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7:20 수정 : 2014.03.02 14:26

시간의 무게를 가늠해보자. 1초가 60번 모여 1분을 이룬다. 1분을 60번 모으면 1시간이다. 하루는 24개의 1시간으로 채워진다. 그렇게 365번의 24시간이 흐르면 1년이 된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은 3650일로 채워진다. 20년은 7300일이다. 30년은 1만950일, 40년은 1만4600일이다. 긴 세월이다.

‘1만일 클럽’이란 게 있다. 27년과 넉 달하고도 25일이 모여야 1만 일이 된다. 스스로 ‘왕 중의 왕’을 자임했던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는 1969년 9월1일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2011년 8월23일 권좌에서 끌어내려질 때까지, 무려 42년 동안 철권을 휘둘렀다. 그의 집권 기간을 날수로 따지면 1만5300일이 넘는다. 가히 ‘왕 중의 왕’이라 부를 만하다.

1978년 7월 취임한 알리 압둘라 살레 전 예멘 대통령은 국민의 반발에 밀려 2012년 2월 사임할 때까지 33년 7개월을 집권했다. 1만2200여 일을 대통령으로 지낸 게다. 3년 전 ‘카이로의 봄’으로 낙마한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도 30년, 1만950일가량 권세를 누렸다. ‘1만일 클럽’의 전직 회원들이다.

현직도 있다.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적도기니 대통령은 1979년 8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다. 34년 5개월을 넘어선 그의 집권 기간은 날수로 따져 1만2500일을 훌쩍 지났다. 음바소고보다 한 달 늦은 1979년 9월 전임자의 사망과 함께 권좌에 오른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앙골라 대통령도 1만2천 일을 넘기며 권력을 누리고 있다.

이들의 뒤를 1980년 4월 집권한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이 쫓고 있다. 1924년 2월생인 그는 다음달이면 구순에 접어든다. ‘1만일 클럽’의 최고령 회원이다. 카메룬의 폴 비야 대통령도 1982년 11월 취임 이후 지금껏 권좌를 지키고 있다. 1986년 1월 정권을 잡은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비로소 ‘1만일 클럽’ 가입 조건을 맞춘 ‘신입회원’이다.

독재의 상징 ‘1만일 클럽’ 등극

무세베니 대통령보다 꼭 1년 전인 1985년 1월 33살의 나이에 집권한 독재자가 있다. 그의 ‘1만일 기념일’은 벌써 1년 8개월여 전에 지나갔다. 만 29년을 집권했음에도, 여전히 60대 초반이다. 그는 “여든 살까지 정치를 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공언한 바 있다. 카다피의 기록에 감히 도전장을 던진 그는 캄보디아의 총리 훈센이다.

2011년은 ‘1만일 클럽’ 회원들에게 고단한 한 해였다. 그해 2월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진 데 이어, 8월엔 카다피 정권이 막을 내렸다. 끝없는 줄다리기로 시간을 끌던 살레 정권도 이듬해 결국 손을 들어야 했다. ‘아랍의 봄’이 중동을 휩쓸던 그해 6월1일 ‘1만일 클럽’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훈센은 그즈음 이렇게 내뱉은 것으로 전해진다.

“반대세력을 약화시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예 죽여버려야 한다. …누구든 거리에 나가 시위를 벌일 정도로 강하다면, 그 개새끼들을 흠씬 두들겨팬 다음 우리에 가둬버리겠다.”

훈센은 1952년 8월 캄보디아 동부 캄퐁참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훈날이다. 한때 승려 생활을 했던 아버지 훈네앙은 프랑스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승복을 벗어던진 것으로 전해진다. 훈네앙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한 지주 가문이었고, 넉넉히 물려받은 토지 덕분에 훈센도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훈센은 13살 되던 해에 수도 프놈펜에 있는 불교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훈센의 굴곡 많은 이력을 살피려면, 먼저 캄보디아의 역사를 짤막하게라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름난 앙코르와트 사원을 건설한 크메르 왕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9세기 초반 창건한 크메르 왕조는 한때 동남아시아 일대를 호령하던 제국이었다.

