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0:21 수정 : 2014.06.09 17:17

서울 서초구에 자리한 서래마을은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의 약 40%가 몰려 살고 있어서 ‘프랑스 마을’로 통한다. 1985년 프랑스학교가 옮겨오면서 형성된 이곳은 중상층을 위한 유럽풍 고급 빌라가 밀집해 있다. 프랑스학교 어린이들이 다양한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가면을 쓴 채 가장행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2012년 12월 서울의 외국인 수는 140만9577명이다. 서울 인구 10명당 1.4명이 외국인이다. 외국인 중 거주자(장기 체류)는 총 외국인 수의 28.8%인 40만6293명이다. 서울의 외국인 10명 중 3명이 장기 체류자다. 전체 인구 대비 외국인의 비중이 14%에 달하는 것은 서울이 한국 사람만의 도시가 아님을 말해준다. 서울의 글로벌 도시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외국인 거주자 수를 기준으로 하면 1998년 5만9천 명에서 2012년 40만6293명으로 약 7배 증가했다. 서울의 총인구 대비 외국인 비중은 1998년 0.49%에서 3.8%로 늘었다.

외국인이 많아지면서 국적(인종)별로 집단 거주하는 이른바 ‘미니글로벌 빌리지’(Mini-global Village)가 서울에 30여 곳이 생겨났다. 그 덕분에 서울은 현재 글로벌 시티(Global City)를 넘어 코즈모폴리스(Cosmopolis)로까지 변하는 중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선도하는 사람과 활동이 집적하는 도시가 ‘글로벌 시티’라면, 이를 넘어 여러 이주집단들이 호혜롭게 공존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세계의 보편도시를 ‘코즈모폴리스’라고 한다. 이러한 도시적 변화는 아직 초기 단계라서 그 내부에는 대립과 균열의 지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많은 외국인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지만 각 집단 혹은 거주지가 서울의 주류사회에 통합되는 방식이나 정도는 다르다. 어떤 집단은 주류사회의 상층부와 연결된 채 거주지 지역사회(Host Community)나 주민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어떤 집단은 이등시민(Secondary Citizens)과 같이 차별과 배제를 겪는다. 그 차이는 집단(인종)별 출신국의 위상과 문화적 역량, 이주자들이 서울의 노동시장과 주택시장에서 차지하는 지위, 나아가 이주자를 수용하거나 대하는 거주지 주민들의 사회계층적 성향,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적 지원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난다.

한국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와 서울의 미니글로벌 빌리지

크게 보면 서울에서 미니글로벌 빌리지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한국 경제가 글로벌화하는 결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970∼80년대 한국 경제는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의 도움으로 성장과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외국상사 주재원이나 국제기관 관계자 등은 외국인 학교나 고급 주택들이 있는 쾌적한 도심부 주변(한남동·동부이촌동·신촌 등)에 모여 살면서 특권적인 외국인 주거지(Enclave)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한국 경제는 급격한 임금 상승과 노동력 부족의 문제를 겪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3세계로부터 저임금 노동자를 대거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도시 외곽 공단 주변의 저렴한 노동자주택(벌집 등)에 대규모로 정착하면서 ‘외국인 노동자 거주지’가 이곳저곳에 빠르게 생겨났다. 신자유주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자본의 초국경적 이동과 함께 ‘글로벌 전문직’(Globalized Professionals) 대 ‘주변적 저기술직’(Marginalized, Poorly Skilled)으로 ‘양극화된 노동이동’(Bipolar Labor Migration)을 동반한다. 글로벌 전문직은 라이프스타일이 나라별로 다르지 않다면, 주변적 저기술직은 인종적 라이프스타일을 버리지 못하는 문화적 특징이 있다. 양극화된 노동흐름은 이를 받아들이는 글로벌 시티의 ‘노동시장과 주택시장을 분절’시키면서 데이비스(Davis)가 말하는 ‘복잡한 계급, 인종, 토지이용의 모자이크’(complex class, ethnic and land use mosaic)를 도시공간에 만들어낸다. 서울의 ‘미니글로벌 빌리지’는 양극화된 노동흐름이 서울의 노동시장과 주택시장의 조건과 맞물려 만들어낸 ‘다문화 공간 모자이크’인 셈이다. 서초구의 서래마을과 구로구의 연변마을(가리봉동)은 초국경적인 노동흐름이 서울 대도시 특유의 사회공간적 조건과 맞물려 형성된 상이한 다문화 공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강남의 ‘프랑스 엔클레이브’, 서래마을

