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4:51 수정 : 2014.03.30 14:09

황우석이 세계적인 과학 사기를 감행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영향력에 편승했거나 순종한 다른 과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황우석이 발휘했던 절대적인 힘은 평범한 과학자들을 희대의 공모자로 전락시켰다. 2005년 8월 서울대 수의대 잔디밭에서 이병천, 황우석, 제럴드 섀튼 교수(왼쪽부터)가 복제견 ‘스너피’를 언론에 공개하고 있는 모습.한겨레 김태형
세계적인 과학 사기가 벌어진 뒤 10년. 그 거대한 사기에 휘말렸거나 가담했던 자들은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나·들>이 그들을 찾아나섰다. 연락이 닿은 그들 모두는 누군가가 자신들을 ‘그 사건’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에도 거부감을 느꼈다. 말이라도 맞춘 듯, 황우석 사건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일’이라고 했다.

’황우석의 왼팔’로 불리던 이병천(49·산과) 교수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 2월14일 오후 그의 연구실이 있는 서울대 수의과대를 찾았다. 10년 전 황우석 연구팀이 불을 밝혔던 그곳은 여느 연구 공간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모습이었다. 6층의 황 전 교수 연구실은 현재 다른 교수가 쓰고 있었고, 바로 옆방이 이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특이하게도 두 연구실 쪽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만 따로 유리문이 있었다.

<나·들>이 방문할 당시 이병천 교수는 돼지 수술 뒤 샤워를 마쳐 맨발인 상태였다. 2005년 당시 노무현 정부는 황우석팀을 ‘요인보호대상자’로 지정해, 이병천·강성근·안규리 교수에게 경찰 경호를 붙였다. 생명공학 분야의 세계 최고 기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그는 혼자였다.

뜸은 길었고, 답은 짧았다. 그는 NT-1 줄기세포 특허에 이름이 등재된 것을 묻자 “(나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황우석과 연락을 하느냐는 질문에도 “전혀 연락하지 않는다”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 이병천 교수는 황 전 교수의 제자다. 나란히 자리잡은 연구실만큼이나 황우석 전 교수와 이병천 교수의 관계는 긴밀하고 돈독했다. 둘은 1989년부터 복제동물 연구를 함께 했다. 검찰에 따르면 그는 줄기세포 연구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연구실 관리, 돼지 실험 등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부지원금을 빼돌려 벌금 3천만원을 선고받았다. 서울대도 3개월 정직 처분을 내렸다.

정직 뒤 교수 복귀, 이병천·강성근·안규리

2007년. 황우석 쇼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 교수는 ‘늑대 복제’ 논문 조작 의혹에 휩싸였다. 이병천 교수팀은 늑대 복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서울대는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언론도 ‘BT(생명공학기술) 코리아 부활’이라며 가세했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다음엔 정부가 나설 차례였다. 김우식 과학기술부총리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전부터 “과학계가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데 디딤돌이 될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브릭)가 논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황우석 사태와 유사한 상황이 전개됐다. 결국 서울대는 ‘뒷북 검증’에 나섰고, 통계에 오류가 발견됐다. 서울대는 “오류는 고의가 아닌 실수”라며 “복제 자체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서울대는 오류에 대해 “허술한 자료 관리와 논문 작성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대는 이 교수에게 6개월 연구 금지 징계를 내리고, 논문이 실린 저널 <클로닝 앤드 스템 셀스>(Cloning and Stem Cells)에 정정문을 냈다.

2009년, 이 교수는 스승과 재회했다. 이번에는 법정이었다. 복제개 ‘스너피’ 특허기술을 놓고 두 사람이 소송의 상대편에 섰다. 법원은 황우석의 손을 들어줬다. 황우석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황우석) 사건 얘기가 나오는 날에는 하루 종일 힘들다”며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라며 말문을 닫았다.

황 전 교수의 오른팔로 불렸던 강성근(45) 전 서울대 교수(수의학)는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그는 이병천 교수의 고교 후배이기도 하다. 검찰과 서울대에 따르면, 그는 2005년 논문 작성시 허위 자료를 취합해 제럴드 섀튼 미국 피츠버그대학 교수에게 건넸다. 아울러 연구비를 횡령해 벌금(1천만원)을 선고받았다. 서울대는 2008년 재임용을 거부했고, 강씨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했다. 이후 그는 성체줄기세포 기업 알앤엘바이오의 대표이사로 일했다. 알앤엘바이오는 검증되지 않은 줄기세포 치료제를 일본 병원에서 투여하다 수사를 받는 등 추문에 휩싸여 지난해 상장 폐지됐다. 이후 케이스템셀로 이름을 바꾸고, 강씨를 연구소 부원장으로 선임했다.