600년 넘게 이어지던 크메르 왕조는 15세기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타이·베트남 등 주변국의 속국 신세로 전락해갔다. 19세기 중반 캄보디아가 자발적으로 프랑스의 보호령 아래로 들어간 것도 이웃 나라의 횡포를 피해보려는 발버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에 점령됐던 캄보디아는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프랑스 수중에 넘어갔다. 프랑스는 젊은 왕자 노로돔 시아누크를 왕위에 올렸다. 말 잘 듣는 꼭두각시 노릇을 해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젊은 국왕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11월 독립의 길로 나아갔다.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이 됐다. 시아누크 국왕은 1955년 아예 왕위를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다시 ‘왕자’ 신분이 된 그는 선거를 통해 총리에 올랐다.

냉전이 불을 뿜고 있었다. 인도차이나에도 전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베트남 전쟁 기간에 시아누크는 ‘중립’을 선언했다. 실상은 달랐다. 국내 좌파세력을 탄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지대가 북베트남군의 중요한 보급로 겸 은신처 구실을 하는 걸 적극 나서서 가로막지도 않았다. 미국으로선 시아누크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터다. 미국은 1960년대 중반부터 베트콩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와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시아누크는 노골적으로 ‘반미’ 행보를 이어갔다.

1970년 3월 시아누크는 중국 방문길에 올랐다. 시아누크 정권 아래서 국방장관과 총리를 지낸 론놀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새 군사정부는 북베트남 진영에 즉각 캄보디아를 떠나라고 명했다. 미국은 환호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 입장에선 가장 중요한 보급로가 끊길 상황이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폴포트에게 배운 무자비한 탄압?

훈센이 ‘훈날’이란 옛 이름을 버리고, 나이까지 1살 속여가며 크메르루즈 저항운동에 가담한 것도 이 무렵이다. 훈센의 공식 생일은 1951년 4월4일이다.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즈 반군은 1975년 1월1일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117일 동안 이어진 당시 공세를 론놀 정부는 버텨내지 못했다. 결국 그해 4월17일 론놀 정권이 무너졌다. 크메르루즈 반군이 주도하는 민주캄푸지아 정권이 등장했다. 훈센은 당시 전투에 참가했다가 왼쪽 눈을 잃었다.

크메르루즈 정권은 중국의 마오주의를 모델로 삼았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농촌을 살려야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 캄보디아판 ‘대약진 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도시인들이 농촌으로 대거 강제이주를 당했다. ‘킬링필드’의 서막이었다. 4년 남짓한 크메르루즈 집권 기간에 숨진 이들은 줄잡아 200만 명,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크메르루즈 집권 직후 훈센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민주캄푸지아 동부군 지역 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1977년 내부 숙청 작업이 단행되면서 그는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투항’했다. 크메르루즈는 베트남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해묵은 영토분쟁으로 두 나라는 점차 앙숙이 돼갔다.

베트남에서 훈센은 어엿한 ‘반군 지도자’로 성장했다. 베트남은 이미 캄보디아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9년 1월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루즈 정권이 무너졌고, 캄푸지아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20대 후반의 훈센은 새 공화국의 부총리 겸 외교장관에 발탁됐다. 그는 30대 초반이던 1985년 1월 내각회의를 통해 총리직에 오른다.

집권 초반부터 훈센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반대세력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겨우 집권 두 해를 넘긴 1987년부터 앰네스티 등 인권단체들이 훈센 정권의 광범위한 인권탄압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내놓기 시작했다. 전기충격은 기본이다.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온갖 수법을 동원해 정치범들을 고문했다.

타이 국경지대로 숨어든 크메르루즈 쪽과의 지리한 공방전은 1991년 파리평화협정으로 막을 내렸다. 협정 이행을 위해 대규모 유엔 평화유지군이 캄보디아에 주둔할 때도 훈센은 야권 탄압을 주저하지 않았다. 유엔이 지켜보는 가운데 100명 이상의 야권 인사가 버젓이 살해됐다. 누구도 훈센을 막을 수 없었다.

1993년 치러진 총선에서 훈센의 캄보디아인민당(CPP)은 시아누크의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끈 왕당파 정당 푼신펙에 참패했다. 선선히 물러날 그가 아니었다. 겁박과 회유가 이어졌다. 라나리드 왕자는 제1총리를 맡는 조건으로 기이한 ‘공동 집권’에 합의했다. 훈센은 제2총리를 맡아 권좌를 지켰다.