서래마을은 ‘프랑스 마을’로 불린다. 서울의 부유한 강남 3구 중 하나인 서초구에 자리한 서래마을은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의 약 40%(2011년 현재 전체 프랑스인 1261명 중 415명)가 몰려 살고 있는 ‘작은 프랑스 엔클레이브’(Small French Enclave)다. 이 마을은 한남동에 있던 프랑스 학교(Lycée Français de Séoul)가 1985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형성됐다. 중상층을 위한 유럽풍 고급 빌라가 집단촌을 이루고 있는 신주거지로서의 매력이 학교 이전과 함께 프랑스인들의 집단 거주를 이끌어냈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의 구릉지나 마을숲이 고향 마을을 연상시켜 고국의 향수를 달래준다고 여긴다. 실제 구릉지(서리플공원)의 일부가 ‘몽마르트’라는 이름을 달고 공원으로 꾸며져 있어 프랑스인들은 이곳을 즐겨 이용한다.

이곳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은 한국에 주재하는 프랑스계 다국적 상사인 르노(Renault), 테제베(TGV), 카르푸(Carrefour), 에릭슨(Ericson) 등의 직원이거나 제휴한 한국 대기업(삼성전자 등)에 파견근무하는 이들이다. 근무처도 주로 서울 강남 일대에 분포돼 있다. 전형적인 ‘글로벌 전문직 종사자’들로서 이들은 고소득(거리에서 만나 인터뷰한 이들의 월급은 6천~8천달러(약 600만~700만원)로, 집값 등은 별도로 수령)의 안정된 생활을 향유하고 있다. 주재국(한국)으로부터 기업투자, 무역, 경영 등을 수행하는 주재원이나 고기술 전문직에만 제공하는 비자(Visa)를 받고 2∼3년 체류하다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옮겨가곤 한다.

이들이 서래마을에 몰려 사는 주된 이유는 고급 빌라 같은 주거 조건 외에 자녀를 교육할 수 있는 프랑스 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서래마을 거주 프랑스인들의 일상 교류에서 거점 역할을 한다. 또한 학부모들 사이의 사교활동은 물론, 자녀를 중심으로 안정된 가족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다.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인 프랑스 가족도 많아 학교는 취학 자녀를 둔 프랑스인과 한국인(특히 지역주민) 사이를 특권적으로 이어주기도 한다. 이는 프랑스 문화를 동경하는 한국 중상층들의 의식과 태도에 의한 것이다. 어떻든 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프랑스인 거주자들은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일상 리듬을 서래마을이란 공간에서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프랑스풍 문화 생산 기구들이 배치돼 있다. 가령 서래마을을 가로지르는 중심길(서래길)을 따라 양쪽에 들어선 유럽식 레스토랑, 디저트 카페, 와이너리, 베이커리, 부티크 등은 프랑스 거주자들이 고유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적 리듬을 만들어준다. 이 공간적 리듬 덕택에 정체성을 바탕에 둔 일상생활의 재생산이 안정적으로 이뤄진다.

서래마을의 공간적 형성은 프랑스인의 일상 리듬이 장소적으로 반복되는(재생산되는) 것의 직접적 결과지만, 이면엔 한국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와 유럽 문화를 동경하는 지역의 계층문화가 중요한 조력자로 역할하고 있다. 즉, 교육·거주·소비·여가 등의 일상활동에서 프랑스식 라이프스타일이 유지되는 것은 글로벌 전문직이란 그들의 특권적 지위가 한국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에 의해 보호 내지 지지받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프랑스 문화를 흠모하는 중상층 배경의 지역주민들이 이들을 ‘특별손님’으로 대하고 이들의 일상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욕망이 서래마을 내에 다양한 프랑스풍 문화기구(레스토랑, 카페 등)를 만들어놓았다. 여기엔 서래마을의 이국적 풍경을 ‘명소화’, 즉 고급 장소 관광으로 상품화하려는 지역주민들의 셈법이 작용하지만 그 뒤엔 프랑스 문화를 그들의 계층문화와 일체화하려는 욕망이 웅크리고 있다.

