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7:18 수정 : 2014.03.02 14:25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높이 솟아오른 빌딩들 덕분에 오히려 황량해 보이는 도시의 겨울을 가로질러 ‘위로공단’이란 글자가 인쇄된 포스터가 나붙은 사무실에 들어섰다. 따뜻한 제주도에서 올라와 추위에 서툰 듯 몸을 웅크린 귤들이 테이블 사이에 마주 앉은 남자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임흥순 작가는 사무실에서 촬영 막바지에 다다른 <위로공단>을 다듬어가고 있었다. 2010년부터 기획해온 <위로공단>은 구로공단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에게 시선을 맞춘 다큐멘터리다. 점차 현재의 여성노동 문제로까지 이어졌고, 노동을 둘러싼 인식과 감정 혹은 공포를 담아내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2014년 영화제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서울의 중심에서 세상의 그늘을 보다

임흥순은 주변부 감수성으로 성장했고, 실패의 개인사를 써왔다. 그가 작품에서 결과가 아닌 과정과 지향을 중시하고, 여성의 화법을 자신의 방식으로 끌어안은 건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제주 4·3 항쟁을 다룬 자신의 장편 다큐멘터리 <비념> 포스터와 임흥순.
1969년 서울에서 가난한 노동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임흥순 작가는 ‘세상의 주변부 감수성’을 지니고 성장했다. 당시에 살던 곳은 달동네에 가까운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아파트라고 해봐야 4층짜리가 전부였고, 도로보다는 개천과 밭이 많았으며, 아이들은 반딧불을 볼 수 있는 산과 들에서 뛰놀며 하루를 보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가족의 거처는 점점 높은 곳으로, 그리고 점점 좁은 곳으로 옮겨졌다. 오랜 주민들이 하나둘 다른 동네로 떠나갔지만, 떠날 데가 없는 가족은 다시 아래, 즉 지하로 이사했다. 서울에서의 가난한 생활이란 차츰 높이 오르다가 어느 순간에 처음보다 더욱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서예와 미술에 재능이 있는 자신을 발견했으나, 미술은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이 드는 진로였고, 가정 형편 때문에 과외 같은 것을 받아볼 기회는 좀처럼 얻을 수 없었다. 아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도 허다한 동네였다.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임흥순 어린이의 마음속에는 불의를 참을 수 없는 ‘악다구니’ 같은 것이 자라고 있었다.

“한번은 반에서 싸움 잘하는 남자애가 여자애한테 돌을 던지는 모습을 봤죠. 제가 대들었다가 두들겨 맞았고요. 그런데 제가 끝까지 물고 늘어졌어요. 제 얼굴에서 흐르는 피가 그 녀석 얼굴에 떨어지니까 질렸는지 그만두더군요.”

서울의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용산구 후암동에 터를 잡은 임흥순 작가는 자신의 가족과 살아온 환경을 통해 계급과 공간을 바라보게 되었고, 사회 시스템의 불평등 문제에 주목하는 건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그가 임대아파트라는 공간에 관심을 두게 된 과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보통미술잇다’의 이름으로 등촌주공아파트 주민들과 함께한 <만나요, 우리 프로젝트>는 이 시선의 걸음으로 만들어졌다.

“과거에는 가난과 함께 나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난이 고립돼 있지요. 더욱 가난해지고 있는데도 가난이 가려지는 공간을 임대아파트가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의 공동체성에 대한 작업을 해보았는데, 사실 회의적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보다 더욱 어려운 사람들을 꺼려요.”

