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7:23 수정 : 2014.02.12 14:15

정보기술(IT) 시대의 천재들은 대개 살아서 거부가 되고 죽어서도 전설로 남지만, 드물게 에런 스워츠는 정보인권 운동가로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정치권력과 자본의 독재에 항거할 수 있는 영감과 용기를 주었다. 2012년 ‘인터넷 해적행위 방지법’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연설하는 스워츠의 모습.
“바야흐로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현행법 테두리 안에 가둬두려는 세력과 한바탕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생각해보자.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동영상을 내려받는 것은 비디오대여점에서 테이프를 훔치는 것과 마찬가진가? 아니면 친구한테서 영화 테이프를 빌려 보는 것과 비슷한가? 특정 웹페이지에 접속해 계속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는 것은 평화적인 연좌농성에 가까운가? 아니면 가게 유리창에 벽돌을 집어던지는 것처럼 폭력적인 행동인가? (…) 새로운 기술이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되레 그간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누려온 가장 근본적인 권리까지 침해할 수 있다.”(2012년 5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접속의 자유 2012’ 행사 기조연설 중에서)

‘스워츠의 이름으로’ 인터넷 파업

2012년 1월18일 미국에서 인터넷이 ‘파업’에 들어갔다. 포털의 대명사 구글을 비롯해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소셜미디어 레디트와 텀블러 등 수많은 인기 사이트가 일시 폐쇄됐다. 온라인에서 ‘가상 시위’가 벌어진 게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미래를 위한 투쟁’이란 단체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이날 ‘온라인 파업’에는 11만5천여 웹사이트가 동참했다.

목적은 하나였다. 이른바 ‘인터넷 해적행위 방지법’(SOPA)으로 불리는 ‘온라인 저작권 침해 금지 법안’의 미 의회 통과를 막기 위해서다. 이 법안은 저작권 침해 가능성이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폐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뼈대였다. 저작권 침해를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서 인터넷에 재갈을 물릴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파업이 가상공간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었다. 미국 전역에서 시민·인권단체가 오프라인 시위에 나섰다. 정치권이 무시할 수 있는 ‘압박’ 수위를 넘어섰다. 결국 미 의회는 SOPA 입법을 포기했다. ‘인터넷 자유의 날’(1월18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2주년을 맞은 올해, 미국에서 정보인권 운동이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지난 1년 새 벌어진 두 사건 때문이다.

지난해 6월5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법원의 영장을 받아 수백만 미국인들의 전화 통화 기록을 무차별적으로 수집했다고 폭로했다.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다. NSA의 요구에 따라 전화 가입자의 정보를 통째로 내준 업체는 미국 최대 규모의 정보·통신업체 버라이즌이었다.

지난 1월14일 미국 워싱턴DC 연방 순회항소법원은 버라이즌이 연방통신위원회(FCC)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망 중립성 규정은 인터넷망 사업자들의 네트워크 관리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법에 위반된다”고 판결했다. ‘망 중립성’이란 인터넷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내용이나 유형을 따지지 않고, 이를 생성하거나 소비하는 주체를 차별 없이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판결이 미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망 사업자는 영상이나 음악 등 트래픽 과부하를 일으키는 데이터를 제공하는 콘텐츠 업체에 요금을 더 부과할 수 있다. 누리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에 장벽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겉보기엔 다르지만, 두 사건의 뿌리는 하나로 연결된다. 우선 인터넷 검열과 사생활 침해, 정보접근권 차단 등 ‘정보인권 유린 행위’란 점이 같다. 거대 민간기업이 주요 행위자로 등장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2012년 SOPA 투쟁을 주도했던 정보인권 운동가 에런 스워츠의 삶에 새삼 눈길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에런 스워츠는 1986년 11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유대계인 부친 로버트 스워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대표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와 인터넷을 장난감 삼아 성장했다. 영민했던 스워츠는 13살 때 비영리 웹사이트 개설 경진대회에서 입상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부상으로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견학 기회를 얻은 그는, 그곳에서 ‘월드와이드웹’을 만든 팀 버너스리를 비롯한 ‘인터넷의 아버지들’과 처음 만났다.

