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1 15:39 수정 : 2014.05.02 15:39

나는 집회에 여러 차례 참가했지만 늘 혼자였다. 친구들이 내 권유에 질색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집회 현장의 깃발들은 내게도 여전히 부담스럽다. 집단이 개인에게 틈을 열어놓을수록 연대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지난 3월15일 충북 옥천 나들목 광고철탑 앞에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모여 있다.한겨레 박승화
토요일 아침이다. 지인과 잡아뒀던 약속이 갑자기 취소됐다. 빈 시간을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다가 어제 리트위트한 내용이 떠올랐다. 배낭을 메고 서울시청 앞 대한문으로 향했다. 이정훈 전국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장이 고공농성을 한 지 154일째인 오늘, 전국에서 154대의 희망버스가 농성장이 있는 충북 옥천으로 향한다고 했다.

나는 30대의 평범한 직장여성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다. 잡일만 하는 사무직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졸업 뒤 취업에 실패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콜센터 업무가 올해로 10년째다. 내가 일하는 곳에선 통화 건수가 모자라면 잔업을 해도 추가 급여를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전화를 빨리 끊었다가는 고객의 불만이 빗발친다. 반대로 친절한 서비스를 위해 길게 통화하면 상사의 욕설이 날아온다. 노조 결성은 꿈같은 얘기다. 열악한 대우에 익숙해지다보니 하루하루가 무기력했다.

변화는 특별한 경험 뒤에 찾아왔다. 나는 LG트윈스 팬으로 1인시위를 한 적이 있다. 구단을 홍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운영진에게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질 것이 뻔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유별나다고 했다. 그때 만난 책이 공지영의 <의자놀이>다. 책을 읽고서 쌍용자동차 관련 정보를 리트위트하기 시작했다. 출발은 ‘쌍용차 걷기대회’였다. 나를 집회로 이끈 것은 혼자 싸워봤기에 느낄 수 있는 공감이다. 트위터를 통해 비슷한 사람들과 소통하다보니 두려움도 사라졌다. 그런 내가 너무도 놀라웠다.

지금까지 집회에 여러 번 참여했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위풍당당 문화제’와 ‘밀양 고 유한숙 어르신의 100일 추모제’도 내가 참여한 현장들이다. 지난 3월 초에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추모제에 다녀오기도 했다. 놀랍게도 삼성전자 반도체의 희생자 명단에는 내 입사 동기 몇몇이 보였다. 나는 삼성전자 반도체를 벗어났지만, 지금 있는 곳도 또 다른 삼성전자 반도체가 아닐까 생각했다. 집회에는 늘 혼자 갔다.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떠나는 희망버스도 이번이 처음이다.

10여 년 전을 떠올리게 하는 유성

대한문에서는 총 10대의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들은 제각각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내가 탄 버스는 ‘밥과 예술 버스’였다. 탑승객 대다수가 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예술가였다. 이동 중에는 다 함께 노동가요를 배웠다. 노래가 가슴에 쉽게 와닿지는 않았다. 나 같은 일반 시민에게는 ‘투쟁’과 ‘해방’이 등장하는 가사가 생경했다.

멀리 광고철탑이 보이는 곳에 버스가 멈췄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 꼭대기에 사람이 서 있었다. 이정훈 지회장이다. 그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저렇게 높고 비좁은 곳에서 얼마나 춥고 외로웠을까. 나도 철탑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아프고 힘든 사람에게 공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다. 찰칵. 광고탑의 모습이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겼다. 사진은 즉석에서 나의 트위터 계정으로 전송됐다.

내가 있을 자리를 찾아 한참을 걸었다. 길가에 늘어선 깃발들이 위압감을 자아냈다. 깃발 근처에는 결연한 표정의 노조원들이 대열을 지어 앉아 있다. 일부가 외치는 “자본가 척결”이나 “정권 타도” 구호는 아직 부담스럽다. 나는 왜 노동운동을 지지하는 걸까. 아마 공감을 하고 싶어서인 것 같다. 철탑 위에서 노동가요를 부르던 이정훈 지회장의 목소리가 눈물에 잠겼다. 사람들이 답한다. “힘들면 내려와도 된다! 이정훈! 우리가 같이 싸운다! 우리가 희망이다!”

버스는 다시 유성기업 아산공장으로 이동했다. 공장 안으로 진입하려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다. 담장 안은 이미 새까만 헬멧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위로 비죽 솟아오른 깃발들만이 시위대의 위치를 보여줬다. 깃발들이 요동칠수록 헬멧들도 함께 들썩였다. 최루액이 허공에 흩뿌려지는 순간, 담장 위에서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밤에 잠 좀 자자는 게 그렇게 큰 요구입니까?” 맞은편 무대에서는 연설이 한창이다. 거친 음성에서 분노와 결의가 느껴졌다. 문화선전대의 춤이 이어졌다. 머리에 동여맨 붉은 띠가 몸이 움직일 때마다 펄럭였다. 각이 선 안무와 투쟁적인 가사도 내게는 다소 낯설다. “일반 시민이죠? 인터뷰 좀 해주시겠어요?” 하루 종일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시달렸다.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커밍아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사실 집회 활동 사실을 밝히는 것은 내게도 큰 부담이다. 친구들더러 시위나 집회에 가자고 하면 다들 질색한다. “얘, 너 무섭다.” “그거 으싸으싸 아니야?” 노동운동은 과격할 것이라는 고정관념. 그 벽을 깨려면 좀더 대중적인 연설과 세련된 행사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을까.

밤이 되자 초봄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든다. 포장마차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제법 친해진 여자들끼리 술판을 벌이다가 사진기자들과 합석했다. ‘내가 언제 또 사진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겠어.’ 이런 게 진짜 연대하는 재미구나 싶다. 이슥한 새벽까지도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아니, 너무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여기저기 모닥불 주변에서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노동가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상하다. 왜 지금은 저 노래들이 이물스럽지 않은 걸까.

깃발의 대오 속, 개인의 틈을 다오

날이 밝았다. 사람들이 밤새 곱은 몸을 펴며 짐을 챙겨 무대 앞에 모였다. ‘희망만장 꽂기’를 위해서였다. 만장이 달린 대나무 장대가 나눠졌다. 내가 받은 선홍색 만장에는 ‘민주노조 승리’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각자 만장 하나씩을 공장 둘레에 세워야 한다. 풍경은 되풀이된다. 만장을 들고 공장 안으로 진입하려던 노조원들을 경찰이 가로막으면서,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한 차례 지나갔다. 노조원들은 경찰 뒤에 숨어 있는 회사 쪽 직원과도 한창 설전을 벌였다. 단체율동 시간. “안 하면 프락치다!”라는 농담 섞인 말에도 나는 뒤로 빠졌다. 단체율동의 부담감과 농담의 부담감 사이에서 내 마음은 깃들 곳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버스에 올라 다시 서울로 향한다. 나는 창밖으로 노조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밤새 긴장했을 경찰에게도 인사를 잊지 않는다. 이제는 모두가 나와 무관하지 않은 이들이다. 부유하는 개인의 점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사회. 더 이상 깃발의 군집만이 전부는 아니다. 깃발들의 연대망 속에서도 개인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틈이 있었으면 한다. 집단이 개인을 위한 틈을 열어놓을수록 연대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집에 오니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다. 일요일을 하루 더 연장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닥쳐올 월요일을 걱정하며 눈을 붙인다.

글 김효정 인턴기자 genu2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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