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5:39 수정 : 2014.03.30 14:14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가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 이후, ‘일베 용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일종의 사회적 낙인찍기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사람이 실제 일베러일 수도 있지만 단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유행어를 별 생각 없이 썼을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그 용어가 실은 일베 용어가 아닐 수도 있다. 일베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는 일베에서 발생한 용어도 있지만 이미 널리 사용되던 단어를 재전유한 형태도 적지 않다. ‘국뽕’이란 단어의 경우, 지나친 민족주의나 자기도취적인 애국심을 조롱하는 용어로 일베 이전에 이미 유통되던 말이었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베 용어로 오해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일베 용어에 사회가 과민반응을 보이자, 오히려 이를 역이용해 ‘멀쩡한’ 인터넷 언어들을 ‘일베화’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ASKY’라는 인터넷 유행어가 있다. (그래도 애인은) ‘안 생겨요’의 앞 음절을 영어 철자로 바꾼 말인데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서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애인은 안 생길 거라는 자포자기와 상호자학의 개그 코드다. 그런데 한 일베러는 “10년 넘은 올드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의 유일한 유행어 ASKY를 뺏어보자”면서 “A(아) S(슨상님) K(계실 적엔) Y(이런 일 없었는데)”라는 글을 올린다. ‘일베식 ASKY’는 그렇게 등장했다. 물론 여기서 ‘슨상님’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넷우익 담론 분석에서 주의해야 하는 점은, 이들이 사용하는 특유의 용어들을 지나치게 특수화하는 것이다. 언어란 본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이고 개념상 서로 뒤섞이고 변화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인터넷에서 언어의 불확정성은 더욱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어떤 주체들을 특정한 언어의 사용자로 동결시키는 것, 또는 어떤 단어들을 특정한 주체의 도구로 규정하는 것은 담론 분석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관건은 적대의 배치와 효과를 포착하고 그것이 억압하거나 은폐하는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일베의 담론 중 이른바 ‘지역드립’, 즉 지역주의 담론은 가장 저열하고 선정적인 방식으로 유통돼왔다. 이를테면 5·18 광주항쟁 희생자의 관 앞에서 오열하는 노인의 사진 밑에 ‘홍어택배’ 운운하는 부류의 게시물들이다.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무릎 꿇린 채 결박당한 사진에는 ‘어느 물건이 더 싱싱하려나’라는 제목이 붙었다. 광주항쟁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도 튀어나왔다. 이런 게시물들이 알려지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일어났다.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됐을 뿐 아니라 이념을 떠나 국가적 추모의 시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사건에 대한 심각한 훼손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다 못한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이 나서서 “일베의 북한군 광주 개입설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조갑제가 누구인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호전적 반공주의자이자, 세계에 내놓아도 오른쪽에 둘 사람이 별로 없을 극우파다. 하지만 일베는 놀랍게도 오히려 조갑제를 ‘종북세력’이라 비난했다. “조갑제는 그냥 박정희 팔아서 보수 흉내나 내는 깡통 새끼다. 박정희나 5·16은 그냥 보수 이미지 생색내는 장치이고 여기에 대해 말하는 거 보면 우리 일게이(일베 게시판 이용자)들 수준만도 못함.”(아이디 ‘웨스코’) “조갑제 기자가 광주에 있었던 기간은 5월23일부터 5월27일까지”라며 “이전의 상황은 경험하지 못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광주 상황을 싸잡아 단박에 정의한다는 것도 큰 무리이다.”(아이디 ‘頑固虎訓育官’)

‘지역갈등’이라는 맥거핀

일베의 ‘지역드립’이 흥미로운 건 한국 사회에 널리 유포된 지역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고스란히 답습하면서도 똑같이 광범위하게 합의된 규범적인 가치, 즉 ‘지역주의는 망국병’이라는 판단은 거부한다는 점이다. 일베의 특이성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일베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지역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부터 살펴보자. 그 인식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식화할 수 있다. ‘오랫동안 내면화된 지역주의 때문에 지역정당 체제가 만들어졌다. 지역주의의 본질은 지역갈등이다.’ 지역주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서뿐만 아니라 ‘단결하지 못하는 한민족’의 비극적 서사로 호출된다. 이는 일베, 보수우파세력, 중도세력, 심지어 진보 일각까지도 공유하는 인식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저 명제에는 함정이 있고, 함정은 세 가지다. 첫째, 오랫동안 내면화된 지역주의라는 인식. 둘째, 지역주의 때문에 지역정당 체제가 출현했다는 인식. 셋째, 지역주의의 본질이 지역갈등이라는 인식.

