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5:00 수정 : 2014.03.02 14:24

소셜 맥거핀에 대한 분석은 그것을 생산하고 확산시키는 주체들(또는 에이전트들)에 대한 분석과 구체적인 사례들에 대한 분석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후자를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이번에 다룰 소재는 사이비 적대의 일종으로, 이른바 ‘김치녀’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사회적 혐오 현상이다. 최근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의 진원지였던 고려대에선 ‘김치녀’에 대한 담론이 한창이다. 수많은 자보들 틈에서 항간에 떠돌던 이른바 ‘된장녀/김치녀 혐오’에 대한 여성들의 반박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아우르는 하나의 담론운동으로 번져갔다.

한국 사회에는 ‘속물적이고 남성의존적인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집단적 언어폭력이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인터넷을 하다보면 ‘된장녀’ ‘보슬아치’ ‘김치녀’ 같은 노골적인 비속어를 누구나 한 번쯤 듣거나 보게 된다. 셋 모두 거의 같은 대상을 비하하는 인터넷 신조어다. 위키백과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비교적 상세한 정의와 설명이 실려 있다.

일베, ‘김치녀’의 유래를 날조하다

김치녀라는 말이 갖고 있는 여러 겹의 뉘앙스와 의미는 이미 된장녀가 선취했던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전적 의미 설명은 된장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음은 ‘된장녀’ 단어의 유래에 대한 위키백과의 정의와 설명.

된장녀는 2000년경에 신설된 한국의 유행어로 비싼 명품을 즐기는 여성들 중, 스스로의 능력으로 소비 활동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애인, 남자, 가족, 타인 등)에게 의존하는 여성들을 풍자한 유행어이다. 2000년에 익명의 네티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이 본래의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의미가 계속 확대재생산되어, 현재는 주로 남성들이 생각하는 모든 부정적인 여성상들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보통 자신의 경제력은 없으면서 부모나 남자친구 등의 지갑에 의존하는 여성을 풍자하는 단어로 쓰인다. 된장녀란 단어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젠장→된장’의 변화를 통해 된장녀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 그리고 똥과 된장을 구별 못한다는 의미에서 된장녀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 그들이 즐겨 들고 다니는 스타벅스 커피를 희화화한 것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다. 2000년 초 익명의 네티즌이 한국 여성들의 허영심을 비난하며 된장녀라는 단어를 썼으며 2004년 12월부터 2005년 4월경 일부 네티즌들이 된장녀에 대한 풍자, 패러디를 여러 건 올리면서 화제가 되었다. -위키백과 ‘된장녀’ 항목(http://ko.wikipedia.org/wiki/된장녀)

2009년 전후 크게 유행한 단어로 ‘보슬아치’도 있다. 여성 생식기의 속칭인 ‘보지’와 관직을 지내는 자를 뜻하는 ‘벼슬아치’를 합친 단어다. 말 그대로 ‘여자인 게 대단한 벼슬인 줄 아는 여자’를 의미한다. 온라인에서는 제법 활발히 쓰였으나 ‘된장녀’와 달리 실생활에서 발화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지간한 남성 쇼비니스트라도 사회 감각이 마비되지 않은 이상 타인을 면전에 두고 이 말을 사용하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치녀가 활발히 쓰이면서 점점 사장되는 단어다.

