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0:39 수정 : 2014.07.03 11:14

매달 첫쨋주 토요일인 ‘해피데이’에는 삼오랑왕만두에서 만두와 찐빵을 나눠주고 자발적인 기부금을 받는다. ‘해피데이’를 맞기까지 김선삼 대표는 숱한 역경을 겪었다. 이제 그의 목표는 자신이 개발한 음식들을 파는 테마거리를 조성하는 것이다. 한겨레 박승화
고백하건대, 이 인터뷰는 애초부터 ‘사심’에서 출발했다. 서울 지하철 5·6호선 공덕역 6번 출구에 위치한 아담한 만둣집 ‘삼오랑왕만두’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 1970~80년대 선술집 골목 같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게 3년 전쯤 들어선 만둣가게, 그 안에서 만두를 빚는 젊은 사장님에게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노파심도 들었다. ‘이거 장사 되겠어? 임대료만 건져도 본전이다.’ ‘과연 몇 달이나 버틸까?’ 1천~2천원짜리 고기·김치 왕만두, 왕찐빵, 고구마치즈찐빵을 팔아서는 수지타산을 맞추는 일조차 버거워 보였다. 혹시 임대료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건물 주인의 아들? 호기심이 노파심으로 바뀔 즈음, 나는 이 집의 단골이 돼 있었다. 만두와 찐빵 맛이 일품이다!

그 가게를 뻔질나게 들락거리던 어느 날, 우연히 ‘삼오랑왕만두’ 간판과 눈이 마주쳤다. ‘마포본점’ ‘010-8318-7007’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프랜차이즈가 아니었다. 눈을 의심했다. “상호, 브랜드 이미지, 만두를 직접 개발하신 거예요?” 젊은 사장에게 물었다. “네, 맛이 별로인가요?” 그가 걱정에 찬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요, 맛있어요. 놀랍네요.” 그는 ‘삼오랑왕만두’ 브랜드를 일군 장본인이었다. 기존 ‘노마드 경제인’에 등장했던 이들에 비해 중량감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가 더 ‘노마드 경제인’에 가까운 인물일 수 있겠다는 직감이 왔다. 신분을 밝히고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하하. 저 같은 일개 장사꾼이 경제인으로 소개될 만한 인물인가요?”

“어서 오세요. 아하, 이거 쑥스럽고 어색하네요.”

화창한 어느 봄날, 손님이 아닌 기자로 삼오랑왕만두를 찾았다. 김선삼 대표가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가게 문을 열기 한참 전인 오전 9시쯤, 매장 내부는 깔끔하고 정갈했다. 평소 만두를 빚을 때와 달리 그는 두건이 아닌 캡모자를 쓰고 있었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나이가…?” “하하하, 33살입니다. 제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사업을 시작한 편입니다.”

즐거운 남자, 김선삼표 왕만두

‘삼오랑’.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친숙한 상호의 의미를 물었다. “사실 아무 뜻 없어요. 색다르지만 귀여운 느낌이 있는 상호를 짓고 싶었어요. ‘삼오랑’이 발음하기 쉽고 귀에 착 감기더군요. 의미 없이 지은 건데, 다들 궁금해하셔서 지금은 이렇게 답합니다. ‘삼’은 제 이름, ‘오랑’은 ‘즐거울 오’(娛)에 ‘사내 랑’(郞)이라고 말이죠. 즐거운 남자, 김선삼이 만드는 왕만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그는 정성과 신선한 재료가 결합될 때 정직한 맛이 나온다고 믿는다. 밀가루, 김치, 양파, 파 등 재료 선정에 신중을 기하는 이유다. 그는 “당일 배송되는 김치의 맛과 양념, 익은 정도에 따라 만두소의 맛이 달라지기 마련”이라며 “균질한 맛을 담보하는 믿을 만한 김치공장을 선정하는 데 가장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삼오랑왕만두 매장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맛·청결·친절 최우선’ ‘남은 재료 절대 재사용하지 않음’ ‘모든 조리 과정은 수제로 만듦’ ‘고기와 채소는 100% 국내산’ ‘하노키나무로 쪄 풍미와 맛이 뛰어남’. 그 덕분일까. 삼오랑왕만두는 입소문을 타고 공덕동 ‘맛집’으로 자리매김했다. 단골손님도 점점 늘고 있다. “일부러 먼 곳에서 찾아와 만두와 찐빵을 단체주문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고맙죠. 이런 분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정성스레 만두를 빚어야지요.”

