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1 14:31 수정 : 2014.05.02 15:02

전통적 경쟁 형태에 속하지 않는 유형을 제시하는 홍진호는 경쟁의 일상성을 겪는 우리에게 가장 모방하고 싶은 사람이다.한겨레 박승화
전쟁 시뮬레이션인 <스타크래프트1>(‘스타1’)에서 승리의 요체는 자원, 생산력, 물량 격차로 이어지는 전쟁의 하부 구조를 이해하고 응용하는 데 있다. 홍진호는 저그 종족이 노동일꾼 수 대비 전투병력 생산성이 뛰어난 특성에 주목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자원→병력 소모전을 유도해 전략 우위 요소인 물량 격차를 상대적으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답을 찾았다. 그의 전술적 유인책은 응수타진이었고, 상대가 단순히 웅크린다면 영토확장(유닛을 생산하기 위해 자원을 차지하는 것)을 통한 절대적 물량 격차를 만들 수 있었다. ‘폭풍저그’가 보여준 공격전술의 경쾌함은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는 탁월함의 표피에 불과하다. 그는 안정적인 운영을 선호하는 게이머였다. 그는 당대 최강의 저그였고 이것이 명성을 이루고 팬덤을 확보해가는 출발점이었다.

홍진호가 사랑받은 이유는 게임을 대하는 그의 캐릭터에 있었다. ‘결과적 승패만큼 과정도 중요하다’는 그의 캐릭터는 두 개의 일화로 표현될 수 있다. (1)‘마이큐브’ 8강에서 패색이 짙은 경기를 하는 중에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자 깔끔하게 박정석에게 패배를 선언하고 상황을 복잡하지 않게 만든 일. (2)‘올림푸스’ 결승에서 유리했던 경기 도중 시스템 이상으로 서지훈이 일시 중단을 요구하고 컴퓨터를 멋대로 재부팅한 것을 인정하고 재경기를 했던 일.

그러나 홍진호는 탁월한 게이머로서 기억되진 않는다. 인터넷 하위 문화에서 홍진호는 ‘2’ 그리고 ‘황신’으로 대리되며, 그를 게이머가 아닌 존재로 박제한 지점은 공식 리그(애매한 부분이 있다) 6회 준우승이 아닌 두 번의 스캔들과 그에 따른 군중폭력이다.

첫 스캔들은 ‘3연벙’이었다. ‘에버2004’ 4강 임진록에서 임요환이 3경기 연속 극초반 벙커링 암수로 승리하며 구성원들에게 대논란을 불러일으킨 이후엔 ‘스타1’은 이기기 위해 무슨 수를 써도 되는 냉혹한 세계로 불가역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스타1’ 역시 승자독식 구조이기에 이런 전환은 이르든 늦든 필연적이었으리라.

슬럼프에 빠진 그는 차차 까이기 시작했다. 조롱은 일상이 되었으며 끝내는 즐겨야 하는 조리돌림이 되었다. 그는 유죄였다. 2는 2등의 속성을 말하며, 간사하게 인기를 얻기 위해 착한 척하며 2등에 만족하는 위선자의 속성을 대변했다. ‘콩까기’는 홍진호의 골수팬이라도 또는 골수팬이기 때문에 더 풍자적으로 승화해서라도 커뮤니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전염성 강한 놀이였다.

다음 스캔들은 2006~2007년 마재윤의 본좌 담론이었다. 마재윤은 테란, 온게임넷, 협회, 임요환 등과 같은 e스포츠계 구체제에 대립하는 안티테제로 여겨졌다. 본좌론은 마재윤 쪽에서 담론을 생산하던 사람들이 개발한 논리로, 그 본질은 마재윤 중심으로 스타판의 역사를 재편하는 작업이었다. 이때 전 본좌들의 대적자일 홍진호는 저그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 없고 더 나아가 발전을 방해했다는 여론이 공론화된다. 홍진호는 저그의 역사에서도 부정당한다.

