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0:57 수정 : 2014.07.03 11:14

이런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는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사고가 아닌 ‘보편사건’이다. 세월호 참사의 분석 중에서 좌파·진보적 지식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환원론’이었다. 대표적으로 재독 철학자 한병철씨의 것이 있다.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세월호 선원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란 점, 선박 사용 연한을 늘리도록 한 게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란 점을 들어 “세월호는 신자유주의의 소우주”라고 일갈했다. 또 그는 “여객선 타이타닉호 선장 에드워드 존 스미스처럼 승객을 먼저 구하고 가라앉는 배와 운명을 같이했던 기풍은 이젠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 외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엇비슷한 신자유주의를 악마로 지목하고 나섰다. 더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천민자본주의’와 한국 자본주의의 후진성을 문제 삼는 경향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는 한마디로 한국 자본주의가 선진 자본주의에 비해 낙후해서 벌어진 참사라는 것. ‘천민자본주의론’ 내지 ‘한국 사회 봉건론’이라 할 수 있겠다.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납득하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다.

‘신자유주의’와 ‘천민자본주의’라는 맥거핀

사실 대형 선박 사고시 승무원이 승객부터, 특히 여성과 아이들부터 구조한다는 ‘타이타닉의 기풍’은 신자유주의 여부를 떠나 역사적으로 거의 지켜진 적이 없었다는 게 정설이다. 스웨덴 웁살라대학 연구팀이 1852년부터 2011년까지 발생한 대형 여객선 침몰사고 18건을 분석한 결과를 2012년 영국 에서 보도한 적이 있다. 여성 생존율이 남성 생존율보다 높았던 사고는 1912년 타이타닉호 사고와 1852년 버큰헤드호 사고, 2건에 불과했다. 반면 16건의 재난사고에서 선장과 승무원의 생존율은 각각 45%와 60%로 승객 생존율(30% 안팎)보다 높았다. 동서고금에서 해상재난이 일어났을 때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일은 선원이 승객을 버리고 먼저 탈출하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것은 보통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환란 이후이고, 신자유주의의 이식은 이르게 잡더라도 1990년대 초반이나 1980년대 말에 일어났다. 오래전부터 세월호와 유사하게 인재(人災)로 꼽히는 대형 사고들은 종종 일어났다. 140명이 사망한 1963년 목포 ‘연’호 사고, 319명이 사망한 1970년 제주 남영호 사고, 아파트 한 동이 통째로 무너져내려 33명이 사망한 같은 해 와우아파트 사고, 32명이 사망한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등은 무리한 선적, 부실 시공, 안전점검 미흡으로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대표적인 재난들이다. 이 사고들이 신자유주의 때문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비슷한 유형의 사고지만 어떤 것은 시점에 따라 신자유주의 때문이고 어떤 사고는 아닌 것일까? 분명한 게 있다. 세월호 사고 같은 대형 참사는 고도성장기와 신자유주의 시대를 막론하고 발생해왔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환원론은 재난을 과잉 현재화함으로써 사회 모순의 역사성을 되레 은폐하기 쉽다.

‘천민자본주의론’과 ‘한국 사회 봉건론’ 역시 문제다. 막스 베버가 처음 사용한 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의 개념은 오늘날 대체로 금전만능주의나 배금주의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본래 의미와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베버는 합리적 자본주의를 하나의 규범으로 제시하면서 낙후했거나 비정상적인 자본주의를 전통적 자본주의, 약탈 자본주의, 천민자본주의로 구분했다. 그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당시의 유대인 금융업자를 ‘천민’(Pariah)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의 맹목적인 이윤 추구 행위를 비난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돈 때문에 생명을 희생시킨 것에 사람들이 분노하자 천민자본주의를 주적으로 삼는 ‘착한 자본주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본주의는 적어도 합리성에 입각하여 돌아간다” “돈에는 적어도 ‘합리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죄가 없다, 한국 사회는 합리적·선진적 자본주의에 미달하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는 논리다.