김치녀는 2014년 1월 현재 보슬아치는 물론이고 된장녀보다 훨씬 많이 쓰이는 단어가 됐다. 김치녀의 유래를 두고 격렬한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많은 여성들이 김치녀를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용어’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일베 유저들이 이런 지적에 대한 반박으로 내놓은 게 바로 ‘김치녀 네이트 판 기원설’이다. 2011년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트 판’의 어느 유저가 키 크고 잘생긴 외국인 남성의 사진들 밑에 ‘길거리에 흔한 유럽 남자’라고 적고 ‘내 옆에는 왜 김치맨인가’라고 푸념하는 글을 게시했는데, 이를 보고 격분한 어떤 남성이 “길거리에 널린 흔한 해외 여자, 나는 왜 김치녀인가”로 패러디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게 ‘정설’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일까? 물론 사실이 아니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고민 Q&A’란에 몇 해 전 올라온 어떤 글을 한번 보자. ‘자기 주제를 알고 나댔으면 좋겠어요’라는 글에서 작성자 ‘Rescue’는 친구의 애인이 초면에 자신의 연봉, 차종, 자택 평수를 물었던 일에 불쾌감을 토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친정오라버니’라는 아이디가 남긴 답이 질문자 채택 답변으로 선정됐다. “그래서 된장녀, 김치녀 소리가 나오고, 말이 생긴 것입니다. (중략) 돈에 환장한 여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질문은 2009년 7월9일 아침 6시56분에 올라왔고 답변은 2시간가량 뒤인 같은 날 아침 8시54분에 올라왔다. 내용과 상관없이 이 사례는 이미 2009년에 김치녀라는 말이 지금 유통되는 ‘바로 그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찾아보면 근거는 끝없이 나올 것이다. ‘김치녀’가 2011년 ‘김치맨’이라는 말을 쓴 여성에 대한 대응에서 시작됐다는 ‘네이트 판 기원설’은 간단히 기각된다. 김치녀라는 말은 네이트 판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며 아마도 일베에서 처음 등장한 말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김치녀라는 말을 가장 빈번하게 쓰는 주체가 일베 유저라는 것, 그리고 한국의 어떤 대형 커뮤니티보다 여성 혐오 현상이 격렬하게 분출되는 공간이 일베라는 사실이다.

여성 혐오는 한국 넷우익의 ‘종특’

일본의 넷우익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을 추적한 르포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는 2013년 6월2일 서울에서 열린 출간기념 공개대담에서 필자와 양국의 넷우익 현상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일본 넷우익에도 여성 혐오 현상이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재일조선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에 대한 혐오 발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처럼 강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른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극우 담론을 보더라도 자국의 젊은 여성에 대한 혐오가 한국만큼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여성 혐오는 한국 넷우익의 ‘종특’(종족특성)인가?

최근 일베 등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가 신분을 숨기고 최소 수백만 건의 댓글 공작, 즉 여론 조작을 조직적으로 벌여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댓글 공작은 대선을 전후한 민감한 정국에서 어떤 정치세력(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에겐 우호적으로, 또 어떤 정치세력(범야권 세력, 민주화운동 세력)에겐 악의적 괴담, 극단적 언어폭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일관했다. 이는 더 이상 일베 등에서 유통되는 우파 담론이 자생적이라 단언하기 어렵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특히 호남 비하와 호남 출신 배제 담론이 국가기관에 의해 더욱 극단적인 방식과 강도로 확대재생산됐을 가능성이 크다(이 글에서는 주제에서 벗어나기에 자세히 논할 수 없지만, 호남에 대한 편견과 배제 담론은 원래 한국 사회에 존재하던 게 아니라 1970년대 이후 활성화됐고, 그 중심에 박정희 정권의 반호남주의 정치 동원이 있었다).

그런데 된장녀/김치녀 혐오 현상의 경우는 좀 달라 보인다. 아무리 봐도 국가기관이 개입할 동기가 별로 없는 사안이다. 그렇다면 김치녀 혐오는 다른 극우 담론에 비해 자생적인 담론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여성 혐오 현상은 2000년대 들어 온라인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금 김치녀 담론에서 갈등하고 적대하는 주체들은 단순히 ‘남성 대 여성’이 아니다. 일부 젊은 여성과 일부 젊은 예비역 남성이다. 이 ‘전선’이 처음 사람들의 눈앞에 가시화된 사건이 2001년 ‘월장 사태’였다. 여자 후배에게 음담패설을 하고 술을 따르게 하는 등 대학 내 군사문화를 비판하는 칼럼이 부산대 여성주의 웹진인 <월장>에 실렸는데, 이 글이 알려지면서 예비역 남성들의 온라인 테러가 시작됐다. 인터넷 게시판에서의 욕설과 성희롱은 기본이고 폰섹스를 요구하거나 편집부원의 신상 정보를 성인 사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온라인의 예비역 남성이 집단 정체성을 과시하게 된 계기도 사실상 그때부터였다. 월장 사태 때는 대립하던 쪽이 여성주의자와 남성 진보주의자였지만, 200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적대 대상은 여성부, 된장녀/김치녀로 이동, 확대됐다.

