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10:54 수정 : 2014.07.03 11:11

서울 중구 대한문 분향소는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지부장(가운데)에게 ‘중년 아이돌의 완전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또 ‘행복해지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그는 대한문 분향소 철거를 막은 혐의로 구속됐다가 지난 4월1일 풀려났다. 지난해 6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염원을 담은 ‘H-20000 프로젝트’에서 김 전 지부장이 조합원들과 함께 자동차를 조립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박승화
사람이 변한다는 건 외모만이 아니었다. 목소리와 몸짓,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 모두가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탓도 있지만 특별한 시간의 흔적이 그에겐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맏상주, 맏형’이란 수식이 늘 따라다니는 사람. ‘반백의 노동자’란 표현이 현실적 힘을 갖는 사람. 형과 아우로, 동료와 동지로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지만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은 많지 않았다. 쌍용차 투쟁을 말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김정우(53).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 전 지부장이다.

까칠한 하얀 수염과 짧은 머리는 첫인상부터 단단한 느낌을 준다. 작은 체구지만 단단한 느낌은 오랜 시간 조기축구를 통해 단련된 몸 덕분이다.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풀어놓는 예의 그 구수한 뽕짝 메들리는 20대 초반부터 시작한 풍물패를 통해 몸속에 밴 흥의 결과다. ‘중년 아이돌의 완전체’라 불리는 김정우 전 지부장은 잘생겼다. 영화배우 원빈과 같은 강원도 출신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고향을 유추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10대 후반부터 고향을 떠나 살아온 그의 내력 때문인지, 말에서 사투리는 없다. 20대 때 쿠웨이트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미싱일이 첫 직장이었던 내력은 청년 시절이 간단치만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난 4월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구치소를 나왔다. 구속 296일 만이었다.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해 41일간 단식을 했다. 잇몸은 내려앉았고 허리춤은 헐렁해졌다. 지난 2월7일 노조는 정리해고 무효 소송 2심에서 이겼지만 회사는 대법원에 상고만 했을 뿐 어떤 반응도 없다. 그사이 지난 4월23일 25번째 희생자가 발생했다. 김정우를 만난 건 바로 그 전날이었다.

창근- 출소 이후 바쁘게 지내신다던데, 어떻게 생활하세요?

정우- 인사 다니고 있어. 고마웠던 사람들 만나서 식사도 하고 연대하러 다니고 그래. 밤 9시 넘어서 포장마차 알바도 하고. 힘든 노동 하는 아내 포장마차 일 돕고 그렇게 지내지 뭐.

창근- 첫 구속이었죠? 구치소로 넘어갈 때 어땠어요?

정우- 유치장에서 48시간씩은 숱하게 있어봤지. 유치장에서 구치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담배 한 대 피우자’고 엄청 싸웠지. 결국 담배는 피웠지만, 구치소로 넘어가면서부터 또 싸웠지. 다리 꼬고 앉지 못하게 해서 엄청 싸웠지. 싸움의 연속이었지. 날인하는 것부터 해서.

창근- 단식 41일과 296일 구속 기간 중 어떤 것이 더 길게 느껴지던가요?

정우- 징역이 길었지. 단식은 결정을 하고 한 것이고, 구속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라서. 구속되면서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했지. 그래도 편지가 있어서 견딜 만했어. 출소 전까지 계속 보낸 분들도 있고, 응원의 메시지야 뭐 매일 면회를 오니까. 그런데 구치소 면회를 와서 우는 사람이 가장 미웠지. 속에서 천불 나는 사람도 있는데 어쩌란 말이야, 하하.

창근- 구속 기간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정우- 인격 모독이었지. 직원들이 수용자를 대하는 태도. 특히 포승줄에 묶여 나갈 때, 규정이라며 묶고 끌고 갈 때. 수갑 차는 게 아주 수치심이 느껴지더라고. 굴욕감 같은 거. 너무 꽉 묶지 말라고 계속 싸웠지. 연승줄에 묶여서 질질질 끌려가는 것이 매우 굴욕적이더라고. 짐승새끼 다루듯 하는 게 힘들더라고.

