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3:37 수정 : 2014.03.04 18:43

회계 조작에 의한 불법 해고가 2심 법원에 의해 인정되면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이들은 1723일 동안 ‘몸’으로 투쟁하며 동료 24명을 잃었지만, 이들의 싸움은 ‘수’로 판가름날 수밖에 없다. 지난 2월14일 쌍용자동차 경기도 평택공장 정문에서 해고노동자들이 해고통지서를 찢어 허공으로 던지고 있다.한겨레 박승화
“피고가 2009년 6월8일 원고들에게 한 해고는 모두 무효임을 확인한다.”

1723일을 기다려온 말은 낭독되는 데 5초가 걸렸다. 5초는 1723일의 첨예한 집중과 극도의 응축이었다. 판결문 뒷부분은 훨씬 길었지만 온전한 문장으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장 문을 안에서 걸어잠그고 목마름과 배고픔, 폭염에 악취까지 견디며 한 줌 인간성을 가불해야 했던 77일, 공장보다 훨씬 거대한 감옥인 바깥세상에 갇혀 비바람을 뚫고 쉰 목청을 쥐어짜야 했던 1646일. 그사이 차곡차곡 쌓인 영정 24위는 몇 번이나 짓밟혀 청소차에 실려갔던가.

2014년 2월7일, 서울고법은 2009년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정리해고가 ‘회계 조작’에 따른 것이라며 ‘해고 무효’를 선고했다.

‘수’는 누구를 위한 누구의 언어인가

“끝끝내 숫자로 드러난 쌍용차 정리해고의 진실. 되찾은 회계장부 숫자는 제자리를 찾았지만 24란 숫자를 잃은 후였다. 숫자가 드러나기까지 허공에서, 거리에서 멱살과 군홧발과 몽둥이에 얼마나 또 맞고 추위에 떨었던가. 진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 길이 심란하다.” -이창근 전국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 페이스북 글 중에서

‘수’는 노동자의 언어가 아니다. 아니, 노동자의 수와 사용자의 수는 다르다. 평화의 시기에 노동자 수는 임금 인상률 몇%, 잔업 몇 시간 같은 것이다. 하지만 평화가 깨진 시기에는 파업 며칠, 해고 며칠, 심지어 자살 몇 명 등이다. 그들에게 사용자의 수는 기우뚱한 비대칭이자 요령부득의 음어일 뿐이다. 회계가 그렇다. 사용자에게 속할 뿐 노동자에게는 결코 속하지 않는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싸움 수단은 ‘몸’이었다. 하지만 결국 ‘수’에서 판가름 났다.

수가 처음부터 얼굴을 내민 건 아니었다. 그것은 숨죽여 웅숭그리고 있었다. 사용자의 회계 조작은 징후로 포착됐으나, 느낌으로 수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해고노동자들은 1심에서 졌다. 유형자산 손상차손(가치 하락에 따른 손실)이 과장됐다고 주장해봤지만, 재판부는 “정리해고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과는 별 연관이 없다”며 배제했다. 40여 년 전 전태일 열사는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순간 쌍용차 노동자들에게는 누가 필요했을까.

이번 2심 소송에는 수에 훤한 전문가 세 사람이 해고노동자 편에 깊숙이 간여했다. 공인회계사 김경율, 변호사 겸 공인회계사 장석우, 그리고 연세대 경영대 교수 한재훈이다. 이들에게 노동자는 누구이고, 수는 무엇이며, 이들 안에서 그 둘은 조화할 수 있을까. 지난 2월14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김 회계사와 장 변호사를 만났다. (한 교수는 인터뷰를 완곡히 사양했다.) 재판 결과가 뜻밖이기라도 한 걸까. 두 사람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돼 있었다.

“솔직히 비관적으로 예상했습니다. 판결 전날까지도 재판부가 계속 조정을 시도했는데, 조정안이 회사 쪽 안에 가까웠으니까요. 더구나 재판 과정에서 우리 쪽 얘기를 줄곧 귀담아들어놓고도 끝까지 조정을 시도하니, 재판부가 판결로는 우리 뜻을 받아들여주기 어렵다고 보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장 변호사에게 2심 승소는 대반전이었다. 김 회계사에게는 달랐다.

“여러 사람들이 진다 진다 하는데, 참 이상하죠. 저는 진다는 생각 안 해봤거든요. 몇 달 전부터 경제·경영 쪽 교수들, 회계사들이 ‘아직도 쌍용차 (법정 싸움) 하고 있냐, 적당히 하고 빠져나와라’ 하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이기겠다 싶더라고요. 술 마시다가도 생각나면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곤 했어요. ‘쉽게 안 질 거다’라고.”

