 않았다. 한동안 승강이를 벌이다, 김 소방사는 결국 인공호흡을 계속 하면서, 휴대전화도 들고 나오지 못한 김씨의 기억에 의지해 큰아들과 작은아들 번호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 기억을 짜맞춰 전화번호를 조합해내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큰아들 번호는 연결이 되지 않았고, 작은아들은 서울에 가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잠시 뒤 큰아들이 거실 소파에 누운 채 새까맣게 탄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 소방사는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김씨의 눈은 그의 위로를 받아안지 못했다.

 

“아들, 아들이 불길 속에 있다” 

 소방관은 재난에 직면한 사람에게 누구보다 먼저 절박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다. 생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장 필요로 할 때, 때론 화마를 뚫고, 때론 물길을 헤치고, 때론 붕괴를 무릅쓰고 사람에게 가닿는다. 화재를 진압하고,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을 구조하고, 응급 환자를 치료하고 수송하며, 사체를 수습하고, 때론 생명을 받아내기도 한다. 소설가 김훈은 “재난에 처한 인간을 향하여, 그 재난의 한복판으로 달려드는 건장한 젊은이들이 저렇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간다움이 아직도 남아 있고, 정부와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지난 6월 소방방재청이 펴낸 ‘2012 소방방재 주요 통계’를 보면, 2011년 한 해 동안 모두 4만4985건의 화재가 발생해 263명이 숨졌다. 203만4299건의 구급 출동이 있었으며, 43만1912건의 구조 출동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소방관은 모두 8명이 순직했다. 3명은 화재 현장에서, 2명은 구조 현장에서, 1명은 구급 현장에서, 1명은 출동 중 교통사고로, 1명은 안전지원 중에 숨졌다. 다친 소방관은 모두 355명이었다. 최근 5년 동안 순직한 소방관은 35명이다.

 2009년 12월 15일 2시 25분쯤, 인천 남구 용현동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천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연면적 6만8천여㎡의 대규모 공장이었다. 비번이라 자취방에서 자고 있던 김 소방사는 머리맡에서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안전센터로 달려갔더니 ‘광역 3호’가 발동해 있었다. 광역 3호는 용현119안전센터가 속한 인천 남부소방서와 중부소방서, 남동소방서, 공단소방서 전 소방대원이 비상 동원되고, 인접 소방서까지 추가로 동원하라는 본부의 명령이다. 김 소방사는 방화복을 입고 화재 현장으로 출동했다. 당시 김 소방사는 소방관 근무 경력이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벌떡벌떡 뛰는 심장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공장에는 이미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연기가 자욱했고 화염이 빗발쳤다. 김 소방사는 관창수를 맡은 다른 소방대원을 보조하면서 소방 호스를 잡았다. 10m 거리에선 포크레인이 삽을 들어 공장 문과 벽을 부수고 있었다. 벽돌이 날아왔고, 시야는 점점 좁아졌다. “앞의 관창수를 따라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2시간 동안 꼬박 불을 껐다. 그날 초기 진압에 투입됐던 박주원(38) 소방교 등 5명의 소방대원이 2~3도 화상을 입었다. 대형 창고 천장에서 화염이 급격히 폭발해 이들을 덮친 것이다. 장갑이 타면서 손등에 눌어붙고, 방화복이 타면서 등에도 눌어붙었다. 결국 박 소방교는 화재 진압팀에서 빠져, 화재 지휘팀으로 직무가 변경됐다. “최근엔 인천 부평소방서 화재 현장에서 김영수 소방위가 숨지기도 했죠. 죽음이 늘 가까이 있다는 생각은 해왔지만, 가까운 소방서에서 그런 일이 생기니까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되더군요.”

인천 남부소방서 용현119안전센터 구급대원이 관내에서 발생한 응급 환자를 인근 종합병원으로 이송하고 있다. / 박승화 기자
 

대소변으로 칠갑한 50대 

 용현119안전센터가 관할하는 인천 용현동과 숭의동 일대는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는 주택가다. 대형 화재는 적지만, 독거노인이 많아 구급·구조 출동이 잦다. 지난 8월에는 익숙한 전화번호가 찍힌 신고가 접수됐다. 용현동 그 집이었다. “친구가 쓰러져서 움직이질 않는다”고 했다. 한 달 사이 같은 번호로 네 번째 오는 전화였다. 비닐로 덮인 나무문을 열고 들어간 5㎡ 크기의 방은 쓰레기장 같았다. 누렇게 얼룩진 두꺼운 솜이불 위에 신고자의 친구 이아무개(55)씨가 웃옷만 입고 하체를 그대로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하체 아래엔 굳은 똥오줌이 뭉개져 있었다. 파리가 들끓었다.

 구급차에서 화장지와 물티슈를 가져온 김 소방사는 30분 동안 이씨의 몸을 닦았다. “미안해요. 내가 알코올 중독인데, 자꾸 아파서 술을 먹었어요”라고 했다. “그래도 술 드시면 안 된다”고 했더니, “병원에 가면 진통제라도 맞지만 병원비도 없고, 술을 마시면 통증이 잊혀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저도 국가기관에서 일하지만, 저소득층이 먼저 나서서 신고하고 자신의 상황을 증명해야만 그나마 국가기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죠. 이 사람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이 숨겨져 있으니까요. 뭔가 혜택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가짜로 조작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부의 혜택을 찾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달 뒤 같은 집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소방대는 급히 출동했다. 그러나 소방도로가 확보되지 않아 수관과 관창을 꺼내 골목으로 내달렸다. 불은 그리 크게 나지 않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이씨는 빨리 불을 피하지 못했고, 양쪽 다리에 2~3도 화상을 입어 병원에 후송됐다.