외지인들(관광객, 답사자, 소비자, 방문자 등)의 입을 통해 이국적 풍경이 알려지면서 서래마을은 ‘불란서 마을’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지자체(서초구)는 서래마을을 ‘장소판촉’(Place Marketing)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고 이를 위한 여러 사업들을 벌였다. 서초구는 서울 전역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문화장소로 꾸미기 위해 지역주민들과 함께 지역사회의 각종 시설들을 프랑스 코드로 덧칠했다. 가령 2005년 서울시의 협조를 받아 서초구는 서래마을 남쪽 녹지대(서리플공원)에 2만m² 규모의 ‘몽마르트공원’(Montmartre Park)을 조성했다. 프랑스 거주자는 물론 지역주민들도 모두 이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프랑스와 연상작용을 경험한다. 또한 서래길을 따라서는 프랑스어로 된 학교 간판, 도로 표시판, 지역 안내판이 이곳저곳에 설치돼 있고, 길바닥도 프랑스 국기 문양을 본뜬 패턴으로 꾸며져 있다. 프랑스 국기가 펄럭이는 건물 옆에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프랑스 어디에 와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서래마을의 프랑스 문화의 기호와 코드는 이런 점에서 하나의 스펙터클로서 연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출은 프랑스 거주자와 주민들이 함께하는 페스티벌 같은 것에 의해 더욱 고취되고 있다. 서래마을에서는 계절별로 다양한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프랑스인들이 여는 것도 있지만, 한국 사람들(주민 혹은 외지인)이 기획하고 후원해 열리는 게 더 많다. 한-프랑스 친선협회(Association des Francophone de Corée 혹은 Circle des Franco-Coréen)가 있어 양국 간 민간인 차원의 문화교류가 서래마을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서울시는 2008년 서래글로벌빌리지센터를 설치하고 서래마을 프랑스인을 포함해 외국인 거주자들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비자 발급, 관광 안내, 취업 안내, 한국 문화 배우기 등)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센터장은 젊은 프랑스인 여성인데 서울시가 정식으로 임명한 사람이다. 따라서 센터는 외국인을 위한 서비스 제공 이상으로 지역주민과 프랑스 거주자들 사이에 일상적인 만남과 교류를 제도화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서초구청 내에도 서래마을과 거주 프랑스인들을 돕고 지원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가 별도로 있다. 서래마을 거주 프랑스인들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데는, 이렇듯 글로벌 전문직이란 프랑스인들의 특권적 지위와 함께 유럽 문화를 선호하고 받아들이는 지역사회(서초구)의 계층문화, 나아가 서울시나 서초구의 정책적 지원이나 보호 등의 이유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가리봉동의 연변, 조선족 마을

중국 연변은 중국에 살고 있는 200만 명 조선족의 중심지다. 가리봉동 연변마을은 중국에서 들어온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면서 생겨난 거리 풍경이 마치 연변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0년대 조성된 구로수출공단 인근에 자리한 이곳에 조선족이 대거 몰려와 살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에 의해 조선족 방문이 자유로워지면서부터다. 조선족들은 가리봉동에서 집단거주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서울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조선족 집단 주거지는 인근의 금천구, 영등포구, 관악구, 심지어 강북의 광진구와 같이 저소득층이 상대적으로 많아 집값이 저렴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 주로 분포해 있다. 따라서 밀집도나 거리의 풍경으로만 본다면 연변마을은 과거만큼 활성화돼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리봉동 전체 인구(2010년 기준)의 33.4%가 조선족일 정도로 여전히 서울의 대표적인 조선족 마을로 간주되고 있다. 가리봉동 조선족들은 대부분 가리봉시장 주변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노후 주택을 개조해 만든 벌집에 거주하고 있다.

