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3:50 수정 : 2014.03.30 14:04

‘땅 위의 스튜어디스’를 꿈꾸며 KTX에 입사한 여성들은 정부의 ‘여성 상대 취업 사기’로 드러난 KTX 국책사업의 희생자가 되었다. 감사원, 국가인권위원회, 국회, 법원 모두가 승무원의 손을 들어줬지만 코레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2006년 9월 파업에 들어간 KTX 여승무원들의 시위 모습.한겨레 김태형
속았다. 참았다. 4월이면 10년이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고 했다. 파업 트라우마로 노조의 ‘노’자도 꺼내지 않던 그들이, 노조를 만들었다. 사 쪽의 압박도 두렵고, 가족의 반대도 힘겹다. 하지만 다시, 첫발을 내디뎠다. 그들은 철도노조 코레일관광개발지부 KTX 승무원이다.

2006년. KTX 여승무원들은 “진짜 사용자인 코레일이 직접고용하라”며 파업을 했다.1 죽는 것 빼고, 다 해봤다. 보다 못한 교수들(KTX 승무원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교수모임)도 “국가가 KTX 국책사업을 진행하며 여성을 상대로 취업 사기를 벌였다”며 거리로 나왔다. 감사원도, 국가인권위원회도, 국회도, 법원도 ‘불법파견’이라며 승무원의 손을 들어줬다. 여승무원과 유사 업무를 하는 남성 승무원은 코레일에 정규직으로 직접 채용됐다. 국가인권위는 성차별이라고 판정했다.

거리로 나선 지 912일째 되던 날. 마지막 비상구는 높은 곳에 있었다. 그들은 서울역 앞 철탑에 올랐다. 코레일은 꿈쩍도 안 했다. 승무원들은 “역사는 우리가 옳았음을 증명할 것”이라며 법정 투쟁으로 전환했다. 406명이던 승무원은 34명만 남았다. 이들은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승무원이다. 투쟁은 잊혀졌다.

코레일관광개발지부 승무원은 파업 중에 떠나, 코레일 자회사(코레일관광개발) 정규직으로 복귀한 이들이다. KTX승무지부 승무원은 마지막까지 남은 자였다. 서로에게 깊은 상처였다. 파업 뒤 각자의 삶을 살았다. 남은 자들은 직장을 잃고, 다른 일을 했다. 복귀자들의 삶은 곤두박질쳤다. 이들은 “2006년 파업 당시 비정규직일 때가 더 나았다”고 했다. 정규직인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마지막까지 남아 싸움의 선두에 섰던 오미선(36) 전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장과 전문희(36) 철도노조 코레일관광개발 서울지부장이 만났다. 파업 뒤 8년 만이다. 문희씨는 파업 당시 평조합원으로 6개월간 참여하다 자회사로 복귀했다. 이들이 한자리에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복병이 생겼다. 미선씨는 4살·2살 아들이 있고, 문희씨는 23개월 된 아들이 있다. 인터뷰에 대해 가족 동의를 얻고 아이 맡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까지 ‘험난한’ 과정이 있었다. <나·들>이 아이돌봄조를 구성해 나설 찰나, 가까스로 문제가 해결됐다. 2월 중순, 서울역의 한 카페에서 이들을 만났다. 동료 이진희(36·가명)씨도 함께했다. 모두 KTX 승무원 1기, 최고참이다.

싸웠던 자와 이제 싸우는 자의 만남

“와, 완전 그대로네!” 서로 얼굴을 확인하고 안부를 나눴다. 미선씨가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초콜릿을 돌렸다. 그에게 이날은 특별했다. 둘째가 태어난 이후 ‘단독 외출’을 한 첫날이었다. 전 승무원 모임에 나갈 때도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아 가족이 총출동해야 했다. “혼자 버스를 타고 오는데 어찌나 가슴이 떨리는지. 버스 창밖을 보는 데 두근두근하더라고요. (웃음)” 아이들은 남편이 잠깐 봐주기로 했다. “신랑도 이번 기회에 아이 돌보는 게 힘들다는 걸 겪어봐야 해요!” 문희씨가 맞장구를 쳤다. “남자들은 아이가 혼자 크는 줄로만 알아요!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아무것도 몰라요.” 문희씨는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왔다. 8년이라는 시간은 육아 문제와 시월드 앞에 녹아내렸다. 무심한 남편을 타박하고 아이들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그들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다.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평범한 여성이 노조간부를 하는 건 쉽지 않다. 문희씨는 전날 자정 퇴근 뒤, 이날도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고 인터뷰를 하러 왔다. 오후에는 ‘투투근무’를 해야 한다. 투투근무는 부산~서울 2회 연속 왕복근무로, 중간에 잠을 제대로 못 잔다. 악질적인 근무 형태로 다른 철도사업 부문에서는 이미 사라졌다.

