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4:40 수정 : 2014.03.05 11:26

‘황우석 사건’의 최초 제보자 류영준은 현재 강원대 의대 병리학 교수다. 그는 8년 동안 자신의 실체를 대중에게 감추고 살아야 했지만 지금껏 제보자로서의 삶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한겨레 박승화
그를 지금의 그로 만든 건 분노였다. 10살 전신마비 소년에게 줄기세포를 주입하려 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무모한 시도였다. 사실을 알리겠다고 하자 아내는 “사안이 너무 커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만류했다. 망설이던 그는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과 피해를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왜 나인가”라며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침묵의 대가’로 짊어져야 할 평생의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소년의 배에서 체세포를 뗀 건 그였다. 그를 대신해 재앙을 막아줄 사람은 없었다.

절박했다. 2005년 6월1일, 선택의 순간이 왔다. 원자력병원 레지던트 1년차인 그는 한 방송사 게시판에 글을 띄웠다. 이렇게 ‘제보자’가 됐다. 이후 그가 본 것은 대중의 광기였다. 지식인도 정치인도 언론도 그의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식을, 과거를 부정할 수 없었던 이들은 ‘의심의 대상’ 대신 그를 의심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명성은 한 줌 바람에 날아가고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MBC < PD수첩 > 게시글 중 일부)는 그의 신념은 결국 실현됐다.

그 뒤 8년. 그가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나·들>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제 내 이야기도 들어달라.” 소박한 일성이었다. 그는 황우석 신화를 무너뜨린 ‘류·영·준’(42)이다. ‘닥터K’로 알려진 그는 현재 강원대 의대 병리학 교수이자 줄기세포 연구자다. 8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그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러던 그의 눈빛이 딱 한 번 흔들렸다. 10살 소년을 얘기할 때였다.

닥터K 8년 만에 커밍아웃

왜 8년이 지난 지금일까? 좀더 일찍 세상으로 나오거나, 아니면 영원히 가슴에 묻어둬도 될 일이었다. “왜 지금 이냐고 물으면 나도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감정을 추스를 때가 되면 내 이야기를 하려 했다. 내년이면 황우석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된다. 이미 그 의미를 되짚어보려는 이런저런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 사건이 생명윤리나 과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실제 어떤 변화를 이끌어냈는지 객관적으로 성찰해볼 계기다.”

지난해 교수로 임용돼 안정된 신분을 갖게 된 것도 8년 만의 ‘커밍아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난 12월, 사건 당시부터 그에게 도움을 줬던 생물학 연구자들의 인터넷 학술 커뮤니티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브릭) 게시판에 실명으로 감사 인사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과학잡지 <네이처>와 짧게 인터뷰도 했다.

황우석의 가면은 벗겨졌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연출한 무대에서 주연배우로 활동 중이다. 그의 일터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은 경기도와 종교단체 등의 지원을 받아 복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류영준은 ‘무학의 통찰’이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황우석에 대한 단죄를 가로막고 있다고 했다. 잘못된 사실관계와 오해 때문에 그의 덫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황우석만 말을 했고 대중은 그의 시각과 프레임으로 사건을 구성했다. 전체를 이해하려면 다른 이야기도 차분하게 들어봐야 한다.”

황우석은 연구논문 조작을 ‘의대 대 수의대’ ‘미국 대 한국’ ‘불교 대 기독교’의 싸움으로 치환했다고 그는 진단했다. ‘제보자 때문에 국익이 날아갔다. 과학적으로 세계를 호령할 기회를 놓쳤다’와 같은 애국적 과학주의가 그중 하나다. 류영준은 이를 소설일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틀을 바꾸고 싶어 했다. “이 싸움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작됐다. 아주 간단했다. 한 사람의 목숨 앞에 누가 그런 말들을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느냐. 그러나 황우석에게는 이 문제가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과학은 사회적 명성과 평판을 얻으려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거짓 결과물로 스토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적 권력을 얻는 것이었다. 연구자로서의 순수성이나 호기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황우석 사건은 ‘과학조작 스캔들’이었다. 굵직한 사실관계는 드러났고 과학계의 판단이 내려진 지도 오래다. 그러나 황우석은 과학의 문제를 ‘감성의 법정’으로 이끌고 갔다. “역사를 판단할 때 사실관계 확인이 이뤄지고 그에 따른 해석이 뒤따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황우석을 둘러싼 대중의 반응에는 수많은 오류가 보인다. 또한 감정적 반응은 논리적이고 건설적인 해석을 불가능하게 한다. 내가 나온 이유는 아직까지 사실관계를 잘 모르거나 한 부분만 보고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배아줄기세포 꿈을 안고 ‘황사단’에

