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4:52 수정 : 2014.03.02 16:15

13년 만에 처음 파업에 들어간 효성노조 울산공장에 경찰이 투입되면서 울산 노동계가 요동쳤다. 같은 화학섬유 업체인 고합 울산, 태광·대한화섬 노조가 연대파업에 들어갔고, 민주노총이 주최한 연대집회에는 1987년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한겨레 자료.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관객 1천만 명을 돌파한 영화 <변호인>에 나온 송강호의 명대사 중 하나다. 법정에서 울분을 토하며 내뱉는 이 한마디에 사람들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었던 시대의 아픔이 전해져온 탓이다. 고문 같은 직접적인 가해는 없어졌지만, 민주주의가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는 갑갑한 현실도 작용한 것 같다. 사람들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다양한 분노가 이 영화를 1천만 명이나 보게 한 힘이 아닐까?

송강호가 우리에게 외쳤던 헌법은 현실에선 자주 힘을 잃는다. 노조에 대해서는 특히 무용지물에 가깝다. 헌법 제33조를 보자.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돼 있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파업하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란 얘기다. 회사와 노조가 원활하게 소통하는 건강한 노사관계는 일터에서 민주주의를 자리잡게 한다. 국민의 생각을 반영해 정부 정책이 만들어지고,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경영이 이뤄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하지만 노조와 민주주의 사이의 간격은 넓다. 민주주의는 지켜야 할 가치로 생각하면서, 그 기본이 되는 노조에 대해서는 불온시하는 이중적 시선이 곳곳에 퍼져 있다. 노동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교육 현실과 경제 중심의 사회구조는 노조를 민주주의 확대가 아니라, 사회 발전의 걸림돌로 생각하게 만든다. 노동자들은 점점 힘을 잃었다. 민주주의도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울산으로 내려가는 KTX에서 2001년 5월부터 113일 동안 진행된 ‘효성 파업’ 자료를 읽으며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노조가 파업 한 번 했을 뿐인데, 이토록 처참한 상황으로 내몰려야 했는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지금도 노동운동을 둘러싼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울산에서 이제 싸울 수 있는 대공장노조는 현대자동차가 거의 유일하다. 현대차 노조마저 점점 보수화되고 있다. 울산은 더 이상 노동운동의 메카가 아니다.

식칼, 야구방망이, 가스총, 전기충격기…

2001년 5월25일 새벽 2시 효성 울산공장. 파업을 시작하고 2시간이 지났다. 효성 노조의 파업은 13년 만에 처음이었다. 말로만 들어온 ‘파업’이 시작됐고, 그 뒤는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세계였다. 공장 안 체육관 근처에서 파업 노동자들과 회사 쪽 관리자들이 마주 섰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벼움 몸싸움이 있었고, 본사에서 내려온 관리직 사원들은 조합원들의 기세에 뒤로 밀렸다. 그때 느닷없이 소화기가 발사되며 “죽여”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뿌연 소화기 분말 사이로 용역경비원 100여 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1m 길이의 곤봉이 들려 있었다. 경비원들은 닥치는 대로 조합원들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소화기를 던졌다. 조합원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노조 사무실까지 밀린 노동자들도 반격을 시작했다. 돌멩이를 던졌고, 쇠파이프를 든 사수대를 긴급히 꾸려 싸웠다. 이날 100여 명의 노동자와 경비원이 다쳤다.

2001년 5월28일 오전 9시. 용역경비들이 여자 기숙사에 들어오면서 노조와 또다시 충돌했다. 서로 자극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교섭도 어렵게 시작한 터였다. 회사는 용역경비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합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내 파업의 힘을 빼려는 노림수였다. 용역경비들은 헬멧과 방패는 물론 쇠파이프, 가스총까지 들고 있었다. 노조도 물러설 수 없었다. 울산 지역 노동자들까지 연대해 큰 충돌이 일어났다. 이들은 또다시 서로 때리고 맞고 전쟁을 치러야 했다. 효성 노동자들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용역경비들과 왜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폭력은 무감각해졌고, 내가 때리지 않으면 맞는 상황이 돼버렸다. 이날도 80여 명이 다쳤고, 공장 밖으로 쫓겨난 건 ‘쪽수’에서 밀린 용역경비들이었다.

