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1 14:28 수정 : 2014.05.02 15:02

홍진호는 방송에 출연하면서 프로게이머 2인자로서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는 게임도 방송도 자신의 방식대로 당당하게 임한다.tvN 제공
처음 그와의 인터뷰 약속 시간은 오후 2시였다. 뒤에 일정을 조정하면서 오후 4시로 변경됐지만 2의 배수니까 괜찮다. 그와의 인터뷰 날짜는 3월21일이었고 인터뷰에 참관하고 싶다고 당일에 불쑥 찾아온 손님도 2명이었다. 아마 그가 스튜디오로 들어선 시각은 4시2분이 아니면 4시12분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시계를 보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분명 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무슨 억지냐고? 아니다. 홍진호니까 그냥 그리 믿으면 된다. 이런 것이 바로 ‘홍진호 현상’이다. 세상의 모든 2를 수렴해버리는 남자.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그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학습돼버렸다. 2는 그의 것이다. 2는 그의 것이다….

전설을 이해하기 위한 예습

독자들 중에서 연령대에 따라 혹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해봤는지에 따라 홍진호에 대한 사전 지식이 꽤 차이가 날 것이다. 게임 마니아를 자처하는 손아람과 달리 게임이라곤 오락실에서 뽕뽕뽕거리는 갤러그나 스마트폰으로 사탕이나 얼음 따위를 부수는 경력이 전부였던 나에게 홍진호는 근래 방송에 자주 나오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홍진호’를 검색어로 넣어보았다.

홍진호는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2000년 프로게이머가 된 이후 2등만 22번을 했고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단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다. 그는 역대 온게임넷 스타리그 다승 공동 2위이며, 역대 한국e스포츠협회(KeSPA) 랭킹 최장기간 2위이며, 역대 2번째로 스타리그 통산 100승을 달성했고, 2번째로 스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역대 2번째로 억대 연봉을 받은 프로게이머다. 또 역대 올스타전 최다 득표 2위에 빛나며, 은퇴식 당일 2차전에서 2시22분에 마지막 경기를 시작했다. 제닉스 스톰 게임단의 감독으로 취임한 날짜는 2012년 2월22일이었다. (‘위키피디아’만 봐도 ‘2’와 얽히고설킨 그의 기록들은 여기에 요약한 것보다 훨씬 많다.) 하다못해, 그가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 열차를 예매했는데 배정된 좌석이 22일 2호차 22번이었으며, 심지어 <스타크래프트>를 만든 게임회사인 블리자드에서 홍진호와 임요환의 경기 기념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그 기간을 2011년 7월29일 2시22분부터 8월5일 2시22분까지로 공고하기도 했다. 상품 개수도 2개씩이었고, 이벤트 참가자 수도 22명, 222명을 기준으로 나눌 정도였다.

이렇게 ‘2’와 홍진호를 동일시하는 움직임은 인터넷상에서 하나의 놀이문화로까지 커졌다. 2009년 <그림자살인>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주인공 이름이 하필 홍진호였다. 이 소식을 접한 누군가 영화의 평점을 2점으로 만들자고 제안했고, 이에 동조하는 네티즌들에 의해 영화는 개봉하기도 전에 평점 댓글이 수백 개가 달리고 평점이 인위적으로 2점대에 맞춰지는 일이 벌어졌다. 주연을 맡은 황정민은 평점 놀이를 자제해달라는 인터뷰를 해야 했고, 제작사는 객관적인 평가를 해달라며 온라인 게임 팬들을 위한 시사회를 따로 열기도 했다. 일부 네티즌들의 장난이 너무 심하다는 비판 여론도 있었지만 배우가 아닌 극중 인물의 이름 때문에 이 정도의 관심이 몰리고 소동이 벌어지는 것 자체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2009년이라면 홍진호는 군생활을 할 때였고 게임 팬을 사로잡을 만한 새로운 스타 게이머들이 활약할 때였다. 거의 은퇴를 앞둔 셈인 20대 후반의 프로게이머임에도 ‘홍진호 까기’의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스타크래프트>를 중심으로 하는 게임 유저들을 넘어서 이미 디시인사이드를 비롯한 인터넷 서브컬처계에서 널리 ‘까이는’ 일종의 공공재였다. 요즘 말로 하면 사람마다 ‘흑역사’란 게 있기 마련이고 숨기고 싶은 흑역사는 살짝 가려주는 게 예의이기도 한데, 유독 홍진호의 흑역사는 모두의 공통된 놀잇감이었다.

