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09:06 수정 : 2014.06.09 17:18

세월호 침몰 이튿날인 4월17일 중증장애인 송국현씨가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혼자 움직이지 못하는 중중장애인임에도 장애인등급제 때문에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한 그는 침대 위에서 화마가 번지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사망 26일 만인 5월12일 ‘장애인등급제 희생자 고 송국현 동지의 장애인장’이 치러졌다. 한겨레 김성광
세월호 유족은 묻는다. “우리가 국민이냐”고. 세월호 유족은 말한다.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처방이 없으면 또 다른 세월호는 필연”이라고. 그들과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수년째다. 아무도 말을 귀담아듣지 않자 죽음으로 구조 요청을 보냈다. 기업과 국가는 죽음마저 ‘왜곡’했다. 그들은 오늘도 구조 요청을 보낸다. 잊히지 않기 위해. 세월호 참사 이후 밀양·울산·광화문 농성장에서 보고 들은 어느 ‘국민’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경남 밀양은 적막했다. 연대하러 온 사람들이 북적였던 그곳엔 긴장감이 대신했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경찰과 갑자기 올라가는 철탑이 마을을 짓누르고 있었다. 한국전력이 농성장 철거를 강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16일이었다. 주민들은 해왔던 대로 마을을 지켰다. 9년째다. 나무에는 손때 묻은 밧줄이 걸려 있다. 농성장 철거에 맞서 “언제든 목매달고 죽기 위해” 묶어놓은 것이다.

유동환(46)씨는 이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버지 유한숙(당시 나이 74살)씨를 죽음으로 내몬 송전탑 공사가 3월부터 시작된 탓이다. “공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 (제가)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자괴감과 모멸감을 느껴요.” 지난해 말 양돈업을 하던 유한숙씨가 농약을 마셨다. 응급실에서 눈을 감기 전, 그는 경찰에게 음독 원인을 밝혔다. “76만5천V 송전탑 때문에 죽으려 했다”고. 밀양경찰서는 이상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의 사망이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수단으로 호도되지 않길 바란다.” 장남 동환씨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이유다. 사람이 죽어도 송전탑 공사는 멈추지 않고, 아버지는 죽어서도 쉬지 못한다. 고인은 여섯 달째 냉동고에 안치돼 있다. “한전과 정부는 최소한의 인륜도 도덕도 없습니다.” 지난 4월22일 정부는 공청회 없이 송전탑을 건설할 수 있게 하는 전기사업법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세월호 침몰 이튿날인 4월17일. 송국현씨가 숨졌다. 그의 나이 53살. 23년간 시설에서 살다 세상에 발을 디딘 지 6개월이 되던 때였다. 송지인(가명)씨는 국현씨보다 나이는 어려도 자립생활 선배다. “(국현 형이) 시설에 있었으면 안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나오라고 해서 죽게 된 것 같아 미안해요.” 지인씨는 국현씨와 9년간 같은 시설에 있었다. 지인씨가 장애인단체의 도움으로 먼저 시설에서 나온 뒤 국현씨에게 ‘탈시설’을 권유했다.

“(형이) 사람과 어울리고 움직이는 걸 좋아해 시설에 있는 걸 답답해했어요. 자유로움을 갖게 해주고 싶었어요.” 형이 시설에서 나오자 동생은 멘토를 자처했다. 지하철 타는 법, 홀로 서는 법 등을 알려주었다. 시설에서 나온 형은 모든 것이 서툴렀다. 동생은 “마음 강하게 먹고 독립심을 길러야 한다”고 충고했다. 형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지난 4월13일. 서울의 한 자립생활 체험홈에 불이 났다. 국현씨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혼자 움직이지 못한다. 언어장애도 있다. 국현씨는 침대 위에서 화마가 번지는 걸 지켜봤다. 외마디 비명도 없이. 장애인단체는 “활동보조만 있어도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며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화재가 나기 전 국현씨는 정부에 여러 번 활동보조 지원을 요청했다. 중증장애인 24시간 활동보조 지원과 장애등급제 폐지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공약이었다. 장애심사센터가 판정한 그의 장애등급은 3급이었다. 활동보조는 2급까지만 지원된다.