류영준은 자신의 이런 생각을 <나·들>에 서사로 펼치기 위해 10년이 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와 황우석이 인연을 맺은 건 1999년이다. 두 해 전 의대 본과 4학년이던 그는 <네이처>에 실린 영국 복제양 ‘돌리’에 관한 논문을 보게 된다. 이듬해인 1998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제임스 톰슨 교수가 쓴 ‘인간 배아줄기세포’ 수립 논문은 그를 임상의사가 아닌 기초의학 연구자의 길로 안내했다. 두 논문을 접목하면 환자 치료에 사용할 세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엔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실험실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일본 도쿄대 줄기세포연구소 등에 자신의 생각을 적은 전자우편을 보냈다. 황우석만 답을 해왔다. 강연차 부산에 들르니 그곳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황우석은 복제소 ‘영롱이’와 ‘진이’로 명성을 얻고 있던 때였다. “그날 황우석을 처음 보게 됐고 강연은 감동적이었다. 나를 대하는 눈빛도 따뜻했다. 이듬해 결혼을 앞둔 아내 이유진도 함께 인사를 했다. 황 교수는 바로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긴 이야기는 서울에서 다시 만나 나누자고 했다.”

서울로 찾아간 예비부부를 황우석은 ‘의사-간호사 부부’라며 반겼다. 게다가 그때까지 의대생이 수의대 대학원에 진학한 경우는 없었다. “내 계획을 듣고 난 황 교수는 연구팀에 합류하면 진로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류영준과 황우석은 그날 이후 돈독한 사제 관계를 맺었다. 류영준이 실제 황우석의 실험실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한 건 2년쯤 뒤인 2002년 3월1일이었다. 기초 의학자의 길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최소한 의대 인턴과정은 마쳐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실험실에 들어갔을 때 황 교수는 인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어떤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그제야 막 돼지 줄기세포를 만들려던 단계였다. 막막했다. 모든 걸 내가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실험실 청소부터 시작한 류영준은 두 달쯤 뒤 연구실의 대표 실적인 ‘영롱이’와 ‘진이’ 논문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소 연구팀장을 맡았던 선배에게 논문을 달라고 요청했다. 한숨과 함께 돌아온 답은 ‘그런 건 없다’였다.” 류영준은 이 사건 이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거짓과 조작의 냄새였다.

얼마 뒤 류영준은 다른 선배 연구원에게서 더 자세한 내막을 들었다. 황 교수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가 지금 1등을 뺏기면 끝이다. 나중에 우리가 실력을 쌓아서 진짜로 복제하면 된다’고 답하더라는 것이었다. 당시 복제 연구 경쟁 상대인 축산기술연구원에서 조만간 복제소가 태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황우석이 입수한 것이다. 황우석의 연구실에서 일했던 또 다른 연구원 역시 <나·들>과의 인터뷰에서 “황우석에겐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1등을 하기 위해 거짓말부터 하거나 논문을 조작하는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류영준은 그런 사실을 알고도 왜 항의하거나 실험실을 떠나지 않았을까? “내 입장에선 의대 과정을 포기하고 온 만큼 큰 승부수를 던진 거였다. 또한 소 연구 파트와는 팀이 달랐기 때문에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타협하고 외면했던 거다.”