용역경비들이 떠난 숙소와 차에서 다양한 무기들이 나왔다. 노동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식칼, 야구방망이, 가스총, 사람을 바로 기절시킬 수 있는 전기충격기, 5m 내에서 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고무탄총까지 있었다. 고무탄총은 경찰들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다. 효성 울산공장에 투입된 용역경비원들의 폭로도 잇따랐다. 용역경비들은 일당 5만~15만원을 받았고 700여 명이 동원됐으며 서울역 노숙자와 철거업체, 10대 청소년, 조직폭력배까지 포함됐다고 밝혔다. 노조가 실물을 입수하지 못했지만, 특수부대 출신의 일부 경비업체 직원들은 흑연 등을 구입해 사제폭탄 50여 개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노조에 붙잡힌 노숙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울산에 왔고, 충돌이 일어날 때 앞줄에 서서 ‘방패막이’가 됐다고 진술했다. 그동안 노사분쟁 현장마다 문제가 됐던 용역경비 업체의 실체가 효성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효성 노동자들이었다.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일했던 직장인데, 이렇게 잔인한 방법까지 사용해야 했을까 분노를 쏟아냈다.

“용역과 충돌하는 상황은 눈알이 뒤집히는 것 같아 살기 위해 정신없이 밀고 갔습니다.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_ㄱ 조합원

“살인무기를 보며 엄청 놀랐습니다. 보고, 만져보고,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해고를 당해도 끝까지

싸운다고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_ㄴ 조합원

“회장 이름에 아직도 치가 떨립니다. 조석래는

망할 겁니다. 죗값은 먼 훗날 받게 될 겁니다.

조석래가 망하는 날까지 나는 지켜볼 겁니다.” _ㄷ 조합원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까지 독하게 구는지…. 앞으로 두고 볼 겁니다.

힘없는 노동자들 눈에 피눈물 보게 하고… 반드시 복수할 겁니다.” _ㄹ 조합원

노조는 당시 조합원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놨다. 노조는 경영진 3명과 용역경비 업체 대표를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고발했지만 처벌은 없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는 지금까지도 노동 현장에서 용역경비들이 회사의 ‘사병’으로 활약하게 만들고 있다. 돈이 되기 때문에 용역경비 업체는 더 많아졌고, 물대포까지 갖춘 업체가 생기는 등 대형화됐다.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유성기업, KEC, SJM 등 최근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파업 현장에서 용역들은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파업 노동자에게 폭력은 일상화됐다.

헌법 위에 힘의 논리

지난 1월13일 오후 울산 남구에 있는 민주노총 울산본부에서 전 효성 노조 사무국장 최만식(48)씨를 만났다. 그는 울산본부 뒤쪽으로 안내했다. 컨테이너로 만든 효성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사무실이다. 효성 노동자들은 이곳을 ‘깡통’이라고 부른다. 2001년 효성에서 해고된 최씨는 2005년부터 민주노총 공공노조 울산본부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도 원직 복직을 요구하는 그에게 효성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효성’이라는 말만 나와도 눈물이 난다는 최씨의 상처는 아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울산 토박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군대를 제대하고 잠시 포장마차를 하다 1990년 동양나일론(현 효성)에 입사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한 부모의 뜻을 따른 것이다. 효성에도 노조가 있었지만 최씨는 불만이 많았다. ‘어용노조’는 아닌데, 파업 문턱에서 번번이 회사와 타협했기 때문이다. 싸우지 않는 동안 노동 현장은 열악해지고 있었다. 효성은 1998년 4개사를 합병하면서 약 2300명의 노동자를 퇴직시켰다. 그 뒤에도 부서 통폐합, 설비 합리화, 공정 외주화 등 수익을 높인다는 이유로 크고 작은 구조조정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업무가 갑자기 바뀌었고, 정규직은 줄고 비정규직은 급속히 늘었다. 울산공장 생산직의 경우 2001년 초 정규직(900여 명)보다 사내하청이 100여 명이나 많았다. 모든 것이 회사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효성만 봐도 ‘힘의 논리’가 중심인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회사가 노조를 대등한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면 싸울 노조는 많지 않다. 노사관계가 ‘힘의 논리’로 가는 순간, 노조는 저항과 복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억눌려 있던 효성에도 저항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제대로 한번 싸워보자’는 마음으로 최씨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선배 박현정씨와 2000년 11월 선거에 나섰다. 박씨는 위원장에 당선됐고, 최씨는 사무국장에 임명됐다. “현안 문제가 터지니까 바로 노사관계가 대립 상태로 변했어요. 그 전까지는 집행부 통제가 가능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회사가 세게 나온 겁니다.” 갈등의 시작은 전환배치 문제였다. 2001년 2월 회사가 기계 설비 변경을 하면서 연신과 정규직에게 방사3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노조는 연신과마저 앞선 코드3과의 경우처럼 부서 전체를 사내하청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라고 봤다. 연신과는 정규직 3분의 1, 사내하청 3분의 1, 외국인 연수생 3분의 1로 돼 있어 가능성이 높았다. 노조는 필요한 인력에 대해 신규 채용을 주장했고 업무 전환을 거부했다. 3~4월에는 반장 교육으로 마찰을 빚었다. 노조는 회사가 조합원인 반장들을 대상으로 ‘반노조’ 교육을 시키고 있다며 강하게 맞섰다. 교육 장소에서 몸싸움까지 일어났다. 업무 전환과 조합원 교육은 노사 협의 사항인데도 회사는 일방적으로 시행했고, 이를 거부한 박현정 위원장 등 7명을 해고했다. 위원장, 수석부위원장, 부위원장은 업무방해 및 폭행행위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노사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집행부는 노조 사무실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며 임금·단체 협약 교섭을 요구했으나 회사는 전혀 응하지 않았다.