창근- 송경동 시인도 포승과 수갑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다고 했어요. 그런 느낌인가요?

정우- 꽉 묶으면 반항했지. 포승줄 색깔이 달라서 알 텐데도, 계속 조이고 묶더라고. 밧줄을 묶고 쇠붙이를 달고 있는 것이 심리적으로 압박이 엄청 되더라고. 여름에 포승줄에 묶여 있다가 확 풀리면 맨살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워. 인격적으로 모독당하는 느낌이 강하고.

창근- 쿠웨이트는 언제 갔다온 거예요?

정우- 군 제대 이후 현대건설 직업훈련원생으로 충주댐 공사 일도 했고, 그러고 충남 서산 간척사업으로 갔지. 당시 중동 달러가 좋았어. 그래서 3년 정도 현대건설 일을 하다가 쿠웨이트로 나갔어. 1984년에 갔다가 1985년에 들어왔지. 장남인데 집에 빚이 많았어.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 하루 4시간만 자면서 돈을 벌었어. 낮 시간에 2시간은 오침인데 그 시간도 아까워서 일을 했지. 그래서 빚 갚고 장가갈 돈을 마련했지. 돈이 부족해서 1년 연장하려고 했는데 지금의 아내가 ‘너는 돈 벌어라, 나는 간다’ 하더라고. 그래서 돌아왔지. 난 의리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 아내와도 의리, 뭐 이런 게 중요했지.

창근- 쌍용차 입사는 언제죠?

정우- 1990년에 했지. 계속 정비를 했어. 일반 정비공장. 쿠웨이트에서도 정비를 했지. 수입차 같은 뭐 이런 차량, 덤프 등 다양한 차량. 당시엔 꼬마였지.

창근- 지금까지 계속 정비일만 한 건가요?

정우- 정비일은 1983년부터 했지. 그전에는 미싱을 했어. 나 원래 미싱사였어. 그래서 <전태일 평전>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소금꽃 나무>를 보고, 어린 시절 가슴에 쌓인 것들 있잖아, 그것 때문에 좀 남달랐지. 나도 미싱일 할 때 수출 물량을 맞추려고 약 먹으며 일했으니까. 한 4년 했을 거야. 미싱 기사까지 하고 때려치웠지만. <전태일 평전>도 그렇고, 촉촉하게 스며들더라고. 내가 한 일이니까. 많이 울었지. 구속된 뒤 변호사에게 말했지. 김진숙 동지 책을 다시 보내달라고. 그런데 보내주지 않더라고, 하하.

창근- 처음 운동을 하게 된 계기 혹은 시작은?

정우- 지역의 역사교실 같은 것을 통해서였지.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자극을 받은 거지. 정말 따뜻하게 대해줬던 기억이 있어. 그래서 시작했던 것 같아. 풍물을 치면서 많이 알아갔지. 사물놀이의 뜻도 북, 장구, 쇠 뭐 이런 것도 어떤 의미인지, 역사적 현실적 의미 등을 알았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얘기였지. 지역에서 역사교실을 다니면서 역사가 뒤집어진 것을 알고 세상이 뒤집어진 것을 알았지. 노동교실과 역사교실. 잘못된 역사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내가 뒤집어진 거지. 쌍용차에 들어가서도 계속 공부를 했지. 저항심이 생겼고. 수습기간이 끝난 뒤부터 계속 싸웠어.

창근- ‘중년 아이돌의 완전체’란 얘길 많이들 하는데, 스스로 잘생겼다고 생각하나요?

정우- 몰라. 그런 게 어딨어? 그냥 대한문에서 이런저런 모습을 봤으니까 하는 말이지. 대한문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그런 얘기를 들었을까. 잘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많이 봤다는 얘기겠지. 잘생기긴 뭐가 잘생겨, 하하.

