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1 15:32 수정 : 2014.05.02 15:04

광주 지역의 인문학 열풍은 5·18 정신의 계승을 통해 광주가 ‘보편도시’로 건너가야 한다는 시민들의 무의식과 닿아 있다. 이를 위해 전남대 철학과 등 지역에서 연구하는 철학자들의 활동은 큰 역할을 해왔다.한겨레 박승화
지혜학교 및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원당숲어울마루, 첨단·하남종합사회복지관, 송정시장카페, 광주민중의집, 기아차노조, 금속노조, 꿈·해맑은지역아동센터, 두암동철학교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무등지성, 들불학당, 월봉서원, 무등공부방, 참교육학부모회, 교육청 방과후학교·민주인권교육센터, 교육연수원, 광주여성재단, 광산구청, 남구청, 첨단고, 수완고, 광주일고…. 모두 강단 밖에서 인문학 강좌를 주관하는 광주의 단체·기관들이다. 통계 자료는 없지만 인구 대비 가장 많은 강좌와 참여자 수를 자랑하는 도시가 아마 광주 아닐까. 도대체 이 도시에서 마치 열병을 앓듯 인문학 교육의 열풍이 불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광주항쟁, 국가 배상 이후

1990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배상이 이뤄지고, 시행령에 따라 유가족의 교육·취업·의료 등에 대한 예우가 시행됐다. 이후 광주는 자신의 시대와 화해할 수 있었을까? 다시 묻자면 과연 광주 ‘정신’은 걸맞은 예우를 받으며 계승되고 있느냐는 말이다.

5·18은 마땅히 기념해야 할 사건이며, 피해자들에 대한 물질적 배상은 정당하다. 그러나 사건의 기념은 정신의 계승과 다르며, 물질적 보상은 정신의 계승을 보장하지 않는다. 5·18의 정신적 계승은 그것을 1980년 5월18일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을 일으켜세운 역사 정신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되불러오는 일, 지금 이곳의 시대정신으로 되살려내는 일을 뜻한다. 개신교회가 늘 개신돼야 하듯, 68혁명의 숨결이 유럽인의 일상 속에 살아 있듯, 광주 정신도 늘 새로워져야 하며 사람들의 삶 속에 깃들어야 한다.

2004년 이래 김상봉, 박구용, 박준상, 이중표(가나다순) 등 광주 지역 철학자들이 5·18에 관한 철학적 반성을 지속해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광주 정신이 기념적인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반성이란 언제나 지난 것을 생각하는 것. 사건의 회고가 아니라 정신의 계승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이 땅의 철학자들이 응답하는 것이다.

물질적 보상이 절정에 이른 것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이 가시화될 무렵, 이 엄청난 하드웨어에 과연 어느 ‘나’들이 내용을 채울 것이며 향유할 것인지, 광주시민들이 토로했던 이 막막함은 지금도 택시에서, 각종 뒤풀이 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대사다. 인문학 열풍은 어쩌면 금전적 보상 이후 광주시민들에게 급격히 찾아온 정신적 허기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보편도시 광주로 가는, 그 길 위에 인문학

광주 정신 계승은 광주나 전국의 시·도민끼리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는 뜻이 아니다. 광주 정신을 인류 보편적 가치 위에 자리매김하는 일, 인류사에 때마다 등장하는 민주·인권·평화의 정신이 1980년의 억압을 계기로 치솟아오른 것으로 읽어내는 일, 이것을 모두와 공유하는 일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광주 정신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인을 광주로 초대하는 국제화 과정은 5·18 기념재단의 각종 사업을 통해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런데 국제화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또 있다. 그것은 광주시민이 5·18을 내 것, 특정 단체의 것, 광주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 한마디로 ‘남’에게 적극적으로 내놓는 일이다.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는 하이몬의 외침처럼 한 도시, 특정 단체만의 5·18은 5·18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광주가 국제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도시로 건너가는 일이다. 보편도시로의 이행은 광주시민들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자신들의 특수성을 그 속에 자리매김할 줄 알게 된다는 것, 광주 정신을 역사 정신 속으로 반환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 길 위에 인문학이 있다. 인문학은 동서고금의 특수성을 지니면서도 그 제한을 뛰어넘는 보편적 주제를 탐구한다. 따라서 인문학 교육은 교육주체가 자기 시대를 한계 안에서 인식하면서도 보편적 가치로 고양시키고, 그곳에서 자기 시대를 재인식하는 끊임없는 순환 활동이다.

