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4:02 수정 : 2014.03.10 18:18

단 한순간.

단 한순간이다. 인간의 삶이 결정된다. 시간이 소실하듯 한 점으로 고요하게 수렴했다가 세상을 뒤흔드는 대폭발을 일으킨다. 이해할 수 없이 복잡해 보였던 지나간 일들이 마침내 다 설명된다. 그 순간이 지났을 때, 세계는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한 인간의 삶은 모든 것이었거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통째로 판가름 난다. 그 순간은 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고 그는 오로지 그 순간을 위해 살아왔지만, 그것은 예상할 수만 있지 예비할 수는 없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일어난다. 삶은 애드리브다.

바로 그 순간. 연극판에서 15년을 살아온 단역 영화배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지시문(가오리, 쉭쉭거리면서 권투 연습을 한다)을 이렇게 즉흥적으로 소화해냈다.

“복싱은 말이여, 바람을 가르는 빠른 팔, 습!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입은 가만히 있잖여….”

<목포는 항구다> 이후의 한국 영화에서 전라도 사투리는 박철민이 소유한 언어와도 같았다. 그는 단역과 조연을 넘나들며 확고한 입지의 일관된 캐릭터를 구축했고, <또 하나의 약속>을 통해 드디어 주연배우로 발돋움했다.

-박철민의 삶은 사방으로 돌출돼 있다. 대학에서는 단과대 학생회장,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른바 ‘성골’ 라인의 운동권 학생으로 시위마다 앞장서서 이름을 떨쳤다. 6월항쟁을 통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전두환을 끌어내렸다. 정치인이 되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형적인 386 엘리트 코스를 걸었으나 배우가 됐다. 그런데 그의 전공은 경영학이다. 궁금해진다. 연기자로서 운동을 했었나? 운동가로서 연기를 했었나?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애드리브 같은 개별적인 우연이었나?

박철민- 연기자로서 운동을 한 거죠. 연기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서 그럴 수 없었어요. 돌아가신 형님도 연기를 전공했기에 한 집안에 배고픈 딴따라를 둘이나 둘 수는 없다고 하셨죠.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활동할 때 이미 조짐이 보여 불안하다며 선을 그어두셨어요. 그래서 저는 경영학과에 입학한 바로 다음날 연극 동아리를 찾아갔고요. 제가 찾은 극회가 사회참여적 연극을 주로 하는 곳이었죠. 거기서 한 2년 연기를 했더니 재미있는 친구라는 소문이 돌면서 선배들이 단대 학생회장을 나가보라고 권하더군요. 그래서 선거에 출마했죠. 사회적 책무 같은 건 몰랐어요. 그냥 나서서 까불 수 있는 게 좋았지요. 마침 총학생회장이 결석인 상태라 총학생회장 직무대행까지 맡게 됐고요. 제 경력이 부끄럽지도 않고 자랑스럽지도 않습니다. 내가 그 시대에 단지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면 부끄러웠을 테고, 치열하게 투쟁했다면 자랑스러웠겠지만, 불행하게도 ‘얼떨결에’였어요. 인터뷰마다 꼭 그렇게 밝혀둡니다. 저는 운동권 날라리였어요.

-운동권 출신이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 않나. 하지만 배우 생활 초기에 노동극과 마당극에 주로 참여했는데, 선택했던 지점을 들여다보면 단지 ‘배우로서의’ 우연한 선택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박철민- 어떤 연기를 할 것인가. 어떤 작품을 할 것인가. 그런 고민들은 대학 때 이미 정리됐죠. 우리 주변의 이야기, 우리 주변의 사람들, 우리 주변의 감정들, 그게 더 재미있고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때 적극적인 성격의 극단에 있었고, 선배들의 영향과 소개로 자연스레 노동극단에 몸담게 된 부분도 있죠. 그렇게 5년 정도 활동하다보니 연기가 울타리에 갇히는 느낌을 받았어요. 비슷한 시기에 형님이 돌아가시고, 애가 태어나면서 밥벌이의 필요도 생기고 해서 그곳을 나오게 됐지요.

-이달부터 <나·들>의 새 인터뷰어로 합류한 한채윤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운영위원이 물었다. “연기도 반대한 아버지가 학생운동을 하는 건 가만히 놔뒀나?”