IT 기업가서 정보인권 운동가로

‘리얼리 심플 신디케이션’(RSS)이란 게 있다. 말 그대로 정말 간단하게, 인터넷에서 떠도는 수많은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이다. 아침마다 집 앞으로 배달되는 종이신문을 떠올리면 쉽겠다. 주요 언론사의 기사와 평소 즐겨 찾는 블로거의 글이나 음성·영상으로 이뤄진 각종 팟캐스트 파일까지, 새로 만들어져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 가운데 원하는 것을 골라 ‘구독’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RSS는 19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핵심은, 인터넷에 올라 있는 막대한 양의 정보를 좀더 쉽게, 좀더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다. 스워츠는 14살 때부터 RSS 초기 버전 구성 작업에 실무 기술진으로 참여했다. 그의 천부적인 프로그래밍 능력을 눈여겨본 인사들의 추천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고교 졸업과 함께 스탠퍼드대학에 진학한 그는 1년 남짓 만에 학업을 중단했다. 인터넷의 기준을 마련하는 국제기구인 ‘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W3C)에서 자문 활동을 한 것도 이미 오래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초창기 멤버이기도 했으며, ‘카피레프트’ 운동의 상징 격인 ‘크리에이티브 코먼스’(CC)의 체계를 세우는 작업에도 동참했을 정도다. 학교가 따분했을 게다.

자퇴는 창업으로 이어졌다. 스워츠는 ‘인포가미’란 소프트웨어 업체를 세웠다. 이 회사는 몇 년 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소셜미디어 업체 가운데 하나인 레디트와 합쳐졌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대 최첨단 업체의 잘나가는 경영진이 된 게다. 그럼에도 이 무렵, 스워츠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관심사가 전혀 다른 곳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스워츠가 2008년 7월 이탈리아에서 발표한 ‘오픈액세스 게릴라 선언문’을 보면, 그의 ‘지향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오픈액세스’는 법적·경제적·기술적 장벽 없이 누구라도 자유롭게 무료로 접근할 수 있도록 저작물 생산자와 이용자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뜻한다.

“정보는 권력이다. 다른 모든 권력과 마찬가지로, 정보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이를 독점하려고 한다. 인류가 쌓아온 모든 과학·문화적 유산, 수세기에 걸쳐 책과 학술지를 통해 공개된 무수한 정보가 디지털화했다. 그리고 극소수 민간기업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들은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인류의 가장 중요한 지적 성취를 구경하고 싶다면, 그들에게 막대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 반격에 나서야 한다. 미국의 대학생과 도서관 사서, 과학자들은 정보접근권이라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특권을 공유해야 한다. (…) 정보 접근이 차단된 이들도 그저 물러설 순 없다. 갇힌 정보를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공유하자. 불의한 법을 따르는 게 정의는 아니다. 불복종의 위대한 전통을 따라야 한다. 정보는 공공의 자산이다. 소수가 독점해선 안 된다. 우리 모두 오픈액세스를 위한 게릴라 운동에 나서자.”

지식해방 행동한 ‘오픈액세스’

‘선언문’ 발표에 앞서, 스워츠는 이미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2006년 미 의회도서관의 모든 서지 자료를 확보해, 인터넷 도서관인 ‘오픈 라이브러리’에 공개했다. 정부 자료는 저작권의 대상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8년엔 미 연방법원이 보유하고 있던 디지털 재판 기록 가운데 약 20%에 해당하는 막대한 정보를 내려받아 공개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들 자료는 모두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2010년 스워츠는 하버드대학에 딸린 ‘에드먼드 샤프라 윤리학센터’로 삶의 무대를 옮긴다. 잘나가는 IT 기업인에서 본격적인 ‘정보인권 운동가’로 탈바꿈한 게다. 이 무렵 미국 사회에선 SOPA 도입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입법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서 미 전역을 누볐다.

그 무렵 스워츠는 또 다른 ‘실천’에 골몰하고 있었다. 학술지 전문 데이터베이스인 ‘저널스토어’(JSTOR)에 접속해 약 400만 건에 이르는 논문을 내려받았다. 이른바 ‘지식해방운동’을 직접 실행에 옮긴 셈이다. JSTOR는 비영리단체이지만, 일반인의 접근은 쉽지 않다. 대신 주요 대학과 연구기관은 일정한 약정금을 내면 무제한 접근이 가능한 계정을 얻을 수 있다. 그는 2010년 10월 일리노이주립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미국 명문대 학생이 된 덕분에 여러분 모두 온갖 종류의 학술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제3세계 대학생들은 그렇지 못하다. 인류의 유산이라 할 막대한 학술적 연구 성과에 대한 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셈이다. 인류 모두가 공유해야 할 소중한 정보가 기업의 이윤 추구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현실을 바꿔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운동이 바로 ‘접속의 자유’다.”

