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10:48 수정 : 2014.05.08 13:36

여성으로서 불운한 삶을 살아온 메리 해리스 존스는 탄압받는 노동자들을 만나 새 삶을 찾았다.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고, 체포와 구금은 그녀의 일상이 되었다. 파업노동자들은 그녀를 ‘어머니’(마더)라 불렀고, 상원에서는 ‘모든 선동꾼들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녀는 죽어서도 파업 도중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묘역에 묻혔다. 한겨레 자료
꽤 오래된 일을 떠올려보자. 1914년 4월20일, 그러니까 꼭 100년 전 이야기다. 미국 콜로라도주 러들로에서 벌어진 일 말이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일은 아니지만, 한번쯤 귀담아들을 만한 사건이 그때 그곳에서 벌어졌다. 미국 노동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러들로 학살’ 사건이다.

로키산맥의 험준한 산자락을 끼고 있는 콜로라도주에는 채산성 높은 다량의 석탄이, 그것도 지표면에 가깝게 매장돼 있었다. 난방·취사용은 물론 바야흐로 석탄을 때는 철도가 미국 전역을 내달리던 때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기조차 버거웠다.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콜로라도의 광산으로 몰려들었다. 은 지난 4월19일 “한때 콜로라도주 광산 노동자 숙소에는 27개국의 언어로 공고문이 나붙었을 정도”라고 전했다.

1913년 9월17일 전미광산노조연합(UMWA)은 ‘8시간 노동제 도입’을 으뜸 구호로 내걸고 조합원들에게 파업지령을 내린다. 콜로라도주 탄광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을 포함한 노동환경 개선과 임금 인상,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며 그해 9월23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승리하는 그날까지’ 이어가기로 했다. 사 쪽은 구사대를 동원했다. 탄광촌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파업은 해를 넘기고도 쉽게 끝날 줄 몰랐다. 구사대와 노조 쪽이 자주 충돌했고, 유혈 사태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새 임금 없이 견디던 노동자들과 그 가족은 하나둘 영양실조로 쓰러져갔다. 운명의 4월20일, 콜로라도 주방위군과 콜로라도연료철강회사(CFIC) 구사대가 파업 현장으로 들이닥쳤다. 이내 총격이 퍼부어졌다. 삽시간이었다. 농성용 천막이 불길에 휩싸였다. 텐트 아래로 구덩이를 파고 몸을 숨겼던 여성 2명과 어린이 11명이 고스란히 질식해 숨졌다. 학살이란 말을 빼고 그날 벌어진 사건을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다. 학살극은 14시간가량 이어졌다.

사건 100주년을 맞은 지금껏 러들로 학살의 진상은 여전히 흐릿하다. 최초 발포 책임자가 누구였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참극 이후, 노동자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하나둘 탄광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러들로의 피가 헛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돼 여론이 들끓으면서, 1935년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노사관계법이 처음 만들어졌다.

러들로 학살과 록펠러, 그리고 마더

학살의 현장, 콜로라도연료철광회사는 누구의 소유였을까? 당시 후한 자선사업으로 유명세를 타던 스탠더드오일의 소유주 존 록펠러다. 학살 직후 록펠러는 뉴욕 맨해튼의 스탠더드오일 본사로 열혈 노동운동가 한 명을 부른다. 두 사람은 한참 대화를 나눴고, 이후 록펠러는 러들로 현지를 직접 찾는다. 그는 회사 주도로 노사협의회를 꾸려, 노동자들의 불만 사항을 접수하는 통로로 삼기도 했다. 당시 록펠러가 만난 노동운동가는 파업 노동자들이 ‘어머니’(마더)라 부르던 노년의 여성이었다.

메리 해리스 ‘마더’ 존스는 1837년 아일랜드의 코크시티 북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아영세 날짜가 8월1일인 걸로 미뤄, 그해 7월 말이 생일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존스는 만년에 펴낸 자서전에서 자신의 생년월일을 ‘1830년 5월1일’이라고 적었다. 나이를 7살이나 높게 잡은 것은 그가 이미 50대 초반부터 ‘마더’로 지내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태어난 날을 5월1일로 삼은 것은 1886년 5월1일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 시위를 벌이다 무차별 발포로 학살됐던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을 게다. 세계 노동절의 출발점이 된 그 ‘학살’ 말이다.

존스의 부모는 가톨릭 교회의 땅에 기대어 근근이 살아가는 소작농이었다. 가난을 견디다 못한 아버지 리처드 해리스는 신대륙에서 새 삶을 꾸리기로 하고 1830년대 말 먼저 대서양을 건넜다. 미국 시민권을 따자마자 가족을 불러들인 그는 철도 건설노동자가 돼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토론토의 가톨릭계 학교를 마친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주철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인 조지 존스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1861년 결혼했다.

결혼 5년여 만에 아이를 넷이나 낳았다. 평범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눈먼 비극이 존스 가족을 덮쳤다. 1867년 미 남부 일대에서 창궐한 황열병이 멤피스를 휩쓴 게다. 존스는 한꺼번에 남편과 네 자녀를 모두 잃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노동자와 빈민이었다. 부자, 연줄 있는 자들은 모두 도시 밖으로 몸을 피했다. 학교도 교회도 문을 닫아걸었다. 황열병 환자의 집을 방문하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가난한 이들은 간호사조차 부를 수 없었다. 우리 집 건너편에만 주검 10구가 즐비했다. 도처에 주검이었다. 내 아이들도 차례로 쓰러졌다. 다음은 남편 차례였다. 조합의 도움으로 남편 장례를 치른 뒤, 당국의 허가를 받아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황열병이 사라질 때까지.”