룰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업자에게 강한 페널티가 주어지고, 룰을 제대로 지키는 게 실질적 이익이 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의 합리성’에서 비롯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저런 주장이 나온다. 전혀 그렇지 않다. 정작 그런 시스템을 ‘초기 세팅’ 하는 일은 돈을 벌어다주지 않는다. 그 최초의 작업을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은 이윤 동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축적해온 어떤 ‘사회적인 것들- 본능이면서 동시에 역량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인간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 내재한 사회성 때문이지 자본주의에 내재한 합리성 때문이 아니다.

서구인이 한국을 관찰할 때 종종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인이 자국의 위상에 비해 지나치게 자기 비하적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참 후지다’ ‘아직도 선진국이 되려면 멀었다’는 이야기는 많은 한국인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주제다. 정상근대 열망은 이런 멘털리티를 해명하는 데 유용한 개념틀이다. 이 열망에는 동전의 양면 같은 파토스가 존재한다. ‘우린 한 번도 제대로 된 근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회한 내지 자기모멸과, 서구/미국의 근대화는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것이라는 타자선망이 그것이다. 그러나 좋은 근대(우월한 근대)와 나쁜 근대(열등한 근대)가 있다는 시각은 일종의 신화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이분법에 근대화 자체를 특권화하고 물신화하는 시선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환원론도 천민자본주의론도 맥거핀이라면 무엇이 ‘진짜 폭탄’일까. 대답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양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묻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발전 경로를 따르는 건 아니었다. 국가별로 역사·문화·제도·자원이 전혀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나름의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시장주도형 자본주의’, 서독(독일)과 스웨덴 등은 ‘코포라티즘적 자본주의’(협상제/합의제 자본주의)로 유형화된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모델은 국가주도형 자본주의다. 이 유형의 ‘원조’는 일본이다.

인간을 ‘갈아넣는’ 체제

국가주도형 자본주의는 선택과 집중을 통한 추격 전략, 말하자면 ‘후발주자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 정부나 강력한 관료제가 기업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자원 분배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최대의 장점은 자유주의적 사회가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대규모 자본을 일시에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이 점은 경쟁국에 그야말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국제 금융자본의 간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도 이 모델의 큰 장점이다.

장점만 있을 리 없다. 당연히 이 축적 양식에는 ‘그늘’이 있다. 고위 관료가 엄청난 급료를 받는 민간부문으로 옮겨가는 관행- 한국에서 ‘낙하산 인사’라 부르고 일본에서 ‘아마쿠다리’(天下り)라 부르는-, 정실주의와 부정부패, 금융규제의 결여로 인한 과잉대출- 이는 과잉생산과 과잉설비, 그리고 기업의 부동산 투기로 이어졌다-, 지나친 대기업 의존이 낳는 각종 부작용 등이 손꼽힌다. 특히 한국의 재벌은 일본 대기업과 기능적으로 유사하면서도 특유의 후진성(세습·족벌경영 등) 때문에 ‘Chaebol’이라는 일반명사로 영문사전들에 등재될 정도다. ‘그늘’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건 다른 모델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가혹한 노동착취와 정치적·사회적 억압이었다.

물론 핸더슨이 아주 적절히 명명한 “기적의 어두운 측면”을- 특히 노동탄압과 여성 노동자들의 착취를-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밖으로 보기엔 중립적인 크루그먼의 “요소동원”이라는 용어와 일본 기업과 일본 노동자를 연결하는 특별한 “신뢰” 관계를 묘사하는 미사여구의 밑에는 장기간 노동, 강도 높은 작업과정,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끊임없는 경영진의 압력, 사회적 통일성이란 국민적 문화를 조성함으로써 노동 저항을 최소화시켰던 섬뜩한 사회적 현실(현재도 그렇다)이 깔려 있다. 노동권의 실질적인 억압은 (일본의 기준에서 보아도 임금은 낮고 작업시간은 긴) 한국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났다.