박철민- 모르셨죠, 아버지는. 학생회장이 되어 집회를 주도하는 입장이 되다보니 학교 쪽에서 결국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어요. 놀란 아버지가 직장을 결근하면서까지 서울에 오셨고, 마침 집회를 선도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셨어요. 아마 그 집회에 사람이 10명쯤 있었을 겁니다. 집회가 끝나고 아버지가 저를 구석으로 끌고 가시더니 이렇게 야단치시는 거예요. “예끼 자식아, 10명 앉혀놓고 뭐하는 거냐! 쪽팔린 줄 알아라!” 그리고 바로 뒤돌아 집으로 가셨죠. 그때 자괴감이 무척 심했어요. 부정할 수 없이 아버지 말씀이 맞는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이후 학생운동에 대해 말씀을 꺼내신 적이 없어요. 걱정이 아니라 오히려 안심하게 되셨나봅니다, 제 초라한 영향력에. 그런데 그 뒤로 투쟁 의제가 확산되면서 집회 참가 인원이 1만5천 명을 넘어섰거든요. 아버지가 오셔서 그 장관을 보셨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왜 하필….

-운동권에 몸담으면서 직선제 개헌까지 이뤄내고 졸업했지만, 과거 기사들을 읽어보니 정작 386세대가 사회의 기층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1990년대에는 많은 고생을 했다는데.

박철민- 어느 극단이나 배고픈 건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토크쇼를 나가든지 인터뷰를 하든지 항상 비슷한 질문을 받았지요. “그 힘든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나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죠. 아프고 어려운 시절을 기어이 극복한 화려한 성공 미담. 에피소드가 필요하니 종종 기억을 돌이켜 찾아주긴 합니다. 지갑을 열어보니 주민등록증 하나만 꽂혀 있던 때가 많긴 했죠. 하지만 솔직히 말할게요. 저는 힘들었던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즐거웠어요. 정말로 힘들지 않았는데… 자꾸 요구하니까 뭐 찾아내서 들려주긴 해야죠.

-연기를 쉬고 장사한 시기가 있다고 들었다.

박철민- 과일도 팔고, 지하철역에서 신발도 팔아봤죠. 그것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제 삶은 언제나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장사하기 지겹다. 때려치우고 연극 무대로 돌아가고 싶다.’ 이런 생각 따위는 한 번도 안 했어요. 반대로 이런 생각을 했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이 팔아야지. 거상이 되고 말겠어. 정주영도 소 한 마리 끌고 장사를 시작했다잖아!’ 비가 내려서 장사를 종쳐도 즐거웠어요. 천막을 치고 친구들을 불러서 팔고 남은 과일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실 수 있었거든요. 지하철에서 불법 가판을 벌이다가 신고당해도 즐거웠죠. 삼엄한 경계를 뚫어내는 맛이 있었으니까. 물건을 파는 데도 연기와 전략이 필요해요. 손님의 딸을 보고 “공부 잘하게 생겼다”고 말하려면 “못하는데요”란 대답이 돌아올 걸 대비해야 하고, “예쁘다”고 말하고 나서는 “엄마 닮았다”고 덧붙여줘야 손님이 더 흡족해하죠. 장사에 필요한 애드리브를 짜내는 것도 즐거웠어요. 누군가 그것을 생존 싸움이라 부른다 해도, 저에게는 그저 즐겁기만 했죠.

-과일이 마냥 잘 팔리기만 했으면 삶의 길이 달라졌을까.

박철민- 도매업으로 진출해서 실패를 맛보기 전에는, 제가 연기보다 장사에 자질이 있다고 믿었어요. 프로들의 세계로 나가보니까 도저히 그 속도와 동물적인 감각을 따라갈 수 없더라고요. 연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돌아온 게 아니었어요. 거상이 될 수 없어서 돌아온 거죠. 내가 가진 재능으로 승부할 수 있는 곳은 무대밖에 없다는 걸 배운 겁니다.

-<또 하나의 약속>에서 밥벌이까지 내려두고 죽은 딸이 근무했던 대기업과의 투쟁에 뛰어든 상구(박철민)를, 아내 정임(윤유선)은 지쳐하면서도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응원한다. 어느 날 식탁 앞에서 상구는 아내를 바라보며 “당신 참 예뻐”라는 말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무명 배우와 가판 장사를 오갔던 인간 박철민은 자신이 부양해야 할 ‘또 하나의 가족’ 속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도 듣고 싶다.

박철민- 이기적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되겠지’였죠. 내조를 맡거나 경제적 부양을 맡거나 하나는 했어야 하는데, 모른 척하고 무대만 쫓아다녔어요. 어쩔 수 없이 아내가 모든 책임을 떠안았죠. 사실 그게 제가 착한 아내를 얻은 이유고요. 가정이 있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런 이기성을 가지고 있어요.