결과적으로 시민이 자신이 처한 곳을 보편도시로 만들어가는 길은 교육주체의 인문학 학습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5·18의 정신적 계승이 광주를 보편도시로 승화시키는 것이라면, 또 보편도시로의 이행 과정이 인문학 학습 과정과 일치한다면, 광주 지역의 인문학 열풍은 이제는 보편도시로 건너가야 한다는 광주시민들의 무의식적 몸부림인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강단 밖에서

학술적 정의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강단 밖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인문학은 한마디로 ‘글(文)로 사람(人)을 만나는 일’이다.

우선 이 말은 글이 없으면 인문학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문학을 내건 강좌들 중 종종 읽을거리 없이 진행되는 것(연사의 체험담, 부부관계 상담 등)이 있다. 하지만 인문학 강좌라면 고전이든 당대 작품이든 유행가 가사든 반드시 읽을거리가 있어야 한다. 다음, 그 글을 통해 사람을 만나야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삶을 만나는 것, 삶을 만나는 것은 시대를 만나는 것이다. 글을 읽되 저자의 삶과 시대가 독자의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되도록 읽어야 한다. 하여 강단 밖 인문학 교육의 주요 방법론으로 채택되는 것이 바로 낭독이다. 김보경의 <낭독은 입문학이다>에 따르면, 낭독은 활자를 일으켜세워 낭독자의 마음속에 저자의 생생한 모습을 탄생시킨다. 이런 만남은 몰입도에 따라 현실과 완전히 독립된 인문학의 공간을 형성한다.

이즈음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다른 의미를 얻는다. 부활한 저자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낭독은 한 공간 안에서 소리의 공명을 통해 서로의 영혼을 만나게 한다(같은 책). 거기서 강사와 수강생은 구분되지 않으며 모두가 교육주체이다. 저자의 삶을 함께 치르고 그 체험을 동시대인들과 공유·소통하는, 그 연대의 길은 강단 밖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 자체이며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도정일)의 유일한 쓸모다. 강단 밖 인문학 교육의 목표는 인문학 자체를 회복하는 일이다.

“학교폭력 방지 위해 4강 청탁해요”

여러 단체들이 각자의 ‘쓸모’를 위해 강좌를 의뢰해온다. 한번은 학교폭력이 고민인 한 도서관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학교폭력을 방지하는 내용으로 4강 정도 수업이 가능하신가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아니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렇게 거절을 해볼까? ‘관장님, 인문학 교육은 부단한 순환활동입니다. 운이 좋아 단번에 순환활동이 이뤄졌더라도 금방 일상으로 돌아가거든요. 학습이 학(學)으로 끝나지 않고 습(習)이 되려면 오랜 시간 같은 활동을 반복해야 합니다. 인문학이 원래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그리고 특정 주제나 계층을 위한 인문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평화 교육을 위한 <일리아스>가 따로 있고 입시 교육을 위한 <일리아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1년 정도 매주 만나는 방식으로 한번 맡겨보시지요? 4강이면 심리치료 쪽이 훨씬 유리합니다.’ 하지만 배운 체한다, 돈 밝힌다는 비난이 무서워, 아니 사실은 언제 끊길지 모르는 수입 걱정에 대답한다. “요새 학교폭력이 문제죠. 당연히 가야죠. 특별히 원하시는 텍스트나 진행 방식이 있으신가요? 예, 그렇게 준비해보겠습니다. 그럼….” 만일 이 강좌가 성사됐다면 나는 4회에 걸쳐 ‘인문학 교육에 의한 학교폭력 예방’을 성취하기 위해 진땀깨나 뺐을 것이다. 효과만 난다면야 진땀이 아니라 골수라도 빼주겠건만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현실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인문학의 공간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현실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일,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어이 바꾸게 하는 일, 바꾸되 이데올로그 교육처럼 곧장 뛰쳐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득한 자기성찰을 통해 삶을 뿌리째 바꾸는 일,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한 나와 나들이 모여 결국 세상을 바꾸는 일. 이것이 어찌 단시간에 가능하단 말인가. 강단 밖 인문학 교육이 지닌 유일한 쓸모가 빛을 발하려면 지속성과 체계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다.

재능기부 강요받는 인문학 활동가들

영어·수학 고액 과외는 해도 인문학은 왠지 재능기부를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 이 느낌이 사실상 강단 밖 인문학 교육을 와해시키고 있다.