먼저, 내면화된 지역주의라는 측면을 들여다보자. 오래전부터 지역감정, 특히 호남인 차별과 영호남 갈등이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그 기원은 조선시대를 넘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백제의 당시 중심지는 오늘날 경기도 지역이지 호남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특별히 호남 지역만 차별받았다는 근거는 발견된 적이 없다. 제도적 차별은 오히려 서북 지역이 훨씬 심했고, 조선시대에 민란의 발생 빈도를 보면 호남보다 영남이 압도적으로 높다. ‘경상도 문둥이’ ‘서울 깍쟁이’ ‘함경도 이전투우(泥田鬪牛)’ ‘황해도 석전경우(石田耕牛)’ ‘호남 개땅쇠’ 등 지역에 대한 편견은 서로 왕래가 어려웠던 전통사회가 아니라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타 지역민이 서로 섞여들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도시의 하층 이주민들 사이에서, 다시 말해 하층민 중 최다수인 호남 이주민과 그다음이던 충청 이주민, 그리고 서울 하층민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며 전라도 사람에 대한 편견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당시 조사에 따르면, 호남에 적대적인 지역민은 영남 출신이 아니라 충청도 사람과 서울 사람이었다. 그러나 1987년 선거 이전까지 선거 분석을 들여다보면 이 편견조차 그 자체로, 혹은 자연발생적으로 정치적 힘을 발휘한 적은 없다. 호남에 대한 편견이 마치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정서인 양 포장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한 주체는 따로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었다.

둘째, 반호남 지역주의는 급격한 근대화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잔존한 전근대적 유산이 아니라, 지역적 정체성의 차이가 중첩됐던 급격한 도시화와 계급분화, 그리고 영남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재생산하고자 했던 권위주의 정권과 그 지지자들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셋째, 이 과정에서 근대 이전의 중앙과 지방의 균열을 반영하는 호남에 대한 편견은 ‘발견’됐고, ‘동원’됐으며,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창조’됐다. -박상훈, <만들어진 현실>, 후마니타스, 57쪽, 2009

다음으로, ‘지역주의 때문에 지역정당 체제가 출현했다’는 인식은 사태의 원인을 호도한다. 1971년 선거는 박정희 정권에 의한 지역주의 선동이 전면화한 사실상 첫 번째 선거였다. 박정희의 강력한 경쟁자인 김대중 후보가 호남 출신이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반독재·민주화 열망이 치솟는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였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돈을 뿌린 정권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는 호남뿐 아니라 영남에서도 골고루 높은 지지를 얻었다. 박정희는 부정선거와 득표 조작으로 겨우 당선될 수 있었다. 요컨대 조목조목 살펴보면 겉보기와 달리 지역주의보다는 독재 대 반독재가 중심 이슈인 선거였다. 한편 지역주의가 영호남의 분절이라는 형태로 또렷이 사회문제화하기 시작한 1987년 선거 이후 지역당 체제가 굳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야당의 분열, 계급과 이념 대표성이 희박한 정치 환경 등이지 지역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를 봐도 계급이익에 기반하지 않는 정당체제일수록 선거시 표의 지역 간 편차가 크게 나온다.