예를 들어 2004년 게임 중계방송 중에 잠깐 지었던 기이한 표정이 캡처 화면으로 돌면서 ‘콩간지’라는 이율배반적 타이틀로 큰 화제가 되었다. 그의 수많은 합성사진이 제작돼 유포됐고, 팬미팅 무대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잠시 췄던 막춤은 이내 ‘콩댄스’라는 이름으로 온갖 배경음악에 덧씌워져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기도 했다. 홍진호는 이 시절을 자신이 숨만 쉬어도 까였던 때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어느 게임 마니아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은 분석에 의하면, 처음엔 정말 안티라는 의미에서 ‘콩까’였는데 홍진호가 계속 결승전에서 지자 팬들도 지쳐 열렬한 지지자로서의 ‘빠’와 그를 조롱하는 ‘까’ 사이를 오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콩까’가 비난이나 조롱이 아닌 애정이 담긴 하나의 인터넷 문화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다. 이 시기에 ‘프로리그 중계권 사태’라 불리는 일이 터지고 <스타크래프트> 저작권 분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몇 년간 게임판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는데, 이 암울한 시기에 게임 팬들은 ‘콩까기’를 공유하며 슬픔을 달랬다는 것이다.

이렇게 ‘2’와 ‘콩’으로 이뤄진 그의 전설이 만들어졌다. 2011년 선수 은퇴를 한 뒤 그의 전설도 세월 속에 묻히는가 싶을 때쯤 홍진호는 케이블방송 tvN에서 방영된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에 출연했다. 출연자들끼리 게임을 펼치고 한 회에 한 명씩 탈락하는 콘셉트의 방송에서 그는 끝까지 탈락하지 않았고! 마침내 아주 오랫동안 소망하던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이 방송에서 그가 얻은 이미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매번 다른 게임을 다뤄야 하고, 언제든지 배신과 협업이 가능한 게임의 규칙 덕에 날카로운 분석과 판단력, 빠른 두뇌 회전이 요구되는 <더 지니어스>에서 우승한 그에게는 7900만원이라는 우승 상금보다 ‘뇌가 섹시한 남자’라는 핫트렌드의 선두주자 이미지가 더 큰 부상으로 돌아왔다.

이어 2탄으로 제작된 <더 지니어스: 룰 브레이커>에서는 오히려 중간에 탈락하면서 더 화제를 모았다. 권모술수을 부리지 않고 싸우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이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이렇게 상승한 호감도는 자연스레 타 방송사의 출연으로 이어졌다. 유명해질수록 프로게이머로서의 화려했던 이력은 지금의 홍진호를 더욱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쯤 되면 적어도 하나는 명확해졌다. 발목 잡는 과거는 없다는 사실. 30년을 조금 넘게 걸어온 그의 인생이 제법 괜찮은 모양이다.

‘견디다’는 것의 매력

그와의 인터뷰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한마디는 바로 ‘견디다’였다. 입지전적 인물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단어는 좀 다르게 내 마음에 와닿았다. 19살 때 가족을 떠나 홀로 서울에 올라와 게임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고, 프로게이머로도 빠른 성공을 해 20대 초반에 이미 억대 연봉 계약도 체결했던 그가 아닌가. 고된 훈련 과정을 견뎠더니 실력이 늘어서 금메달을 따게 되었다는 유의 의미가 아니다. 내 질문은 경기에서 졌을 때 그 자괴감과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였고, 그의 대답은 견뎠다는 거였다.