‘산재노동자의 날’ 익사, ‘장애인의 날’ 최루액

국현씨는 화재가 난 지 나흘 만에 세상을 떴다. 고인의 죽음을 수습하기도 전에 지인씨는 또다시 황망한 소식을 들었다. 지난 4월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단체들은 버스타기 행사에 나섰다. 버스타기는 이동권 확보를 알리기 위한 것으로 몇 해째 진행한 행사다. 버스표도 단체로 미리 구매했다. 경찰은 버스를 타려는 장애인을 향해 최루액을 난사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경찰 쪽은 “유감”이라고 했다. 지인씨가 인상을 찡그리며 힘들게 말했다. “(마음이) 너무 안 좋아 (뭐라) 할 말이 없어요.”

세월호 침몰이 참사로 이어질 즈음, 정현중(가명)씨는 뉴스를 보다 TV를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고 했다. 참사 책임을 미루는 정부의 태도가 정몽준씨와 닮아서였다. 정몽준씨는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다. 현중씨는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다.

4월28일 밤, 땅과 바다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울산에는 세찬 비가 내렸다. 현중씨는 담배를 연거푸 물었다. 3월부터 4월26일까지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계열사 포함) 7명이 산재사고로 숨졌다. 추모 현수막에 ‘7명’이라고 쓴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야간작업 중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 안전 난간도 없었다. 현중씨는 현수막 숫자를 ‘8명’으로 고쳤다. 모두 하청노동자다.

산재 유형은 추락·익사·끼임 등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고다. 대부분 최소한의 안전 조처만 이행했다면 막을 수 있는, 사실상 방치된 죽음이었다. 이날은 ‘세계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었다. 사업장에선 고용노동부 관계자가 중대재해를 조사하기 위해 특별근로감독을 벌이던 중이었다.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의 조선업체다.

서울시장 예비후보로 나선 정몽준씨는 ‘시민 안전’을 약속했다. 현대중공업의 산재사고에 대해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가래침을 뱉어주고 싶습니다.” 새까맣게 타버린 심정을 현중씨는 이렇게 토로했다. 언론의 관심도 적다. 언론이 ‘문제시’하는 건 노동자 개인의 안전불감증, 자살 시도 논란 등이다. 왜 ‘사람이 일하다 죽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정몽준이 유족과 노동자에게 사과 한마디 안 하면서 시민 안전 운운하는 건 사회가 (정몽준을) 용인해서가 아닌가요. (무관심은)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4월29일. 지인씨는 청와대 앞으로 향했다. 억울해서다. 이번엔 그가 알고 지내던 동생이 사고를 당했다.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오아무개씨가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 호흡기 고장으로 중태에 빠졌다. 반복되는 사고를 보다 못한 지인씨는 청와대 앞에서 삭발을 했다. 함께한 장애인단체들은 “정부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기다리다 죽느니 싸우면서 죽겠다”고 외쳤다.

지인씨도 활동보조가 필요한 지체장애인이다. 활동보조 지원 서비스를 신청하려면 장애인등급 재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등급 하락 우려가 있어 못하고 있다. 등급이 하락하면 장애인연금조차 못 받게 될 수도 있다. 그는 함께 사는 친구들에게 활동보조 도움을 받고 있다. 지인씨는 “도와달라는 것도 한두 번”이라며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매번 미안하다”고 했다. 활동보조 없이는 그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조만간 자립생활 체험홈에서도 나가야 한다. 건강상태도 좋지 않다.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요. 나도 곧 (국현 형을) 따라가야 할 것 같아서….”

지인씨는 서울 반포동에 있는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의 집 앞에도 갔다. 촛불을 들었다. 사과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문 장관은 “유감”이라고 했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지 않고 시끄럽게 한다”는 시민들의 수군거림도 들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봐요. 장애인들은 시설에서 보이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시설에 가만히 있지 않고 괜히 밖으로 나와 문제를 일으킨다는 식이죠.” 장애인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 송국현씨를 추모하는 분향소를 설치했다. 서울광장 세월호 분향소 옆이다. 광장을 메운 추모 행렬은 고인의 분향소로 이어지지 않았다. “형이 딱해요. 죽어서도 차별받는 것 같아요.”

울산 현대중공업 정문 건너편 인도에도 분향소가 설치됐다. ‘세월호 희생자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산재 사망 하청노동자를 함께 추모하는’ 분향소다. “시키는 대로 일했더니 하청노동자만 죽어간다” “위험작업 거부해 우리 죽음 우리가 막자” 등이 쓰인 현수막이 걸렸다.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이다. 울산 동구청은 분향소가 설치된 지 사흘 만에 강제 철거했다. 구청은 “인도를 불법 점용해 통행 불편 등을 초래했기 때문에 도로법에 따라 행정 집행을 했다”고 밝혔다.