황우석은 의대 출신에다 자신보다 일찍 실험실에 나와 밤늦게 귀가하는 류영준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보통 4년차 연구원이 맡는 팀장을 3개월 만에 맡겼다. 당시 석사 월급이 40만원이었지만 그는 박사급 대우인 150만원을 받았다. 이런 고속승진과 황우석의 특별대우는 같은 실험실에 있던 동료 연구자들의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팀장이 된 류영준은 황우석의 도움을 받아 외부에서 팀원을 영입했다. 나중에 논문 조작의 실무 책임자로 밝혀진 미즈메디병원 출신의 박종혁과 김선종, 그리고 자신의 아내 이유진을 비롯해 구자민, 박을순 등 모두 6명이었다.

또 황우석이 줄기세포를 잘 모르는 상황이라 당시 미국 뉴욕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연구소’에 있던 조재진 교수를 지도교수로 영입했다. 연구용 난자는 미즈메디병원과 한양대병원에서 제공받았다. 이 과정에서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성 연구원들의 난자를 실험에 이용한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이 미리 알려졌다면 <사이언스>에 논문이 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연구원들은 왜 자신의 난자를 제공해야 했을까?

류영준은 이를 “무언의 압력과 박을순의 야심” 때문이라고 했다. 박을순 연구원은 황우석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몇 달간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 때문에 황우석은 그녀의 이름을 논문에 넣지 않으려 했다. “박을순은 뭔가를 보여줘야 할 상황이었다. 황 교수가 그녀의 처지를 이용해 난자제공에 무언의 동의를 한 것으로 보고 팀원들이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그러나 황 교수는 ‘하늘을 감동시켜야 성과가 나온다’며 계속 기다렸다.”

“NT-1은 자가생식 산물… 황은 조작 강요”

결국 박을순 연구원은 난자를 제공했고 자신의 난자로 자신이 핵이식을 하는 ‘윤리적 비극’이 일어났다. 조사 당시 그녀가 동료 연구원에게 보낸 전자우편을 보면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셀프 클로닝(자신의 난자로 체세포 복제 실험을 하는 것), 이건 있을 수 없는 일, 자신의 난자를 자신이 복제하고 지독하게 독해요. …선생님께 대적하지 못했던 것, 이런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도록 더 열심히 공부할래요.” <나·들>과 만난 당시 황우석 교수의 연구원들은 한결같이 그때를 “떠올리기조차 싫은 악몽”으로 기억했다. 연구원들 모두 자신과 동료를 ‘황우석의 피해자’라고도 했다. 한 연구원은 황우석의 압력을 ‘날카로운 송곳의 끝’에 비유했다. 논문 조작을 직접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 압박을 견뎌내기 힘들어 논문을 조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 여성 연구원은 자신이 맡은 핵이식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짐을 싸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연구원이 핵이식 연습을 하던 중에 줄기세포가 만들어졌다. 바로 NT-1이다. 딱한 처지의 박을순 연구원을 위해 그녀의 공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녀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문제는 검찰에서도 조사가 이뤄졌지만, 박을순은 끝까지 자신이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떻든 줄기세포의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세포는 있었지만 잘 자라지 못하는 상태였다. 강성근 교수가 주도했던 복제 검증 실험도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다. 논문을 싣기로 한 <사이언스>에서도 NT-1이 줄기세포임을 확신할 수 없으니 이런 내용을 논문에 넣자고 제안했다. 류영준은 “나는 자가생식만으로도 세계적 업적이 될 수 있고 치료용으로 쓸 수 있다고 했지만, 황우석은 핵이식이 아니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처음부터 데이터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꾸밀 생각이었다. 결국 논문 초록 끝에 그 가능성을 한 줄 언급하는 정도로 타협이 이뤄졌지만 황우석은 그것조차 기분 나빠했다. 내가 논문 초안을 작성해 보낸 이후 그의 지시로 데이터가 조작됐다는 걸 사건이 터진 뒤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후일 서울대 조사위원회와 학자들은 이 세포가 체세포 복제가 아닌 자가생식의 산물이라고 결론 내렸다.

황우석은 또 다른 한편에서 2004년 NT-1 <사이언스> 논문의 사진을 중복 게재해 조작한 박종혁과 2005년 줄기세포 전체를 바꿔치기한 김선종에게도 압력을 가했다. “박종혁과 김선종은 박사학위를 받지 못하면 연구자로서 인생이 끝이라는 궁박한 처지에 내몰려 있었다. 그들에게 가해진 황우석의 압력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황우석은 박종혁과 김선종의 박사학위 수여에 깊이 관여했고 이를 압력 수단으로 이용했다.”