윤현수(58) 전 한양대 교수(해부세포생물학)는 당시 미즈메디병원 연구소 소장 자격으로 DNA 검사 부문을 맡았다. 윤씨는 미즈메디 연구비를 빼돌려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한양대는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그는 “벌금이 과하다”며 항소했으나, 서울고법은 이를 기각했다. 2011년 8월에는 한양대에서도 퇴직했다. 이후 윤씨는 서울의 다른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우석의 입’으로 활약한 안규리(59) 서울대 교수(신장내과)는 지금도 박근혜 대통령의 주치의 후보로 거론되는 등 대중과 접촉이 잦다. 2004년·2005년 논문 공동저자였던 안 교수의 역할은 연구자문이었다. 세포 회생 방법을 조언하고, 면역 적합성 검사 등을 맡았다. 안 교수는 청부취재로 드러난 YTN 인터뷰에 개입해, 논문 조작 의혹 초기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정직 2개월 뒤 서울대병원 신장내과 분과장으로 복귀했다. 2009년부터는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지원을 받으며 이병천 교수와 당뇨병 치료 연구를 하고 있다. 2년 뒤, 안규리·이병천 교수팀은 “당뇨병 치료용 췌도를 면역 거부 반응 없이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는 형질전환 돼지 생산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 논문은 장기 이식 분야 학술지 <트랜스플랜테이션>에도 실렸다. 아울러 안 교수는 서울대병원 공공의료사업단 부단장으로 공공보건의료센터 실무를 관장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황우석의 NT-1 미국 특허와 관련해 안 교수의 입장을 듣고 싶다는 기자의 요청에 서울대병원 쪽은 “2006년 초반 물의(황우석 사건)가 있을 때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며 “의견을 밝히기 곤란하다. 이해해달라”고 막아섰다. 또 “안규리 교수와 서울대병원을 더 이상 황우석 사건과 엮지 말아달라”고 덧붙였다.

노성일·섀튼 “결백”

“과학이 정치와 결탁한 사건이다.” 노성일(62)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은 황우석 사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과학은 진리만 추구해야 한다”며 “나도 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황 전 교수에게 난자를 공급한 그는 2005년 논문에 제2저자로 등재됐다. 검찰에 따르면 황우석은 연구 내용에 대해 노성일 이사장과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NT-1 특허에 대해 “의미가 없다”고 했다. 노 이사장의 말투는 신중하면서도 단호했다. 그는 황우석 사태와 관련해 “나는 참고인이었고, 죄가 없어 벌금도 안 냈다”며 결백을 강조했다.

노 이사장은 사건 당시 매매 난자 논란이 일자, 회견을 열고 매매한 난자를 제공했다고 인정했다. 대가성이 있는 난자를 이용해 줄기세포 연구를 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었다. 당시 난자 공여자에게 150만원을 준 게 문제였다. 노 이사장은 “그때는 생명윤리법이 없었다”며 “법적 근거가 없어 처벌도 안 받았고 불법 난자도 아니었다”고 했다. 황우석 사태가 터지고도 우리나라는 배아 연구 규제를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완화했다. 2008년 생명윤리법이 개정되면서 보상액이 150만원까지 합법화됐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황우석의 연구에 대해 “기술이 아니라 마술”이라고 극찬했다. 황우석의 과학 사기에 가담한 자는 당시 대통령부터 일반 개인들까지, 대한민국 전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2003년 12월10일, 노 전 대통령이 서울대병원 임상의학연구소를 방문해 황우석에게서 생명공학 연구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한겨레 자료
현재 노 이사장은 불법 난소 적출 혐의를 놓고 쟁송 중이다. 2006년 서울중앙지법은 재일동포 여성 한아무개(당시 44살)씨가 노 이사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한씨에게 6천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그는 즉각 항소했다. 노 이사장은 “재판이 이상하게 진행됐다”며 “검찰 수사라도 요구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사건이 황우석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냐”며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김병준·박기영·진대제… 건재한 ‘황+금박쥐’

2005년 논문의 공동교신저자였던 제럴드 섀튼(64) 교수(수의학·Obstetrics)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섀튼 교수는 영장류 복제와 유전자변형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논문 편집 및 논문에 관한 <사이언스> 편집진 의견에 대한 답변 등을 맡았다. 검찰은 섀튼 교수의 논문 조작 여부를 밝히지 못했다. 그는 난자 공여 파문이 일자, 황우석과 결별했다. 공동논문에 등재된 이름도 뺐다. 그 또한 피츠버그대학 조사위원회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사이언스>에 따르면 조사위는 “과학 비행에 대해 죄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조사위는 “섀튼이 조작한 증거나 위법행위를 인지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연구를 면밀히 감독하지 못한 데 따른 실패는 그에게 과실이 있다”고 밝혔다.