파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단순히 노사의 ‘기싸움’이 아니었다. 이미 정부는 2001년 1월 공급 과잉인 화학섬유 업계의 구조조정을 예고한 상태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화학섬유기업 대표들은 ‘자율적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노동자들의 목줄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효성의 경우 1999년 924억원, 2000년 511억원 순이익 등 흑자 기업으로 법률상 정리해고가 어려운 만큼, 신규 채용 없이 사내하청을 늘리는 방향으로 일상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었다. 노조 입장에서는 싸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회사도 강경했다. 2001년 5월6일 새벽, 경찰은 천막에서 자고 있던 박 위원장 등 집행부 3명을 기습적으로 체포했다. 경찰이 체포영장을 집행하러 공장 안으로 들어온 것은 회사의 협조 없이 불가능하다. 1970~80년대 독재정권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집행부 3명은 바로 구속됐다. 노동자들의 구속은 언제나 속전속결이었다. “기가 찼습니다. 지도부를 솎아내면 노조가 무너질 거라고 봤던 거죠. 근데 우리도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최씨는 이때부터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으며 노조를 이끌게 됐다.

대한민국에서 파업한다는 것

우리나라 노동법은 까다로워 파업까지 가는 데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야 한다. 노조는 예전에도 조합원 찬반투표 때 회사의 방해가 심했다며 사흘이던 투표 기간을 일주일로 늘렸다. 하지만 회사의 방해는 상식을 넘어섰다. 노조가 조사한 내용을 보면, 돈까지 주면서 조합원들을 집단으로 휴가 보내고, 개별 면담을 통해 협박하고, 관리자를 동원해 물리적으로 투표를 못하게 했으며, 공장 출입문에는 자물쇠를 달고 창문에도 쇠창살을 대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는 명백한 노동법 위반이지만, 사업주가 처벌받는 사례는 거의 없다. 노조는 2001년 5월22일 투표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고는 불법을 감수하고 5월25일 파업에 들어갔다. “우리가 강성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누구든 그 상황이라면 파업밖에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을 겁니다. 크게 고민하지 않았어요. 투쟁으로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파업이 시작되자, 무시만 하던 회사가 대화에 나섰다. 용역경비 문제, 화학섬유 업계의 구조조정과 맞물리면서 효성 파업이 여론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파업하고 며칠 뒤 회사와 거의 합의까지 갔습니다. 노조가 받아들일 수 있는 안이 나왔습니다. 근데 회사 관계자가 전경련에서 연락이 왔다며 나갔다 오더니, 모든 것을 뒤집었어요. 합의는 물거품이 됐죠.” 최씨는 지금도 그 순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대화가 실패하자, 전경련과 효성은 경찰을 투입해 공장에 있는 노동자들을 해산시켜줄 것을 정부에 강하게 요청했다. 정부는 화답했다. 6월5일 새벽 5시30분 울산공장에 30개 중대 3600여 명의 경찰이 투입된 일명 ‘울산만 작전’으로 12일째 파업농성을 벌이던 조합원들은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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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들어오기 전, 최씨 등 노동자 8명은 공장 안에서 가장 높은 40m 높이의 방사과 옥탑에 올라갔다. “두 가지였어요. 공장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것과 여기서 한 달 견디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봤어요. 조합원들과 잠시 떨어져 있지만 지도부가 공장 안에서 구심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농성자들은 옥탑에 오르는 계단을 산소절단기로 잘라 외부의 진입을 막았다. 스스로 내려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용역경비와 싸우고 경찰에 밀리고 옥탑까지 올라간 이들이 요구한 것은 공장에서 경찰 철수, 구속 노동자 석방, 구조조정 중지, 조건 없는 교섭 재계가 전부다. 이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인가?