과학은 ‘객관을 전제로 한 정확성’의 학문이다. “믿는다”가 아니라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황우석은 왜 논문이 아닌 언론으로 자신의 연구를 증명하려 했을까? 류영준은 황우석이 “노벨상에 눈이 멀어 있었다”고 했다. 그는 “2003년 <사이언스>에 논문 게재가 받아들여진 뒤 들뜬 황 교수가 나에게 노벨상을 공동수상하자고 했다.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황우석의 노벨상 집착증은 과대망상 수준이다. 사건이 일단락되고도 한참이 지난 2009년 3월, 그가 지지자들 앞에서 모조 노벨상 메달을 꺼내들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유튜브 동영상으로 공개됐다. “노벨상 위원회에서 이미 2년간의 검증을 마치고 갔다. 줄기세포를 재현만 할 수 있다면 언제든 노벨상을 주겠다며 이 메달을 나에게 보냈다. 그런데 정부가 난자 연구 승인을 안 해줘서 못하고 있다.”

진실의 문과 도망자의 삶

류영준은 그가 맡았던 프로젝트가 끝나고 <사이언스>에 논문 게재 승인이 이뤄지자, 결심했던 대로 아내와 함께 실험실을 떠나, 2005년 3월부터 원자력병원 레지던트로 일하게 됐다. 류영준은 “황우석이 어떤 거짓말을 하든 이제 나와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흔들 만한 순간이 왔다.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이 발표되기 한 달 전 지인에게서 황우석 팀이 11개의 복제 줄기세포를 만들었고 곧 임상실험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핵심 인력이 모두 황우석을 떠난 상태에서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걸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곧이어 들은 소식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황우석이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10살 소년에게 조만간 임상실험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류영준과 그 소년의 관계는 각별했다. 2003년 병원에 찾아가 소년의 체세포를 직접 떼어 온 이가 그였다. 그와 아내는 소년의 줄기세포만은 반드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부모에게 아이의 사진을 부탁해 책상에 붙여둔 채 실험을 했다. 그러나 실험실을 떠나기 전에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잘못하면 그 애가 다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줄기세포를 넣어서 신경을 살린다는 것인데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아무런 검증이 안 된 상태였다. 면역반응이 나타나거나 암에 걸릴 수도 있었다.”

억울하다 나에 대한 비방들이

류영준 교수는 자신에 대한 몇몇 오해를 적극 해명하고 싶어 했다. 황우석 사건 논란이 한창이던 때 황우석의 지지자들이 문제 삼은 것들이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탓에 반론을 할 수 없었다. 불명예와 억울함에도 8년 동안 침묵해야 했던 것이다. 그중 몇 가지를 골라 그에게 답변을 요청했다. 그는 또 황우석 사건을 앞뒤로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도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류영준은 황우석 연구실 생활에 적응을 못해 불성실했다.

=황우석 실험실의 생활은 ‘월화수목금금금’이었다. 나는 황 교수보다 먼저 출근해 늦게 퇴근했다. 설날과 추석 연휴에 고향인 부산에 가는 일 외에 휴가라곤 없었다. 실험을 위해 도축장과 병원을 오가는 생활만 반복했다. 일각에선 성적이 나빠 유급했다고 하는데 실험실을 떠날 당시 A학점 이상이었다.

-다른 연구원들과 불화가 많았다.

=황우석 실험실엔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도 황우석 교수는 전혀 위계나 체계를 잡지 않아 실험실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소·돼지·호랑이·개 복제팀 그리고 줄기세포팀으로 나눠져 있어 갈등과 알력도 있었다. 황 교수는 이를 활용했다. 서로 이간시켜 자신에게 잘못을 보고하도록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선임자에게는 책임만 있고 권리는 빼앗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류영준이 정의와 진실을 내세우는 동안 황우석의 원천기술이 외국으로 흘러갔다.