실수를 속죄하고 과정 속으로

소년 시절의 임흥순 역시 회의와 실패의 역사를 써두었다.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고, 어려운 준비 과정과 낙방 끝에 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교육비가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는 돈을 빌려서라도 아들을 도우려 했으나 아버지는 ‘기술을 배우라’고 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학도가 되고 싶은 꿈을 품었지만 이번에는 대학 진학이 쉽지 않아 군대부터 가야 했다. 심지어 해병대에 지원했는데 그마저도 떨어졌다. 병역을 마치고 26살에 시작한 대학 생활 역시 여의치 않아서 밤 8시부터 자정까지 김치를 배달하고, 주말에는 TV경마장에서 일했으며, 때론 자장면을 배달했다. 회화 작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얻기 힘든 생활이었다. 30대에는 이태원에서 ‘실수를 하면서’ 놀았다. 그때 ‘이태원 실수에 대한 미안함’도 지금의 작품활동에 녹아 있는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속죄의 마음이랄까.

이러한 과정에서 임흥순 작가의 두 가지 방식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 들여다보기’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기준 만들기’이다. 첫 작업은 가족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이어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가난에 직결된 도시인 경기도 성남의 공간과 역사를 탐구하는 공동 작업을 시작해 ‘성남 프로젝트’(1998~1999)와 ‘성남공공미술프로젝트’(2006) 그리고 ‘성남도큐먼트’(2007)로 이어갔다.

자신이 실패의 역사를 적어왔기에 더는 심사와 시험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싶었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얼까 생각해본 결과는 주민(사람)과 함께하는 작업이었으며, ‘커뮤니티 아트’로 발길을 움직였다. 그리고 ‘믹스라이스’(2002~2005)와 ‘보통미술잇다’(2007~2010) 등에서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을 시도했다.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에서 과정과 관계로서의 예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부분들을 찾고 싶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보다는 과정과 지향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내 직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민중도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장점과 재능이 있는데도 발견할 기회를 얻을 수 없지요. 재능은 꼭 기술만이 아닙니다. 감수성과 감정도 재능이고, 마음과 놀기도 재능이죠. 일상 자체가 큰 감동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후암동 주민이지만, 아니 서울의 중심부인 후암동 주민답게 임흥순 작가의 손길은 서울의 변두리 이곳저곳으로 향했다.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했을 때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미술워크숍을 진행했다. 2010년 말부터 2011년 초까지 ‘○○수다스러운’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금천구 기혼여성들의 모임 ‘금천미세스’의 산파 역할을 했고, 평범한 주부들은 예술활동의 주체가 되었다. 이 워크숍에 참가한 19명 중 9명이 스스로 단편영화와 예술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예술가그룹이 되어 2012년 금천예술공장에 작가그룹으로 당당히 입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노동자의 아들, 어머니들의 대변자로

임흥순 작가의 활동에서 두드러지는 관계가 여성인 것은 주변의 여성들, 그러니까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여러 여성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켜보자니 결혼한 여성들의 삶은 참 힘들었지만 또한 지혜로웠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생각이나 화법에는 현명한 면이 있어 보였다. 그래선지 임흥순 작가의 작품들은 과격하게 선동하지 않는다. 용산 참사가 벌어진 뒤의 흔적들을 찾아 전시한 ‘행복으로의 초대’는 흩어져 있던 이미지들과 재개발, 그리고 군부대의 이미지들을 말없이 모아냈다. 제주 4·3 항쟁을 다룬 <비념>조차 관조하고 경청하는 분위기를 품었다. 미술을 전공한 작가의 미학적 기법과 여성의 화법을 자신의 방식으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안으로 삭이는 여성들의 화법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과 자기 이야기를 어렵게 말하는 방법을 닮았습니다. 여성만이 아니라 우리 민중의 현실과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지점을 어떻게 보여주고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물론 나를 위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내가 소중하기에 남도 소중하지요. 그렇게 각자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거지요.”