‘황신’이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그 후였다.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한 그는 팀을 우승에서 좌절시키고 전도유망한 선수를 결승에서 패배시키는 신성한 존재로 숭배되고 사랑받았다. 개인 리그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고 소속팀인 KTF가 동세대 게이머들을 방출하는 와중에도 그는 KTF의 선수로 남았다. 황신인 그는 더 이상 저그도 아니었고 게이머도 아니었으며 홍진호도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e스포츠계 내의 사회적 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희생물에 만장일치적으로 반대(anti)하는 모방경쟁의 소용돌이로 하나 되어 분열의 위기를 종식시키고 안정을 찾았던 e스포츠의 질서에 대한 건국신화다. 2와 2의 연상을 반복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희생양의 악덕에 가해진 최초의 폭력적 만장일치를 재현하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가 지적한 바와 같이, 돌팔매에 맞아 죽은 희생물은 부활 뒤 화려하게 등장하며 주기적으로 콩을 까며 황신을 찬양하는 모두의 제의로 마무리된다.

현재 홍진호는 e스포츠나 인터넷 하위 문화의 컬트로 머무는 존재는 아니며, tvN의 <더 지니어스>를 통해 10~30대 대중에게 소개됐다. <더 지니어스>에서 그는 ‘아름다운 패배와 추악한 승리’를 택해야 한다는 교훈을 표방한 제작진의 의도를 보기 좋게 물먹이며 승리했다. 이는 언뜻 소년만화 주인공의 카타르시스 내지 2등의 인생 역전 구도로 보이지만, 그것만으론 왜 우리 시대에 홍진호가 주류 문화에 침투해 보편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극동의 보편적 권력투쟁에 관한 우화인 김용의 <비곡 소오강호>엔 “사람이 강호에 있으면 제 몸도 제 것이 아니다”란 구절이 나온다. 분류에 따르면 똑똑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은 타락한 집권파, 뒤엎으려는 모반파, 개선하려는 개혁파, 권력투쟁을 거부한 은자로 나눌 수 있다. 옛 극동에선 상부에서 다스리는 자들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권력을 잡기 위해서 속고 속이는 경쟁을 하며, 다스려지는 자들은 정직한 협동을 권장받았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선 경쟁이 생산성을 만들어내는 기본 원리이며, 평범한 사람들도 경쟁을 요구받는다. 한국에서 이 현상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살기 위해 각개약진하며 심화됐고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은 기본 소양이다. 경쟁이 심해지면 타협도 심해지지만 투쟁하면서 얻는 것은 불안정한 일자리 정도이지, 권력도 아니고 대의도 아니다. 물론 잉여를 자처하는 청년세대에게 대의 추구는 냉소의 대상이며, 현실적인 그들에겐 은자처럼 경쟁을 뒤로하고 제 양심을 지키며 산다는 것도 선택지가 아니다. 다만 경쟁의 일상성 아래 자신의 양심 기준을 한 단계씩 내려야 하는 것이 괴로울 뿐이다.

예컨대 그들은 어떻게든 타인을 짓밟고 서는 고립된 경쟁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세상을 바꾸려는 야망은 없고 동시에 남들 보기에 추해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홍진호는 이 극현실주의 판타지를 거의 충족시킨다. 실제 그가 <더 지니어스>에서 힘들게 우승하고 얻은 것은 예능 관련 방송의 비정규직 일자리 세 곳이다. <더 지니어스>보다 척박한 세계의 일상에서도 승리와 굿게임을 대등하게 준수한 것을 확인할 수 있고(게다가 경쾌하게 승리한다!), 별반 대단한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며, 동네 형·오빠·친구가 가질 법한 시선에서 이들이 할 법한 언행을 한다. 전통적 경쟁 형태에 속하지 않는 유형을 제시하는 홍진호는 경쟁의 일상성을 겪는 우리에게 가장 모방하고 싶은 사람에 속하리라.

글 김정근 기자와 칼럼니스트로 활동했고, ‘이지눈’을 조직해 e스포츠계의 선수 처우 개선을 시도했다. 필명은 Judas Pain 또는 pain이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공저)를 출판한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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