문희씨는 한 올의 잔머리도 없이 정성스럽게 머리를 묶고 곱게 화장을 마친 상태였다. 한눈에 봐도 승무원임을 알 수 있는 용모다. 화장은 삶의 고단함을 커버하지 못했다.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눈과 간간이 새어나오는 한숨은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가늠하게 했다. 그에게 일상은 승무·잠·육아·가사의 연속이다. 지부장이 됐다는 소식에 시댁에서는 난리가 났다. 남편과 시댁에는 “지부장 직함만 갖고 있을 뿐 하는 일은 없다”고 했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데, 지부장 활동으로 짜증이 늘었다는 얘기를 들을까봐 집에서조차 힘든 내색을 못해요.”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그의 감정노동은 계속된다.

8년 전보다 추락한 여승무원의 노동환경

미선씨가 공감을 표했다. 그는 “투쟁 당사자들은 벼랑에 몰려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인데, “저 또한 투쟁 당시 가장 큰 힘이 돼야 할 가족이 반대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파업 뒤 서비스강사를 하다가, 둘째가 태어나면서 전업주부가 됐다. 20대 후반, 취재 현장에서 마주쳤던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미선씨도 분주한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다.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는 사내아이 둘을 키우느라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인터뷰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전화를 걸 때마다 항상 아이들이 전화를 받았다. 결국 문자메시지와 전자우편으로 소통했다. 미선씨는 “그래도 행복하다”며 수줍게 웃었다.

-파업의 상처가 남아 공동 인터뷰를 수락하지 않을 줄 알았다.

미선- 예전에도 복귀 승무원과 함께 인터뷰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는데, 거절했어요. 복귀한 승무원이 미운 건 아니고요. 저도 복귀했으면 일이라도 했을 거라는 생각에 스스로 움츠러들어 힘들었어요. 오래 파업을 해봐서 흔들리는 마음 이해해요. 복귀하고 말고는 한 끗 차이예요. 시간이 약인 것 같아요. 이젠 그런 감정 없어요. (웃음)

문희- 저도 옛날이라면 (미선이와 함께 인터뷰하는 게) 힘들었을 텐데, 시간이 지나 다 잊은 것 같아요.

미선- 오히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요.

문희- 완전 안 좋아!

문희씨는 자회사 복귀 당시 “파업하기 전보다 더 나빠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고 했다. 코레일관광개발(주)는 코레일로부터 승무 업무를 위탁받은 자회사로, 기타공공기관이다. 정규직인 만큼 안정된 근무환경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2007년, 이철 전 코레일 사장도 “KTX 승무원 보수는 항공사 스튜어디스에 버금가고, 복리후생 또한 철도공사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코레일 자회사 복귀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문희·진희- 승무원다운 승무원을 하고 싶어 파업한 것이지, 일이 싫은 게 아니었어요. 힘들 거라는 우려보다 열차 승무원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죠. 무엇보다도 국책사업2인 ‘KTX 승무원 1기’라는 자부심도 컸고요.

미선- 그 느낌 알아요, 승무원이 너무 하고 싶은 마음. 회색 승무원 제복을 입고 KTX 안을 지나가는 느낌이 지금도 생생해요.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할 때 희열을 느꼈고, 승객의 ‘고맙다’는 말에 하늘을 날 것 같았죠. (웃음) 동료와 조조영화도 보고 먹자모임도 하고 소중한 기억이 참 많아요. 지금도 서울역에서 방송이 나오면 가슴이 설레고, 제복 입은 승무원들을 보면 멋있어요. 이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데….

-그렇게 하고 싶은 승무원이었는데, 왜 복귀하지 않았나.

미선-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었어요. 사 쪽이 승무원을 왜곡했어요. 안전을 책임지며 승객이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하는 승무 업무를 못하게 했어요. 약속한 정규직 전환을 미루는 대신, 검표·청소·판매 업무가 넘어왔어요. 그럴 거면 처음부터 ‘땅 위의 스튜어디스’라며 ‘KTX 승무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채용해선 안 되는 거였죠.