하루 매출이 얼마나 되는지,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하루 기준으로 만두 400~500개(겨울철 성수기 700~800개), 찐빵 100개(성수기 200개), 고구마치즈찐빵 50개”라고 설명했다. 망설임이 없어서 놀랐다. 모두 당일 생산·판매가 원칙이다. 준비된 만두와 찐빵이 소진되면 미련 없이 초저녁이라도 가게 문을 닫는다. “큰돈을 단기간에 벌 수 있는 수익모델은 아니지만, 소박하게 생계를 꾸려가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맛을 인정해주는 고객이 늘고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

삼오랑왕만두는 육횟집, 참치횟집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사업이다. 공덕동의 지금 가게 자리에서 내리 업종만 바꿨다. 그는 20대 중반부터 자기 명의의 가게를 열었다. 고교 때부터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은 덕분이다. 신문 및 우유 배달, 피자집 서빙, 휴대전화 판매점, 공사장 일꾼,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것이 자신의 꿈인 ‘수완 좋은 장사꾼’이 되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가방공장을 운영하던 부모님도 “선삼이는 직장인 체질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머릿속엔 오로지 “20대에 사장이 되겠다”는 목표뿐이었다.

다행히 몸을 쓰는 일만큼은 그에게 천성이었다. 특히 식당에서 손님을 맞을 때, 음식을 만들 때가 그랬다. “평소 음식을 잘 만드는 편도 아니고 주방에 들어가는 편도 아닌데, 참 신기하더라고요. 피자집에서 도(dough)를 돌릴 때는 실력이 뛰어나 퇴사를 말릴 정도였어요. 고등학교 졸업 직후 대기업에 취업한 적이 있어요. 급여도 많고, 관리 업무라 일도 편해서 부모님이 좋아하셨죠. 1년 만에 관두고 군대에 갔어요. 아무리 애써도 조직생활은 저와 맞지 않았어요. 가끔 ‘계속 다녔으면 어땠을까?’ 가정해보기도 해요. 금전적·시간적으로 여유로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20대 사장님, 마포대교에 오르길 여러 번

제대 직후인 2000년대 중반부터 음식점 개업을 본격적으로 구상했다. 그는 “어떤 장사를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며 “종잣돈을 신속하게 모아 내 가게를 열겠다는 열망만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이때부터 가전제품 매장에서 판매원으로 일했다. 판매수당이 꽤나 쏠쏠했다. 적어도 손님을 상대하는 일은 자신 있었다. 4년 만에 창업자금 8천만원을 모았다. 곧바로 가게 자리부터 물색했다. “친구 추천으로 아무 연고가 없는 공덕동, 지금 이 자리를 계약했습니다. 가게만 잡았지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었죠. 철이 없었어요. 유행하는 아이템을 잡아 개업하면 성공할 것 같았어요. 2009년 무렵 육횟집이 대유행이었어요. 고민 없이 덥석 프랜차이즈 계약을 했죠.”

개업 초기, 가게는 성업했다. 손님들이 몰렸고, ‘돈방석’에 앉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공덕동 직장인들의 1차 회식 장소로 그의 육횟집이 급부상했다. 개업 뒤 3~4개월까지 손님들이 줄서서 기다려 먹을 정도였다. 구제역 파동이 터졌다. 고기 수요가 곤두박질쳤다. 손님들이 발길을 끊었다. 하루에 단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육회의 특성상 고기를 오래 두면 상품성이 떨어진다. 본사로부터 구입한 고기를 그냥 버리는 날이 허다했다. “이틀만 지나도 갈변이 되어 손님상에 내놓을 수 없거든요.”

가게 문을 열수록 적자가 커졌다. 눈물을 머금고 문을 닫았다. 영업은 안 해도 매달 120만원의 임대료를 꼬박 부담해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게를 내놓았다. 밑바닥부터 경험을 쌓은 뒤 재도전할 요량이었다. 여러 달이 지나도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1억원 넘게 손해를 봤어요. 빚이 4천만원까지 늘었죠. 술 먹고 ‘죽겠다’고 마포대교에 올라간 적도 여러 번입니다. 돈을 날려서가 아니라 제 자신이 한심스러웠거든요. 소신은 없었고, 욕심과 허상만 좇았으니까요.”

가게를 무작정 비워놓을 수도 없었다. 업종을 바꿔 다시 가게 문을 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즈음 구제역 파동으로 사라진 고깃집을 대신해 참치횟집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프랜차이즈 참치횟집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쇠고기 회 뜨던 실력을 믿었고, 아무것도 안 하고 매달 120만원을 손해보는 것보다는 수익이 있지 않겠나 막연히 기대했어요.”

그것이 화근이었다. 참치는 더 심각했다. 개업 때 손님이 몰린다는 ‘개업발’도 안 먹혔다. “공덕동은 비싼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고급스럽지 않고 서민적인 것, 저렴하면서도 실속 있는 품목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결국 5개월 만에 참치횟집도 문을 닫고 말았다.

‘올드보이’만큼 먹어본 만두… 달인 수준

육횟집부터 참치횟집까지 연이어 실패를 맛본 2010~

2011년. 그의 인생에서 최대 시련기였다. 의욕은 꺾이고 절망은 쌓였다.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아이템으로 재도전하는 것 말고는 탈출구가 없었다. 그는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어도 요식업과 관련해서는 유행하는 아이템을 좇아서는 안 되고, 프랜차이즈에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프랜차이즈는 절대 가맹점이 수익을 내는 구조가 아니거든요. 요식업의 경우 재룟값이 30%를 넘어가면 힘들어요. 그런데 프랜차이즈에서는 40~50%가 재료비니까요. 나머지 50~60% 마진에서 임대료·인건비·운영비 등을 대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결국 마진이 거의 없거나 적자가 생기지요.”