스워츠가 JSTOR의 정보를 내려받기 위해 택한 방식은 기발했다. 대학 교정이면 어디서든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할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해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교정 여러 곳에 노트북 컴퓨터를 가져다놓고, 최대한 많은 양의 정보를 한꺼번에 내려받았다. ‘이상징후’를 발견한 대학 당국과 JSTOR 쪽은 이를 신고했다. 스워츠는 이내 해킹과 컴퓨터 사기 등의 혐의로 체포돼, 10만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다.

대학 연구원 신분인 스워츠는 JSTOR에 저장된 논문을 1편씩 합법적으로 내려받을 수 있었다. 한꺼번에 400만 건의 논문을 내려받으면 합법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인가? 그가 석방된 직후 JSTOR 쪽은 성명을 내어 “어떤 민사상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미 연방검찰은 기소를 밀어붙였다. 공소장에는 모두 13개 항목의 ‘범죄’가 나열돼 있었다. 유죄가 확정되면 최대 징역 35년형과 벌금 100만달러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였다.

기소에 앞서 검찰 쪽은 유죄를 인정하는 대가로 징역 6개월형으로 감형해줄 수 있다는 이른바 ‘플리바게닝’을 제안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스워츠는 무죄를 주장했다. 그의 집과 서버, 사무실이 여러 차례 압수수색을 당했다. 하드드라이브와 휴대전화, 컴퓨터와 아이패드, 콤팩트디스크 등은 모조리 압수됐다. 보스턴 연방법원, 케임브리지 지방법원 등에서 줄줄이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그는 모두 12차례나 법정에 출석해 기소 전 심문 절차에 응해야 했다. 스물여섯 꿈 많은 젊은이가 참아내기엔 지나치게 혹독했다.

재판은 2013년 4월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해 1월11일 스워츠는 뉴욕 브루클린의 크라운하이츠 지역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자살이었다. 스워츠의 부모는 성명을 내어 “협박과 기소권 남용으로 점철된 미국 형사사법제도가 애꿎은 죽음을 불렀다. 아들은 정부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흘 뒤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하일랜드파크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팀 버너스리와 ‘크리에이티브 커먼스’의 설계자로 평가받는 인터넷 법률의 권위자 로렌스 레식 하버드대학 교수 등이 참석했다.

그의 1주기를 앞두고 정보·통신 전문 인터넷 매체 <와이어드>는 정보공개법(FOIA) 절차에 따라 스워츠에 대한 미 연방검찰의 기록을 입수해 보도했다. 전체 1만4500여 쪽 가운데 공개가 허용된 자료는 단 104쪽에 그쳤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편집된 채 공개됐지만, 적어도 중요한 사실 하나는 확인했다. 미 연방정부가 스워츠를 ‘요주의 인물’로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오픈액세스 게릴라 선언문’을 내놓은 직후부터였단다.

그의 1주기인 지난 1월11일 해커집단 ‘어노니머스’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 홈페이지를 해킹해 스워츠를 추모하는 글을 남겼다. 같은 날 미 정보인권 단체들의 연대체인 ‘무차별 사찰에 맞선 반격의 날’(thedaywefightback.org)은 성명을 내어 “에런 스워츠의 비극적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SOPA 폐기 투쟁에서 값진 승리를 일궈낸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오는 2월11일을 ‘행동의 날’로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이번엔 특정 법안을 겨냥한 싸움이 아니다. ‘인터넷 파업’을 통해 정보기관의 무차별적 사찰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모아내자는 게다. ‘스워츠의 이름으로’ 말이다.

못다 핀 꽃이 된 게릴라를 위한 추모

지난 1월16일 미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제30회 선덴스영화제가 개막됐다. 브라이언 크내펜버거 감독의 다큐멘터리 <인터넷의 아들: 에런 스워츠 이야기>는 경쟁 부문에 출품됐다. 이 영화는 이른바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제작비를 마련했단다. 인터넷 대안매체 <데모크라시나우>가 공개한 영화의 한 장면에서, 젊은 스워츠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이다. 정부도, 민간기업도 인터넷을 검열할 수 있다. 하지만 민간기업이 정부보다 더 무섭다. 기업은 헌법을 따를 필요도 없고, 선출된 것도 아니고, 유권자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독재를 막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법·제도적 장치가 기업의 독재를 막는 데는 무용지물이다. (…)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헌법적 권리, 당연하게 여기던 그 권리가 헌법적 의무가 없는 사기업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제 기업이 우리가 특정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면 돈을 더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이를 둘러싼 싸움에서 우리가 이겼다. 운이 좋았던 게다. 하지만 언제든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맛볼 수도 있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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