창근- 지금까지 김정우 지부장은 많은 사진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장면은 아무래도 박근혜와 전태일 동상 앞에서의 역사적인 만남일 것 같아요. 이후 구속과 보석 불허 등, 그 사건이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정우- 박근혜는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덤비는 자에게 용서는 없다는 마인드가 있다고 봐. 거지 같은 놈이 덤비니까 어이가 없었겠지. 결국 헌화는 못했거든, 내가 발로 툭 차서. 쌍용차 문제가 노정의 문제니까 풀기 어렵다고 보는 거지. 그 사건으로 플러스알파가 있었다고 생각해.

창근- 만약 말을 걸었을 때 박근혜 후보가 말을 받아서 대화를 했다면 어땠을 것 같아요?

정우- 난 상황이 바뀌었을 거라 생각해. 만약 대한문에 왔다면 정중하게 맞이하려고 했으니까. 상황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노동이란 문제의식이 없는 정권이라서 그냥 흉내내기로 끝났을 수도 있겠다는 두 가지 생각을 해. 그런데 그 사진을 TV조선이 2주 넘게 우려먹었다고 하더라고.

창근- 쌍용차 노동자들의 이야기인 <그의 슬픔과 기쁨>에서 저자 정혜윤 PD는 결정적인 순간에 의리·동료애 등 구체적이지 않은 것을 부여잡는다고 쌍용차 노동자들을 표현한 바 있는데, 김정우 전 지부장이 투쟁을 계속하는 이유는 뭔가요?

정우- 세상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가난한 집 아이가 성장해서 서른 살에 운동을 알고 아이를 갖고 시작한 일이야. 부당한 현실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과 민주세력은 무엇인가라는 생각,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더 모을까 하는 생각,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은 있다는 생각, 그것을 믿고 가는 거지. 대한문에서 배운 것이 있지. 나누면 행복해지고 함께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창근- 무수한 날이 있었지만 대한문에서 인상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면?

정우- 불타버린 분향소 모습이지. 다 타버려서 재가 됐으니까….

미싱사에서 시작해 정비공으로 살아가는 사람. <전태일 평전>을 누구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한다고 했다. 그 느낌을 “촉촉하게 젖는다”고 표현했다. 대한문은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그리고 그에게 특별한 공간이자 순간이었다. 연대를 알게 됐다고 한다. 어쩌면 해고자들의 24시간을 몽땅 개방한 결과는 아닐까. 투쟁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밥 먹고 쉬고 잠자는 모습까지. 24시간 해고자들의 일상을 공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개방된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는 시간을 지나왔는지 모른다. 슬픔과 기쁨이 등을 맞댄 채 살아가다보니 어떤 모습이 드러나고 보여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우의 ‘18번’은 <흘러>란 노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부르는 노래다. 지난 4월25일 쌍용차 공장 앞에서 가수 박준은 <흘러>를 불렀다. 25번째 희생자 추모곡이었다. 여전히 노래는 불린다. 그는 앞으로 또 어떤 기분으로 <흘러>를 부를까. 대한문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불타버린 분향소라 했다. 불타버린 분향소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분향소와 좋은 이별을 하는 장면을 앞으로 그의 기억에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 함께 말이다.

글 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nomadchang)

‘독자의 인연 인터뷰’는 독자에게 열린 지면입니다. 독자가 인터뷰어가 되어 자신의 부모, 자식, 친구, 친척, 동료 등 가까우면서도 정작 궁금한 것을 묻지 못했던 이를 직접 인터뷰하는 형식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히려 못하는 이야기가 많을 수 있습니다. 일상의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인터뷰를 하면 뜻밖에 새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0자 원고지 30장 안팎 분량에, 일문일답이나 수필, 일기 등 자유로운 형식으로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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