사실 어떤 패배이든 반드시 이기고 싶었던 자에겐 독약 같기 마련이다. 모든 승리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우승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그 목전에서 씁쓸하게 들이켜야 했던 독배야말로 얼마나 가슴을 시커멓게 태워버렸을까. 애써 상상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 어떤 날은 술에 취해도 보고 혼자 미친 듯이 괴성도 질러보았을 것이다. 컴퓨터는 켜지도 않고 하루 종일 잠만 자기도 했을 터이다. 이런 순간을 담아낼 말은 여러 종류가 있지 않았던가. 유명 인사들은 보통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 비법이라며 그럴싸한 뭔가를 꺼내놓기 마련이다. 나도 그걸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과정을 그저 ‘견뎌낸 시간들’이라고만 되풀이해 말했다.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무릎을 탁 치고 싶었다. 아무 요령도 없는 게 맞다. 왜냐면 얼마나 속상했는지와 상관없이 항상 그는 때가 되면 소속팀의 유니폼을 입고 나와 다시 한 손에 마우스를 잡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도망가지 않았고,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다.

“고통스러워도 계속해야 하는 일이고, 멈출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자신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고 게임에서 지는 것은 싫어도 게임 자체가 좋다면 게임을 벌이는 것 자체를 멈출 수 없는 노릇이다. 정말 살다보면 그런 시기가 있지 않은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는 순간이. 그런 때엔 ‘이것이 정말 내가 꿈꾸던 것이 맞는가’라는 회의가 찾아오기도 하고 심리적 방황도 겪게 된다.

자신만 당당하면 되고 자신의 꿈만 지키면 된다고들 말하지만,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그만큼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중요하다. 또 내가 원하는 평가를 이끌어내고 싶기도 하다. 내가 되고 싶던 ‘사람’이 되었다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순간이 간절해지기도 한다. 우승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되려고 했던 ‘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내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제 모습의 차이를 인정하기가 어려웠어요. 프로게이머로서 세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하면서 시각의 변화를 겪었어요.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을 인정하게 된 거죠. 그러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고요.”

그의 말은 어떤 시간을 견뎌낸 다음에야 얻게 되는 통찰력이다. 이 말은 나를 버리고 남들이 원하는 다른 내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내가 만들어냈던 허상의 나를 버리겠다는 의미다. 그럼 애써 집착할 것도 없어진다. 나는 여태 그랬듯이 나의 방식대로 살면 된다.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은 원래 거기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인내는 모든 고난의 치료제다. 인내는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한다.” 이 말뜻을 저자의 의도대로 파악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장은 홍진호에게 적절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 자신을 놀리는 사람들에게 ‘미친놈들아, 그만해’라고 발끈하던 그가 결국엔 그러시든지라는 식의 여유 있는 미소를 던지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점이 지금 방송인으로서 새 출발을 하는 그에게 큰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인내는 희망을 가지는 기술’이라는 말도 틀리지 않았다.

의미를 부여해 기억하는 방식, 좋다

홍진호에 대해 잘 모르던 사람이라도 만약 그에 대해 뒷조사를 한다면 신기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스타크래프트>의 황제’라고 불리는 임요환은 메이저 대회에서 통산 다섯 번 우승했고, 홍진호는 메이저 대회에서 준우승만 다섯 번 했다. 이 정도면 호사가들이 ‘불운의 사나이’라든지 ‘2등 징크스’라든지 무슨무슨 저주 같은 유의 수식어를 붙여줄 만도 하다. 하지만 홍진호에게 그런 관용어는 통하지 않는다. 그를 따라다니는 별명은 오히려 ‘콩간지’나 ‘황신’ 같은 다소 ‘개그 코드’가 섞인 것들이다. 그의 얼굴을 봐도 비운이나 울분의 기색 따위는 없다.