한 도청이 모 인문학 단체와 함께 연간 기획 강좌를 진행했다. 잘 진행됐고 내년에도 열자는 제안에 단체 구성원들은 강좌 기획에 들어갔다. 돌연 도지사가 재능기부를 요구한다. 그들은 고민한다. ‘인문학 교육의 성과를 거두려면 재능기부 형태로라도 계속 이어가야 할 텐데….’ 조금 있으면 다른 생각도 난다. ‘도지사와 관계를 잘 맺어놓아야 다른 일들이 이어지지 않을까?’ 이제는 화가 난다. ‘아니 우리 강사료 다 해봐야 얼마나 된다고!’

재능기부란 한 개인이 자신의 재능을 개인적 이익 추구에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공헌하려는 자발적 활동이다. 재능기부를 거절하면 어느새 속물이 되고 마는데,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은 마음,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려는 욕구가 이익 추구라고 비난받아야 할까? 기부는 자발성을 상실할 때 착취로 변질된다. 재능기부를 따내는 것이 그의 이력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권력자가 그것을 요구하는 순간 그에게는 ‘착취자’의 꼬리표가 붙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강사료를 준다 해도 적절한 대우를 하는 곳은 많지 않다. 늘 일에 치여 살지만 최저임금 수준을 간신히 유지하는, 그도 못한 형편인 활동가들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인문학 활동가들과 넉넉지 못한 주관단체에 대한 지원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인문학 교육의 지속성과 체계성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며, 결국 최대의 수혜자는 시민이다. 이것이 ‘인문 복지’의 본뜻이다.

강단이 강단의 경계를 넘어서

‘강단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꼭지를 청탁받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강단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미뤄놓더라도, 도대체 누가 그 경계를 넘어야 하나? 답은 강단 자신이다. 물론 대학교수가 모두 강단을 박차고 나와 시민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교수는 강단을 지켜야 한다. 전문적인 인문학 교육자를 양성해 강단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인문학 교육자들 중 과연 누가 시민을 위한 전문적인 교육방법론을 습득했겠는가? 전공 공부를 하면서 각자가 쌓은 노하우, 느꼈던 한계, 나누고 싶은 열망이 그들을 강단 밖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교육대·사범대 출신은 좀 낫겠지만 이들을 시민 교육 전문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철학은 사정이 더 좋지 않다. 전달하기 위해 어지간히 고민하지 않고서는 말 붙이기도 어렵다. 전남대 철학과의 경우 ‘철학교육방법론’이 대학원 과정에 설치됐지만, 전문가를 양성하기에는 체계나 시수가 아직 부족하다. 최근 광주 지역에서 철학 교육자에 대한 수요는 학과 내 철학교육 전공, 아니 별도의 철학교육과를 신설해야 할 만큼 늘고 있다. 윤리교육과와 철학교육과가 따로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하나는 있는데 다른 하나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하다.

이 밖에도 강단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장황하게 늘어놓느니 독일의 대문호 슈테판 츠바이크의 입을 빌려 한마디를 전하는 것이 좋겠다. “인문주의의 기질적 근본 결함은 인문주의가 민중을 이해하거나 그들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고, 위에서 그들을 가르치려 했다는 데 있다. 현실에서 유리된 이 이상주의자들은 벌써 (현실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자기들의 영역이 상당히 확장됐고, 모든 나라, 궁정, 대학, 수도원, 교회에 있었던 그들의 하인, 사신, 보좌관이 이제껏 야만적이었던 지역에서 ‘교육’과 ‘수사학’이 진보했음을 의기양양하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그 영역은 엷은 상층부를 품었을 뿐 현실에 굳게 뿌리박은 것이 아니었다.”(<에라스무스>)

*후기 - 광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인문학 교육 단체들 중 몇몇이 서로 소통하고 상생하자는 의미에서 올해 초 ‘광주전남인문학교육네트워크’(가칭)를 결성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더없이 좋은 강좌들을 개설하고 있지만, 사정이 어렵다보니 마땅한 홍보 방안을 마련하기 어렵고 그러다보니 불가피하게 폐강을 결정해야 할 때도 적지 않다. 이들의 꿈은 장차 ‘인문학교육재단’을 만들어 지역아동센터같이 예산이 넉넉지 않은 곳에서 강사를 요청하면, 재단이 직접 채용해 현장에 투입하는 교육행정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안정적인 인건비와 지속적인 교육체계, 두 마리 토끼를 잡겠노라 호기 있게 선언했지만 당장은 내일 열릴 강좌가 열릴지 말지 초조한 마음이 그나마 먼 꿈을 더 멀리 꾸게 한다.

글 양진호 광주를 중심으로 철학 및 인문학 강좌를 주관하는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www.paideia.re.kr)에서 사무국장 겸 연구원으로 일한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예아카데미의 간사와 사무국장을 역임했고, 스피노자의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와 데카르트의 <성찰>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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