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1 15:27 수정 : 2014.05.02 15:04

강단 밖 인문학은 강단 인문학 위기론과 대비되며 하나의 현상으로 비치지만, 거기서도 교육열과 스펙쌓기로 대표되는 ‘욕망의 인문학’과 시민의 자발성이 빚어낸 ‘대안인문학’, 소외계층의 자활을 위한 ‘치유인문학’ 등으로 갈린다.한겨레 박승화
“해가 지는 건가?”

지난 3월25일 클로드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가 맞이하는 이곳은 노숙인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성프란시스대학’의 강의실이다. 빔 프로젝터가 야릇한 색채를 쏘아올리는 동안, 학생 20여 명은 ㄷ자로 배열된 책상에 둘러앉아 감상을 나눈다.

“아냐, 저건 해가 뜨는 거지!”

30대 장성화(가명)씨도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장씨는 카지노에서 지난 10년의 세월을 잃어버렸다. 방황 끝에 도박은 끊었지만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뭐라도 시도해보자는 생각에서 지원한 것이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이었다. “여기서는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1년 동안 예술사, 문학, 국사, 철학 등을 배워요. 제일 좋은 과목은 글쓰기예요. 글을 쓸 때 평소 느끼지 못했던 걸 많이 발견하거든요. 최근에는 가계부도 쓰기 시작했어요. 수업을 시작한 뒤부터 생활에 규칙이 생기더라고요.” 쉬는 시간에도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학생들의 눈에는 파릇한 생기가 감돈다.

강단 밖 인문학의 다른 현장들은 어떨까? 그곳에서도 이런 눈빛을 찾아볼 수 있을까?

#1 대치동의 인문학 과외

“얼짱이오.” 휴대전화 앨범 속 인물이 누구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과외 학생은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렸다. 아이는 과외 수업 내내 손에서 휴대전화를 놓지 않았다. 둘 중의 하나였다. 얼짱들의 사진을 훑어보거나 카카오톡 게임을 하거나.

월 160만원. 대학생 심지영(가명)씨가 아이와 주당 8시간 책을 읽는 대가다. 학부모는 아이에게 인문학의 재미를 알려달라고 했다. 인문학적 소양을 중시한다는 입학사정관 전형 때문이었다. 아이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인문학 수업 외에도 3개의 과외와 2개의 학원 스케줄이 있었다. 인문학 공부는 그저 피로의 확장일 뿐이었다. 과외는 두 달이나 계속됐다. 아이가 엄마에게 거부 의사를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생 엄마가 하라는 대로만 살아온 아이에게 자기 의견은 없었다. 결국 심씨가 대신 나서야 했다.

과외를 그만두고 한참 뒤, 익숙한 번호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수시 전형 때문에 급해서 연락드렸어요. 우리 애 자소서(자기소개서) 좀 써주실 수 있나요?” 끈질긴 부탁과 돈의 유혹. 결국 심씨는 펜을 들었다. 완성된 글은 인문학 서적으로 서두를 여는 자소서였다.

#2 강의 파는 업체, 사는 기업

‘최고의 강의! 스타 강사 대기! 인문학 퍼레이드!’

‘고전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세종대왕의 소통 리더십, 영화로 보는 창조적 상상력.’

인터넷에서 기업특강대행업체의 현란한 광고 문구를 발견한 순간, ㄱ물산의 인사관리부 박 부장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예, 어느 기업에서 전화 주셨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상냥한 상담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ㄱ물산에서 전화했습니다. 다음달 중에 인사팀 직원들 대상으로 특강을 열까 하는데요.”

“특별히 원하시는 강의 있으세요?”

“인터넷에서 인문학 특강 광고를 봤거든요. 강의를 직접 보고 결정할 수 있을까요?”

“아, 저희 강사분들이 다른 기업에서 하는 강의를요?”

잠시 흐르는 어색한 침묵.

“고객님,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특강 내용은 기업체의 인력교육 자원이라 함부로 공개할 수 없어서요. 홈페이지에 짧은 동영상 시범 강의가 있기는 한데….”

“아, 그래요? 그럼 한번 보고 나서 연락드리죠.”

상담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를 잡아끈다.

“저기, 저기 잠깐만요!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직위와 연락처 좀 남겨주세요. 저희가 인문학 쪽으로 좋은 강의가 있으면 차후에 추천해드리겠습니다.”

