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09:46 수정 : 2014.06.13 11:44

서울 성북구에는 주민이 직접 참여하고 사업을 제안하는 ‘주민참여예산학교’가 있다. 예산학교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수업을 통해 주민들은 지역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고민한다. 여기서 발표된 주민들의 사업 구상은 토론을 거쳐 구체적인 사업안으로 만들어진다. 한겨레 박승화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미끄럼틀이 낡고 썩어서 위험했어요. 아이들이 다칠 것 같아 미끄럼틀 교체를 학교에 건의했죠. 근데 학교는 교육청에, 교육청은 구청으로 넘겼어요. 구청에서는 부서들끼리 또 미루더군요. 서로 뺑뺑이를 하면서 예산이 없다고 했어요. 1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미끄럼틀 하나 바꾸자는 요구는 외면하면서, 엉뚱한 공사는 계속하는 것 같고…. 도대체 이걸 어디 가서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답답한 경험 한번씩은 있지 않았나요?”

김준용(49) 서울 성북구 주민참여예산위원의 질문에 청중이 기다렸다는 듯 “네”라고 답한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동네에서 생활하며 겪는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을 제시하고 다양한 사람의 검증을 거쳐 사업으로 실현하는 것이 주민참여예산제도예요.” 집단지성을 통해 주민의 소망을 사업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얘기다. 준용씨의 설명에 청중이 공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지난 4월21일 저녁 7시. 그녀는 이날 서울 성북구 주민참여예산학교 수업(입문과정)에 일일강사로 나서 경험담을 소개했다. 준용씨는 고등학교 1학년 딸과 중학교 3학년 아들을 키우는 평범한 워킹맘이다. 성북구 삼선동에서 편의점을 운영한다. 그녀는 성북구 1·2기 주민참여예산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생활 문제에 대해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청했다가 덜컥 공개추첨을 통해 선정됐다.

“평생 살면서 500원짜리 복권 한 장 당첨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공개추첨할 때도 현장에 안 갔어요. 근데 제 이름이 적힌 당구공이 뽑혀 이렇게 강연까지 하게 됐네요. (웃음)”

성북구는 준용씨처럼 평범한 주민들의 자치 참여가 활발한 곳으로 유명하다. 주민참여예산위원을 선정할 때면 신청자가 몰려 뽑기 등의 공개추첨으로 선정한다. 성북구에 따르면 1기 예산위원의 경우 경쟁률이 7 대 1에 달했다. 2기도 연임위원을 제외한 경쟁률이 1.7 대 1이었다. 위원의 임기는 2년이다. 1회 연임도 가능하다.

주민참여예산제1는 지방자치단체가 독점하던 예산편성에 주민이 직접 참여해 동네에 필요한 사업을 제안하고 결정하는 제도다. 성북구는 2011년부터 실시했다. 주민참여예산학교는 올해로 네 번째다. 선착순으로 모집하는데 매번 신청자가 초과한다. 성북구에 직장이 있는 다른 지역의 주민도 참여할 수 있다. 올해 예산학교에는 8명이 초과 신청해 58명이 함께 수업을 듣고 있다. 네 차례 이어지는 수업에서는 예산에 대한 기초지식, 예산서 읽기, 사업제안서 작성법 등에 대해 강의가 진행된다. 수업은 무료다. 강의는 희망제작소 예산연구위원들이 진행한다.

참가자들의 수강 이유는 다양하다. 호기심에 들러본 사람,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고 싶은 사람, 통장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사람, 민원을 해결하고 싶은 사람 등. 참여 목적도 참여 의지도 제각각이지만 주민참여예산제도가 제대로 지역에 뿌리내리길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주민 소망이 동네 사업으로

이날은 세 번째 수업으로 동네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사업을 구상해보는 날이었다. 동네별로 나눠 9개 조를 짰다. 난상토론이 시작됐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식사도 못한 채 진행되는 수업임에도 열기가 후끈하다. 동네의 단점과 장점, 기회와 위기에 대해 각자 의견을 내놓고 토론을 이어갔다. 동네 문제를 개인적 이해(내 집 앞 문제)가 아닌 공공의 이해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말하는 것도 어렵지만, 타인의 의견을 귀담아듣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토론이 진행될수록 타협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중심으로 사업의 우선순위가 결정됐다.

