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1:41 수정 : 2014.03.02 14:21

이남종은 스스로 ‘불’이 되어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광주 망월동 5·18 구묘역에 묻혔다. 지난 1월17일 찾은 그의 무덤 위에는 ‘박근혜 퇴진’이라고 쓰인 만장과 시들어버린 국화꽃들이 재처럼 내려앉아 있다. 재 속에 불씨는 남아 있을까.
이남종. 그의 이름 석 자는 아직도 낯설다.

광주·전남 시민운동을 꿰고 있는 전직 기자가 금남로 노제에 참석해 “생전에 고인을 알고 있었느냐”고 시민단체 지인들에게 물었을 때 다들 “모른다”고 답했다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다.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남총련) 투쟁국장을 지낸 고등학교 같은 반 동창이 그를 기억의 저편에서 쉽게 불러내지 못해서도 아니다. 낯섦은 그가 몸을 불살라 ‘공적’ 공간으로 나왔지만 과거 ‘공적’ 공간에서의 행적을 찾지 못함에 있다. 그의 이름은 대학(조선대) 시절 ‘터앝문학동인회’ 오월시화전 목차에서, 군대 장교 시절(1396부대) 휴가증에 쓰인 행정문서에서만 발견될 뿐이다. 그것이 ‘공적’ 공간에서 찾은 이름 석 자다. 그래서 그에게는 ‘열사’의 삶에서 흔히 발견되는 학생운동 전력도, 노동운동 전력도 없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그가 자살 방법 중에서도 두려움이 가장 큰 분신으로 모든 사람의 두려움을 안고 산화했다.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과 노동의 대가, 우리나라의 경우 약간의 부족함이 느껴진다. 저번에 ○○이와 ○○이하고의 토론이 떠오른다. (중략)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관해 좀더 학습해야겠다. -1991년 7월19일 고인의 일기 중

10살 소년은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는 분재를 위해 돌을 캐러 갈 때 꼭 소년을 데리고 갔다. 바둑도 가르쳐주었다. 말썽꾸러기 형에겐 회초리를 들던 엄한 아버지였지만 소년과는 취미를 나눌 만큼 다정했다. 선생님이던 아버지 탓에 전남 승주(현재 순천)에서 순천, 여수 낭도, 쌍봉 등으로 전근과 함께 이삿짐을 싸야 했다. 초등학교만 네 번 옮기면서 친구들과 정붙일 시간 없이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서였는지 삼형제는 잘 뭉쳤다. 야구를 하며 낙도의 삶을 버텼다. 형은 치고 소년은 던지고 동생은 받았다. 소년이 주로 시간을 보낸 곳은 학교 도서관이었다. 형은 소년이 항상 책을 읽었다고 기억을 더듬는다. 소년의 성적표에 ‘수’와 ‘우’가 쌓여갔다. 여수 낭도에서 살 때였다. 한번은 ‘올 수’를 맞아 잔치를 열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집에는 형과 동생의 상장보다 많은 소년의 상장이 남아 있다.

소년이 중학생일 때 가족은 광주로 왔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낸다. 전라도에서 광주는 서울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아버지만 홀로 낭도에 남아 교편을 잡았다. 비극의 씨앗이었다. 소년이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겨울방학 때, 아버지는 업무차 여수로 나오다 배가 뒤집히는 사고사를 당했다. 많은 생명을 앗아간 사고는 지역 신문에서 비중 있게 다뤄졌다.

‘전교조 합법화 투쟁’으로 학내가 시끄러울 때 소년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소년의 모교는 광주의 어느 고등학교보다 치열한 투쟁을 했다. 학생들은 교장실을 점거했고 끝내 3명의 교사가 해직됐다. 격변이 지나가고 대입 학력고사로 한창 바쁠 시기인 고3 여름방학 때 그는 두 번째 죽음을 겪었다. 함께 물놀이 간 친구를 눈앞에서 잃었다. 소년의 일기를 본 형은 친구 부모가 소년에게 자주 전화해서 괴로워했다고 회고한다. 죽은 친구와 친했던 소년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기억하고픈 친구 부모의 애절한 전화였다. 그의 학창 시절은 비극에 가까웠다.