쉽지 않은 동거였다. 1997년에 접어들면서, 두 진영 간 파열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라나리드는 크메르루즈 잔존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이미 1980년대 베트남을 등에 업고 훈센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도 두 세력은 연대한 경험이 있다. 푼신펙과 크메르루즈가 힘을 합치면, 캄보디아 정치권의 균형추가 그쪽으로 기울 건 뻔해 보였다.

그 무렵 훈센의 개인 경호부대 요원들이 야권 지도자 삼랭시가 주도한 시위대를 겨냥해 수류탄을 던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16명이 숨지고 150여 명이 다쳤다. 당시 부상자 명단에 미국인 1명도 포함되면서, 미 연방수사국(FBI)이 진상조사에 나섰다. 조사 결과, 범행을 배후조종한 것은 ‘최고위층’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해 7월 훈센은 “노로돔 라나리드가 프놈펜에 불러온 준군사적 무정부 상태를 해소하겠다”며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라나리드는 제1총리직에서 해임됐고, 웅후트가 꼭두각시로 총리 자리에 앉았다. 다시 100여 명의 야권 인사들이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처형됐다. 속옷 차림에 수갑을 차고, 눈은 가려진 채 머리에 총을 맞은 주검이 도처에서 발견됐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듬해인 1998년 만연한 선거 부정 속에 인민당이 다시 제1당에 올랐다. 그제야 훈센은 명목뿐이던 제2총리직을 버리고 다시 통합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수천 명의 성난 시민들이 프놈펜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집트 카이로의 해방구 타흐리르 광장을 닮은 민주광장이 공원 한켠에 마련됐다. 재검표를 하거나 새로 선거를 치르자는 요구가 메아리쳤다. 훈센의 군대가 이내 들이닥쳤다. 시위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당시 ‘프놈펜의 봄’에 지구촌은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언론 통제, 사재 축적… 28년 독재 5년 더

언론은 철저히 통제된 채다. 현지 <바욘TV>는 훈센의 맏딸인 훈마나가 소유하고 있다. <아프사라TV>는 인민당 소속인 사이삼알 환경장관이 운영한다. <마이TV> 등은 중국계인 네악키스멩이 소유하고 있다. 네악키스멩은 이름 앞에 ‘오크나’란 별칭이 붙어 있다.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라는데, 집권층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상징한단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보면, 오크나의 주요 역할은 “총리가 국정 과제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정기적으로 대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훈센의 금고’란 뜻이다.

2003년 7월 총선에서도 인민당은 다시 승리를 거뒀다. 푼신펙은 의석을 더 많이 잃었다. 야권 지도자 삼라인시가 이끈 캄보디아 구국당은 약진했다. 승리는 했지만 단독집권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얻는 데 실패한 인민당은 이듬해 푼신펙과 두 번째 공조 협상에 나섰다. 쿠데타로 축출됐던 노로돔 라나리드는 국회의장에 오르며 다시 한번 훈센의 품에 안겼다. 캄보디아 총리는 어김없이 훈센이었다.

이 무렵, 미국 국무부에서 “훈센의 개인 자산이 5억달러를 넘어섰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 2000년대 들어 캄보디아에선 이른바 ‘경제적 토지양허’가 붐을 이뤘다.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훈센과 그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마구잡이로 팔아넘긴 게다. 이를 위한 법·제도적 정비도 치밀하게 이뤄졌다.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고,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임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캄보디아의 숲과 호수, 해변과 산호섬까지 팔려나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008년 4월26일치에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가량이 외국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 크메르루즈의 학살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던 인구보다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전했다.

지난 10년 세월 동안 캄보디아는 연평균 6%가 넘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섬유·의류·농업·건설·관광 부문에서 외국인 투자도 줄을 이었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운영하는 ‘월드팩트북’을 보면, 캄보디아의 공식 실업률은 단 1%에 그친다. 그럼에도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1490만 인구의 20%를 넘어선다. 이유가 뭘까?