세상은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내고 1인자와 2인자의 갈등 스토리를 즐긴다. <삼국지>에 제갈량과 지략을 겨뤘던 주유의 이야기도 종종 이런 사례로 쓰인다. 주유가 번번이 제갈량에 지자 “하늘은 어이하여 주유를 낳고도,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라고 야속한 하늘을 탓하며 홧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인자의 설움과 한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한마디이지만, 이 주유의 한탄은 사실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1등은 경탄을 자아내는 영웅으로 기억시키고 2인자는 안타까움이란 정서로 포장해 기억에 남기는 방식이다. 역사의 이런 주된 구성마저 홍진호는 살짝 비껴나간다.

2011년 6월25일, 그가 은퇴식에서 한 마지막 말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2등도 많이 하면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아 그 점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2등도 많이 하면 기억이 되고 그렇게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그의 말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2등으로 기억되는 걸 겁내지 않을 때라야 가능하다. 그러니 무엇이든 어떠랴. 최선을 다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콩라인’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 라인의 창시자이자 수장은 홍진호다. 1등은 못하고 평생 2등만 한 자만이 감히 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전설적인 콩라인. 가끔 콩라인의 선수들끼리 결승전에서 만나 부득이 한 선수가 우승자가 되고야마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탈락자가 생기기도 했다. 콩라인에 심취한 이들은 게임뿐만 아니라 타 스포츠 종목과 사회, 정치, 연예계 등 모든 분야에서 족보를 작성하고 있는데, 여기엔 축구선수 미하엘 발라크부터 박명수나 아사다 마오까지 가입시켜놓았다.

장난이기도 하지만 매우 진지하고 꼼꼼하게 수많은 기록을 뒤져서 콩라인을 정리해놓은 글을 접했을 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 얼마나 유쾌한가. 예를 들어 아사다 마오가 콩라인에 들어가는 이유는 밴쿠버 겨울올림픽 때 쇼트프로그램 연기 순번 추첨일이 2월22일인데 이날 22번을 뽑았고, 2일 뒤 치른 쇼트프로그램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26일에 벌어진 프리스케이팅 추첨에서도 또 22번을 뽑았기 때문이다. 2라는 숫자와 관련이 많아질수록 콩라인에서 더 높은 인정을 받기 때문에 아사다 마오는 꽤 유력한 콩라인이다.

이런 장난이 좋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이 누군가에게 밀리고 누군가에게 진 사람으로만, 그래서 패자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기억하는 방식도 좋다. 홍진호의 말대로 우승은 사회적 기준이다. 나에겐 나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서 내가 나에게 할 말이 있고 기가 죽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자신을 우승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가 좋다.

김연아도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마지막 경기를 마친 다음에, 금메달이나 은메달이 아니라 김연아라는 선수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엄청난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만 그녀 역시 선수생활 내내 심사위원들의 평가에 시달려야 했다. 외부적 평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오랜 선수생활을 버티고 그 많은 도전을 해왔다는 것, 그래서 항상 그 경기장에 있었다는 그녀만의 성취를 사람들이 기억해주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중요하다. 따져보면 1등의 상징인 임요환의 통산 승률은 58.4%이고 홍진호는 57.1%로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는다. 승률만 놓고 본다면 이 대단한 전설의 게이머들도 늘 이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구나라는 사실도 새삼스럽고, 또 한편으로 어쨌든 패배보다는 더 많은 승리를 맛보았음도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경기 자체에 끊임없이 도전해온 사실은 잊은 채 마치 한쪽은 지기만 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면, 혹은 이기기만 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면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패배만을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홍진호는 자신이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패배는 했어도 결코 패자는 되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야 그는 우연히 나간 게임에서 우승을 했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 따라 우연히 간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듯, 또 그렇게 운명적인 우연이 찾아온 것이다