-작가인 나에게는 거의 인생 충고처럼 들린다. 자신의 이기성을 이타적으로 받아줄 사람을 반려자로 ‘선택’하는 이기성이 예술가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보는가.

박철민- 아주 중요하죠. 그러지 않을 거면 차라리 결혼하지 말아야 해요. 감당하지 못할 사람의 인생까지 끌어들이는 건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그래서 남자 연극배우들은 교사를 최고의 반려자로 여겨요. 성격이 착하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사람. 여교사들이 단체관람을 온 무대에서는 연기력이 개선될 정도죠. <또 하나의 약속>을 통해 저는 삶을 공부했어요. 내 가족을 한 번 더 살피게 됐고, 더 나아가 인간의 진정한 친구는 언제나 이타적인 약자라는 걸 배웠죠. 영화가 투자사를 찾지 못해 표류할 때 많은 사람들이 사비를 털어 후원하면서 오히려 액수가 적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겁니다. 깊이 감동하면서도,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 사람들은 대체 뭘까?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걸까?’ 이기적인 제 눈에는 처음으로 보였지만, 제가 보지 못했던 이 사회 곳곳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타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은 제 깨달음조차 이기적인 거예요. 왜냐하면 누군가 내가 출연한 작품을 도왔을 때야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게 된 거니까요.

-많은 시민들이 후원한 만큼 <또 하나의 약속>은 정치색이 강한 영화다. 한채윤이 물었다. “출연을 결정할 때 망설이지 않았는가?”

박철민- 전혀 없었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성향과는 상관없이, 배우란 직업은 한쪽 세계로 치우치면 다른 한쪽 세계를 잃을 수밖에 없어요. 고민하는 데 술이 필요했어요. 가끔씩 들어오는 광고 생각도 났죠. 하지만 그건 짧고 사소한 걱정이었어요. 내가 훌륭한 배우라면 민감한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광고주가 외면할 이유가 없겠죠. 무엇보다 캐릭터의 매력이 정말 컸어요. 헌신적이고 우유부단하고 어깨가 굽은 아버지. 하지만 가족을 위협하는 거대한 적을 마주쳤을 때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마라톤을 완주하는. 저와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고, 제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역할과도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죠. 욕심이 났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욕심이 너무 크지 않았나 싶어요. 나보다 티켓 파워가 있는 송강호나 김윤석 같은 배우가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의 연기와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또 하나의 약속>에서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수행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전라도 사투리를 간신히 벗어난 대신 강원도 사투리를 구사했지 않나. 사투리는 그 자체로 ‘변방의 인간’을 표상하는 것이 아닐까. 가볍게 촐랑거리는 캐릭터, 심지어 깡패를 연기했을 때도, 박철민에게는 요란하게 떠들지만 실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변방의 인간이 엿보였다. 말한 대로 송강호나 김윤석이 맡았으면 티켓은 더 팔렸겠으나 더 어울렸을 것 같지는 않다.박철민- 김태윤 감독 역시 저를 “아무리 까불고 오버해도 여전히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배우”로 보았다고 하더군요. 주름 많은 하관도 마음에 들었다고 하고요, 하하.

-사실은 <또 하나의 약속>의 상구와 진짜 비슷한 캐릭터는 ‘인간 박철민’인 게 아닐까.

박철민- 하하. 갈기갈기 해체하다보면 제 안에도 비슷한 구석이 있겠죠? 상구의 모델이 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는 저랑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 낙천적이고 외곬인 분이죠. 이런 점도 비슷한 것 같네요. 나이 들면서 배우로서 저 스스로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한계와 외로움을 느껴요. 자신감도 흔들리고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해보고요. 하지만 결국은 포기하지 않았죠.

대학 총학생회장 직무대행, 연극배우, 노점상을 거쳐 다시 배우로 돌아온 박철민의 삶은 우연의 형식을 띤 애드리브를 닮은 듯도 하다. 그러나 맥락 없는 일탈은 한 번도 없었고, 잘 들여다보면 치밀한 서사를 이루고 있다. 2010년 8월26일 서울 청계천에서 ‘전태일다리 이름짓기 범국민 캠페인 선포식’ 홍보대사로 1인 릴레이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박철민.한겨레 이종근
-박철민은 애드리브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하나의 약속>에서는 어떤 대사가 애드리브였나.