열사들 옆에, 아버지 옆에 눕다

2014년 1월17일 광주 망월동 5·18 구묘역. 묘비 없이(49재가 끝나고 묘비를 내린다) 위패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무덤에 그는 잠들어 있다. ‘특검 실시, 박근혜 퇴진’이 적힌 만장이 덮인 무덤 위에는 겨울바람에 시들어버린 국화꽃들의 침묵이 내린다. 1987년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고 이한열, 1989년 의문사한 조선대 선배 이철규, 1991년 ‘분신정국’의 도화선이 된 강경대 열사를 비롯해 그의 광주 서강고 선배 택배노동자 박종태, 그가 신입생 때 ‘힘차게 전진하라’고 당부하며 전남대에서 분신한 박승희 열사의 슬픔이 내린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바로 옆 시민묘역에는 26년 전 먼저 생을 달리한 아버지가 아들을 맞이하며 피눈물을 내린다. 그와 아버지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다. 망월동을 뒤로하는 길, 버스도 518번이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흔적을 더듬었던 길. 문득 그도 나도 ‘수인’(囚人)이라 느낀다. 그는 스스로 부모가 물려준 신체에 위해를 가하고 먼저 간, 부모에게 빚을 진 수인이며, 나는 부정의한 사회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그에게 빚을 진 수인이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는 압송차처럼 불편하고 쇠사슬을 몸에 감고 간 그처럼 나 역시 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느낌이었을까. ‘겉으로는 자유여 해방이여 외치면서 속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 있으니….’ 5·18 구묘역에 함께 묻혀 있는 고 김남주 시인의 핏대 오른 시구가 몸을 감싼다. 하지만 그는 잇속만 차리고 있는 국민을 원망하지 않았다. 지극히 겸손하게 ‘공포와 결핍을 가져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인생에 고뇌는 결국 삶의 문제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맞음이 있기 때문이다. -1992년 5월21일 고인의 일기 중

열아홉 청년이 왜 영어과를 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 대입에서 학생들의 취향은 선택사항이었고 학력고사 점수는 필수사항이었다. 청년이 고3 진학실에서 고집을 피웠다면 모르겠지만, 형의 말마따나 학력고사 점수에 맞춰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를 좋아했던 청년은 과 활동보다 문학 동아리 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하지만 청년이 대학 신입생일 때 학생운동은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1991년 ‘5월 분신정국’. 그해 4월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11명이 잇따라 목숨을 던졌다.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며 청춘의 뜻을 비하했다. 청년은 그때 ‘거리’로 나가지 못했다. 학생운동에 관심은 있었지만 그를 이끌어줄 선배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과는 불과 3년 전에 신설됐다.

선배가 된 청년이 후배에게 충고한다. “학보사 기자는 편향된 시작을 가지면 안 된다.” 하지만 곧 후배가 학생운동에 투신하자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후배는 사람을 잘 챙기는 순수한 사람이라고 기억을 되살린다.1 이물질이 가득했던 그 시절, 순수는 더욱 몸부림쳤으리라. 청년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 동아리 시화전에 찬조시를 보냈다. “허상의 세계에 삶의 공간을 채우고 안주하지 못하고 서성이는 발목에 차인 쇠고랑(중략)”이라는 꽤 긴 설명이 적혀 있는 ‘절대값을 만드는 사회’라는 시다.

“절대값이란…// 선상님요 그라믄 지도 머스마로 바꽈주이소/ 가스나는 음지고 머스마는 양지라 안캄니꺼/ 가스나가 아무짜기도 쓸모없다믄/ 지도 싫습니더/ 지도 머스마 할라요// 선상님 쟈가 또 꿈꿨나뵈요/ 쟈는 소 귀에 경 읽기라요// 선상님 소 귀에 경 읽기라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카데요// 그런데 애야 저 학생들은 나이 들어 보인디/ 저 나이에 학교는 뭣하러 댕긴다냐/ 할멈 그게 아니라니깐/ 그런데 야야 저 사람들은/ 저렇게 맨날 놀면서 도대체 뭘 먹고 산다냐”

