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09:33 수정 : 2014.06.13 13:38

디딤돌축구단 총무인 홍아무개씨는 과거 ‘노숙인 천국’이었던 구로리공원 등을 관리하며 자활의 길을 가고 있다(위쪽). 축구단 구성원인 양씨 역시 이곳에서 공공근로를 하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나 안 되겠어, 넘어올 것 같아.”

1 대 0으로 앞서는 상황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앙 수비를 맡고 있는 선수가 배와 입을 가리키며 토할 것 같다는 신호를 보냈다. 구토 증세였고 교체 사인이었다. “어제 또 달렸구먼!” 회장과 벤치 멤버들은 ‘허허’ 웃어넘겼다. 헐레벌떡 교체된 선수는 담배 한 모금으로 속을 달랜 뒤 “이제 살 것 같다”며 넉살 좋은 소리를 했다. 축구 시합에서 구토는 흔하게 일어난다. 그 유명한 데이비드 베컴, 리오넬 메시도 경기 도중 구토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선수들 말마따나 구토 증세는 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어제 한 잔을 넘어 여러 잔을 했다”고 귀띔했다. 그의 말마따나 음주 축구도 늘 있는 일이다. 코치는 당황했다. 경기장에는 구청장과 구의회 의장 등 ‘고위층’이 관람하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 입장이 엇갈린 이유는 코치는 공무원이었지만 선수와 회장은 노숙인(지금은 자활인이다)이었기 때문이다.

잠깐의 해프닝이 있던 곳은 서울 구로구 고척동 계남근린공원 축구장. 이날(4월2일) 구로 디딤돌축구단은 창단 3주년 기념행사로 연예인 축구단과 친선경기를 했다. 경기 결과는 사이좋게 2 대 2 무승부. 2012년 서울시 노숙인 축구대회에서 우승했던 디딤돌축구단의 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제기랄, 축구는 얼어죽을…”

구토 증세를 느낀 주인공은 홍아무개다. 그는 디딤돌축구단 창단 당시 구로구 노숙인 상담반에서 공공근로를 하며 산파 역할을 했다. ‘축구를 통한 노숙인 자활’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구청장이라면 노숙인들을 모으고 독려한 사람은 그였다. 예비군들은 현역병이 지시하면 반대로 행동한다. “모자를 똑바로 쓰세요” 하면 거꾸로 쓰고, “줄을 맞추세요” 하면 일부러 대열에서 벗어난다. 노숙인들도 마찬가지다. “(지원)시설에 들어가세요”라고 권유해도 끝내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일상이 구속당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관에서 주도하는 축구단에 쉽게 들어갈 리 없다. 축구단 창단 초기에 애로 사항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저리 꺼져!”

“제기랄, 축구는 얼어죽을….”

홍씨와 구청 공무원들이 술 취한 노숙인들에게 자주 들었던 소리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그는 구로구 구로리공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5년 남짓 구로리공원에서 노숙을 했고 지난해까지 그곳에서 공공근로를 했다. 노숙인들 사이에서 ‘노숙인 대장’으로 불렸다. 대장 체면을 구겼을지언정 포기하지 않았다. “밥도 준다니까. 끝나고 술도 한잔하고….” 처음에 시큰둥하던 노숙인들은 밥과 술이라는 회유책에 차츰 귀를 열었다. 공무원들은 “술은 안 된다”고 했지만 노숙 생활을 해본 그는 노숙인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단박에 끊으라고 하면 거부감만 생긴다’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신 금요일이라도 술 먹지 말고 나오라”는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노숙인들이 자활을 포기하는 이유는 음주 때문이다. 그도 노숙 생활을 할 때 자주 느꼈던 일이다. 서울시 노숙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성노숙인(노숙 기간이 1년 이상이고 알코올중독, 정신질환, 고령 등으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의 67.1%가 아파도 의료시설을 이용한 경험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알코올중독 및 정신건강 문제가 있는 사람 중 63.1%가 한 번도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구로리공원 노숙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모토는 ‘내일 쉽시다’다. 그 의미인즉 술 마실 때는 평일·휴일 없이 먹고 그 다음날은 쉬자는 뜻이란다. 365일 술을 달고 사는 그들에게 ‘내일 쉽시다’라는 말은 ‘내일도 먹읍시다’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의료 시스템 같은 구조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매일 술과 동고동락하는 인생에서 치료받을 짬은 없어 보인다.

홍씨가 넉살 좋게 술 예찬론을 펼친다. 벌써 여러 잔 마신 뒤다.