박철민- 아까 이야기했던 장면, 아내를 바라보면서 “당신 참 예뻐”라고 했던 대사가 애드리브였죠. 그 순간 배우 윤유선씨와 배역인 ‘정임’이 겹쳐 보였고, 저 역시 상구가 된 기분이었어요. 딸을 가진 아빠의 입장이 ‘상구’로부터 감정적으로 분리되질 않았던 거지요. 나도 모르게 “당신 참 예뻐”라는 말이 자연스레 입 밖으로 나오더군요.

-촬영하면서 딸이 많이 떠올랐는가.

박철민- 극중에서 백혈병으로 죽은 ‘윤미’를 떠올리지 않고 제 딸을 떠올렸어요. ‘딸’이란 단어와 ‘내가 낳은 딸’은 그 소중함과 고통의 감각이 다르잖아요. 내 딸을 생각하면 연기할 필요도 없이 연기할 정서가 만들어졌죠. 희한하게 요즘 들어 딸 가진 아빠 배역의 제안이 많이 들어옵니다. 몇 년 전까진 까불대기만 하는 장가 못 간 노총각 역할이 많았거든요. 아마 제가 늙었나보죠?

-단지 나이 들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많은 영화에서 박철민은 큰 이야기 안에서 별개로 닫혀 있는 ‘소극’을 벌이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성장했다. 영원히 철없을 것처럼 보이던 노총각이 겨우겨우 장가들더니 딸바보인 가장으로 성장한다는 것, 사람들이 배우 박철민에게서 ‘한국의 보통 남자’로서의 인생 서사를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닐까. 김혜자가 드라마 <전원일기>를 거쳐 ‘한국의 보통 어머니’ 상을 확보했듯이.

박철민- 그건 제 장점이 되겠네요. 두 딸에게 저는 항상 부하이자 동생이 되려고 노력해요. 가장 만만하고 하찮은 사람. 그래야 딸들을 오래 지킬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거든요. ‘아빠’라는 이름의 권위는 딸에게 바로 거리가 생기도록 해버려요. 그래서 야단 안 치는 아빠가 되려고 했죠. 체벌은 엄마한테 다 떠넘기고! 저는 딸들에게 공중도덕을 가르치는 동시에 적당한 수준에서 공중도덕을 어기는 법도 가르쳤죠. 가래가 입에 고였는데 삼켜야 하는가, 아님 뱉어야 하는가. 뱉어야죠. 딸들은 간접경험을 통해 “부끄러우니까 제발 그러지 마, 아빠” 하면서 공중도덕을 배우는 거죠. 그러다보니 사실은 자신이 있어요. 허점과 빈틈을 가진 아빠를 연기하는 것에는.

-좋은 이야기는 많이 했으니 나쁜 이야기도 해보자. <또 하나의 약속>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가 25년 택시 기사를 해서 어떤 사연이 있는 손님인지 얼굴만 봐도 대번에 알아요.” 내가 25년 경력의 택시 기사는 아니지만, 깡패 연기를 할 때조차 박철민의 얼굴은 어쩐지 선량한 인상을 풍겼다. 이번 영화에서는 그게 잘 맞았지만, 앞으로 연기폭의 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역으로 시작해서 주연까지 성장하는 배우들은, 대개 근본적인 인간성의 사악함을 의심케 하는 섬뜩함이나 긴장감을 간직하고 있고, 정극에서 적당한 역할을 만났을 때 뒤틀린 에너지가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철민- 저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스스로 쉽게 무장해제하는 느낌, 관객들이 “저 사람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닌 것 같은데”라고 믿게 만드는 느낌이 저에게 있죠. 일단 팔자 주름이 그렇죠. 지금까지는 장점으로 이용해왔지만 앞으로는 단점이 될 수 있겠죠. 그건 제 얼굴의 문제가 아니라 연기력의 문제일 겁니다. 사실 잘 들여다보면 제 눈빛에 섬뜩한 기운도 있거든요.

-얼굴과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천성의 문제는 아닐까. 미묘하게 스쳐 지나가는 언어 습관, 목소리, 표정과 제스처에서 박철민에게는 ‘나쁜 놈’이 결코 느껴지질 않는다. 반면 아까 언급됐던 김윤석 같은 배우는 스크린으로만 봤을 뿐이지만, ‘실제 나쁜 놈일 게 틀림없어’라는 확신이 들게 하는 어둡고 섬뜩한 구석이 있다. 배우로서 그의 커다란 장점으로 본다.