조선족은 인종적으로 한국인이지만 국적으로는 중국인이며 돈을 번 뒤 중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이가 대부분일 정도로 중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이들은 한국에 들어와 있는 여러 외국인 노동자 집단의 하나다. 그러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 달리 이들은 동포로서 권리와 혜택을 제한적으로나마 누리고 있다. 가령 조선족들은 방문비자를 발급받아 체류하며 일용 건설, 식당 서비스, 가사도우미, 간병 등과 같은 35개 분야에서 취업할 수 있도록 허용돼 있다. 이러한 일자리는 이른바 ‘3D 업종’이라 해서 한국인들이 대부분 취업하길 꺼리는 분야다. 한국 경제가 고도화(글로벌화)되면서 비게 된 노동시장의 바닥 부분, 즉 ‘주변화된 저기술 노동 부분’이 제3세계에서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부터다. 조선족 노동자들도 이렇게 해서 들어온 ‘주변화된 저기술 노동’의 한 유형이다. 그러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 달리 도시 서비스업에 많이 취업해 있는 것은 이들이 우리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구사 능력 덕분에 도시 일자리를 쉽게 얻지만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이 가장 낮은 노동으로 취급되는 것은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인 노동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은 한국 자본주의를 지탱시키는 ‘노동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족 노동자들이 서울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구로구 가리봉동에 몰려와 살기 시작한 것은 이곳에서 저렴한 거처를 특별히 쉽게 구할 수 있어서였다. 가리봉동 일대에는 과거 수출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살던 저렴한 작은 셋방(벌집)이 많았는데, 공단이 문을 닫고 노동자들이 떠나 대부분 비게 되면서 집주인들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지역경제도 급격하게 나빠졌다. 1992년 한-중 수교로 중국 동포들이 한국의 젊은 노동자들이 떠난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저소득층 집주인들은 물론이고 지역 상인들은 이들의 이주를 환영했다. 조선족들이 들어온 뒤 지역경제(특히 가리봉시장)는 실제 빠르게 활력을 찾아갔다. 서울의 주택시장에서 가장 낮은 부분으로 진입했지만, 조선족과 (저소득층) 지역주민들은 특유의 동포의식을 바탕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만들어갔다. 그 덕분에 가리봉동은 더 많은 조선족을 받아들이면서 중국계 조선족이 집단거주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조선족 타운’으로 부상했다.

가리봉동 연변마을은 가리봉시장 골목을 따라 주변으로 흩어져 있는 옛 노동자 주거지(벌집촌)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월세가 10만~15만원이어서 월평균 100만~150만원(서래마을 글로벌 전문직 소득의 5분의 1 수준)을 버는 조선족 노동자들이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최적의 거처인 셈이다. 조선족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주거 문제를 저렴하게 해결할 뿐 아니라 이곳의 여러 관계망(개인적 관계, 새벽 인력시장, 구직센터 등)을 통해 일자리도 쉽게 구한다. 심지어 불법체류자들도 동료나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머물면서 일할 수 있다. 남구로역은 조선족 노동자들이 저렴한 교통비로 서울 전역의 일터로 출퇴근하는 대문이다. 가리봉동 조선족들은 거처를 이곳에 두고 지방을 돌아다니며 일하다가 주말에 올라와 쉬곤 한다.

조선족 노동자들 중에는 가족 없이 혼자 와서 일하는 청·장년 남성이 유독 많다. 가족을 데려오거나 부양하는 것이 힘들고, 또한 돈을 벌려고 혼자 와 있기 때문에 이들은 최소 비용으로 일상을 꾸려간다. 벌집에 사는 것도 주거비를 줄이는 한 방법이다. 또한 가족 없이 살다보니 개인의 일상은 단순하고 사회적이지 못하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면서 가리봉시장에서 저렴한 식재료(중국 재료)를 구입해 식사를 해결하고 잠을 자는 일상을 반복한다. 지역주민과 교류하거나 지역사회가 제공하는 사회적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다. 주말이 되어도 대부분 숙소에서 소일한다. 경제적 여유가 조금씩 생기면서 이들은 중국 동포들을 만나 밥이나 술을 같이 먹고 노래방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회포를 풀곤 한다. 가리봉동 중앙통을 따라서는 중국 연변에서나 볼 수 있는 식당, 술집, 노래방, 식품가게, 옷가게 등이 즐비하다. 파는 물건도 그렇지만 간판 등 길거리 장식들도 중국풍 그대로다. 저녁이나 주말엔 중국말을 하거나 연변 사투리를 쓰는 중국 동포들로 거리가 넘쳐난다. 거리 풍경이 영락없이 연변의 어느 곳이다. 서래마을 프랑스인들이 가족과 학교 중심의 일상을 꾸리면서 고급 글로벌 라이프스타일을 특권적으로 향유한다면, 연변마을 조선족들은 거리 시장에서 저렴한 상품 소비를 통해 그들식(중국풍)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해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서래마을의 프랑스인들에게 학교, 빌라, 놀이터, 공원, 카페, 베이커리, 레스토랑, 부티크숍, 문화교실 등이 그들의 일상 재생산을 돕는 공간적 장치라면, 연변마을의 조선족에게는 시장통의 중국풍 식당, 술집, 가게, 벌집 등이 그들의 일상 재생산을 돕는 공간적 시설인 셈이다.