“우리는 술을 짝수로는 먹지 않아. 1, 3, 5… 19, 21병, 이렇게 홀수로만 먹지.”

노숙인들이 ‘술잔은 반드시 홀수지 짝이 차서는 안 된다’는 ‘주불쌍배’의 원리를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고 술잔 역시 수치가 차면 기우는 법이다. 그들이 술잔을 메우지 않는 이유가 꽉 차 있는 짝수보다 장차 메워질 것을 염두에 둔 의지가 담긴 주도가 아닐까? 하지만 의지가 몸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할 새도 없이 영혼은 술에 의해 유체이탈하기 일쑤였다. 디딤돌축구단이 창단했을 때 선수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창단 멤버 33명의 평균 주량은 무한대였고 체력은 무한소였다.

‘헬레레’ 축구에서 챔피언까지

어쨌든, 2011년 4월26일 창단식에는 공을 건드릴 힘조차 없어 보이는 노숙인 33명이 모였다. 홍씨는 비공식적으로 50여 명쯤 된다고 했다. 보험을 들기 위해 주민번호를 밝혀야 하고 신체검사도 받아야 하는 ‘구속’ 절차를 꺼린 몇몇 노숙인이 정식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청이 예상 밖의 인원에 예산(1년 2500만원)을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구청은 그들의 출입을 막지 않았고 그들도 곧잘 축구장에 찾아왔다.

평균 나이 50대, 평균 노숙 기간 5년 이상, 선수들의 사연은 세월만큼이나 절절했다.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한 사람, 음주와 건강 문제가 있는 사람, 이로 인해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과거 전과가 있는 사람이 다수였다. 가족도 친구도 외면해 거리 인생을 살아가는 노숙인들에게 재기의 슛이 절실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의지를 불태우며 열정을 쏟는 통상적인 그라운드의 모습은 아니었다. 연습이 시작되자 재기의 슛은커녕 헛발질이 허공을 갈랐다. 아니 ‘픽’ 하고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가관이었지. 5m만 뛰면 다 넘어졌어. 하하.” 그때까지만 해도 선수들이 ‘잿밥’에 관심이 쏠려서인지 축구에 대한 열정은 없었다. 제법 공을 차봤다는 사람들도 아침부터 ‘헬레레’ 축구를 시전했다.

그때 홍씨가 군기반장으로 나섰다. 술 먹고 소란 피우는 노숙인에게 ‘옐로카드’를 주며 분위기를 다잡았다. 선수들을 회유할 때의 유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법원·경찰·교도소 소속 축구팀들과 함께 공을 차며 ‘저 사람들도 하는데 우리도 해보자’는 자부심을 북돋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1년, 결실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2012년 서울시 노숙인 자활 체육대회 축구경기에서 디딤돌축구단은 챔피언이 됐다. 그와 그들의 노력이 꽃을 피운 것일까? 그에게 그때의 감동을 물었지만 “승리는 크게 의미가 없다”며 한사코 의미부여를 거부했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여러 번 탈락의 쓴맛을 본 그에게 또 다른 경쟁은 의미가 없다는 투였다.

사실 그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사연 없는 노숙인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는 남들보다 좀더 별났다. 그는 과거 구로공단의 한 전자회사 노조 위원장 출신이다. 그로 인해 지명수배를 받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길도 막혔다. 그 시절 노동사범으로 낙인찍히면 위장 취업 말고는 일할 방법이 없었다. 자구책으로 선택한 자영업은 외환위기와 함께 나락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술병은 켜켜이 쌓여갔다.

담배 한 모금과 함께 그의 눈가에 회한의 눈물이 맺힌다.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말고….”

2010년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노숙인 출신 선수를 영입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주인공은 ‘홈리스 월드컵’ 포르투갈 대표선수 베베. 홈리스 월드컵은 노숙인들이 잡지를 팔아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기업 ‘빅이슈’가 처음 제안해 2003년부터 매년 열리는 대회다. 고아원에서 자라 거리 축구를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잉글랜드의 최고 명문팀에 입단함으로써 꿈을 이뤘다. 지금은 터키 리그를 거쳐 포르투갈 리그에서 임대 선수로 뛰고 있다.

베베처럼 큰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디딤돌축구단 선수들도 차근차근 자활인의 길을 걷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노숙 생활 청산이다. 선수들로만 한정한다면 이제 노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축구를 접한 뒤, 어떤 이는 가족과 재결합하고 어떤 이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방을 구했다. 홍씨도 몇 해 전 헤어졌던 아내와 재결합했다. 그라운드의 열정이 삶의 열정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에 있다면 섣부른 판단일까.

