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11:11 수정 : 2012.12.28 11:12

내미는 손이 거슬거슬했다. 머리칼 곳곳에서 한두 가닥씩 흰머리가 보였고, 거뭇한 수염에도 하얀 털이 드문드문했다. 토요일 오후 5시까지 이어진 노동의 뒤끝이어선지 아니면 52년 동안의 지난한 삶에 무겁게 짓눌렸는지, 푹 꺼진 눈동자엔 생기가 없었고 지방이 두툼하게 돋은 눈 밑은 그늘이 자욱했으며 눈꺼풀은 다섯 겹인지 여섯 겹인지 셀 수 없을 만큼 층이 져 있었고 뺨이 움푹 들어가 광대가 도드라져 보였다. 콧잔등 위에는 밴드가 붙어 있었는데, 밴드 속 붕대에 차마 마르지 못한 피가 배 있었다. 어찌된 상처냐고 묻자, 파리한 식물 같은 그가 씩 웃으며 “일하다 맞았어요”라고 한다. 그 나름의 유머 같았지만, 재미는 없었다. 진짜 맞은 거예요? 그게 아니라 부딪힌 거죠? 재차 묻자, 조용히 턱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경남의 한 대형 조선소에서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하고 있다. 하청업체는 요즘 ‘협력업체’라고 불린다. 원청회사인 대형 조선소와 하도급 계약을 맺고 공사비를 받아 소속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시스템은 변함 없는데, 명칭만 어느덧 바뀌어 있다. 그가 다니는 조선소는 7천 명이 넘는 노동자 가운데 3천 명 정도만 조선소 소속 정규직이다. 나머지 4천여 명은 70개 정도의 협력업체에 소속되어 있다. 그는 소속 협력업체와 1년에 한 번씩 계약한다. 하지만 계약은 형식일 뿐, 자동 갱신됐다. 그렇게 14년 동안 임금에 대한 별다른 협의 없이 일해왔다.

 그도 정규직 노동자였던 적이 있다. 쇳물을 끓여서 제품을 만드는 주강 공장에서 오래 일했다. 그러나 한참 전 일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직후 공장은 부도가 났고, 서너 달 동안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명예퇴직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업종으로 와서, 계약직이 됐다. 그 뒤로 신분은 내내 그대로다. “처음에는 적응도 안 되고 해서 그만둘까 했는데, 생계도 있고 하니까 쉽지가 않대요.”

 임금은 세금 빼고 월 200만 원 남짓 된다. 3년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조선업계의 심각한 불황이라면서 회사는 일방적으로 임금 20%를 삭감했다. 그 뒤로도 배는 쉴 새 없이 건조되는데 임금은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삭감된 금액을 회복하려면 15~20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상황으로 봐선 그것도 안 되지 싶어요.” 오전 7시에 출근해 평일은 오후 7시, 토요일은 오후 5시에 일을 마친다. 그는 배의 배관 만드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배관은 사람의 핏줄과 같아요”라고 했다. 여전히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단호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재훈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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