참관하는 구청 공무원들도 토론을 귀담아들으며 의견을 보탠다. “○○ 사업은 적은 돈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실현 가능성도 높아 보여요.” 주민이 말을 받는다. “○○는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임에도 항상 방치돼 있어 안타까웠어요.” 이들 사이에 스스럼없는 대화가 오간다. 참여예산제는 공무원 조직 문화에도 영향을 끼친다. 성북구청 관계자는 “처음엔 익숙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점도 없지 않았다”며 “과거엔 주민이 민원을 제기하면 공무원이 이를 검토하는 관계였다면 지금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관계로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봉제공장 단지 내에 오토바이 주차장이 없다보니 운전자도 보행자도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도 아이도 모두 위험한 것 같아요. 오토바이 주차장을 만들면 동네가 안전해질 거예요.”

“A지하철역을 보면 (공사가 잘못됐는지) 6·7번 출구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전혀 없어요. 시각장애인이 A역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점자블록과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어떨까요?”

“동네에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있어요. 이들과 장애아동 등 맞춤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공립 대안학교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시설은 기존의 B회관을 활용하고요. 성북구는 서울에서 가장 많은 대학이 몰려 있는 곳이니 대학생들과 연계해 맞춤교육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사업 구상이 발표될 때마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 밖에도 접근성이 떨어지는 산 중턱 주민센터 이동로 개선, 마을버스 안 희망광고판(시민단체·협동조합 홍보) 설치, 돈암동 직장인을 위한 ‘집밥 프로젝트’ 등 다양한 구상이 나왔다. 토건사업이 아닌, 일상 속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생활복지 사업이 주를 이뤘다. 이날 발표된 구상은 마지막 수업 시간에 다시 토론을 거쳐 구체적인 사업안으로 만들어진다.

수업 과정은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도 확대된다. 황려진(25)씨는 “예산에 대한 기초지식 습득을 넘어 성북구에 있는 각양각색의 동네 사정을 알게 돼 유익했다”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무슨 고민을 하며 살고 있는지 관심 갖고 살펴보게 될 것 같다”고 전했다.

이날 수업처럼 주민 의견을 수렴해 사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곳이 지역회의다. 지역회의는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시행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다. 지역별 특성에 따라 운영 방식이 천차만별이다. 지역회의가 논의한 결과를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 통보하면, 예산위가 사업 적절성 등을 따져 주민총회에 상정할 사업을 결정한다. 이어 주민들이 상정된 사업을 놓고 주민투표를 거쳐 최종 사업을 선정한다.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된다. 이후 진행되는 예산심의와 감사는 주민들의 대의기관인 지방의회가 한다.

우리나라 지자체는 재정의 상당 부문을 중앙정부 재원에 의존하는 구조다. 사실상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다. 설령 지자체에 돈이 많다고 해도 그것이 꼭 주민의 생활복지비로 지출되지는 않는다. 예산 운영은 돈이 얼마 있느냐보다, 한정된 예산을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이다.

“주민 참여 통한 갈등 예방이 경제적 효율성 높여”

적잖은 지자체에서 예산정책은 여전히 법률과 통계, 숫자 등을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고정관념이 남아 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대목이다. 첫 수업(주민참여예산제의 이해)을 진행한 권기태 희망제작소 연구위원이 우화 하나를 소개했다. 미국과 소련이 치열하게 우주개발 경쟁을 벌이던 1960년 즈음, 볼펜은 중력이 잉크를 밀어줘야 쓸 수 있어 무중력 진공 상태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미국은 수백억원의 혈세를 들여 ‘우주용 볼펜’을 개발했다. 미국 우주비행사는 소련 우주비행사를 만나 ‘우주볼펜’을 자랑하고 소련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소련 우주비행사는 간단하게 답했다. “연필로 쓴다”고.

관점의 차이가 몇백원짜리 연필로도 충분할 것을 수백억원의 거금을 들여 볼펜을 개발하는 낭비를 낳은 것이다. 권기태 연구위원은 “예산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행정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문들에 대해서도 관리가 가능해져 궁극적으로는 재정 건전성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곳에 사는 공무원보다 동네 현안을 가장 잘 아는 주민들이야말로 예산정책 전문가가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주민의 참여 없는 탁상행정이 ‘세금 참사’로 이어진 사례는 차고 넘친다.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853억원을 들이고도 개통조차 못한 인천 ‘월미은하레일’이 대표적인 예다. 현재 인천 주민들은 인천시 공무원들을 직무유기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세금 참사에 이어 사회적 갈등 비용까지 치르게 생겼다. 일각에서는 주민참여예산제가 복잡한 의사결정 절차로 인해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근시안적인 지적이다. 멀리 보면 잘못된 예산집행으로 인한 낭비는 돌이키기 어렵지만, 주민의 참여로 사전에 잘못을 차단할 경우 효용성이 더 높아진다. 주민 참여를 통한 갈등 예방이 잘못된 사업으로 인한 비용을 줄이는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자기정화 효과로 ‘완장’ 예산 걸러내”

건강한 풀뿌리가 없는 곳에서는 특정 이익단체 등에 의해 참여예산제가 휘둘릴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기적인 예산 따먹기’는 공개토론 과정 등을 통해 걸러질 수 있다. 참여예산제의 자기정화 효과다. 준용씨가 경험담을 전했다.