=체세포 핵이식에 대한 황우석의 특허 초안은 내가 작성했다. 국제특허를 위한 보정도 내가 도와 겨우 이뤄졌다. 나는 서류에 발명자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내가 발명한 특허를 외국에 넘겨줬다는 해괴한 논리는 사실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만들어낸 소설이다.

-미즈메디병원의 주요 자료를 개인 실험노트에 적어 빼돌렸다.

=실험노트는 연구자 개인의 것이다. 개인이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적는다. 팀 안에 여러 사람이 있으면 각자의 노트에 자기가 한 일을 적는다. 우리는 팀원이 5명이라 실험노트도 5권이다. 내가 실험실을 떠날 때 실험에 대한 모든 내용을 복사해 실험실에 두고 나왔다. 황우석이 내 노트가 다시 필요했다면 당장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2년이 넘도록 아무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제2저자인 2004년 <사이언스> 논문도 조작으로 결론 났다. 류영준도 사기꾼 아닌가.

=2004년 논문에서 조작된 부분은 세 가지였다. 사진과 부계모계유전자동시 발현검사, 체세포와 줄기세포 유전자 비교일치검사였다. 사진은 박종혁이 잘못한 부분을 인정했고, 부계모계유전자에서 둘 다 발현돼야 함에도 실험 결과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황우석에게 이를 사실대로 보고했지만 묵살했다. 이후 강성근 교수가 황우석의 지시하에 데이터를 조작한 사실을 사건이 터진 뒤 알게 됐다.

-MBC < PD수첩 >이 ‘황우석 죽이기’에 협조하는 대가로 미래를 보장해준다고 약속했다.

=오히려 황우석 편에 있으면 더 이익이 될 수 있었던 상황이다. 교수도 더 빨리 됐을 것이다. MBC가 학계에 있는 나에게 어떻게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겠는가.

-배반포가 있지 않았는가.

=황우석이 실험을 통해 모양이 좋은 배반포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은 증명이다. 아무리 간단해도 남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진의 배반포가 핵이식에 의한 것이라면 증거를 대야 한다.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기억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의대 시절 온몸으로 기독 의사의 삶을 보여줬던 고 장기려 박사,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서 정신적 가르침을 준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 실제 함께 황우석 사건을 겪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에 가르침을 준 황상익 서울대 인문의학과 교수, 병리과 의사로서 의사의 길을 다시 걷게 해준 김한겸 고려대 병리학과 교수,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김병수 박사 가족, MBC < PD수첩 > 최승호·한학수·김보슬·김현기 PD, 그리고 아직 말할 수 없지만 많은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현재 강원대 병리학교실에서 줄기세포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다. 연구를 통해 줄기세포에 대해 기본적인 데이터를 제공하고 싶다. 또 실험에 필요한 인체조직을 공급하는 정부 주도 연구 인프라인 ‘한국인체자원은행사업’에도 참여 중이다. 올해부터 강원도 지역 단위 은행장을 맡게 됐다. 연구자들이 어려워하는 법적·윤리적 문제에 대해 조언해주고 친절한 동반자가 되고 싶다. 병원에서 조직·세포·분자 검사 등 환자 치료에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황우석이 임상실험까지 성공해야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무리수를 두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11개는 뻥튀기겠지만 최소한 소년의 체세포로 만든 줄기세포는 있을 것으로 믿었다. “마음이 급했다. 과거 연구팀에서 의사는 나밖에 없었다. 잘못되면 나중에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 대신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까 고민했다. 문신용 교수나 안규리 교수, 노성일 원장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절박했다.” 그의 눈두덩이 붉어졌다.

황우석의 행동에 분노한 그가 찾은 곳은 MBC < PD수첩 >과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였다. < PD수첩 >은 이후 난자윤리, 줄기세포 조작을 확인해 보도했다. 참여연대는 제보자 보호와 지원을 맡았다. 황우석의 애제자였던 류영준은 왜 스승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황우석 지지자들은 이를 두고 “2005년 논문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진 데 불만을 품고 스승을 파멸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2005년 논문은 류영준이 이미 실험실을 떠난 뒤 작성된 것이다.