-일각에서는 2006년 승무원의 투쟁에 대해 ‘실패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문희- 동의해요. 오히려 파업 당시 코레일 자회사였던 홍익회 소속 비정규직이었을 때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요.

미선- 개인적으로는 직장도 잃고 마음도 다쳤어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개인은 실패했어요. 하지만 갓 대학을 졸업한 비정규직 여성들이 장기간 파업한 건 쉽지 않은 투쟁이었어요. 공공부문에서도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려 사회 흐름을 바꾸는 데 작은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법적 투쟁도 진행 중이어서 전부 실패한 건 아니라고 봐요.

-당시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되면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미선- 결국 정부의 의지였던 것 같아요. 참 좋아하는 대통령이었는데, 왜 그렇게 우리에게 못을 박았는지 지금도 의문이에요. 이철 전 사장은 이번 철도 파업 때 기부금을 냈다고 하는데, 당한 게 많아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어요.

문희- 우리 의도와 상관없이 투쟁에 대한 상징이 너무 컸던 것 같아요. 당시 “정부가 우리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사람들도 일어날 것이고, 정부의 비정규직 외주화 전략3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어요.

미선- 지금 보면 철도 민영화라는 거대한 계획에 따라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전환하면서 승무 업무를 외주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여자애들이 투쟁을 하는 바람에 정부로서는 정책에 오점이 생긴 거죠.

-실패를 딛고 다시 용기를 내서 노조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문희- 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신입이 입사하면 “나이 어릴 때 빨리 나가 다른 회사 알아보라”는 말을 가장 먼저 들어요. 후배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죠. 후배들 보기가 미안했어요. 일터를 바꿔보고 안 되면 그때 그만두자 싶었죠.

진희- 전 자신이 없었어요. 저희는 요주의 인물이라 ‘표적 모니터링’을 당해 일도 힘들게 했어요. 노조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일터를 바꾸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어요. 숙소에서 한 방에 9명이 자는데, 각자 ‘다이아’(열차 스케줄)가 달라 잠도 못 자요. 공동숙소 생활로 피부병이 생겨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숲 속에서 일하냐?”며 황당해했어요. 그만두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일터를 바꿔 다녀보고 싶다”는 문희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죠.

‘그땐 몰랐어’ ‘그 마음 알아’

이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예견된 일이었다. 과거 파업 당시 승무원들이 코레일의 직접고용을 요구한 데는 간접고용의 폐해도 컸다. 코레일은 공기업의 정원 통제와 비용절감을 이유로 승무사업을 자회사인 홍익회(비정규직)에 위탁했다. 홍익회는 승무 업무 경험이 없다. 홍익회는 중간 착취 역할만 할 뿐, 승무 업무는 코레일 소속의 열차팀장이 지휘·감독했다. 자회사는 수익구조 특성상 비용절감 효과를 높이기 위해 노동력을 착취할 수밖에 없다. 인건비를 깎아 위탁비를 남겨야 수익이 생기고, 그래야 코레일로부터 높은 경영평가를 받는다. 승무원의 임금은 점점 깎였고, 홍익회 간부의 성희롱 등이 발생하면서 노동조건은 더욱 열악해졌다.

8년 만에 다시 만난 전문희씨(왼쪽)와 오미선씨. 두 사람은 과거 다른 길을 택했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보낸 세월은 지난날의 앙금을 녹아내리게 했다. 이들을 갈라놓은 코레일과 정부는 여전히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한겨레 박승화
홍익회가 하던 일을 현재는 코레일관광개발이 한다. 그때는 비정규직이었지만 지금은 정규직이다. 정부는 자회사 ‘정규직’이라며 적극 홍보했다. 하지만 자회사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또 다른 이름이다. 파업했던 승무원들이 지적한 대로, ‘자회사’의 구조적 특성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지부에 따르면, 승무원은 월 232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승무 대기시간 포함)을 한다.4 A~E라는 능력등급제도(급여 차이가 40만원이 난다)가 있어, 휴일근무와 부당한 취업규칙 변경을 거부할 수도 없다. 이로 인해 입사 때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는 승무원도 있다. 임금은 7년째 동결이다. 일부는 임금 반납을 강요받기도 했다. 승객에게 안 맞아본 승무원이 없지만, 산업재해 처리는 꿈도 못 꾼다. 승무 대기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해 월 20~40시간의 ‘무료노동’을 한다. 유산, 갑상선 질환, 자궁 질환, 위장염, 방광염 등을 달고 산다.