마지막으로, 지역주의의 본질이 지역갈등이라는 인식은 지역주의의 실제 내용이 반호남주의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 1987년 대선 직전에 쓴 ‘지역감정’이라는 칼럼을 보면 망국적 지역감정을 개탄하며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양김을 포함한) 민주화세력을 싸잡아 “지역감정을 자기들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세력이라 매도하고 있다. ‘이놈도 저놈도 다 망국적 지역감정의 노예’라는 비평의 의도는 명약관화하다. 노태우의 당선이었다. 지역주의를 지역갈등과 동일시하는 관점에서는 부당하게 차별받은 호남 사람들의 항변조차 전부 지역이기주의로 매도되고 만다. 그렇게 지역주의는 지역감정이란 말로 자연화되고 지역갈등이란 말로 상대화되면서, 기득권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념이냐 쾌락이냐

지역주의는 한국 사회의 오랜 인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역주의는 늘 반공주의·반진보주의와 결합한 이데올로기였다. 산업화 시기에 잠시 생겨났던 편견을 권력을 지닌 기득권 집단이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활용하면서 모든 악의 근원이 지역주의에 있다는 식의 신화가 생겼다. 일베의 지역주의는 이 권력의 전략을 그대로 답습한다. 여기까지는 어떤 새로움도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베의 지역주의 담론은 이데올로기 전략의 차원을 초과해버린다. 이런 ‘초과’ 또는 ‘과잉’은 지역주의 담론에서 다른 담론들, 예컨대 여성혐오나 반이주노동자 담론을 훨씬 능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홍어택배’나 ‘조갑제 종북론’은 그 초과의 결과다.

일베가 극우·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념집단이라면 지역주의를 그런 식으로 자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일보>처럼 호남혐오를 지역갈등으로 대체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적 실천의 ‘정석’이다. 이데올로기가 지속 가능하려면 최소한의 정당화 기제가 필요하고, 지역주의에서 그 정당화를 지탱하는 규범은 ‘망국적 지역감정에 반대한다’이다. 정치 기득권 집단은 입으로는 ‘망국적 지역감정’을 말하지만 지역정당이라는 구조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이들에게 가장 유리한 전략은 지역갈등을 ‘한국 사회의 영원한 상수’로 만드는 거지 호남을(또는 영남을) 대놓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새누리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정치 지형이라 하더라도 호남혐오를 직접적으로 표출하거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인신공격하는 건 정치적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새누리당은 속마음이야 어떻든 일베의 ‘지역드립’에 동조는커녕 맹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베는 지역갈등 담론을 가장 원초적 형태의 지역혐오로 다시 되돌려버린다. ‘홍어택배’는 이념적 목적의식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며, 이는 곧 사회적 영향력을 스스로 축소하고 자신의 활동 공간을 게토로 만드는 행동이다. 상당수 일베러의 특징은, 사회적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는 욕망이나 사회적 명성을 추구하는 태도는 상대적으로 희박한 반면, 주목받으려는 욕망은 강렬하다는 점이다. 얼마나 주목받는가는 커뮤니티 외부의 사회적 금기를 얼마나 전복적으로 위반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무엇을 위반할 것인가? 정치적 급진성이 가장 ‘핫’했던 시대, 문화적 급진성이 가장 ‘쿨’했던 시대는 1980~90년대를 거치며 끝나버렸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막장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디시인사이드 막장 갤러리가 그토록 흥하고 일베에까지 그 흐름이 연결된 것에는 전위(Avant Garde)가 아니라면 차라리 패륜으로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들에게 성역이 된 광주 담론에 오물을 뿌리는 것은 강력한 효능감(Efficacy)을 가져다주는 위반일 수 있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것처럼, 비도덕적이라 간주된 개인이나 집단을 비난하는 것은 주목받지 못하지만 도덕적인 개인이나 집단의 작은 흠결은 큰 관심을 끈다. 일베는 광우병 촛불시위나 천안함 사태 당시 진보의 위선과 비이성 때문에 자신들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후 구성된 자기 정당화 서사일 뿐이다. 어떤 검증 과정도 없이 조갑제씨를 종북으로 모는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이들은 팩트에 근거한 비판이나 이념 대립의 지형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이들의 목적은 이념도 사상도 아니며 인정이나 명성도 아니다. 주목(Attention)이 가져다주는 쾌락을 향한 맹목적 추구. 일베의 동기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필터의 하나는 바로 정보사회의 인간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등장한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다. 그래서 국가정보원은 이 목적 없는 쾌락주의자들을 마음껏 자신의 목적에 동원할 수 있었다.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 있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