효성의 절박한 상황에 울산 노동계가 요동쳤다. 고합울산, 태광·대한화섬 노조가 6월12일 구조조정 중단을 요구하며 연대파업에 들어갔다. 이로써 울산의 화학섬유 업체 3사가 공동파업에 나서게 됐다. 민주노총이 주최한 효성 집회에는 울산에서 1987년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들이 모였고, 투석전에 화염병까지 나올 정도로 투쟁이 격렬했다. 정부는 투쟁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6월12일 저녁 헬기에 특공대까지 투입해 8일째 옥탑에 있던 농성자 8명을 모두 연행했다. “투신 위험도 있는데 저렇게 진압을 하리라고 예상을 못했어요. 잡혔을 때는 조합원들 걱정에 심정적으로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최씨는 구속됐고 감옥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다시 13년, 다시 희망을 보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뺏기는 순간, 시간은 더 이상 노동자들 편이 아니다. 불안이 커지면서 복귀 조합원들이 늘고, 대체인력이 들어가 공장이 조금씩 가동되면 파업 노동자들은 고립되기 마련이다. 효성 노동자들은 울산 복산성당에 모여 어렵게 파업을 이어갔다. 민주노총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7월5일 총파업도 현대자동차노조가 빠지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8월에 지도부는 회사와 직권 조인을 했다. 하지만 다수 조합원들이 반발하자 파업을 이어가다 9월15일, 끝내 복귀를 결정했다. 파업 113일 만이었다. 사실상 노조가 ‘백기’를 든 셈이다. 후폭풍은 컸다. 38명이 해고됐고 마지막까지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300여 명은 모두 징계를 받았다. 파업 한 번에 단일 기업에서 38명을 해고한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노조에 70억원, 파업을 주도했던 15명에게 2억7천만원 등 약 73억원의 손해배상도 판결됐다. 노조 내부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현장은 꽁꽁 얼어붙었고, 회사는 노조를 흔들었다. 2002년 2월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을 탈퇴하고, 위원장 선출도 간선제로 바꿨으며, 감옥에 있던 박현정 위원장을 불신임했다. 노조는 해고자에 대한 생계비 지원조차 해주지 않았다. “파업을 거치면서 효성의 동지적·동료적 관계가 다 무너졌습니다. 참 가슴이 아파요. 잘못은 회사가 했는데, 고통은 왜 노동자들이 받아야 하는 건지….”

노동자들의 손발이 묶인 효성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조석래 회장은 10여 년 동안 8천억원대의 분식회계를 통해 탈세와 횡령, 배임 등 비리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조 회장을 두 차례 소환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에서 기각됐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썩기 마련이다. 정치나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 싸워서 얻은 해방감을 단 하루라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을 지키겠다고 목숨까지 거는 이들은 무모해 보인다.”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씨의 말이다. 2001년 효성 노조의 파업은 실패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효성 노동자들은 당당히 싸워봤고, 지금도 민주노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효성과 함께 남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효성 언양공장에서 민주노조 집행부가 세워졌고, 울산공장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올해는 통상임금이 쟁점이 될 테니 다시 효성 조합원들을 만나봐야죠.”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갈망하는 것이 사람이고 인생이라고 한다. 최만식씨는 한 줄기 빛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효성이 2001년 13년 만에 처음으로 파업에 들어갔듯, 13년 만인 올해 다시 민주노조 깃발이 휘날리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영원한 효성 노조위원장 고 박현정씨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박현정 위원장(왼쪽)과 최만식 사무국장이 노조선거 운동을 하는 모습. 사진=효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여기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박현정씨가 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좀더 살아서 해고된 사람들 복직되고 비정규직 정규직 되고, 이 모든 것 같이 만들어놓고 그렇게 함께하다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박현정씨를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리고 꼭 이루십시오. 동지들이 바라는 세상, 동지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 철탑 위에 병승씨랑 천의봉 동지 두 분도 힘내시고 꼭 승리해서 그렇게 내려오십시오.”