#3 아이들은 관심 없는 여행

토요일 아침부터 ㅎ도서관 복도가 어수선하다. 복도에는 대여섯 명의 학부모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엄마나 아빠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대다수는 동화작가가 강연하는 ‘가족 동행 어린이 인문학여행’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다. 어느새 강당에는 5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태권!” 6살짜리 남자아이가 강단 위에서 두 주먹을 번갈아 뻗는다. 강연자가 스파르타 문화를 설명하며 아이에게 태권도 시범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린 청중의 시선을 끌려면 어쩔 수 없다. 오늘 강의에서는 인문학의 기원과 역사를 소개했는데, 30분이 넘어가자 아이들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색종이로 배를 접는 아이, 옆 사람에게 자꾸 귓속말을 하는 아이, 일어나서 두리번거리거나 발을 구르는 아이 등 유형은 다양하다. 그 와중에도 필기까지 하며 경청하는 아이들은 거의가 중학생이다.

강의가 끝날 무렵. 초등학생 자녀들과 함께 온 최정환(가명)씨가 눈에 띄었다. “아이 엄마가 이야기해서 왔어요. 가족끼리 인문학을 접할 기회가 생겨서 좋긴 한데…. 애들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인문학을 배운다는 게 어렵지 않을까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주입식이지.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학문이잖아요. 스스로 사람을 알고 싶을 때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강의에 대한 소감을 묻자 초등학교 4학년인 최씨의 아들은 “안 들었는데요!” 하고 휑하니 자리를 피한다. 이번에는 6학년 딸에게 물었다. “재미있어요. 근데 사실 좀 어렵긴 해요.”

#4 대학생 캠프, 힐링과 스펙 사이

광고마케터가 꿈인 대학생 강주원(가명)씨는 지난 1월, 부산에서 열린 대학생 인문학 캠프에 참가했다. 요즘 인문학 이야기가 방송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관심이 생겼다. 솔직히 취업시장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중시한다는 말도 신경 쓰였다. 정성스레 쓴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적지 않은 참가비를 납부했다. 캠프 현장에는 전국 60개 대학에서 온 대학생 150여 명이 있었다. 구체적인 참가 동기는 다르겠지만 대다수는 ‘인문학 열풍’을 실감하고 있었다.

2박3일 동안 강연회, 인문학 퀴즈 풀기, 청춘 고민 상담 등의 행사가 진행됐다. 인문학 강연에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영하 소설가, 최영환 엠트리 대표가 연사로 등장했다. 마지막 순서는 캠프 기간 동안 각자가 인문학에 대해 느꼈던 것을 발표하는 거였다. “저한테 인문학 캠프는 ‘힐링’이었어요. 좁은 학교 생활에서 벗어나 멀리 보고 넓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좋았죠. 물론 인문학 열풍이 없었다면 캠프에 참가하지 않았을 거예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인문학 활동을 스펙으로 인식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이런 캠프에 다녀왔다고 하면 주변에서 자기소개서 글감이나 이력서 한 줄이 필요해서 다녀온 걸로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아요.”

#5 읽고 토론하며 어울리는 청소년

대구에 있는 청소년 인문학 동아리 ‘다브’는 ‘우리는 다 브레인이다’의 줄임말이다. ‘다브’의 시작은 2012년 청소년교육문화센터 ‘우리세상’에서 주최한 ‘인문고전캠프’였다. 캠프에서 만난 교사 2명과 학생 4명이 만든 동아리에는 현재 20명의 구성원이 몸담고 있다.

‘다브’에서는 1년에 6권의 인문학 도서를 읽고 토론한다. 지금까지는 <동물농장>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태백산맥> <20년간의 수요일> 등을 읽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함께 영화를 보거나 소풍을 다닌다. ‘다브’는 사회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지난해 가을, 아이들은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기금을 보태기 위해 1일카페를 열었다.

‘다브’의 지도교사 김형수씨는 이처럼 함께 어울리는 것 자체가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요? 요새 인문학 교육이 또 다른 입시 과목이나 스펙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가 커요. ‘다브’에서 하는 토론과 놀이는 모두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향하도록 기획돼 있어요. 그게 현재의 청소년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가장 원하고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6 직장인들, 비슷한 강연보단 소규모 모임

저녁 7시, 지하 책방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인다. 올해로 22돌을 맞는 풀무질은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정문 앞에 있는 인문학 서점이다. 오늘은 <녹색평론> 읽기 모임이 열리는 날. 책방 주인 은종복씨와 동업자, 마을활동가, 변호사, 기자, 다큐멘터리 PD, 총 6명이 모였다.