조선족의 이러한 재생산 방식은 서래마을의 프랑스인들과 달리 거주지의 지역사회나 지역주민들과의 어떠한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집주인이나 시장 상인들이 경제적 이익 때문에 조선족과 세입자 혹은 고객으로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 밖의 지역주민들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중국 동포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기피한다. 조선족의 예의 없고 지저분하며 탈법적인 행태문화는 그들을 멀리하고 배척하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지역주민들의 처지에선 일상생활에서 조선족들과 특별히 엮일 필요성을 못 느낀다. 지역주민들은 배타적 우월의식마저 가지고 있어 조선족들이 지역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인식과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지역주민들은 조선족 노동자들을 아예 한국 사회의 이등시민으로 여기는 의식 혹은 태도마저 내면화하고 있다. 지역주민들이 조선족 노동자를 낮은 계층의 신분집단으로 여기는 것은 저소득 노동자 지역에 오래 살면서 갖게 된 그들의 계층적 피해의식을 보상받으려는 잠재의식의 발로일지 모른다.

지역사회로부터 배제와 단절은 공공서비스 차원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서래마을의 프랑스인들과 견줄 때 연변마을의 조선족들은 지역사회, 특히 지자체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나 공공시설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다. 많은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 그들의 자녀를 교육할 전용 학교가 없다. 주거의 질이 불량하지만, 외국인 거주와 관련된 당국의 지원은 하나도 없다. 쉼터나 공원도 이곳엔 없다. 흔한 문화시설이나 복지시설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서초구청과 달리 구로구청에는 연변마을(인근 지역 포함)의 중국 동포 관련 업무를 별도로 담당하는 부서나 인력이 없다. 서울시에서 최근에 ‘서남권 글로벌센터’를 설립했지만, 서울의 서남권 지역 외국인을 위한 각종 다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기구일 뿐이다. 동포로서 조선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지만 지역사회와 단절돼 있고 적절한 보호도 받지 못하면서 이들은 인권침해, 주거 불안, 경제적 파산, 범죄 노출, 건강 훼손 등의 문제를 집단적으로 겪고 있다. 개인의 부적응과 실패로 발생하는 듯하지만, 집단의 이러한 문제는 이들을 배제하고 배척하는 주류사회의 문화와 제도에 의해 근본적으로 야기된 것이다. 결국 시민단체(지구촌나눔, 조선족권리찾기, 조선족교회 등)들이 나서서 조선족이 직면한 집단적 문제를 해결하려 돕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조선족 문제는 글로벌화하는 한국 자본주의에 의해 구획된 계급·계층적 굴레 속에 이등시민으로 갇힘으로써 겪는 윤색된 인종차별의 문제다. 따라서 주류사회로부터 배제와 단절이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조선족으로 대표되는 ‘주변부 저기술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분극화되는 코즈모폴리스 서울

자본주의 수도로서 서울은 한국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와 더불어 내부로부터 빠르게 글로벌화하고 있다. 서울은 더 이상 ‘한국 사람만을 위한 도시’가 아니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서울의 보통 시민으로 우리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차별적으로 받아들인다.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에 의해 노동 이동이 노동 역량에 따라 양극화되고 있지만, 도시 사회에 최종 수용된 모습이 ‘서래마을 대 연변마을’과 같이 나뉜 것은 수용 지역의 계층적 선택성과 무관치 않다. 급격한 자본주의적 도시화를 겪으면서 내부화된 우리의 계층·계급적 삶의 양상이 도시 글로벌화의 분열과 갈등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것이다.

글 조명래 단국대 교수, 환경정의 공동대표, 서울시 지속가능발전위원장. <현대사회의 도시론>(문화관광부 우수도서), <녹색사회의 탐색>(학술원 우수도서), <공간으로 사회 읽기> 등 70여 권(공저 포함)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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