“(황우석 사건) 재판이 아직도 안 끝났나요?” 박기영(56) 순천대 교수(생명과학부)가 황우석 사태에 대해 밝힌 첫 일성이었다. 그는 재판이 대법원에서 진행 중인 것도 몰랐다. 박 교수는 황우석 사태를 키운 일등 공신이다. 사건 당시 청와대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이던 그는 “김선종 연구원의 실수”로 모든 책임을 돌려 비난을 샀다. 2004년 논문에는 연구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음에도 공동저자로 등재됐다. 대신 연구에 기여한 연구원이 후순위로 밀렸다. 박 교수는 최근 황우석이 받은 NT-1 미국 특허와 관련해 “학문적·이론적으로 줄기세포를 생산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라며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더 이상 황우석 교수님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며 말문을 닫았다.

황우석 사태 뒤에는 정·재계 인사들이 있다. 2004년 당시 박기영 보좌관은 황우석 전 교수, 김병준(60) 전 청와대 정책실장, 진대제(62) 전 정보통신부 장관과 함께 연구지원을 위한 비공식 조직 ‘황금박쥐’를 결성하며 황우석 후원에 앞장섰다. 황우석 사태 뒤 박 보좌관은 파면되는 대신 사표를 내고 순천대로 돌아갔다. 진 전 장관은 경기도지사 선거 낙선 뒤, 정보기술(IT) 기업 전문 투자사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를 설립해 대표로 취임했다. 김병준 정책실장은 교육부총리에 임명됐으나, 제자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려 불명예 퇴진한 뒤 현재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특히 박 전 보좌관은 사표를 낸 지 1년 만에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컴백해 ‘막장 인사’ 논란에 휩싸였다. 그 뒤로도 그는 황조근정훈장을 받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으로 거론되는 등 건재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 연구에 수백억원의 세금이 투입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표적인 ‘황빠’였다. 노 전 대통령은 황 전 교수의 기술을 ‘마술’이라고 극찬했다. MBC 의 취재에 대해선 “이만 덮자”며 진실 규명조차 막았다.

직장 잃고 숨어 사는 연구원들

황우석의 사과 기자회견 때 ‘인간병풍’으로 섰던 연구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은 대부분 논문 조작과 무관했다. 연구원들은 흩어졌다. 그들은 서로의 안부조차 몰랐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제 코가 석 자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조작에 연루된 연구원들은 노출되지 않기 위해 숨어 살았다.

사건 당시 줄기세포 섞어심기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김선종(45) 연구원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금 한 민간 연구소에서 일한다. 줄기세포와 무관한 업무다. 당시 과학계에서는 김씨에 대한 동정론이 일었다. 지도교수의 절대적 권위에 억눌린 위계질서와 줄기세포 성공에 대한 중압감이 낳은 피해자라는 거였다. 사건과 연관된 다수의 연구자들도 김씨에 대해 “당시 연구실 압력은 제3자는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라며 “임계치에 달한 압력이 김선종 연구원을 통해 터져버린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김선종 연구원을 만나기 전, 그의 지인을 통해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지인은 “(김선종 연구원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다. 현재 전혀 연관 없는 일을 하고 있고, 또 본인의 삶이 있는데 그대로 뒀으면 좋겠다”며 취재 자제를 요청했다.

전화로 연락이 닿지 않아 김선종 연구원을 직접 찾아갔다. 김선종 연구원은 <나·들>이 찾아가자 “죄송합니다”는 말만 반복했다.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기자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연신 “죄송하다, 드릴 말씀이 없다”고만 했다. 기자가 찾아간 지 채 10분도 안 돼 그는 “회의가 있다. 먼 길 오셨는데 죄송하다”며 다른 직원과 함께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논문 조작 공모 혐의로 수사를 받은 핵심 연구원 박종혁(44)·권대기(34)씨는 각각 다른 병원에서 근무 중이었다. 박씨는 2009년 차병원의 연구실에서 일하는 것이 언론에 알려져 해고당한 뒤 다시 새 직장을 구했다. 연락이 닿은 연구원들은 모두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며 언론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을 표시했다. 황우석 사건이 연구원들의 인생에 얼마만큼의 ‘생채기’로 남아 있는지, 아직까지 그들을 얼마나 움츠러들게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학자적 양심은 고사하고, 야망을 위해 제자조차 도구로 이용하는 ‘그’를 만든 건 ‘우리’가 아니었을까.

글 오다인 인턴기자(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김은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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