차가운 수를 대면하는 뜨거운 피

장 변호사는 변호인단에서 회계 위주의 소송을 진행했고, 김 회계사와 한 교수는 소송의 회계적 논거를 찾아 제공했다. 수와 법을 함께 보는 이와 오로지 수만 보는 이의 직감은 엇갈렸다. 어떤 산술로 증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수만 보는 이의 직감이 적중했다. 장 변호사의 직감은 다수의 것에다, 정세까지 두루 종합한 보편의 것이었다. 김 회계사와 한 교수의 직감은 소수의 것이었는데, 그들이 기댄 거라곤 ‘수’ 말고 없었다. 글쎄, 그거 말고는 없었을까.

“아니요. 회사 쪽 손을 들어주는 특별감정인 감정보고서가 재판부에 제출되고 나서 분위기가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도 김 회계사와 한 교수는 감정보고서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지적했습니다. 판결이 나고서 재판부의 판단 요건을 보니 두 분이 제기한 핵심들이 다 받아들여졌더군요. 참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 변호사는 “두 분의 긍정적 에너지와 열정이 재판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긍정적 에너지라…, 열정이라….” 김 회계사는 “그러고 보니 한 교수와 만나서 쌍용차 문제를 얘기하다보면 둘 다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흥분하곤 했던 것 같다”며 크게 웃었다. 수는 무색무취하고 차갑지만 그 수를 다루는 건 사람이고, 그 사람들 몸속에는 피가 흐른다. 수를 만지는 사람들의 몸속을 흐르는 피의 성분과 형질은 남다른 데가 있을지 모른다.

“글쎄요. 재판 끝나고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봤습니다. 내가 정의를 생각한 건가, 아니면 노동자들의 아픈 현실을 생각한 건가?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저는 숫자가 잘못된 것에 가장 분노한 것 같습니다.”(김 회계사)

“회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감정 아닐까요. 분노하지 않는 게 문제지요. 우리 법원은 기업이 회생 절차를 신청하면 재무제표에서 분식이 빤히 보이는데도 ‘어, 분식이네’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신청을 받아주고 따로 처벌하지도 않습니다.”(장 변호사)

수를 다루는 사람의 피가 차를 만드는 노동자의 그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를 다루는 사람들끼리는 피가 같다고 할 수도 없다. 수를 다루는 이들의 피는 제가끔의 피다. 다만 그들의 피는 수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의해 유형화될 것이다. 특이한 게 있다면, 무색무취의 차가운 수에 색소와 향료를 입히고 열을 가해 조리(분식)하는 이의 피는 차갑고, 그것을 식히고 색깔도 냄새도 없는 수의 원형으로 되돌려놓으려는 이의 피는 오히려 뜨겁다는 것이다.

장 변호사는 수긍하지 않았다. “저는 지극히 차분한 성격입니다. 평범한 회계사에 평범한 변호사고요. 수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거 좋아하고요. 안 맞으면 화가 나고. 분식회계 보면 특히….” 그는 수를 다루는 이의 보편 윤리를 얘기하는 듯했지만, 보편과 평균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수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화를 내는 대신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바꾸고, 분식회계를 보면서 그 화장술에 분노하는 이보다 감탄하는 이가 더 많다면, 그도 확실히 ‘냉혈’과는 거리가 먼 인물일 터이다.

발견,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세 사람이 소송에 발을 담그는 시기와 과정은 각자 달랐다. 가장 먼저 간여한 이는 김 회계사였다. 1심 소송이 진행될 당시였다. 해고노동자들이 서류 뭉치를 들고 찾아왔다. 안진회계법인의 감사 보고서와 삼정회계법인의 경영 정상화 방안 검토 보고서였다. 살펴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경영 정상화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실사 과정을 거치면 감사 보고서의 장부가액이 깎이기 마련인데, 거꾸로 늘어나 있었다. 분식회계에 혐의를 두고 자료를 만들어줬다.

분식회계라 해도 이런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분식회계(粉飾會計). 말 그대로 ‘화장발’ 회계다. 기업이 재정 상태나 경영 실적을 실제보다 좋아 보이게 하려고 자산이나 이익을 부풀려 계산하는 것이다. 못생겨 보이게 하는 화장은 특수한 목적을 겨냥한 것이다. 회계상 기업의 재정이나 실적을 부러 망가뜨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조조정을 거쳐 매각을 노리는 경우다. 이른바 ‘먹튀 자본’이 애용한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팔 때 써먹은 방법도 이것이었다.

