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11:35 수정 : 2012.12.28 11:35

지하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지하철역 출구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밀어올렸다.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행렬처럼 흘러가는 사람들의 등을 따라 걸었다. 오후 공기 속에 퍼진 설렘 혹은 외로움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➊ 천주교 성당과 이슬람 사원 그리고 개신교 교회를 가리키는 알림판들이 나란히 둥지를 튼 거리. ➋ 낙서의 천국인 양 어느 골목에 들어서든지 태깅(Tagging·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그래피티 문화의 일종)을 쉬이 찾아볼 수 있는 동네. ➌ 쓰레기 무단투기 경고문조차 여러 언어로 함께 새기는 곳, 여기는 이태원이다.

이태원은 출입구였다

 1955년 미8군 사령부가 용산으로 이전하고, 1957년부터 미군의 외박이 허용되면서 오늘날 이태원의 이미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국인 전용 클럽이 이곳저곳에 생겨나고 다양한 업종이 모인 상권이 형성되었다. 각종 원조품과 군용품이 흘러나오는 유출 통로가 만들어지면서 해외의 음반과 라디오 그리고 축음기도 전해졌다. 미국 대중문화가 유입되는 창구가 된 것이다. 1970년대에는 경기도 일원, 그러니까 부평·동두천·연천 등지의 미군 기관이 용산으로 오면서 이런 경향에 가속도가 붙었다. 이범선이 쓴 <오발탄>의 배경인 해방촌과 이웃해 피폐한 군상들의 출구 없는 집합소처럼 그려지던 지역이, 점차 미국인뿐만 아니라 일부 한국인들에게 문화 해방구로 기능하게 된다.

 이른바 ‘미8군 쇼’의 성행은 오늘날 연예기획사 시스템과 비슷한 체계가 만들어지는 계기였고, 전후 경제난 와중에 한국 예능인들의 활동이 ‘외화벌이’로 주목받는 규모로 성장하기까지 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미군 클럽과 쇼에서 기량을 닦은 음악인들이 가요시장에 진출하자 서양의 팝이 한국 대중가요의 중심으로 밀고 들어왔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은석은 당시 움직임에서 지금의 음악계보다 더욱 체계화된 측면을 발견한다. 음악인들이 작은 클럽에서 오디션을 통과해 활동을 시작한 뒤 각종 경연대회로 평가받아 더 큰 무대로 진출할 기회를 얻고, 기획자와 방송사 관계자에게 픽업되는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메이저 기획사가 키운 어린 가수가 바로 중앙무대에 데뷔하거나, 언더그라운드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경력을 쌓아도 대중과 만나기 힘든 작금의 상황에 비하면 기회 균등의 차원에선 오히려 더 나은 면이 있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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