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7 17:42 수정 : 2014.05.08 13:34

김수현(왼쪽)은 TV 시대가 열린 1970년대부터 활약하며 한국 드라마를 ‘작가의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그 뒤 가족을 주제로 한 드라마의 바통을 김운경(가운데 위)·김정수(아래)가 이어받았다. 1990년대에는 30대 송지나(오른쪽 위)·최완규(아래)가 등장해 역사적·남성적 서사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박정희에서 박근혜까지. 한 대통령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기까지 지난 40년간 대한민국은 대통령만 8번 바뀌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권세는 10년을 넘기기 어려운 법인데, 드라마작가 김수현은 TV 시대가 열린 1970년대부터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 한결같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드라마가 작가의 예술이 된 데는 김수현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김수현이 시나리오작가였다면 영화판에서 시나리오작가의 위상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MBC ‘드라마 왕국’ 이끈 김수현

1968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가 MBC 공모에 당선되면서 방송에 입문한 그는 지금껏 30여 편의 드라마를 썼다. 대부분의 작품은 20~30%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1위였고 그중 <목욕탕집 남자들>(1995)과 <청춘의 덫>(1999)은 5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사랑이 뭐길래>(1991)는 7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한국 드라마 역사에서 부동의 시청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 MBC가 ‘드라마 왕국’으로 군림한 데는 당시 MBC에만 대본을 줬던 김수현 작가의 공이 컸다.

희극적 가족물과 비극적 멜로물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시대의 미세한 균열을 반영하며 사회적 화두를 던져왔다. 보수적인 가정과 민주적인 가정의 대조를 통해 웃음보를 터뜨렸던 <사랑이 뭐길래>는 가부장제의 균열을 감지했고, <엄마가 뿔났다>(2008)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묻고, <천일의 사랑>(2011)은 젊은 층의 치매 문제를, <인생은 아름다워>(2010)는 동성애 이슈를 끌어냈으며, <내 남자의 여자>(2007)는 윤리와 욕망의 충돌을 통해 일부일처제에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사회구조로 인한 갈등보다는 인물 간 성격 차이에서 오는 갈등에 훨씬 비중을 두기 때문에 가부장제 등 기존 사회의 질서를 용인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물의 성격을 쉽고 간결하면서 생동적으로 드러내는 ‘촌철살인 대사’는 모든 드라마작가들의 ‘교본’이 되고 있다.

김수현 작가가 가족물과 멜로물을 오간 반면, 김정수 작가는 가족물에만 30년 작가 인생을 바쳤다.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를 12년간 집필한 뒤 <엄마의 바다>(1993), <그대 그리고 나>(1997), <그 여자네 집>(2001) 등의 작품으로 40~50%의 시청률을 올렸다. 그의 가족물엔 재벌도, 출생의 비밀도, 심각한 고부 갈등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인간과 가족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시선만으로도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가였다.

김수현 작가가 중산층의 삶에 돋보기를 들이댔다면, 김운경 작가는 서민의 삶에 애착이 강한 작가다. 대표작인 <한지붕 세가족>(1986)부터 <서울 뚝배기>(1990), <서울의 달>(1994), <옥이 이모>(1995), <파랑새는 있다>(1997), <짝패>(2011) 등 그가 30여 년 동안 초지일관 다룬 소재는 주변부에서 이름 모를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생명력이다. 진짜 삶은 시장과 거리에 있으며, 악인은 없고 다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그의 믿음은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세계관이다. 해학과 풍자 역시 그의 작품의 특징이며, 저잣거리 언어를 그대로 대본에 담기 위해 발로 뛰는 취재로도 유명하다.

1990년대 드라마사는 송지나, 최완규라는 당시 30대의 걸출한 스타 작가가 장식한다. 송지나 작가는 <여명의 눈동자>(1991)와 <모래시계>(1995)를 통해 거대한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가는 남녀의 멜로를 묵직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는 탁월한 재주를 뽐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부터 5·18를 비롯한 민주화운동까지 역사적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는 굵직한 서사력은 남성 시청자까지 방송 시간에 맞춰 귀가하게 만들었다. 최완규 작가는 2년 동안 병원에서 숙식하며 병원 세계를 리얼하게 그려낸 출세작 <종합병원>(1994) 이후 <허준>(1999), <상도>(2001), <올인>(2003), <주몽>(2006)까지 대작 드라마를 써내려가며 안방극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사건과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정반합을 이루는 구조 속에서 남성의 시련과 성장을 다루는 그의 작품 역시 남성적 서사에 목말라하던 시청자를 대거 흡수하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사극은 2000년대 들어 빠른 템포와 화려한 영상으로 특징되는 <다모>(2003) 등의 퓨전 사극, 정통 사극과 스릴러 등을 결합시킨 <뿌리 깊은 나무>(2011) 등의 하이브리드 사극, 또 여성의 성장 스토리에 방점을 둔 미션 사극 <대장금>(2004), <선덕여왕>(2009) 등에 바통을 넘겨주면서 여성 시청자도 빨아들였다. 정형수, 박상연, 김영현 등 이들 작품을 쓴 작가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인물 구도 속에서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낸 장인들로 사극 한류를 주도했다.