2013년 2월1일 ‘효성노조 박현정 위원장 2주기 추모제’에서 그의 아내 심분희(46)씨가 읽은 편지 내용이다. 분희씨의 바람대로 병승씨와 천의봉 동지(현대자동차 비정규직)는 무사히 내려왔다.

영원한 효성 노조위원장. 사람들은 박 위원장을 그렇게 부른다. 박 위원장은 2011년 2월1일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허망한 죽음 앞에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아파했다. 그의 ‘단짝’인 최만식씨는 충격이 컸던 탓인지 장례식장에서 걷지도 못하고 부축을 받은 채 오열했다. “형제보다 가까웠습니다. 위원장은 바보 같은 사람이에요.”

박 위원장은 2001년 5월 효성 노조 파업이 시작도 하기 전에 구속됐다. 공장 안에서 천막농성을 하던 중 새벽에 갑자기 끌려갔다. 파업, 경찰 투입, 옥탑 농성, 복귀, 민주노총 탈퇴, 자신의 불신임 소식까지 모두 감옥 안에서 들어야 했다. 그 무게감 때문인지, 위원장은 효성이란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꼬박 10년을 해고자로 지냈다. 효성 노조를 말하면서 박 위원장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자신이 버텨야 언젠가 효성 노조가 다시 바로 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울산에서 서울 공덕동 본사를 오고 가며 복직을 외쳤지만 회사는 대화는커녕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매일 똑같은 구호에 매일 똑같은 외면을 받았다. 조합원들의 싸늘한 시선은 세월이 가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2004년엔 서울 본사 상경투쟁으로 또다시 구속됐다. 효성은 해고자 38명 중 지금까지 단 1명도 복직시키지 않았다.

해고자 생활 10년은 모든 게 무너지는 삶이다. 가족 생계는 물론, 마음도 몸도 엉망진창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위원장은 늘 웃었고, 비정규직과 장애인 투쟁에 발 벗고 나섰다. 해고자들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위원장이라, 다른 사업장의 해고자들도 늘 따뜻하게 감쌌다. 해고자들은 버팀목 같은 그의 존재 자체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정작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덜컥 큰 병이라도 걸렸을 때, 가족이나 동지들에게 부담이 되는 게 싫었을 것이다. 해고자들의 삶이 대체로 비슷하다.

지난 1월12일 만난 아내 분희씨는 ‘박현정’의 이름만 나와도 눈물을 흘렸다. 듬직하고 말 없는 남편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효성에 찾아가서 따져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억울하고 짜증나고…, 힘든 생각 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그때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요.”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아들은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다.

효성 해고자들의 안식처인 ‘깡통’(효성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박 위원장은 사진 속이지만 늘 환하게 웃고 있다. 아직도 효성 해고자들은 복직을 꿈꾸고 있다.

글 김소연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기자 dandy@hani.co.kr

■ 참고 문헌

효성총파업자료집모음 <13년 무쟁의를 깨고>(효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박현정 동지 추모사업회 발족식 자료집

‘효성노조 파업에 대한 진실보기’(민주화학섬유연맹)

‘화학섬유업계 구조조정과 노조의 연대파업’(임영국)

‘남편을 대신해 노동자들을 응원합니다’, <울산저널> 2013년 2월4일치 기사

‘효성공장 투입 용역직원 폭로’, <한겨레> 2001년 6월16일치 기사

‘파업현장 장악한 용역깡패’, <한겨레 21> 2001년 6월20일치 기사

‘분규 먹고 자라는 독버섯?’, <시사저널> 2001년 6월28일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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