현중씨와 노조·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경찰 경비가 삼엄하다. 교통과·형사과·정보과 소속 경찰들과 전경들이 곳곳에서 진을 쳤다. 사진 채증도 잊지 않았다. 현중씨는 혀를 찼다. “세월호 희생자들도, 숨진 노동자들도 모두 막을 수 있었던 억울한 죽음이에요. 죽은 노동자들은 울산 동구 주민이기도 하고요. 동구청이 나서서 추모해도 모자랄 판에, 뭐가 두려워 추모조차 막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어서도 차별받는, 죽어서도 쉬지 못하는

현중씨의 왼쪽 약지는 곧게 펴지지 않는다. 힘줄이 끊겼다. 언제 다쳤는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난다. “일하는 데 큰 지장이 없어 공상처리(산재 신고 없이 회사가 치료비 부담) 했어요. 대부분의 하청노동자들이 그래요.” 운이 좋았다고도 했다. “일하다 낙하한 물체에 맞았어요. 머리에 맞지 않아 다행이었죠.” 조선소에선 혼재 작업이 흔하다. 용접(화기 작업)을 하는데 옆에선 페인트칠(도장)을 한다. 가스가 찬 공간에 불꽃이 떨어지거나, 일하는 사람들 머리 위로 물체가 떨어지는 일이 왕왕 발생한다. 하청업체들은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전체 공정을 아는 원청(현대중공업)이 안전관리를 총괄해야 하지만 현실은 요원하다.

현중씨에게 사달이 난 건 2011년이다. 작업 중 어깨를 다쳐 사업장이 지정한 병원에 갔다. 병원은 공상처리를 했다. 통증이 심해 휴가를 신청하니 회사 쪽은 무급을 통보했다. 일터로 나섰고, 근육이 파열됐다. 결국 수술대에 올라 어깨에 핀을 박았다. 산재를 신청하니 회사는 퇴사를 종용했다. 근로복지공단도 퇴행성 개인 질병이라며 산재 신청을 불승인했다. 이렇듯 대부분의 하청노동자들은 산재 인정의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한다. 울산 동구청이 현대중공업과 미포조선의 사내 하청노동자 521명을 조사한 결과 5.7%만 “다쳤을 때 산재보험으로 처리했다”고 답했다. 현중씨는 끝까지 맞섰다. “배신감 때문이었어요. (사람을) 실컷 써먹다가 망가뜨려놓고 폐기물처럼 버리는 것 같았어요.” 현중씨는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에 가입해 싸움을 시작했다. 산재 인정과 해고 무효를 이끌어냈다. 그 뒤 현중씨는 동료들이 다치면 산재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동료들이 일하다 다치거나 죽으면 사 쪽은 개인 질병, 가족사, 사생활, 개인 비리, 자살 시도 등을 운운하며 죽음을 농락했어요. 경황이 없는 유족들은 회사와 경찰의 회유에 말려들 수밖에 없죠. 진짜 힘든 일은 장례가 끝난 뒤에 시작돼요. 그래서 세월호 유족이 걱정입니다.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을 간절히 바랄 텐데, 그 바람을 우리 사회가 지켜줄 수 있을지….”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규명해주십시오. 한전은 불법 공사를 중단하고 선친과 유족에게 사죄하십시오.” 고 유한숙씨가 돼지를 키우던 축사 건물에 아들이 걸어놓은 현수막 문구다. 생존 가능성 5%. 음독 뒤 치료를 받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동환씨는 약을 구하러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유한숙씨는 나흘 만에 세상을 떴다.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또다시 뛰어다녔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늘로 보낼 수는 없었다. 1인시위도 여러 차례 했다. 청와대·국회·산업통상자원부·국민권익위원회 등에 탄원서를 넣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달라진 것 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사이 밀양 주민의 세 번째 자살 시도가 이어졌다.