2006년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복귀한 승무원들도 일이 힘들어 대부분 떠났다. 소수는 임원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임신·육아 휴직에 따른 경력 단절로 인해 현장에 복귀할 때는 직급을 낮춰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노총 산하 한국철도산업노조에 가입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누가 노조를 만들었는지는 몰랐지만, 직원들은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가입원서를 냈다. 그 결과 휴일수당과 경조비마저 사라졌다. 직원들은 임금·단체 협상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이들이 한국철도산업노조를 탈퇴하고 철도노조 코레일관광개발지부를 만든 이유다.

문희- 후배들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뭔지도 몰라요. 나이 많은 남자 어른이 앞장서 해주겠다고 해서 가입한 건데,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오히려 단협을 통해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어버렸어요. (한숨)

-다시 투쟁에 나선 동료들을 보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미선- 적어도, 파업 당시보다는 상황이 나아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화가 나요! 4월이면 KTX 개통 10년인데, 정부가 ‘KTX의 주역’이라고 홍보했던 승무원의 삶이 그 전으로 후퇴하는 게 말이 되나요? 모니터링이 필요한 곳은 승무원이 아니라 사 쪽인 것 같아요.

-신의 직장’이라는 공공기관 자회사 정규직이라, 대부분의 시민들은 안정된 근무환경에서 일하는 줄 안다.

문희-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공공기관이 하는 절전·냉난방 캠페인을 따라하느라 전기도 안 들어와요. 그런 건 다 따라하면서 근로기준법도 안 지켜요. 정규직이오? 우리는 관리자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잘리는 노예예요. 대통령이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해 공공부문에 시간제 일자리를 만든다고 하던데, 기존 워킹맘의 경력 단절을 막는 게 먼저 아닌가요? (워킹맘이 떠난 자리는 월급 120만원을 받고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는 청년 인턴이 메운다.)

비정규직만도 못한 정규직, 허울 좋은 이름

-코레일광광개발은 “KTX 승무원은 서비스 위탁업무를 수행하는 반면 코레일 열차팀장은 안전업무를 책임져 단순 비교가 어렵다”며 “근로조건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문희·진희- 기가 찼지요! 승객이 눈앞에서 사고를 당하면 안전업무를 할 수 없다며 가만히 보라는 건가요? 사고가 나면 승무원도 열차팀장과 똑같이 승강문 개방, 의료진 수배, 승객 대피 등 안전업무를 다 합니다. 무전기로 열차팀장에게 업무를 지시받고 보고도 하고요. 불법파견5을 피하기 위해 명목상 업무를 분리했지만, 현장에서는 업무 분리가 불가능해요. 직접 일을 해보면 알아요.

문희- 코레일 관련 민원도 승무원이 막아요. 열차 이어폰이나 화장실에 문제가 생기면 승객은 승무원에게 화를 내요. 코레일이 하던 검표 업무도 승무원이 하는데, 아무리 친절하게 말해도 ‘돈을 내라’고 하면 좋아할 승객이 없죠.

미선- 불법파견을 피하기 위해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 같아요. 우리 때는 코레일 열차팀장과 같은 다이아로 일했어요. ‘투투근무’ 같은 건 없었어요. 아침 회의를 통해 업무를 지시받고 일과가 끝나면 열차팀장에게 보고했어요. 재판에서 계속 이기는 이유도 승무원과 열차팀장 업무는 분리가 안 되기 때문이에요. 승무원 업무가 무엇인지 대국민토론회라도 열어 사회적 합의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진희- 사 쪽은 겉으로는 승무원의 서비스 업무가 하찮다고 하는데, 실상은 정반대예요. 민원에 목숨을 걸어요. 민원 서비스 때문에 승무원은 쉬는 날에도 불려나가고, 잘못된 서비스 평가를 받으면 잘리기도 해요.

-철도노조의 태도가 2006년과 사뭇 다르다. 당시에는 노조 지도부와 평조합원 간 온도 차이가 컸다.