수로 부리는 농간을 입증할 수 있는 것 역시 ‘수’ 말고는 없다. 그러나 1심에서 수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김 회계사의 역할도 해고노동자들에게 한 차례 자료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일찌감치 끝나고, 재판 과정에서는 비켜서 있었다. 그가 소송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2심 소송이 시작되고 난 지난해 2월부터였다. 이번에도 시작은 서류 더미였다.

“해고노동자 한 분이 뭘 들고 있어서 물어보니 1심 재판 때 회사 쪽에서 제출한 감사 조서래요. 회계사에게 감사 조서는 권투에서 상대가 가드를 내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감사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의 온갖 숫자가 들어 있거든요. 직업이 직업인지라 당연히 관심이 갔지요. 줘보라고 했더니 이미 다른 회계사들이 다 봤다는 거예요. 그래도 일단 달라고 했습니다. 살펴봤는데 개판이었어요. 마치 쐐기문자 같았다고 할까. 레퍼런스(조서연결번호)도 없는 파편들뿐이었어요.”

그러나 흩어진 것에는 흩어지기 전의 잔상이 반드시 남는다. 아무리 파편적인 수라고 해도 단서는 그 수 안에 있을 것이었다. 보이는 것을 의심해야 한다.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수가 하는 거짓말, 아니 수로 위장된 거짓말을 찾아내는 건 매직아이의 숨은 그림이 순간 눈에 포착되는 현상과 경험적으로 비슷하다. 걷어낼 것을 걷어내면 가지런히 할 것들이 직관으로 보이지만, 직관으로 나아가는 힘은 근면함에서 온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이치다.

“수없이 장부를 넘기고 또 넘겼습니다. 그것은 계산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수의 궤적과 논리의 흐름을 추적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온몸에 짜르르 하고 전율이 오더군요. 제가 봐도 저는 뛰어난 회계사가 절대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신 제게 ‘똘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 똘기가 찾아낸 것 같아요. 제정신으로 쿨하게 했으면 오히려 못 찾았을지도 모르지요, 하하.”

분식, 1차엔 무식하게 2차엔 교묘하게

완성차 제조사의 유형자산은 전용자산, 타 차종 공유자산, 공용자산으로 나뉜다. 전용자산은 1개 차종 생산에만 쓰는 자산이고, 타 차종 공유자산은 2개 차종 이상 생산에, 공용자산은 모든 차종 생산에 쓰는 자산이다. 특정 차종의 생산을 단종하려면 전용자산은 장부가의 23%로 매각하는 것으로 회계 처리한다. 타 차종 공유자산은 생산에 계속 쓰이기 때문에 100%를 인정한다. 공용자산이야 말할 것도 없이 100%다. 그런데 처음엔 100%로 잡혀 있던 공용자산이 어느 단계부터 항목 자체가 통째로 사라졌다. 유형자산 손상차손 규모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2심 재판부는 5176억원이라고 판결했다.)

그걸 들고 의기양양 금융감독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우린 그런 자료는 처음 본다”면서 전혀 다른 자료를 내밀었다. 금감원의 문서 수·발신 내역을 찾아봤다. 쌍용차의 감사 조서가 두 차례 오간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 자료’를 못 본 것이 아니라 처음 받은 감사 조서를 감리해보니 수가 너무 안 맞아 되돌려보내고 다시 받은 것이었다. 더구나 1심 재판은 기본도 갖춰지지 않은 ‘그런 자료’만 놓고 진행돼 선고까지 났다. 금감원이 처벌 대신 수정을 요구해 더 ‘그럴싸해진’ 감사 조서는 2심 재판부에 이미 제출돼 있었다. 달라진 건 비용을 정교하게 분산한 것뿐이었다.

2심 재판부에 제출된 조서에는 공용자산을 사라지게 하는 대신 현금지출 고정비로 분식의 흔적이 옮겨져 있었다. 차를 생산하는 데는 비용이 들어간다. 현금이 유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차를 생산해서 팔면 현금이 유입된다. 분식회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뤄졌다. 차를 생산해서 파는데 현금 유출과 유입이 맞지 않았다. 김 회계사는 이 문제가 쌍용차 회계 조작의 멱통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풀어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영학 교수들에게 설명하는 데도 2시간씩 걸렸다. 그러니 소송을 대리하는 변호사는 물론 재판부를 이해시키는 것도 난감한 노릇이었다.

김 회계사는 회계 문제를 홀로 감당하며 매일 날밤을 새웠다. 힘들 때마다 카톡으로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어느 날 대학 친구인 한재훈 교수가 지나가듯 반응했다. “내 연구실로 자료 들고 와봐라.” 학부 때 철학을 전공한 두 사람 모두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김 회계사는 졸업만 하면 어디든 취업할 수 있던 시절, 학생운동과 위장취업 등으로 학점 관리를 못해 기업에 입사원서조차 낼 수 없었다. 숫제 “결혼을 위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회계사가 됐다. 한 교수는 2학년 때 홀연 미국으로 떠나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현지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2007년 귀국했다.