1990년대는 <질투>(1992)로 포문을 연 트렌디 드라마의 시대이기도 했다. 가족과 시대는 묻지 않는, 젊은 남녀 간의 사랑을 감각적인 터치로 그려낸 작품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들 작품 뒤엔 이선미·김기호 부부 작가가 있었다. 40% 이상의 시청률을 올린 <파일럿>(1993),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 <별은 내 가슴에>(1997)를 비롯해 <호텔>(1995), <햇빛 속으로>(1999), <발리에서 생긴 일>(2004) 등은 20대 여심에 불을 지르며 차인표·안재욱·장혁·조인성·소지섭 등을 톱스타로 키워냈다.

1990년대 송지나·최완규, 2000년대 홍자매·김도우

2000년대 트렌디 드라마의 기수는 홍정은·홍미란 자매 작가다. 1990년대 트렌디 드라마의 여성 주인공들이 가난하고 평범했다면, 홍 자매 작가의 여주인공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게 특징이다. 사기꾼(<마이걸>·2005)이거나 싸가지 없는 상속녀(<환상의 커플>·2006)이거나 구미호(<내 여자친구는 구미호>·2010)이거나 전 국민의 욕을 먹는 비호감 연예인(<최고의 사랑>·2011)이거나 귀신과 소통하는 능력(<주군의 태양>·2013)을 지녔다. 멜로를 코미디, 판타지, 공포 등과 이종교배시킴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강화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트렌디, 로맨스, 장르극 등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이와 별개로 작가주의 드라마도 폐인을 양산하며 선전했다. 최근에는 예능 출신 드라마작가의 활약이 눈에 띈다. 김은숙, 인정옥, 홍정은·홍미란, 노희경, 정성주, 송재정, 이우정, 김은희, 문영남, 홍진아·홍자람, 임성한, 김도우 작가(왼쪽부터 시계방향).
홍 자매와 달리 매우 ‘현실적인’ 여성 캐릭터 구축에 관심을 갖고 여성의 일과 사랑을 주제로 삼은 작가는 김도우다. <내 이름은 김삼순>(2005)이라는 한 작품만으로도 드라마사에 길이 빛날 이름을 남긴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다이어트 작심삼일을 반복하지만 자기 일의 소중함을 알고, 자기를 찬 남자를 잊지 못하면서도 또 사랑에 빠지는 현실적인 캐릭터를 선보여 20~30대 여성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또 다른 홍 자매인 홍진아·홍자람 작가는 젊은이들의 사랑보다는 ‘성장’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한국 드라마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태릉선수촌>(2005), <오버 더 레인보우>(2006), <베토벤 바이러스>(2008) 등의 남녀 주인공들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결말 대신 ‘내면의 성장’이라는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시청률이나 트렌드에 휘둘리지 않고 ‘휴머니즘이 있는 성장 드라마’를 꾸준히 선보인 이들 작가는, 그래서 ‘시청률’보다는 ‘명품 드라마’라는 평가로 보상을 받아왔다.

가족물과 멜로물을 전혀 다른 분위기로 번갈아 내놓는다는 점에서 이경희 작가는 김수현 작가와 비교될 수 있다. <꼭지>(2000), <고맙습니다>(2007), <참 좋은 시절>(2014) 등이 온 가족을 브라운관 앞으로 불러 모은 따뜻한 시선의 휴먼 드라마라면, <미안하다, 사랑한다>(2004), <이 죽일 놈의 사랑>(2005),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2012)는 벼랑 끝까지 내몰린 치명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어, 작품만 두고 보면 한 작가의 작품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장미와 콩나물>(1999), <아줌마>(2000) 등을 통해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가족물을 그린 정성주 작가가 현재 JTBC에서 방영 중인 <밀회>의 작가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스무 살 청년과 40대 유부녀의 위험한 사랑은 안방극장을 뒤흔들며 지상파 시청률도 제쳤다. 이경희·정성주 작가는 섬세한 심리 묘사의 장인들로서, 상업주의와 작가주의의 황금비율을 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기본 시청률을 보장하면서도 평단의 찬사를 받는다는 말이다.

‘로맨스 내러티브’의 달인, 김은숙 전성시대

누가 뭐래도 2000년대는 김은숙 작가의 시대다. 2003년 <태양의 남쪽>을 시작으로 1~2년에 한 편씩 총 9편을 내놓은 김은숙 작가는 ‘로맨스 내러티브’의 달인이다. 50%의 시청률을 넘긴 <파리의 연인>(2005)부터 전국을 ‘현빈앓이’로 내몬 <시크릿 가든>(2010), 최근 신한류 열풍을 일으킨 <상속자들>(2013)까지 대부분 작품의 플롯은 신데렐라 스토리다. 가난하고 불우한 여성 주인공들이 완벽한 재벌 2세의 집요한 구애 끝에 사랑을 이루는, 이 닳고 닳은 스토리에 시청자가 빠져드는 이유는 김은숙 작가의 속도감 넘치는 사건 전개와 재기발랄한 대사 덕분이다. 재기와 유머, 패러디가 넘쳐나는 대사들은 줄거리와 결말이 뻔함에도 절로 채널고정·본방사수를 외치게 만든다.