류영준은 “실험실을 떠난 건 황우석의 실체를 알고 그 사람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세 차례에 걸쳐 실험실 지도교수였던 조재진 교수에게 나의 우려를 전했다. 두 번은 중간에서 이병천 교수와 강성근 교수가 전달하지 않았고, 마지막은 황우석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만약 황우석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면 오히려 이를 은폐하려 들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말했다.

제보 이후 그의 삶은 180도 바뀌고 말았다. < PD수첩 >이 방영되고 얼마 뒤 ‘제보자는 전직 연구원’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황우석의 광적인 지지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절도, 환자정보 유출 혐의로 고소·고발도 이어졌다. 더 이상 병원 일을 할 수도,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기자들이 집과 병원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는 부산 처가에 맡겼다. 참여연대의 지원을 받아 찜질방, 지인의 집, 서울 신림동 오피스텔을 떠돌아야 했다.

결국 그는 < PD수첩 > 방영 뒤인 2005년 12월6일 원자력병원에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열흘 전쯤인 11월23일부터 한 방송사 카메라가 병원에 들이닥쳤다. 환자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휴가를 내고 잠시 피신해 있었다. 병원을 갈 수 없는 날이 길어졌고, 12월4일 < PD수첩 >의 취재윤리 문제가 불거지자 병원 쪽은 “더는 방어해줄 수 없다. 그나마 파면을 시키지 않는 게 경력에 좋다”며 압박했다. 과학기술부 산하 병원인 이곳 원장실에 과기부 고위 공무원과 국가정보원 직원이 다녀갔고, 그 둘이 제보자임을 확인해줬다고도 했다. 압력을 받았느냐는 질문에도 병원 쪽 관계자는 “그렇다”고 시인했다.

그는 이후 1년6개월가량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부부 모두가 사실상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나마 빚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브릭과 참여연대 등에서 모금해 전달받은 돈이 수입의 전부였다.” 그사이 류영준은 < PD수첩 >의 취재 지원에 나섰다. 과학적으로 황우석의 줄기세포 조작을 입증하는 건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줄기세포와 체세포 제공자의 DNA를 비교하면 되는 것이다. 어렵게 10살 소년의 머리카락을 확보한 < PD수첩 >팀의 다음 과제는 황우석 실험실에 있는 줄기세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황우석이 이를 내줄리 만무했다. (황우석은 뒤늦게 < PD수첩 >팀에 검증용 줄기세포를 내주었다.)

제보자로 매국노로 산 8년, 참 쓰다

류영준은 “하늘이 도왔다”고 했다. 아내가 일하던 서울대 치대 실험실에 2005년 논문의 첫 번째 줄기세포인 NT-2의 배양접시가 분양돼 온 것이다. 황우석의 수의대 제자이자 줄기세포팀을 맡고 있던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황우석은 NT-2가 그 소년의 체세포로 복제한 것이라고 주장한 터였다. “세포를 훔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휴지통을 뒤져 배양된 뒤 버린 접시를 가지고 나와 < PD수첩 >팀에 건넸다.” 나중에 이를 안 황우석 지지자들은 아내를 절도 혐의로 고발했으나, 검찰은 무혐의 처분했다.