 한쪽은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세상이지만, 또 다른 세상은 꾸역꾸역 새 생명을 내어놓는다. 지난해 2월 9일 밤 11시 51분 인천 주안동에서 40주 된 산모가 급한 진통을 앓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김 소방사가 4분 만에 현장에 도착하니, 골목길 어귀에서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급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비쩍 마른 몸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옷차림은 남루했다. 구급차에서 내리자 그가 다급하게 “이쪽 길이요”라고 소리쳤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을 함께 뛰어가니 연립주택이 나왔다. 26㎡ 크기의 1층 거실에 산모가 끙끙 소리를 내며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서너 살 된 아이 두 명이 엄마 옆에서 서럽게 울었다. 이미 양수가 터져 이불이 누랬다. 그리고 산모의 다리 사이로 아기의 머리가 살짝 보였다.

 병원으로 옮길 여유가 없었다. 김 소방사는 멸균 도포와 석션기, 클램프, 가위, 멸균 장갑, 거즈가 담긴 응급분만세트를 꺼냈다. 산모를 멸균 도포에 옮겨 뉘었다. 항체가 없는 갓 태어난 아이가 세균에 2차 감염되면 어찌될지 모른다. 빨리 아기를 꺼내야 했다. 산모 허리에 베개를 받쳐 하체를 들 수 있게 했다. 아기의 어깨가 나왔고, 하체가 나왔다. 아기가 빨갛게 짓무른 몸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 15분이 걸렸다. 남자 아기였다. 김 소방사는 석션기로 아기의 코와 입 안에서 양수를 제거했다. 그리고 클램프 2개로 탯줄을 양쪽에서 고정한 뒤, 아기 아버지에게 가위로 탯줄을 자르게 했다.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 길 없는 아기는 내내 세차게 울었다. 하지만 울음은 적어도, 아기가 건강하다는 신호였다. 김 소방사는 인근 대학병원으로 산모와 아기를 이송할 수 있었다.

 나흘 뒤 김 소방사와 안전센터 요원들이 미역과 기저귀를 사들고 병원을 찾았다. 아이 엄마 이아무개(34)씨는 연방 고맙다고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애 아빠가 일용직 일을 하고 있는데, 일감도 없고 벌이가 좋지 않아서 이렇게 삽니다. 병원 갈 돈이 없어서 첫째와 둘째 모두 집에서 낳았네요. 그래도 그때는 친정 엄마가 도와줬는데, 친정 엄마와 떨어져 살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산부인과를 가본 적이 없어서, 셋째가 태어날 날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병원비가 걱정돼서 퇴원을 서두르려고 해요.”

 

 “먹고살기 힘든데 왜 살려놨냐” 

 생명이 태어난 순간을 맞이하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소방관에겐 생명을 맞이하는 일은 드물고, 죽음에 직면하는 일은 잦다. 지난해 10월 6일 밤 9시 17분, 인천 숭의동에서 ‘심장 이상’ 신고가 들어왔다. 4분 만에 현장에 도착한 김 소방사는 주택 지하 창고 자재물 더미에 쓰러져 있는 이아무개(73)씨를 찾아냈다. 이미 아들이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혈압은 측정이 안 될 만큼 높아져 있었고, 맥박과 호흡은 측정되지 않았으며, 산소포화도는 76%까지 떨어져 있었다. 심폐소생술을 넘겨받은 김 소방사는 심실제세동기로 심장에 패치를 붙이고 전기 충격을 가했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온몸을 한 번 더 주무른 뒤, 전기 충격을 한 번 더 가했다. 그러자 심실제세동기의 그래프가 살짝 뛰었다. 심장 박동이 돌아온 것이다.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급히 병원에 이송하면서도 줄기차게 심장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이씨는 뇌사 상태에 빠졌다.

 “심정지 환자는 초기 처치가 빠르면 빠를수록 소생률이 높은데, 4분이 지나면 뇌에 산소가 없어져서 뇌가 죽어가는 괴사 상태에 이릅니다. 이씨는 뇌사 상태로 입원 중인데, 며칠 뒤 전화를 해봤더니 부인이 이씨 걱정과 함께 병원비 걱정을 깊게 하더군요. 이 동네는 대부분 그렇게 삽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황당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다른 지역에서 소방관으로 근무하는 동료는 김 소방사처럼 심장 이상 구급 출동을 했다가 소송을 당했다. 역시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한 가족이 “가정 형편이 이렇게 힘든데 왜 살려놨느냐”고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좋은 거고 자신에게 보람이 남는 일이지만, 이런 일을 겪으면 허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목숨을 살려내면, 넉넉한 집안 사람들이야 무조건 감사하다고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꼭 그렇게 기쁠 수만은 없겠다 싶었어요.”

 인터뷰 도중 갑자기 ‘뚜릉뚜릉’ 소리가 났다. 김 소방사는 소리가 울리자마자 반자동으로 벌떡 일어나 안전센터 숙직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밖에선 “야! 심장 이상이야, 빨리 출동해”란 명령 소리가 들린다. 4분의 싸움이다. 소방관들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그렇게 질주한다.

글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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