5월8일 어버이날.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진실이 일부 확인됐다. 장하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고인의 육성이 담긴 경찰 진술 녹취록 일부를 입수해 공개했다. “송전탑 때문에 그래. 송전탑 때문에 내가 돼지도 못 먹이고, (송전탑) 하나 옮기면 되는데.” 유한숙씨가 경찰에 밝힌 음독 이유다. 녹취록에 따르면 경찰은 “오늘 (사모님과) 싸운 일이 있는지” “오늘 특별하게 마음이 움직였다든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 등 고인의 진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한 정황도 포착됐다. 장 의원은 “경찰은 송전탑으로 인한 죽음이 여론에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사인을 사생활 문제로 축소했다”며 “고인이 죽음 직전 마지막 힘을 다해 한 말까지 은폐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경찰은 “여러 사람의 진술을 통해 복합적 원인으로 결론 내렸다”는 입장이다. 밀양경찰서는 2012년에도 고 이치우(당시 나이 74살)씨의 분신자살 때 수사 결과를 ‘부주의에 의한 실화’로 발표했다가 ‘분신자살’로 사인을 정정해 비난을 샀다. 고 이치우씨가 경작했던 논 한 가운데에는 송전탑이 들어섰다. “국책사업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조차 않고, 송전탑으로 인한 죽음마저 덮고 (공사를) 밀어붙이기만 했어요. 이게 제대로 된 국가입니까. 이건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겁니다.” 아들의 눈에 분노가 번졌다.

침묵하는 정부… “이게 제대로 된 국가인가”

지난 4월21일 오후 울산 현대중공업 선박건조장에서 화재가 나고 폭발로 이어져 하청노동자 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다.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는 ‘시민 안전’을 약속했지만, 정작 ‘산재 왕국’ 현대중공업의 산재 사고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뉴시스
같은 날 송국현씨의 죽음을 정부가 방치한 정황도 드러났다. 국현씨는 화재 사고 일주일 전 장애등급 이의신청을, 3일 전 긴급복지지원을 신청했다. 모두 거부당했다. 김용익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날 고인이 2010년, 2012년, 2014년 세 차례에 걸쳐 받은 병원진단서를 공개했다. 송씨는 보행과 휠체어 이동, 언어표현 등이 불가능했다. 일상생활 전 영역에 활동지원이 필요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 의원은 “진단서를 보면 송국현씨는 장애 1급에 해당하는 심한 장애를 갖고 있었다. 장애심사센터의 3급 판정 결과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장애인의 삶을 고려하지 않고, 예산에 맞춰 행정 편의로 나눈 장애등급이 국현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병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은 “세월호 구조를 막은 것이 독점자본의 이윤 보장이었다면, ‘장애등급제호’에 탑승한 국현씨의 구조를 막은 건 등급제를 유지해 예산을 줄이려는 정부”라고 했다.

“정부에 구조 요청을 수차례 보냈습니다. 대체 얼마나 더 많은 하청노동자가 희생돼야 우리 요청에 관심을 보일 겁니까?” 하창민 전국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지회장의 말이다. 지회와 지역 노동·시민단체 등으로 꾸려진 ‘울산지역노동자건강권대책위원회’(대책위)는 현대중공업을 산재 은폐 혐의로 4차례 고발했다. 시간이 지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산재 은폐 적발 건수만 늘었다.

혐의는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대책위가 지난해 3월 울산 동구 정형외과 10곳을 방문해 산재 은폐 실태를 조사한 결과 106건의 사례를 적발했다. 5명의 조사원이 2주간 조사한 결과였다. 대책위는 노동부에 조사를 의뢰했다. 조사가 완료된 13건 중 11건이 산재 은폐로 확인됐다고 노동부는 밝혔다. 이 와중에 정부는 현대중공업에서 산재사고가 적게 일어났다며 산재보험료를 감면해주었다.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현대중공업과 계열사는 최근 5년간 955억여원의 보험료를 감면받았다. 정부가 현대중공업에 산재급여를 지출할 일이 적은 만큼 회사 쪽이 내야 할 보험료를 깎아줬다는 얘기다. 산재 다발 사업장에 대한 감독은 제대로 않고 사업주의 보험료를 깎아준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산재 은폐와 위험작업 외주화로 법적 책임은 피하면서 경제적 이익까지 누리게 된 셈이다. 중대재해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산재 사망 1위다. 이라크 전쟁 10년간 사망한 미국 병사 수는 한 해 평균 450명이다. 한국의 한 해 산재 사망 노동자는 그보다 4배 많은 2천여 명에 달한다. 하루 평균 6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다. 일터에선 세월호가 1년에 6번 침몰하고 있다. 이 또한 ‘빙산의 일각’이다.