“오늘 발제는 누구부터 하지?” 사회는 책방 주인 은씨가 맡는다. 은씨가 읽기 모임을 처음 만든 것은 7년 전이다. 대학에서 인문학 모임이 급격하게 줄어들 무렵, 그는 여전히 인문학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읽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철학 고전 읽기 모임, 소설 읽기 모임, 시 읽기 모임, ‘역사와 산’ 산길 모임 등 그렇게 시작한 모임이 벌써 8개째다. 최근에는 마을공동체 사업을 위해 사회적 협동조합까지 열었다. 어린이책놀이터에 이어 행복한 술집, 밥집, 찻집과 같은 터전을 확장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2시간 동안 ‘출산의 기계화’를 주제로 날카로운 논쟁이 오갔다. 이어진 술자리에서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토론이 연장되거나 참여자들의 신변잡기가 튀어나오는 식이다. 취기 속에 꼬리를 무는 삶의 이야기. 그게 바로 은씨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모습이다. “인문학 열풍? 우리랑은 크게 상관없어. 스타 인문학자들이 쓴 책은 대형 서점이나 온라인에서 잘 팔리니까. 대중인문학도 좋지만 비슷비슷한 강연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지. 이렇게 소규모 모임에서는 강사와 학생의 권위가 없어서 좋아. 1대1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거든.”

#7 제2의 길 찾는 어르신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목요일. 이른 오후부터 서울 성북구 평생교육원이 북적인다. 이곳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좌들은 성북구민을 대상으로 저렴한 가격에 제공된다. 자리가 비면 타 지역 주민도 들을 수 있다. 오늘 수업은 <논어>를 다루는 고전 강좌다. 80명을 수용하는 강의실이 4분의 3 정도 찼는데 대부분 50~60대 어르신들이다. 60대 주부 이성복(가명)씨도 그중 하나다.

칠판이 금세 난해한 한문 구절로 채워졌다. 이씨는 한자에 꽤 익숙하다. 결혼 전에 한 일이 논문 타이핑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모두 분가한 뒤, 적적했던 이씨는 지인의 소개로 한문 고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인터넷 덕분에 지역에서 제공하는 무료 강의를 찾아다닐 수 있다. 강의를 들을수록 동양철학이 말하는 구절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닿았다.

“화만 나면 존칭을 쓰는 남편이 있대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 스스로를 억제하기 위해서래. 내가 걔 보고 너 참 시집 잘 갔다 했어요. 말이라는 게 자기를 통제하기도 하고 함부로 만들기도 하거든. 그게 예(禮)라는 거야.” 어르신들은 강사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졸거나 휴대전화를 만지는 사람은 없었다. 박씨의 손도 계속 필기를 하느라 분주하다. “인문학이 많이 도움이 돼. 동양철학을 하면 애들 예절교육에 좋지. 내 친구들도 손자·손녀 가르칠 생각에 일부러 이것저것 배우러 다녀. 여기저기 다니다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도 재미지. 여기서 제2의 길을 찾는 사람도 있어. 나중에는 나도 강단에 서 있는 저 교수처럼 한문 번역을 하고 싶어. 지역에서 이런 좋은 강의를 많이 해야 돼.”

다시 성프란시스대학 강의실. “여기서는 노숙인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누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서로 배워간다는 뜻이죠. 저는 여기서 배우는 게 참 많아요. 인생에 굴곡이 많은 분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각이랄까? 우리 선생님들도 졸업식에서 무언가를 얻어간다면 좋겠죠. 그렇지만 결과물로 성패를 가르고 싶지는 않아요. 같이 모여서 소통한다는 것 자체가 변화잖아요.” 예술사 수업을 맡은 김동훈 교수의 말이다.

사회복지사 정경수씨는 이곳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나타날 때마다 인문학의 힘에 놀란다. “다시서기센터(노숙인의 자활과 사회 복귀를 지원하는 대한성공회유지재단)의 실무자 중에 나이가 좀 많은 입사 동기가 있어요. 알고 보니 성프란시스대학 졸업생이셨죠. 인문학을 배우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같은 노숙인들을 돕기 위해 나선 겁니다. 재작년부터는 같이 공부하는 분들끼리 등산 동아리와 풍물패 동아리도 만들었어요.”

스크린에 고흐의 그림 <해바라기>가 비쳤다. 떠오르는 감정을 자유롭게 털어놓으라는 교수의 말에 설익은 단어들이 교실을 떠돈다. “희망!” “열정!” “사랑!” “열망!” 이미 일부가 시들어가는 해바라기를 보고도 밝은 감각의 어휘들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폐허 속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빛을 발굴해내는 것. 어쩌면 그게 바로 인문학의 본질이 아닐까.

글 김효정 인턴기자 genu2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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