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6:12 수정 : 2014.03.30 14:17

‘에스타글랄, 아자디, 좀후리예 에슬라미!’(독립, 자유, 이슬람공화국)

쇠락의 길로 접어든 지 오래인 부패한 친미 왕조는 질기게도 목숨줄을 유지했다. 혁명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이란의 남녀노소는 밤과 낮의 구별 없이 지붕과 거리에서 이렇게 외쳤다. ‘독립’은 미국 등 외세에 대한 반감이었다. ‘자유’는 리자 샤 팔레비의 폭압을 겨냥한 게다. 부패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삶과 정치를 각각 규정하는 ‘이슬람’과 ‘공화국’을 묶어 새 나라를 만들어내겠다는 염원이었다.

리자 팔레비는 막판까지 늙은 이슬람 성직자보다 젊은 좌파 활동가를 경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79년 1월 말 갑작스레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오랜 박해의 세월을 뚫고, 그해 2월1일 이란의 ‘정신적 아버지’ 그랜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마침내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2월11일 ‘좀후리예 에슬라미예 이란’이 선포됐다. 인류 역사상 첫 이슬람공화국이 등장한 게다.

강제로 이식된 서구의 방식이 아니다. 전통에 뿌리를 둔 자생적 근대화라 해도 좋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슬람권을 휘감은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식 사회주의는 차례로 실패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대안이 나온 게다.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귀국일부터 이슬람공화국이 선포되던 날까지, 이란에서 해마다 그 뜨거웠던 열흘을 축제로 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른바 ‘여명의 열흘’이다.

이슬람 혁명 35주년을 맞은 지난 2월1일 밤 메디 카루비 전 이란 마즐리스(국회) 의장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란 개혁파의 대표주자 가운데 한 명인 그는 마즐리스 의장을 두 차례 7년여나 지냈다. 첫 번째 임기(1989~92년)는 보수강경파가 득세하던 시절이었고, 두 번째 임기(2000~2004년)엔 개혁파의 입지가 굳건했다.

카루비 전 의장은 앞서 두 차례 대선에도 출마했다. 2005년 대선 당시 개혁파를 대표해 출사표를 던졌다. 1차 투표에서 테헤란 시장 출신인 보수강경파 후보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에게 70만 표가량 뒤진 3위를 기록하며 결선투표 진출이 좌절됐다. 두 번째 대선 도전은 2009년이었다. 그때도 그는 3위를 기록했는데, 이후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지면서 반정부 시위가 한동안 테헤란의 거리를 뜨겁게 달구었다. 같은 개혁파로 당시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한 미르호세인 무사비와 함께 거리에 나섰던 카루비는 이후 정부가 마련한 거처에서 연금 아닌 연금 생활을 해왔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2층에서 지내신다. 1층에는 경찰이 경비를 서고 있다. 이란 방송은 볼 수 있지만, 위성방송과 인터넷 사용은 불가능하다. 조금씩 변화가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카루비의 아들 호세인은 <프레스TV> 등 현지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8월 개혁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이후 국내 정치적으로 나타난 첫 가시적 변화다. 반가워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무사비의 모습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체 게바라 사랑했던 청년, 혁명의 소용돌이로

미르호세인 무사비는 1942년 이란 동아제르바이잔 지역 하메네의 넉넉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메네’, 그의 고향 이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현 이란 최고지도자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하메네이 집안은 하메네에서 유래했다. 무사비의 할머니는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고모뻘로 알려졌다. 이슬람공화국 선포 직후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숙명의 정적’이 된 두 사람이 혈연으로 얽혀 있다는 얘기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무사비가 처음 수도 테헤란에 온 것은 1958년. 그는 테헤란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애초 좌파 성향의 학생단체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슬람혁명 이론가인 알리 샤리아티가 이끄는 ‘이란자유운동’(FMI) 쪽으로 방향을 틀어갔다. 종교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이 단체에는 메디 바자르간, 야돌라 사바히, 아야톨라 마흐무드 탈레가니 등 저명한 인사들이 대거 가담하고 있었다.

청년 무사비는 샤리아티의 강연을 듣기 위해 테헤란의 종합문화센터 격인 ‘호세이니예 에르샤드’를 무시로 드나들었다. 조각을 전공하던 미술학도 자흐라 라흐나바르드를 처음 마주친 것도 그곳 강당에서였다. 두 사람은 무사비가 이슬람 전통건축 양식 전공으로 건축학 석사학위를 받은 1969년 결혼했다. 라흐나바르드는 이후 알자흐라대학교 총장을 거쳐, 개혁파인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시절 정무비서관을 지냈다.

젊은 부부는 혁명의 대열에 몸을 던졌다. 거리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갇히는 게 일상처럼 되풀이됐다. 한때 체 게바라를 사랑했던 청년 무사비는 그렇게 혁명의 심장부로 빨려들었다. ‘여명’이 다가올 무렵이 가장 어둡다. 혁명이 막바지로 접어들 즈음, 무사비는 아야톨라 무함마드 베헤티쉬가 이끄는 단체에 가담했다. 베헤티쉬는 망명 중인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최측근이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성공을 거둔 직후, 베헤티쉬는 이슬람혁명당을 창당하고 신생 공화국 수립 과정을 주도했다. 무사비는 당 정치국장 겸 기관지 <좀후리예 에슬라미>의 편집국장에 임명됐다.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혁명 원년이 지나가기 전에 무사비를 최고의결기관인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발탁했다.