5월12일. 송국현씨가 사망한 지 26일 만에 장례식이 치러졌다. 지인씨는 형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는 “형을 (마음에서) 떠나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서울 광화문역 광장 해치마당 지하도에서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650일 넘게 농성이 진행 중이다. 지인씨는 시민들의 관심이 아쉽다. “농성 초기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서명도 많이 했는데 이젠 그냥 지나가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대신 늘어난 것이 있다. 영정 사진이다. 활동보조인이 없는 사이 화재로 사망한 고 김주영씨 등 유사한 사고로 숨진 이들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국현씨의 사진을 옆에 놓으니 8명이 됐다. “또 다른 국현 형에게 또다시 미안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인씨의 바람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는 달라질 수 있을까

불행일까 다행일까. 밀양에서는 세월호로 인해 한전의 행정대집행이 연기됐다. 주민들은 “세월호 아니었으면 이거(움막) 벌써 다 뜯겼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 상태”라며 “경찰들이 숨도 못 쉬게 둘러싼다”고 입을 모았다. 또 “하루하루 전쟁 같은 날”을 보내느라 “사람들이 자꾸 쓰러져가고 있다”며 가슴을 쓸었다. ‘쓰러진다’는 수사법이 아니다. 실제 지난해 전국 송전탑 반대 네트워크와 국회의원 13명이 ‘765kV 송전선로 답사 보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1999년 76만5천V 송전선로가 들어선 충남 당진교로1리에 10명이 넘는 암사망자가 발생했고 그중 3~4명이 60대 이하였다. 다수 주민이 두통에 시달리고 있고, 돼지와 소가 유산하는 일도 빈번하다.

한 마을회관에서는 “밭일 하러 나간 사이 갑자기 올라간” 철탑을 놓고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돈 받아묵는 사람 돈 받아묵구로 놔두라.” “바빠죽겠는데 내보고 도장 받아 묻다 안 카나.” 고성이 오갔다. “동네 잘 팔아처무라.” 자리를 뜨는 사람도 생겼다. 끝내 한전과 합의한 사람, 끝까지 마을을 지키려는 사람 사이에 날선 공기가 흘렀다. 상처는 필연이다. 한전은 개별 보상으로 공사를 밀어붙였다. 마을과 마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끊어졌다. 남은 주민은 소수다. 다시 마음을 모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힘 닿는 데까지 주저앉지 말자”고. 한 할매는 정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힘없는 사람이라꼬, 약하다고 얕보고 힘으로 눌라뿌겠다는 거 아이가!”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국민 사과가 끝나자마자 원전 수출을 위해 아랍에미리트(UAE)로 떠났다. 핵발전 산업을 위한 송전탑 건설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다. 한전은 “밀양 송전탑 경과지 마을 90%와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누가 한전과 합의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몽준씨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확정된 다음날, 현대중공업은 안전대책을 발표했다. 3천억원 투입, 안전관리원 증원, 특별안전교육 실시 등이 골자다. 현중씨는 코웃음을 쳤다. “현대중공업이 요구한 생산 일정을 맞추느라 하청노동자들이 위험하고 무리한 공정을 강요받아도 안전관리원은 못 본 척하는 게 현실입니다!” 법으로 보장된 노동자의 위험작업중지권도 하청노동자의 몫이 아니다. 게다가 저가 수주, 환율 하락 등으로 ‘물량 빼기’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하청노동자들을 대거 투입했다. 위험의 외주화가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현대중공업이 생산(이윤) 제일 위주의 경영 기조를 바꾸지 않고 이를 사회가 묵인하는 한, 안전대책은 공염불로 그칠 수밖에 없다.

꽃은 잿빛이었다. 산재 하청노동자 길거리 분향소 앞에 놓인 국화꽃은 매연과 쇳가루 등을 뒤집어쓴 채 제 빛깔을 잃었다. 시민들은 갈 길 가느라 바빴다. 주부 이아무개(37)씨가 분향소 앞에 잠시 멈춰섰다. 이씨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사색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와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산재 사망의 뿌리는 같아요. 하지만 참사에 대한 경각심이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 같아요.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세월호 이후를 깊게 고민했으면 해요.” 일을 마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분향소 곁을 무심히 지나갔다. 회색 작업복에는 ‘안전제일’이라는 글씨가 왼쪽 가슴에 녹색실로 새겨져 있었다.

글 김은성 객원기자 frame4@hanmail.net

오다인 객원기자 ohdain@naver.com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