혈혈단신이 된 존스는 시카고로 돌아가 의상실을 공동 창업했다. 그럭저럭 살아지는가 싶을 때, 숙명처럼 비극이 다시 그의 삶을 흔들었다. 1871년 10월8일 시작돼 사흘 밤낮을 타오른 시카고 대화재다. 당시 화재로 인한 사망자만 300여 명, 주택을 포함한 건물 1만7천 동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10만여 명이 이재민이 됐다. 존스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애써 일군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의 나이 34살 때다.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천막에서 버티던 그는 우연찮게 한 노동단체가 주관한 회합에 참여하게 된다. 인종과 직종에 구분 없이 흑인·여성·비숙련 노동자까지 받아안은 미국 노동운동의 선구자 격인 ‘노동기사단’(KL)이다. 8시간 노동제와 어린이 노동 금지,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구호를 내걸었던 노동기사단은 1869년 창립 이래 회원 수를 급격히 불려, 1886년 무려 80만 명이 참여한 거대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그곳에서 존스는 ‘새 삶’을 찾았다. 탄압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남은 생을 쏟기로 했다. 일찌감치 백발이 된 머리와 상복을 연상시키는 구식 검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는 전국의 파업 현장을 돌며 격정적인 연설로 힘을 보태고, 구사대의 폭력 앞에 맨몸으로 맞섰다. 파업노동자를 ‘내 자식들’이라 불렀던 그는 특히 노동자의 가족을 보듬는 데 열심이었다.

1901년 펜실베이니아주 섬유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어린 여공들은 성인과 동등한 임금을 요구했다. 현장으로 달려간 존스는 그해 2월부터 9월까지 머물며 파업을 지원했다. 당시 그는 파업노동자들의 가족과 함께 빗자루를 들고 거리로 나서, 프라이팬을 두드리며 조합 가입을 독려하기도 했다. 어느새 체포와 구금은 일상이 됐다.

1900년대 들어 노동기사단은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파업에 나선 노동조합이 직접 존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잦아졌다. 1902년 파업노동자와 접촉하지 말라는 법원의 명령을 어긴 혐의로 그가 웨스트버지니아의 재판정에 섰을 때, 사건을 맡은 지방검사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저기 피고인석에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 앉아 있다. 평화와 번영의 땅에 찾아온 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자, 군소리 없이 열심히 일하던 2만여 명이 갑자기 연장을 내려놓고 파업에 나섰다.”

그가 이른바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낙태는 물론 여성의 참정권도 반대했다는 게 근거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존스가 낙태에 반대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그는 자서전에서도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이란 주장을 여러 차례 되풀이할 정도로 ‘구식’이었다. 다만 존스가 당시 불붙기 시작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건 이유가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노동계급 여성에게 절실한 건 참정권이 아니다. 참정권 운동은 상류층 여성들이 들고나왔다. 부유한 지배층이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희석시키기 위해 자기 계급의 여성들을 조직한 것이다.”

“그의 한마디에 2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1903년 존스는 펜실베이니아주 일대 섬유공장과 광산에서 일하는 어린이 노동자들과 함께 이른바 ‘어린이 십자군 운동’에 나섰다.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켄싱턴에서 뉴욕주 오이스터에 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의 고향마을까지 도보행진을 벌인 게다. “탄광이 아니라 학교에 가고 싶다”는 펼침막을 든 이들의 행진은 어린이 노동을 당연시하던 주류 사회에 충격파를 던졌다.

그리고 ‘1912~13년 석탄 전쟁’이 시작됐다. 1912년 4월 웨스트버지니아주 카나와 카운티의 페인트크릭과 캐빈크릭 지역에서 석탄광산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이듬해인 1913년 7월까지 이어진 파업과 이로 인한 유혈 사태로 5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근과 영양실조로 인한 노동자들의 사망은 더 많았다. 희생자 규모 면에서 미국 노동운동사에 최악으로 기록된 참사였다.

존스는 1912년 6월 현장에 도착했다. 당시 지역 탄광노동자들과 구사대 간 싸움이 치열해 계엄령이 두 차례나 선포될 정도였다. 존스는 1913년 2월13일 체포돼, 살인 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그는 민간인을 군사법원에서 재판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재판부는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전국적으로 비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구금 85일 만에 그는 주지사의 형 집행 정지 명령으로 석방됐다. 그 무렵 그에게 또 다른 별명이 붙었다. 상원에서 “모든 선동꾼의 어머니”란 호칭을 내린 게다.

만년까지 파업 현장을 내달리던 그는 스스로 주장한 100번째 생일을 메릴랜드주 애덜피의 집에서 동료들과 조촐하게 보냈다. 그해 11월30일 존스는 그곳에서 9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주검은 일리노이주 마운트올리브에 자리한 탄광노조공동묘지에 안치됐다. 1898년 파업 도중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이 묻힌 곳이다. 불같은 삶이었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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