-데이빗 코우츠 지음, 이영철 옮김, <현대 자본주의의 유형: 세계경제의 성장과 정체>, 399~400쪽

폴 크루그먼이 “요소동원”이라 표현할 때, 그 ‘요소’에는 살아 있는 인간이 포함돼 있다. 국가주도형 자본주의, 특히 한국 자본주의의 본질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인간을 갈아넣는 것’이다. 장시간 노동, 초고강도 노동, 그리고 잔혹하고 집요한 노동자/노동조합 탄압은 국가주도형 자본주의 모델이 공히 내장한 문제점이다. 한국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자본은 기술을 혁신하기엔 너무나 무능력했고 국가는 시민의 동의를 구하기엔 너무나 부정의했다. 심지어 한국의 일부 자본가들은 수익률 급락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운동을 분쇄하려는 집념을 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간을 죽을 때까지 쥐어짜지 않고선 다른 나라의 경쟁자들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개발독재 시기 분명 한국 자본은 강하게 통제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래(노동계급이나 시민사회)에서 올라온 힘이 아니었다. 따라서 노동자·시민의 생명이나 복지에 방점이 찍혀 있지 않았다. 근대화는 곧 산업화였지 민주화는 아니었다. 이후 외환위기를 통해 신자유주의가 폭력적으로 외삽되면서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의 개발도상국에서 거의 곧바로 신자유주의의 모범국이 된다. 자본이 ‘인간자원’을 ‘갈아넣으며’ 작동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한국은 개발독재 시기나 신자유주의 시기나 매우 일관된 국가였다. ‘인간을 갈아넣는다’ ‘죽을 때까지 쥐어짠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명백한 사실의 건조한 진술이다. 한국에서 노동자는 3시간에 한 명씩 죽고 5분에 한 명씩 다친다. 최근 수년간 산재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가 대한민국이다. 그나마 성장률이 높던 개발독재 시기에는 임금이라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신자유주의 10년이 지나자 이제 기업엔 돈이 쌓이는데 임금 상승은 없는, 이른바 ‘임금 없는 성장’ 현상까지 나타났다. 인간은 더욱 헐값이 된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안전과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가 뿌리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미국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에 따르면, 일정 이상 부가 축적된 사회에서는 물질주의자보다 탈물질주의자의 비중이 높아진다. 물질주의의 척도를 재는 6개 항목은 ‘경제성장’ ‘국방 강화’ ‘사회질서 유지’ ‘물가 상승 억제’ ‘경제 안정’ ‘범죄 소탕’이다. 반면 탈물질주의 항목은 ‘직장과 사회에서 참여 증대’ ‘도시와 농촌의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일’ ‘정부 정책 결정에 국민 참여 확대’ ‘언론 자유의 확대’ ‘더욱 인간적인 사회로의 발전’ ‘돈보다는 아이디어가 중요시되는 사회로의 발전’이다. 한국은 이미 상당 수준의 부가 쌓인 국가다. 그렇다면 물질적 풍요가 자연스럽게 돈보다 인간 우선의 문화로 이어질 거라는 잉글하트의 가설은 한국에도 들어맞을까? 아니, 더 직설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우리는 지금 인간을 갈아넣는 체제에서 인간을 가장 우선하는 체제로 넘어갈 준비가 돼 있는가? 다음의 설문조사 결과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1일 열리는 ‘통계의 날’ 심포지엄에 앞서 31일 미리 배포한 ‘한국 사회 통합의 미래’ 보고서에서 이같이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월드밸류서베이’(WVS) 자료 등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국민 중 ‘개인과 국가 모두 성장이 중요하다’는 개발연대형 비중은 56.84%로 미국(45.93%), 스웨덴(39.17%), 일본(37.47%), 멕시코(35.18%) 등 비교 대상 4개국보다 훨씬 높았다. 반면 탈(脫)물질주의적 가치를 우선하는 ‘유토피아형’의 비중은 6.55%로 미국(15.28%), 스웨덴(20.94%), 멕시코(22.10%), 일본(23.30%)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또 ‘국가는 탈물질주의 단계이나 나는 아직 성장이 필요하다’는 유보·추격형은 28.72%로 멕시코(18.87%), 일본(18.74%)보다 높았다. 보고서는 “우리나라는 물질주의자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높은 가운데 진보는 상위 계층을 위주로 한 탈물질주의, 보수는 하위 계층을 중심으로 한 물질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진보는 완전한 탈물질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탈물질적 가치도 고려해달라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관철 기자, ‘한국민 물질주의 성향 높다’, <경향신문> 2009년 8월31일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 있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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