지난 1월3일 프놈펜 남부 지역에 자리한 카나디아 의류공단에서 살풍경이 벌어졌다.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지난해 12월24일부터 파업을 벌이던 노동자들에게 진압경찰이 실탄을 퍼부은 게다. 이 사건으로 파업 노동자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진압작전에는 공수부대까지 동원된 것으로 전해졌다. 파업은 무참히 꺾였다. 의류공장 대부분은 1월6일부터 재가동에 들어갔다.

섬유·의류 산업 전문 계간지 <텍스타일월드아시아>의 지난해 봄호를 보면, 캄보디아에 의류산업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93년이다. 이후 20년 세월 동안 캄보디아 의류산업은 가파른 성장세를 유지해왔다. 이미 2009년에 이르면 캄보디아 국내총생산(GDP)의 16%를 의류산업이 점했고, 총고용의 45%를 떠맡았다. 의류·섬유 제품이 캄보디아 수출의 85%를 차지한다. 지난해에도 캄보디아 의류산업은 50억달러가 넘는 수출고를 올렸다. 전년 대비 22% 늘어난 수치다. 현재 캄보디아에는 약 800개의 의류업체에서 60만 명가량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노동자 10명 가운데 9명은 여성이다.

캄보디아 의류노동자들은 2010년에도 총파업을 단행한 바 있다. 당시 의류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은 월 56달러였다. 정부는 이를 61달러까지 인상하겠다고 밝혔고, 노동자들은 일주일도 안 돼 파업을 풀었다. 지난해 캄보디아 의류노동자들이 받은 최저임금은 월 75달러였다.

이번에 노동자들이 다시 파업에 나선 것은 지난해 12월 중순 캄보디아 노동부가 2014년 최저임금을 오는 4월부터 95달러로 19% 인상한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애초 노동자들은 160달러까지 인상할 것을 요구했다. 1월3일의 유혈극에 앞서 캄보디아 정부는 최저임금을 100달러까지 22% 인상해줄 테니 업무에 복귀하라고 요구했다. 노동조합과 인권단체 연대체인 ‘아시아 기본급 연대’의 자료를 보면, 캄보디아 의류노동자들의 적정 생활임금은 월 283달러다.

의류노동자 파업에 유혈 진압 ‘광풍’

지난해 7월28일 치러진 총선에서 훈센이 이끈 캄보디아 인민당은 48.8%의 지지율로 68석을 얻으며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다. 44.5%를 득표한 구국당은 55석을 거머쥐며 일약 원내 2당에 올랐다. 온갖 선거 부정을 저지르고도 인민당은 앞선 선거 때보다 의석이 22석이나 줄었다. 구국당은 무려 26석을 늘리는 선전을 했다. 훈센의 연정 파트너 격이던 푼신펙은 창당 이래 처음으로 단 1석도 건지지 못하며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선거 직후 인민당과 구국당 모두 승리를 주장했다. 9월7일엔 승려를 포함한 시민들의 참여 속에 구국당 주최로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유엔 차원에서 선거 부정에 대한 진상조사를 벌이고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촉구했다. 당시 이례적으로 2주간 묵묵히 시위대를 지켜본 훈센은 이렇게 선언했다. “총리직 사임은 없다. 재선거도 있을 수 없다. 헌법에 따라 선출된 총리는 바로 나다.”

지난 7개월여, 구국당은 프놈펜의 ‘민주광장’에 자리를 잡고 선거 부정 규탄 집회를 이어왔다. 의류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자, 그곳에서 연대집회를 열기도 했다. 야권과 노동조합의 결합, 훈센 정권으로선 지극히 불길해 보였을 게다.

학살극이 벌어진 직후 프놈펜 시당국은 공공장소에서 10명 이상이 한꺼번에 모이는 것을 집회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히 금지했다.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지난 1월14일치에서 “1월3일의 유혈 사태 이후 노동운동가 23명이 경찰에 체포된 뒤 연락 두절 상태다. 보안 당국은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있지만, 총상까지 입은 이들을 프놈펜에서 약 200km 떨어진 베트남 국경지대 교도소로 끌고 가 가둔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바야흐로 탄압의 광풍이 불어닥칠 조짐이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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