나의 <비념> 너의 <위로공단>

이태원에서는 미군이 외국군이지만 한때 한국군이 외국군이 되었던 베트남. 그곳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의 개인사를 들여다보며 우리의 ‘아버지들’을 기록한 작업이 <월남에서 온 편지>였다. 이때 참전 군인들을 인터뷰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어른을 인터뷰하면서 꿈 이야기를 들었다. 꿈속에선 잃어버린 다리가 온전히 있었는데 깨고 나서 현실을 마주하니 고통스러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얼마 뒤 임흥순 작가는 거꾸로 자신의 다리가 없어진 꿈을 꾸었다. 깨고 나서 제 다리가 온전히 있는 걸 확인했을 때의 심정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또 다른 ‘나들’이자 아버지인 대상에게 감정이입하고 있었다. 실은 그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물들이 있다. 제주 4·3 항쟁 당시 젊은 나이로 무장대 2대 총사령관이었다가 죽음을 맞은 이덕구와 한진중공업 노조 지회장으로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12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인 끝에 목숨을 끊은 김주익이 그들이다. ‘그들이 곧 나’였다. 이덕구는 <비념>, 김주익은 <위로공단>과 무관하지 않다.

오랜 준비 끝에 2013년에 개봉해 호평받은 <비념> 역시 ‘아는 여성’으로부터 비롯됐다. <비념>의 공동기획자이자 프로듀서인 김민경씨와 그녀의 외할머니 강상희씨의 도움이 컸다. 김민경 프로듀서의 외할아버지이자 강상희 할머니의 남편인 김봉수씨는 노형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4·3의 회오리 속에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이들의 이야기가 전시회 ‘비는 마음-제주 4·3과 숭시’를 낳았고, 첫 장편 다큐멘터리 작품인 <비념>으로 다리를 뻗어갔다.

“<비념>을 본 관객 수는 적었고, 제 입장에서 실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관객 2300명이 2만3천 명의 역할을, 아니 23만 명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무엇’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도 중요하지요. ‘빨리’보다는 ‘어떤 과정’을 밟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비념>을 보는 사람들은 힘들지 몰라도 정작 자신은 편안한 마음으로 임했다. 제주도의 풍광 속으로 들어서며 각자가 조금씩 말을 걸도록 하는 작품이었다. 스스로에게도 전환점이었다. 그전까지는 자신을 위해서이자 예술의 의무와 목적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면, <비념> 이후는 타인을 위한 작업으로 가게 되었고, <위로공단>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마흔 전까지 채우려고 했다면 이제 하나씩 놓아가는 단계에 있다. 어쩌면 다시 처음, 그러니까 태어났을 때로 돌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후암동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임흥순 작가는 역사와 개인, 사회와 계층, 도시와 공간, 그리고 여성에 시선을 두면서 좀처럼 볕을 쬐지 못했던 그늘 아래를 들춰보고 있다. 사회적으로 연약한 사람들,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언어화할 수는 없지만 가치 있는 부분들, 바로 그러한 것을 매개하고 중개하는 역할을 꿈꾸고 있다. 그것이 예술이고, 그것이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라면서.

며칠 뒤, 후암동 아랫마을에서 해방촌을 가로질러 올라 남산을 감싸안고 도는 길에 섰다. 후암동과 용산2가동 그리고 이태원2동의 등줄기를 잇는 길이다. 이태원으로 향하는 동안 낮은 시멘트 지붕들이 염전처럼 펼쳐졌다. 저만치 보이는 그랜드하얏트호텔이 있는 언덕을 넘어서기만 하면 중세의 성채처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저택단지가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슬슬 다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산길의 피로는 퇴근길의 피로와 달리 그다지 싫지 않다.

임흥순 회화를 전공한 임흥순 작가는 장르 구분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활동을 펼쳐왔다.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이주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의 삶을 기록하며 민중 혹은 대중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삼는 작품을 선보였다. 개인전 ‘매기의 추억’(2006), ‘월남에서 온 편지’(2009), ‘행복으로의 초대’(2009) 등을 열었고, 그중 ‘비는 마음-제주 4·3과 숭시’(2011)는 다큐멘터리 <비념>(2013)을 잉태했다.

글·사진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이매진어워드 선정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 노동당 문화예술위원장이다. <결국, 음악> 등의 책을 썼으며, 지난해에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를 펴냈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