박철민- 그래요, 내가 ‘나쁜 놈’이 아닌 천성을 가졌어요! 하지만 그게 제 무기가 될 겁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제 안의 ‘절대악’을 관객은 언젠가 보게 될 테고, 그때는 모두가 깜짝 놀랄 겁니다. 작품을 주기만 한다면. 어떤 평론가는 저에게 스릴러 자체가 안 어울린다고 합니다만. 그 비판 때문에 한동안 엄청난 슬픔의 질곡에 빠졌었죠. 가족에게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그 기사를 읽고 저를 위로했어요. 누군가 당신을 언급하고 지적하는 건, 그 자체로 당신의 크기를 인정하는 거라고. 모든 사람, 모든 시선, 모든 자리에서 당신이 빛날 순 없다고 하더군요. 그때도 “당신 참 예뻐”라는 생각을 했죠. 아까 말했죠? 아내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혹시 평가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

박철민- 일부러 찾지는 않지만, 악평에 가까운 기사나 댓글을 대하면 소심하게 자학에 빠져듭니다. 그때마다 아내가 구원해줍니다. 그리고 또 야구가 구원해주고요. 불안과 고통에 시달릴 때는 야구장에 가서 방망이를 휘두르며 땀으로 씻어내죠. 야구를 정말 좋아합니다.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어릴 때는 꿈이 야구선수였어요.

-기아 팬이겠다. 윤석민의 메이저리그 적응 가능성을 어떻게 보는가.

박철민- 하하. 응원을 해주고 싶지만, 객관적으로 쉽지는 않아 보여요. 류현진의 가장 큰 장점은 강심장이거든요. 자신감이오. 윤석민의 경우에는 한 번의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가 생겼을 겁니다. 롯데 선수와 빈볼 시비가 벌어진 뒤로는 롯데와의 경기에서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정신적인 상처, 그리고 천성에서도 적응에의 약점을 안고 있지요.

-그 이야기는 마치 박철민 자신에 대한 평가처럼 들린다. 스릴러에 적응하는 데 평론가에게 입은 정신적 상처, 그리고 선량한 천성에서의 약점.

박철민- 휴. 음, 이겨내야죠. 아마 그런 면에서는 윤석민이 저보다 유리하겠네요. 한국에서 100억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오직 꿈을 좇아 훨씬 어려운 조건의 환경을 찾아나선 걸 보면, 저보다는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겠지요.

-배우로서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윤석민이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듯 할리우드로 진출하겠다든가.

박철민- 젊은 프로야구 선수와는 다른 계획이 있어요. 윤석민은 짧게 불태우더라도 강하게 부딪혀보는 거라면, 저는 길게 즐거워할 수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길 원해요. 노인이 되어서,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오늘 좋았지” 하며 맥주 한잔 마시다가 죽어버리는 삶. 저는 많은 일을 해봤어요. 연극, 영화, 과일장사, 신발장사, 물류 운전기사. 내가 하는 일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어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돌아보니 내가 가장 신나는 일, 내 매력과 재능이 가장 크게 발휘되는 일이 뭔지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제 삶이 계속되는 동안은 그 즐거움을 길게 누리고 싶어요. 연기자로서의 ‘한 방’은 사실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주인공도 한 번 해봤으니까!

-애드리브 같았던 좌충우돌의 삶. 애드리브에 달통한 배우로서 박철민이 꼽는 최고의 애드리브 대사는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바로 이것이다.

박철민- “나는 세상에서 애드리브하는 놈이 제일 싫어.”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작가 역할을 맡았을 때 했던 애드리브죠. 역설적으로, 내 인생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나 싶어요. 어떤 때는 즉흥적인 결정을 내리는 내 성격이 싫었어요. 손해란 걸 알면서도 그런 행동이, 또 그런 대사가 불쑥 튀어나와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제가 신나고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요. 애드리브로 흥하고 애드리브로 망해도 저는 어쩔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박철민의 연기는 작가와의 실랑이를 불러일으키는 애드리브 범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철민의 삶은 스스로 계획한 것처럼 결말이 정해진 각본으로 진행됐으면 좋겠다. 생애 마지막 날, 만족스러운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소소하게 맥주를 마시며 맞이하는 임종. 그의 계획이 그가 지켜낸 ‘또 하나의 약속’이 되기를!

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 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관련 영상] ‘가족’이라 부르지 못한 <또 하나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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