당시 그를 잡아준 건 여자친구(현재 아내)다. 다섯 살이나 어린데도 속이 깊었다. 그의 좌절과 실패를 지켜보면서도 한결같이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다. “아내가 없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겁니다. 서두르지 말고 제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라고 충고하더군요.”

그 순간 만두가 머릿속을 스쳤다. ‘1천원의 행복’ 콘셉트로 왕만두와 왕찐빵을 팔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왕만두와 왕찐빵을 전문으로 하는 체인점이 시장을 넓혀가던 중이었다. 관건은 만두소의 맛.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1년여간 만둣가게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만둣가게를 다니며 맛을 연구했다. 심지어 만두공장 인근 쓰레기통도 뒤졌다. “먹어보고, 갈라보고, 씻고, 말리기를 반복하며 만두피와 만두소를 분석했다. 1년 남짓 동안 만두 수천 개를 먹은 것 같아요. 나중에는 만두를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만두소 중에서 김치, 고기, 당면, 부추, 대파, 양파 같은 재료는 눈에 잘 띄어서 분석하기 수월했다. 반면 소금·후추 등 첨가물의 양과 재료의 배합 비율은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다. 5개월여 재료의 종류, 배합 비율 등을 바꿔가면서 만두소 개발에만 매달렸다. 그쯤 되니 제법 그럴싸한 맛과 풍미가 나왔다. 만두소가 질척하지 않아 재료의 식감이 살아 있으며,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이제는 만두 빚는 실력도 제법 ‘달인’ 수준에 이르렀다. “만두 빚기 달인의 동영상을 수천 번 돌려보며 익혔어요. 모양과 속도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지요.”

이쯤이면 체인점을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그는 “현재로서는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전에 손님 한 분이 만두 장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체인점 형태로 영업하도록 브랜드를 내드린 적이 있어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제야 제 밥벌이를 하는 수준인데 다른 분들한테 장사를 권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지요.” 그는 지금 가게에서 하루 평균 만두와 찐빵이 1천 개 이상 팔리면 체인점을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이어진 웃음으로 미뤄 그조차 농담인 듯했다.

“어릴 적부터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삼오랑왕만두는 개업 때부터 나눔과 베품의 삶을 실천 중이다. 매월 첫쨋주 토요일, 삼오랑왕만두에서 진행하는 ‘해피데이’를 통해서다. 이날 김 대표는 손님들에게 왕만두와 왕찐빵(300개·30만원 상당)을 무상으로 나눠준다. 공짜 찐빵과 만두를 맛보는 손님들은 그 대신 매장 앞에 비치된 모금함에 자발적으로 기부하면 된다. “뜻은 있으나 실천하지 못했던 분들에게 기회를 드리자는 취지이지 절대 강요는 아닙니다. 돈은 형편껏 알아서 내면 되고, 내지 않아도 됩니다.”

첫쨋주 토요일은 공짜… 기부금은 전액 기부

올해로 3년째, 매달 모금액은 4만~8만원이다. 전액 인근에 위치한 종합사회복지관 ‘사랑의전화’에 기부한다. 그는 “기부금이 점점 늘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처음엔 별 기대 없이 일종의 운동, 시위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특별한 행사나 모금 단위가 아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게 기부문화임을 더 많은 분들이 공감했으면 했지요. 한 예로 전국의 상점들이 ‘해피데이’에 동참하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새마을식당’ 등을 성공시킨 외식업계의 ‘미다스 손’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는 그의 롤모델이다. 단, 그의 주요 공략 분야는 만두, 케이크, 떡, 음료 같은 포장 판매가 가능한 제품이다. 왜 테이크아웃일까. “임대료, 인건비 등을 감안하면 조리업은 리스크가 크지만, 테이크아웃은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해요. 백종원 대표가 성공한 요식업계와 달리 시장을 개척할 여지도 많고요.”

그는 한 골목에 자신이 개발한 음식을 파는 상점이 죽 늘어선 테마거리를 언젠가 만들고 싶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요즘 신규 사업을 구상 중이다. “아직 젊으니까요.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장차 태어날 2세에게 멋진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삼오랑왕만두’를 검색했다. 2012년 케이블채널 음식 프로그램 <테이스티로드 3> ‘꽃미남 셰프 맛집’ 편에 소개된 적이 있다. 또한 그의 ‘베푸는 삶’을 소개하거나 ‘공덕동 맛집’으로 추천한 블로그가 여럿 눈에 띄었다. 김 대표야말로 전형적인 ‘노마드 경제인’ 아닐까.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