“처음 지역회의에 나가 제가 발언할 때만 해도 ‘아줌마가 뭘 아느냐’며 버럭 화를 내는 분들이 있었어요. 일명 ‘완장’ 차신 분들이죠. (완장 찬 분들이) 얼토당토않은 민원 해결을 요구하다보니 공무원과도 다툼이 잦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분들은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 자생적으로 걸러졌어요. 예산사업을 선정하려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난한 토론을 해야 하는데 그 소통 과정을 못 견뎌해요. 또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들이다보니 공식적인 토론보다 아는 구의원이나 공무원을 만나 담판을 지으려 하죠. 결국 저처럼 힘없고 끈 없는 사람들이 생활 문제 해결을 위해 의지를 갖고 마지막까지 나오게 돼요. (웃음)”

주민들이 편성한 예산을 심의하는 지방의회도 넘어야 할 산이다. 예산심의는 의회의 고유 권한으로,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예산이 삭감된다. 성북구 참여예산위원으로 활동한 한 주민은 “각자 처한 정치·사회·지역 등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업과 예산을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른 의원들을 설득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며 “주민이 의회가 갖고 있는 정보에 대해 공개를 요청하고 제대로 활동하지 않으면 참여예산제가 또 다른 이름의 ‘민원제기위원회’로 그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적지 않은 지역에서 주민참여예산제가 형식적인 제도로 머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생업에 쫓기느라 주민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지 못하고, 지자체에서도 권한을 뺏긴다는 의식이 팽배한 까닭이다. 일부 지자체에선 단체장 공약을 실현시키기 위한 창구로 활용하려 하거나, 공무원이 관리할 수 있는 만큼만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 권한을 주고 있다. 이처럼 참여예산제를 흔드는 다양한 입김을 집단지성으로 걸러내지 못하면 주민은 지자체와 공동범죄자가 된다.

예산 용어를 주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주민은 “참여예산제 자체도 낯설고 생소한데 예산 용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며 “주민이 주인공인 제도인 만큼 알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게 지자체와 시민단체들이 암호 같은 예산 용어를 공공의 언어로 바꾸려고 노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어려운 예산 용어 공공의 언어로 바꿔야”

준용씨를 애태우던 학교 미끄럼틀 교체는 어떻게 됐을까. 구청과 교육청을 4개월 동안 여러 차례 오가며 예산집행 현황을 검토한 끝에 결국 사용하지 않는 다른 학교 예산을 가져다 해결했다. 하마터면 연말에 멀쩡한 보도블록을 깨는 데 허비할 뻔한 예산을 공동체 이익을 위해 쓰도록 작은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예산의 ‘예’자도 모르는 내가 의견을 내는 게 가능할까. 내 의견이 말이 되기는 하는 걸까. 설사 말한다고 해도 진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저도 경험이 없다보니 처음엔 걱정과 두려움이 컸어요. 하지만 제가 겪는 삶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득력 있게 말하고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니 제 문제가 우리 문제로 바뀌더라고요. 이는 책임 있는 대안을 만들어가기 위한 공론장 마련으로 이어졌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공동체를 직접 만들어가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껴요. (웃음)”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낸 경험은 그녀의 삶에 원동력이 됐다. 준용씨는 주민참여예산위원회 활동 외에도 성북라디오·마을문화학교 등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제 막 주민참여예산제라는 씨앗이 성북구에 뿌려져 발아하고 있어요. 주민도 공무원도 지방의원도 아직 모두 서툰 것 같아요. 하지만 ‘안 된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싹트기 시작한 주민참여예산제가 스스로 길을 물어 찾아갈 수 있도록 함께 대안을 고민하며 지켜봐주세요.”

글 김은성 객원기자 frame4@hanmail.net

1 2002년 시민참여예산조례 제정운동이 시작되면서 도입된 주민참여예산제는 2010년 6·2 지방선거를 통해 전환기를 맞았다. 민주당이 주민참여예산제를 공약으로 내걸고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 기초의원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제도가 확산됐다. 이어 2011년 국회에서 지방재정법이 개정되면서 자치단체 예산편성 과정에 주민참여를 의무화하는 조항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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