두 친구는 머리를 맞댔다. 김 회계사도 구차종들은 예상 판매 대수가 지나치게 적게 잡혀 있거나 단종하는 것으로 돼 있고 신차종 매출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현금지출 고정비의 문제로 집요하게 풀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달걀을 세우듯 한 교수는 문제 설정을 바꿨다. 신차종 문제였다. 무슨 뜻일까? 장 변호사가 수에 어두운 기자에게 설명했다.

“‘계속기업의 가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회계의 근간이지요. 간단히 말해, 기업은 계속기업 아니면 청산(해야 할) 기업, 둘 중 하나입니다. 기업 회생 절차는 당연히 계속기업의 가정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계속기업은 제품을 생산해야 합니다. 완성차 제조사라면 차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쌍용차 감사 조서 회계를 분석해보면 구차종을 단종하는데 신차종은 만들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계속기업의 가정에 위배되는 거지요.”

전문 분야의 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 회계사는 이 문제를 회계 문제로(만) 봤고, 한 교수는 자신의 전공인 재무관리의 문제로 본 것이다. 김 회계사는 “나는 주야장천 안다리를 걸고 있는데, 한 교수가 ‘그러지 말고 밭다리를 걸어봐’ 한 것”이라고 비유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전문가에게 설명하는 데도 2시간씩 걸리던 것이 비전문가를 이해시키는 데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김 회계사가 소송 대책 모임에 한 교수의 참여 가능성을 타진했고, 그 뒤 한 교수는 거의 모든 회의와 공판에 열성적으로 참석했다. 지난해 11월의 일이었다.

감정 조서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던 특별감정인에 대한 1차 심문이 시작됐다. 해고노동자 쪽 변호인이 물었다. “신차종에 현금지출 고정비가 배부됐습니까?” 특별감정인은 “이 자리에서 처음 들어본다”고 답했다. 김 회계사는 방청석에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한상균 전 쌍용차지부장의 얼굴은 납빛이었다. 특별감정인의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재판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본 듯했다. 변호인들도 그의 허점을 되받아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재판이 끝나고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회계사이면서 변호사인 사람 누구 없어?”

21세기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

장 변호사는 원래 삼정회계법인 소속 회계사였다. 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컨설팅을 했다. 당연히 노동 문제까지 포함돼야 하는데 아는 게 많지 않았다. 노무사 시험 공부를 했으나 떨어졌다. 직장생활과 시험공부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마침 로스쿨 제도가 도입됐다. 노동 전문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스쿨에 입학했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노동 관련 소송을 많이 하는 법무법인 ‘시민’에 지원해 들어갔다. 과거 자신이 소속됐던 회계법인이 쌍용차 정리해고에 연관된 곳이라는 부채감을 안고 있었지만, ‘시민’에는 이미 쌍용차 해고노동자 소송에 참여하는 변호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연락이 왔다. 12월 중순이었다. 수에 훤한 전문가 3인조가 구성됐다. 특별감정인 2차 심문일부터 재판의 프레임은 완전히 신차종 문제로 넘어갔다. 길고 지난하기만 했던 2심 재판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새해가 밝았다. 수를 붙들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한 셈이었다. 그러나 누구는 승리를 확신했고, 다른 누구는 확신하지 못했다. 마침내 결과는 나왔다. 아직 3심이 남았지만 이번 재판은 정리해고와 사법 절차에서 기념비적 사건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자본이 정리해고 과정에서 어떻게 수의 놀음을 하는지 드러났고, 그것에 맞서기 위해서도 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장 변호사는 “수는 정직하다. 물론 조작된 수는 정직하지 않지만, 제대로 된 수는 무엇이든 정직하게 보여준다”며 “3심 결과를 예단해서는 안 되지만, 이제 나도 두 분과 같이 있으면 질 것 같지 않다”고 낙관했다. 김 회계사는 “돌아가신 스물네 분 노동자들에게는 이미 너무 늦었지만, 지금까지 꺾이지 않고 싸워온 수많은 노동자분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노력도 빛이 바래지 않은 것 같다”며 “중요한 건 수에 대한 전문성이 아니라 그 수를 통해 사회를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2심 재판장은 이런 말로 재판을 마쳤다. “마지막 인내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를 바란다.” 노동자에게 이들은 누구이고, 또 수는 무엇일까.

글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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