‘노숙인 천국’ 구로리공원 이제는 ‘NO숙인’

홍씨를 다시 찾은 날. 그의 일터인 구로리공원에는 평일인데도 주민들로 북적였다. 도로 쪽 광장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장기와 바둑을 두고, 안쪽 놀이터에는 어린이공원답게 엄마들과 아이들이 놀이시설을 이용하며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평화’는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2003년 문을 연 구로리공원은 곧 노숙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노숙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구로리공원은 최신식 난방시설이 완비된 화장실이 있어 추운 겨울 ‘주거’가 가능했고, 근처 시장 상인들이 곧잘 음식을 챙겨줘 ‘식사’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어떤 때는 노신사가 술을 상자째 놓고 가기도 했다. 한마디로 ‘주식주’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렇듯 ‘노숙인들의 천국’이라고 소문이 나자 옆동네 영등포 지역 노숙인들까지 원정 방문을 왔다. 노숙인들 간 자리싸움이 일상화됐고, 행인들과 시비도 곧잘 벌어졌다. 주민들은 무서워서 구로리공원에 올 엄두를 못 냈다. 그즈음 구청은 노숙인들이 상주하던 정자를 없애고 벤치에 눕지 못하게 분리대도 만들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디딤돌축구단 창단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했다. 구로리공원의 터줏대감들이 축구단에 가입하고 차츰 노숙 생활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또한 축구단 구성원들이 공공근로자로 공원 관리에 나서자 가끔 찾아오던 노숙인들마저 발길을 돌렸다.

“이제 상주 노숙인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는 원래 디딤돌축구단이 창단하기 몇 해 전부터 자활인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인지 축구단 구성원들의 자활이라면 발벗고 나선다. 일용근로를 주선하고 공공근로를 빠지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제2의 일과일 정도다. 그와 구청의 노력은 가시적 성과로 나타났다. 디딤돌축구단은 창단 1년 만에 취업 2명, 공공근로 6명, 기타 5명 등이 일자리를 가졌고 지난해에는 취업 1명, 공공근로 10명, 일용근로 7명, 자활근로 4명, 서울시 일자리사업 1명 등이 사회 복귀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최고령인 주아무개 축구단 회장의 변화는 놀랍다. 그는 공공근로는 물론 성공회대와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에 참여하고,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의 노숙인 연극 <이문동네 사람들>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풍문에 따르면, 그는 10년 넘게 노숙 생활을 한 노숙인계 ‘어른’이었다. 또 축구단원 중 6명은 2년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진행하는 ‘민들레 창작 특강’에 참여해 시와 수필 6편을 서울시에 응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숙인들의 자활 의지가 축구단이 매개가 된 100% 자각의 산물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그렇다고 어느 순간 갑자기 환골탈태한 우연의 산물로 치부하는 것은 더욱 맞지 않다. 단서를 찾자면 홍씨의 말처럼 “축구단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동료들이 직업을 갖고 노숙 생활을 청산하는 모습을 보며 영향을 받은 것” 정도다. 축구단은 단지 자각을 어시스트한 우연의 산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모두 자활인이 돼 축구단 해체가 목표

노숙인으로 산 시절은 망각의 동물로 살아온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과거 자신만의 빛나던 한때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억의 창고 속에 밀어넣고 끄집어내지 않았다. 그들은 손만 내밀면 뭔가 쥐어진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현재에 자족했다. 수많은 자선단체들은 그들에게 밥을 제공했지만 노숙인 스스로 자활할 기회는 제공하지 않았다. 선의의 자선이 경제적 활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활의 기회를 줄인 셈이다. 탈무드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빅이슈’ 창시자 존 버드가 ‘빵이 아니라 빵틀을 주자’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홍씨의 말을 빌리면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을 찾아주는 것이 자활의 시작일 것이다.

지금도 디딤돌축구단은 매주 토요일만 되면 계남근린공원 축구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장기간 딸을 보호시설에 맡겼다 다시 찾아 가정을 꾸린 김씨, 예비신부를 만난 이씨, 아내와 결합한 박씨부터 과거 용접공 일을 했던 유씨, 권투선수였던 최씨, 사업을 했던 허씨,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했던 양씨까지 20여 명이 모여 자활의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어쩌면 이름 모를 공원에서 배회하다 이름 없이 소멸했을지도 모를 이들의 ‘제2의 인생’은 어떻게 펼쳐질까? 그때쯤이면 모두 어엿한 자활인으로 자리잡아 그들의 목표인 ‘축구단 해체’가 된 뒤겠지만.

글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