그에게 우연은 늘 운명이었다

생각해보면 애당초 그가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국가의 운명과 겹쳐 있다. 테란·저그·프로토스라는 3개 종족이 우주를 지배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 들어온 해가 1998년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과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몰아치던 때였다. 정부는 침체된 국가 경제를 살리는 카드로 ‘정보통신산업 육성’을 들고나왔고 그 덕에 개인용 컴퓨터와 초고속 통신망 등의 개발이 빠르게 진행됐다. 직장을 잃은 이들은 창업해야 했는데 요즘은 치킨집을 많이 하지만 당시엔 PC방 창업이 대세였다. PC방과 <스타크래프트>는 절묘하게 서로에게 필요충분조건이 되었고, 한국은 세계적인 게임 강국이 되었다. <스타크래프트>의 열풍 덕에 게임협회가 조직되고 대회가 열렸으며, 야구나 축구처럼 프로리그가 만들어지고 대기업이 지원하는 프로구단이 생겨났다. 1999년 세계 <스타크래프트> 대회 우승자라는 타이틀로 광고까지 찍었던 ‘쌈장’ 이기석, ‘황제’로 불리는 임요환에 이어 홍진호는 2000년 프로게이머의 세계로 들어와 게임계의 전성기를 자신의 전성기와 함께 보냈다.

20대의 10년을 오롯이 프로게이머로 바치고 서른의 나이에 은퇴했을 때, 그는 뭘 하겠다는 별다른 계획도 없이 일단은 그저 쉬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터뷰 같은 외부 일정을 모두 거절하며 지내던 무렵, 어느 날 <더 지니어스> 제작팀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부터 거절하리라 마음먹었던지라 예의상 프로그램의 포맷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웬걸 ‘이거 해보면 재밌겠는데’ 싶었단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오랜만에 게임이나 한판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방송 출연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떴다.

프로게이머들은 대체로 합숙 생활을 한다. 경기는 수천, 때론 수만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진행된다.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면 혼자다. 헤드폰을 쓰고 모니터를 응시한 채 혼자 싸우다가 승패를 받아들여야 한다. 모니터 안에서 자신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수많은 유닛이 있지만 모니터 밖의 세상에선 혼자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10여 년을 지냈던 그에게 방송은 완전히 다른 세상일 것이다. 방송은 뭐든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상대의 말을 받고 치고 넘기고 이 모든 것을 ‘적절하게’ 해야 하고 수많은 스태프들과도 호흡을 맞춰야 한다. 그가 방송이 게임보다 훨씬 더 두렵고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점점 더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하긴 그가 살아오며 지금껏 지켜온 원칙대로라면 어렵거나 두렵거나 하는 건 무엇인가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재미있는가, 내가 즐길 수 있는가, 없는가일 뿐.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써오던 2등의 2는 1이 되지 못한 비운의 숫자였다. 하지만 오늘 홍진호를 만나고 보니 그의 2등은 다르다. 홍진호의 2등은 1보다 하나가 더 많은 의미로서의 2다.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그런 능력이 있는 그가 앞으로 방송인으로서도 하나에 하나를 더해가며 즐겁고 행복하길 바란다. 아, 마지막으로 그를 직접 보고 싶지만 보지 못한 수많은 팬들을 위해 두 가지 ‘펙트’를 밝히며 마칠까 한다. 홍진호는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겼고, 또 방송으로 보는 것보다 말을 훨씬 더 잘한다. 못 믿는 분들도 계시던데 진짜다. 진짜다.

글 한채윤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운영위원. 1998년 한국 최초의 동성애 전문지 <버디>(BUDDY)를 창간했다. 2001년부터 퀴어문화축제(kqcf.org) 기획에 참여하고 있으며, 2002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org)를 조직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생계는 주로 강의와 원고로 해결하고 있는 전업활동가이며, 낸 책으로는 <한채윤의 섹스 말하기> <남성성과 젠더>(공저) 등이 있다. ‘마포 민중의 집’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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