미선- 철도노조는 보수적인 조직이에요. 평조합원들이 나이 많은 정규직 남성이다보니, 당시에도 ‘어린 너희가 얼마나 하겠느냐’며 얕잡아 보는 시선이 있었어요. 같은 철도노동자고 같은 조합원인데, 전국을 돌며 연대를 부탁하는 게 참 씁쓸했어요. 우리가 비정규직이어서 시선도 싸늘했고요. 지금은 수서발 자회사로 정규직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아요. 힘든 싸움인 만큼 철도노조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아니라, 철도노동자로 하나가 됐으면 해요.

-두 지부 모두 각자 삶에서 따로 또 같이 싸워야 할 것 같다. 지부 통합을 검토할 생각은 없나.

문희- 미선이에게 물어야 할 것 같아요. (웃음)

미선- 우리가 대법에서 승소하면, 결국 같은 문제로 정리될 수밖에 없어요. (통합은) 아직 고민해본 적이 없고, 조합원과 함께 논의해야 할 문제죠. 일단 통합하려면 처우 개선이 아니라 직접고용을 갖고 싸워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마지막까지 남아서 싸운 승무원들이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미선·문희- 철도의 생명은 안전이에요. 사 쪽 주장은 결국 철도 사고시 승객이 각자도생하라는 얘기죠. 승무원에게 안전업무를 하지 말라는 건 국민에게도 해를 입혀 공익에 반하는 거예요. 모범을 보여야 할 공기업에서 벌어지는 불법을 막지 못하면 민간기업에서 일하는 내 가족에게 발생하는 불법도 막지 못해요.

진희- 지금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우리 파업이 정말 정당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개인적 생각임을 전제로 말하면, 파업 때 끝까지 가기보다는 다 함께 현장에 돌아와 조금씩 바꿔나갔더라면 지금처럼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가장 속상한 게 동기를 잃은 거예요. 1기가 거의 없어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코레일의 직고용이 맞아요. 근데 현재 상황을 감안하면, 처우 개선을 위해 작은 것부터 바꿔야 할 것 같아요. 2014년 우리 꿈은 인간답게 사는 거예요. 근로기준법에 따라 잠자면서 일하고 싶어요.

2006년 여승무원을 향했던 외주화 타깃이 이번엔 정규직을 ‘정조준’하고 있다. 수서발 KTX주식회사 인력 운영 방안에 따르면 “코레일 정규직의 노동조건을 코레일관광개발 승무원 기준으로 바꾼다”고 돼 있다. KTX 여승무원 문제가 철도노동자 모두의 문제가 된 것이다. KTX 여승무원은, 철도의 오래된 미래다.

글 김은성 객원기자 frame4@hanmail.net

1 2004년 KTX 개통 당시 여승무원들은 철도공사 자회사인 홍익회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공사와 정부는 채용 당시 “1년 정도 있으면 정규직이 돼 공무원 수준의 후생복지와 정년을 보장받는다”고 밝혔다. 2006년 공사는 KTX 승무 업무를 자회사인 코레일관광개발로 외주화했다. 승무원들은 “약속대로 진짜 사용자인 코레일이 직접 채용해야 한다”며 이적을 거부했다. 공사가 채용을 주도하고 업무 지시·지휘 감독을 수행했다는 게 승무원들의 입장이다. 해고된 승무원들이 공사를 상대로 낸 2건의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 대해 서울고법이 엇갈린 판결을 내려, 대법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2 국가와 공사는 한국이 세계 5번째 고속철도 개통국이 됐다며 화려한 경력의 여승무원들을 앞세워 ‘KTX 개통’을 적극 홍보했다. 경력 있는 항공사 승무원들도 대거 몰리는 등 경쟁률(136:1)도 높았다. 당시 여대생들은 ‘꿈의 직업’으로 KTX 승무원을 꼽았다.

3 노무현 정부 시절 공공기관 비정규직 대책은 두 가지였다. △상시근로 2년 이상일 경우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핵심 업무와 비핵심 업무로 나눠 비핵심 업무는 외주화를 추진했다. 외주화는 ‘여승무원 사례’처럼 위법적인 간접고용을 양산했다.

4 코레일관광개발은 2011년 철도공사 열차팀장과 동일한 월 165시간의 승무원 근무시간을 174시간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했다.

5 코레일과 다른 회사 소속이므로 열차팀장이 수행하는 안전업무를 같이 맡으면 본사의 지휘·감독 아래 놓여 불법파견이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업무를 철저히 나누다보니 열차팀장 1명만 철도 안전업무를 담당하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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