‘분노의 예비역’

예비역 남성(The Reservists)은 국민개병제도의 산물이자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존재하던 코호트적 집단이다(코호트(Cohort)는 공통점을 지닌 인구학적 집단을 말한다). 하지만 ‘분노한 젊은 예비역 남성’(The Angry Young Resevists)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대두된 온라인 집단의 정체성이자 사회문화적 주체다. 전체 예비역 남성 중 일부를 이루는 이들에게 가장 도드라진 특징이 집단 피해의식이다. ‘국방의 신성한 의무’로 포장되곤 하지만 젊은 시기 2년 가까이를(과거엔 3년이었다!)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는 건 그 자체로 고역이고 희생이다. 그런데 상층 계급의 군역 면제율은 지나치게 높고, ‘그나마 위안이던’ 군가산점마저 논란에 휩싸이다 1999년 위헌 판결로 폐지됐다. 평등에 대한 소박한 감각이 개인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결합하면 금방 피해의식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피해의식은 필연적으로 희생양- 그게 타인이든 자신이든- 을 찾게 돼 있다. 자신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목소리에 적대적인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이들이 ‘젊다’는 사실은 예비역이라는 사실만큼이나 중요하다. ‘젊다’는 것은 아직 사회에 진출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뜻이고, 경제적 자본을 포함해 상징자본을 축적하기에 이른 시기란 의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들은 다른 세대와 비교해도 불안한 주체들이며, 스스로의 생애주기 전체를 놓고 봐도 가장 불안한 상태이기 쉽다. 분노한 젊은 예비역의 또 다른 특성이 여기서 출현한다. 바로 공격성이다. 피해의식이 평등에 대한 감각과 고통스러운 기억의 산물이라면, 공격성은 피해의식과 불안감의 화학적 혼합물이다. 불안감은 어떨 때 커지는가. 자신의 기대지평과 현재 상태의 괴리가 커질 때, 선택의 기회가 줄어들고 있을 때, 사회의 경쟁 압력이 높아질 때다. 그리고 지난 십수 년간 시장의 논리로 사회안전망과 공공 영역을 맹렬하게 해체해온 한국 사회는 젊은 예비역 남성들의 피해의식과 공격성이 배양될 수 있는 거의 완벽한 조건을 제공한다. 이들은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한 반면, 노동조합 같은 사회적 보호장치가 왜 있어야 하는지를 실감해본 적이 없다. 그 결과 노동자 투쟁과 민주주의의 산물이 기득권으로 인식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타인을 단지 자신의 기회를 앗아갈 수 있는 경쟁자로 여기게 된다.

성난 젊은 예비역 남성이 혐오하는 건 차별 또는 불평등이 아니다. 이들이 혐오하는 건 정확히 말해, 차별당해 마땅한 인간이 차별당하지 않고 우대돼야 할 인간이 우대되지 못하는 것이다. 김치녀는 젊은 예비역 남성이 상상 가능한 가장 혐오스런 여성상이었다. 그 반대편에는 ‘개념녀’가 자리잡았다. 실제로 된장녀 담론이 확산되면서 여성들 스스로 자신이 된장녀가 아니라 ‘개념이 장착된 훈녀’임을 애써 주장하는, 이른바 ‘개념녀 인증샷’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된장녀/김치녀 담론의 낙인효과가 강하게 발생했다는 증거다. 된장녀/김치녀 혐오를 부추기는 남성들은 이런 여성들의 반응을 근거 삼아 혐오의 정서를 확대재생산했다.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했던 반유대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고스란히 김치녀 문제에도 적용된다. ‘유대인은 이러이러한 존재들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반박은 ‘안 그런 유대인도 있다’가 아니라 ‘그런 특성은 유대인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김치녀 대 개념녀’라는 구도는 완전한 허구다. 성난 젊은 예비역들이 보여준 사회적 혐오 발언은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한 잘못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자꾸 그 프레임에 말려드는 건 그들 또한 ‘자격에 따라 인간을 차별해도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 갖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일베를 ‘루저의 온상’이라 부르며 벌레 보듯 외면하는 사람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일베적 사고방식’을 내면화한 사람들이 아닐까? ‘일베에 대한 일베적 대응’, 강력한 처벌, 또 다양성 존중을 호소하는 관용의 논리는 임시방편일 수는 있지만 사회적 혐오 현상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혐오의 강화와 확산은 사회적 자원의 획득 기회가 축소되고 있다는 본원적 불안과 공포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 있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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