당시 < PD수첩 >과 류영준은 진실 규명의 명운이 걸린 최대 고비를 맞고 있었다. 소년의 DNA와 줄기세포 DNA가 일치하면 그들은 파국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 PD수첩 >은 양쪽에서 얻은 세포를 여러 기관에 맡겨 DNA 검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줄줄이 판정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냈다. 황우석이 내준 줄기세포들이었다. 그는 “마지막 한 곳에서 결과가 왔지만 < PD수첩 >팀은 검사지를 열어볼 엄두도 못내고 자리를 피했다. 나 혼자 열어봐야 했다. 같은 세포가 아닌 걸로 나왔다. 그걸 본 순간 ‘이제 아무도 안 믿어도 좋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믿어주는 사람이 몇 명이든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다’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 PD수첩 >의 네 차례 방송이 나간 뒤 2006년 1월,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검찰 수사가 이어졌다. 류영준은 두 기관의 조사 과정에 증인, 참고인 신분으로 참여했다. 서울대 조사위원회는 “핵이식에 의한 체세포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다는 어떤 과학적 증거도 없다. 따라서 원천기술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9명의 검사를 포함해 50여 명의 수사인력을 동원한 검찰 역시 황우석을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류영준은 처음엔 공범으로 피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검증도 가혹했다. 강성근 등과는 대질 심문도 받았다. 그러나 황우석과는 끝내 마주치지 않았다. “황우석이 인정했거나 다른 사람과 나의 진술이 일치하는 게 많으니까 굳이 대질을 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황우석의 과학 사기를 밝혀낸 또 다른 집단은 젊은 연구자 그룹 ‘브릭’이다. 돈과 진실을 바꾸며 침묵했던 과학자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난자윤리와 논문 조작의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사이언스>가 논문을 철회할 때도 이들의 증거가 바탕이 됐다. ‘어나니머스’ ‘아릉’ 등의 닉네임으로 활동한 그들은 정부출연기관·대기업 연구자, 생물학 전공자, 수학과 교수 등이었다. 브릭 운영자 이강수씨는 <나·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연구 부정에 대해서는 그에 따른 제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과학계에선 불문율이다. 법적인 제재보다는 과학계에서의 퇴출을 의미한다. 논문을 조작하면 연구를 검증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과학 전체가 붕괴되는 거다. 황우석 사건은 그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바뀌었을까? 과학은 진실을 발견하는 좀더 나은 방법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이를 되새기게 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는 류영준에게 빚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에선 여전히 그의 폭로가 앞서나가던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의 발목을 잡고,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희망을 꺾었다고 본다.

그에게 반론을 청했다. 답은 단호했다. “한국이 줄기세포 강국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2004년 황우석이 <사이언스> 논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언론은 ‘미국의 심장에 태극기를 꽂고 왔다’는 식으로 부풀렸다. 올해 초 <네이처>는 한국이 줄기세포 분야에서 약간의 성과를 내고 있지만 연구에 강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과학은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과 다르다. 그 자체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언론이 키워온 거품이 대중의 상실감을 키운 것일 뿐이다.”

줄기세포 분야는 지금도 국가의 많은 지원을 받는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연구 성과는 없다. 줄기세포의 미래 역시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줄기세포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세력과 애국주의적 언론이 대중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줄기세포 연구의 국제적 흐름은 배아줄기세포에서 역분화줄기세포로 넘어간 지 오래다. 배아줄기세포는 인간 난자, 그것도 20대의 젊은 난자를 사용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 실용화가 어렵다. 그런데도 국익론·특허 등을 내세워 복제 줄기세포가 최고라고 하는 건 혹세무민이다”고 했다. 또 “난치병 환자들이 관심을 둘 곳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과학자와 의사들이다. 그리고 과학자라면 거짓 희망보다는 정확한 진단과 치료로 말해야 한다”고도 했다.

“소년의 수술 막은 것만으로도 행복”

내부고발자로서 지난 8년간 그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자신에 대해 “한 사람이 튀어서 조직을 위험하게 하면 안 된다는 전체주의 교육의 세례자”라면서도 “제보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10살 소년의 수술을 막은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설사 내가 묻힌다고 해도 그것만 막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도 씁쓸했던 경험들까지 가슴에 묻지는 못했다. 2007년 3월, 2년여 공백 끝에 가까스로 고려대 의료원에 들어갔지만 일부 교수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 경계도 심했다. 그가 다가가면 하던말을 멈추기도 했다. 그는 “배신자라는 낙인을 불식시키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인간적인 신뢰를 얻어야 했고 실력으로도 증명받아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나를 보여주고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상처를 후벼파는 기억이란 참으로 고통스럽다. 아픈 기억을 꺼내 성찰할 수 있어야 경험은 공유되고 보편화된다. 손가락 하나를 펴서 남을 비판할 때 나머지 손가락 가운데 적어도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그가 전하는 말이다. “황우석 사건은 과거 한국이 정치·경제·사회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생존과 발전’이라는 절대 목표에 복종하면서 벌어진 비윤리적 행태였다. 젊은 과학자들은 기성세대의 잘못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글 이재명 <이코노미 인사이트> 기자 miso@hani.co.kr, 손은민·오다인 인턴기자(경북대 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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