세계 최초의 ‘이슬람공화국’ 이란의 새 역사는 출발부터 험난한 노정의 연속이었다. 혁명의 달뜬 열기는 수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예기치 못한 인질 사태를 연출했다. 해를 넘겨 444일 동안 계속된 ‘이란 인질 위기’는 미국과의 국교 단절로 이어지면서 신생 공화국의 고립을 불렀다. 그리고 이내 전쟁이 터졌다. 1980년 9월부터 이웃나라 이라크와 8년 가까이 벌인 핏빛 공방으로 1980년대를 송두리째 날려야 했다. 신생 혁명은 날개조차 펼 겨를이 없었다.

이슬람 혁명 직후 만들어진 이란 헌법은 총리제를 두고 있었다. ‘신적 존재’인 최고지도자의 지휘 아래 대통령은 외치를, 총리는 내정을 맡는 방식이었다. 1980년 1월, 혁명 이후 첫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볼하산 바니사드르는 ‘성직자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다. 그의 후임으로 선출된 모하마드 알리 라자이는 무사비를 외교장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라자이 대통령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와 무함마드 자바드 바호나르 총리 일행을 겨냥한 암살사건이 벌어진 게다. 1981년 10월, 혁명 2년8개월 만에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아야톨라 하메네이였다.

집권 직후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자신의 측근인 알리 악바르 벨라야티를 총리로 지명해 친정체제 구축을 시도했다. 혁명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때였다.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마즐리스가 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표결은 팽팽했다. 찬성 80 대 반대 74. 벨라야티는 총리의 꿈을 접어야 했다.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마즐리스 내 진보파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마뜩잖은 카드를 꺼내들었다. 무사비였다. 1981년 10월28일 마즐리스는 압도적으로 그의 총리직을 신임했다. 찬성 115 대 반대 39였다. 이슬람공화국의 첫 ‘좌우 동거’라 불러도 좋겠다.

당시 2년째로 접어든 이란-이라크 전쟁은 쉽게 끝날 줄 몰랐다. 전쟁의 참상도 그렇거니와, 생필품 품귀 현상마저 불거지면서 신생 공화국이 흔들리고 있었다.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무사비는 공평과 효율을 원칙으로 ‘전시경제’의 등뼈인 생필품 배급 체제를 구축해나갔다. 국민적 신망이 쌓인 것은 당연했다.

1988년 8월20일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7년 10개월 4주하고도 하루가 더 걸렸다. 눈앞의 더 큰 싸움 때문에 미루고 쌓아놓았던 대통령과 총리의 갈등이 폭발했다. 무사비는 사임서를 제출했다. 최고지도자는 즉각 이를 반려했다. 무사비는 총리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1989년 6월3일 ‘혁명의 아버지’ 그랜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타계했다. 불안한 ‘동거’도 막을 내렸다. 헌법에 따라 이튿날 ‘전문가회의’가 소집됐고, 이슬람공화국 2대 최고지도자를 선출했다. 표결에 참여한 74명 가운데 60명의 표를 거머쥔 것은 아야톨라 하메네이였다. 그해 7월28일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헌법을 뜯어고쳤다. 총리직을 폐지하고, 최고지도자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노림수는 분명해 보였다. 무사비는 이슬람공화국의 ‘마지막 총리’가 됐다.

이후 그가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까지는 20년 세월이 걸렸다. 그 긴 공백기에, 그는 좋아하는 그림을 그렸다. 시도 썼다. 모교 건축학과에서 강의를 했고, 모스크(사원)를 비롯한 전통 건축물과 공동묘지 조경공사 등에도 간여했다. 1997년 대선 당시 개혁파 진영이 몰려와 출마를 강권했지만, 그는 끝내 고사했다. 당시 그를 대신해 개혁파 후보로 나섰던 성직자 출신인 ‘정치 신인’ 모하마드 하타미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하메네이에 반기… 테헤란의 거리 달궈

‘사회정의의 제도화, 평등과 공정성 확대, 표현의 자유 보장, 부패 근절….’ 2009년 3월16일, 무사비가 드디어 오랜 침묵을 깼다. 연임에 나선 보수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게 도전장을 내민 게다. 대선 출마 당시 그의 공식 직함은 ‘이란예술원 회장’이었다. 그가 출마를 선언하자, 앞서 세 번째 대권 도전 의사를 밝혔던 하타미 전 대통령은 전폭적인 지지 성명을 내놓고, 미련 없이 물러났다. 혁명이 30주년을 맞은 해였다.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조차, 재등장한 무사비를 바라보며 어려웠던 ‘혁명의 나날들’에 대한 향수를 떠올렸다. 테헤란의 거리가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해 6월12일 치러진 제10대 이란 대통령 선거는 1차에 끝났다. 여론조사에서 열세를 보였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무려 62.6%의 득표율을 올리며 무사비(33.8%)를 압도했다. 표차는 무려 1100만여 표,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진 것은 당연했다.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록 띠를 머리와 손목에 두른 젊은 시위대가 테헤란 거리에서 공화국의 복원을 요구했다. 이듬해 초까지 이어진 이른바 ‘초록혁명’이다. 그 맨 앞에 무사비와 카루비가 서 있었다.

새로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시즈 민병대를 동원한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채 꽃을 피워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시의 시위는 2010년 말 튀니지를 시작으로 이집트·리비아·시리아로 번져나간 ‘아랍의 봄’의 서막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혁명 이후 지금껏 치밀하게 권력의 철옹성을 쌓아온 아야톨라 하메네이로선 몸서리를 쳤을 게다.

무사비가 마지막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랍의 봄’ 기운이 테헤란 거리를 잠시 배회했던 2011년 2월께다. 이후 그는 아내 라흐나바르드와 함께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연금생활을 하고 있다. 로하니 대통령 임기 안에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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