2000년대 ‘시청률 불패’ 신화의 주인공으로는 박지은 작가도 있다. 박지은 작가는 <내조의 여왕>(2009),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 <별에서 온 그대>(2014) 등 ‘국민 드라마’ 반열에 오른 작품들을 빚어낸 미다스의 손이다. 박 작가 작품의 특징은 풍부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극을 경쾌하게 이끌어간다는 점. 김은숙 작가가 완벽하고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 세공에 헌신적인 반면, 박지은 작가는 남편의 승진을 위해 직접 발로 뛰는 아내(<내조의 여왕>의 김남주), 천방지축 여배우(<별에서 온 그대>의 전지현) 등 존재감 강한 여주인공의 창조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이 특징이다.

시청률에 아랑곳없이 마니아를 몰고 다니며 폐인을 양산하는 작가들도 있다. 노희경과 인정옥이다. 노희경은 <화려한 시절>(2001), <꽃보다 아름다워>(2004),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 등을 제외하곤 시청률에선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이할 점은 <거짓말>(1998)이 저조한 시청률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PC통신 드라마 동호회를 결성하게 했고, 1%대의 역대 최저 시청률을 기록한 <바보 같은 사랑>(2000)은 아직도 드라마 마니아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노희경 작가는 이들 마니아를 위해 대부분의 작품 대본집을 책으로 발간하는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 인정옥 작가는 <네 멋대로 해라>(2002)를 통해 ‘드라마 폐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이 폐인들이 촬영지를 성지순례하게 만든 최초의 주인공이었다.

노희경과 인정옥이 ‘작가주의’를 추구한다면, 반대쪽 극단에서 오로지 ‘시청률 지상주의’만 좇는 작가들도 있다. 임성한, 문영남, 김순옥 등 2000년 들어 ‘막장 드라마’ 논란을 일으킨 주인공들이다. 임성한의 <하늘이시여>(2005)는 친엄마가 딸을 며느리로 들이고, <신기생뎐>(2001)에선 주인공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됐고, <오로라공주>(2013)는 등장인물 12명이 돌연사·교통사고·유체이탈 등으로 줄줄이 하차하는 등의 기행으로 시청자가 불시청 운동까지 벌였다. <조강지처클럽>(2008), <수상한 삼형제>(2010), <왕가네 식구들>(2014) 등으로 ‘욕드(욕하며 보는 드라마)계의 신흥 대세’로 떠오른 문영남 작가의 전매특허는 불륜과 출생의 비밀, 복수, 도를 넘는 악행을 거듭하는 주인공들의 갑작스러운 개과천선이다. 눈 밑에 점 하나 찍고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전남편에게 복수하는 <아내의 유혹>(2009)이 성공한 뒤 남자 버전인 <천사의 유혹>(2009)을 내놓은 김순옥 작가도 ‘막장 드라마계’의 떠오르는 샛별이다.

예능 출신 드라마작가 급부상

최근 들어 드라마계에서 주목받는 현상은 예능 출신 드라마작가들의 부상이다. <응답하라 1997>(2012), <응답하라 1994>(2013) 등을 통해 복고 신드롬을 일으킨 이우정 작가는 <1박2일> <꽃보다 할배> <꽃보다 누나> 등을 만든 스타 예능 작가다. <인현왕후의 남자>(2012),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2013) 등으로 시공간을 오가는 타임슬립물의 대가로 평가되는 송재정 작가는 <순풍산부인과> <거침없이 하이킥> 등으로 이름을 날린 시트콤 작가였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로 2013년 가장 주목받는 작가였던 박혜련 역시 시트콤 <논스톱>으로 방송에 입문했다. 예능 출신 작가들의 특징은 기존 멜로·코미디라는 틀 안에 갇히지 않는 장르적 실험정신을 주류적 감성 안에 녹여내는 것이다. 이우정 작가는 시대적 고증과 청춘물이 만나는 절묘한 포인트를 알았고, <나인>은 미국 드라마가 부럽지 않은 구성과 추리로 승부를 봤으며,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초능력 판타지와 법정 스릴러의 교집합을 선보였다.

한국 드라마가 최근 멜로·가족물 중심에서 탈피하게 된 데는 김은희 작가의 공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은희 작가는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장르극’만 파고드는 거의 유일한 작가다. 메디컬 드라마에 스릴러를 결합한 <싸인>(2011), ‘사이버 수사극’이라는 장르를 처음 시도한 <유령>(2012), 그리고 청와대 미스터리 <쓰리 데이즈>(2014)까지 작품들은 예측불허의 충격적인 스토리 전개와 치밀한 구성으로 시청자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글 김아리 2000년부터 10년간 한겨레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문화부·사회부·국제부·편집부 등을 거쳤다. 지금은 원고 작성부터 편집·교열까지 ‘묻지마 알바’로 먹고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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