시를 좋아한 살가운 청년의 결심

2014년 1월20일 광주 북구의 임대아파트. 옷가지며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던 집은 말끔히 정리된 상태였다. 형 상훈씨 얼굴도 피곤에서 벗어나 조금은 말끔해져 있었다. 상훈씨는 주말 내내 동생을 잃은 아픔을 정리했다. 남종씨와 매일 생활하던 곳, 영결식 뒤 거의 들어가지 못했던 집이다. “무서웠어요. 미안했고요.” 주간에 일했던 상훈씨와 야간에 일했던 남종씨는 밤과 낮으로 나눠 교대하는 노동자처럼 집도 교대로 사용했다. 막내동생과 근처에 살고 있던 어머니는 고생하는 두 아들을 위해 매일 아침 밥을 해주고 가셨다. 상훈씨는 남종씨의 분신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도 믿지 못했다. “분신 직전 사진을 보고 나서야 인정했을 정도니까요.” 상훈씨는 막내동생 상영씨가 사진을 보여주자 현실을 직감했다. 희미해서 누구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사진에서 형은 동생임을 단박에 눈치챘다.

집안 곳곳에 놓여 있는 유품들은 주인을 잃고 생기를 잃었다. 대학 시절 일기와 책들은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시집 <강 같은 세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황지우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부터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까지.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내가 남종이를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형은 아직 다른 유품 상자는 정리하지 못했다며 머쓱해했다.

TV 위 벽면에 붙어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유인물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간 그와 오버랩된다. 그는 매일 유인물을 보며 ‘박근혜 퇴진’을 곱씹었을까? 형은 어머니가 붙여놓은 거라고 했다. “옛날 분이라 대통령을 임금 보듯이 하세요.” 떼면 난리가 난다고 했지만 사흘 뒤 다시 찾았을 때는 박근혜도 동생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한때 고민은 했지만 희망은 갖고 있었다. 지금은 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다. 항상 말만 앞세우며 내 자신마저 속여온, 아직도 어떻게 내가 속았는지 모르는 바보다. -1993년 10월17일 고인의 일기 중

청년은 6년간 군대에서 모은 돈으로 7급 검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사고’를 친 형 때문에 취업준비 자금을 모두 날릴 수밖에 없었다. 택시 운전을 하며 모은 돈도 형의 카드빚을 갚는 데 썼다. 교통사고를 당해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었지만 악착같이 모은 돈이었다. 청년은 형을 원망하지 않았다. “돈은 다시 벌면 되고 부족하면 노력하면 된다.” 되레 형을 위로했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 미안함으로 가슴에 응어리가 맺혔던 형은 청년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시간 좀 내라고 재촉할 정도였다. 그 재촉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한번은 청년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형, 2년 있다가 집 사서 나가자.” 조금만 더 노력하자고, 그때가 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 약속도 이뤄지지 못했다.

광주 북구의 편의점은 한갓졌다. 마지막으로 몸담은 직장. 청년이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던 40대 동료는 아직도 청년의 분신이 믿기지 않는다. 야간 일을 하면서도 아침 교대 근무자를 위해 매장을 정리하고 청소를 해놓는 살가운 사람이었다. 속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청년은 항상 웃는 얼굴로 대했다. 편의점에는 청년의 체취가 묻은 유일한 유품이 남아 있었다.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던 같은 건물의 학원 학생들을 위해 마련한 야구 장비였다. 청년은 곧잘 학생들과 야구를 했다. 유년 시절 형제들과 놀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청년은 3년여 전 광고를 보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6개월간 성실히 일했다. 결산을 할 때 1원 하나 틀리지 않게 맞춰놓았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매장 주인은 청년에게 매장 관리를 맡겼다. 그 뒤 지금까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겸 매니저 역할을 했다. 직원들 근무시간을 조절하고 임금도 정산했다. 편의점 동료가 처음에 청년을 사장으로 착각했던 이유다.

“형, 행복해” “엄마를 부탁해” “일어나십시오”

“진정한 철학적인 문제는 단 하나, 자살뿐이다.”

그의 유품으로 남아 있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의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아마도 그는 카뮈가 메타포(Metaphor·은유)로 등장시킨 시시포스처럼 매일 산꼭대기로 돌을 올렸다가 다시 아래로 굴리는 무의미한 삶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부조리한 실존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시포스처럼 신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부조리한 삶을 연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살을 택했다. 실존의 문제를 벗어나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집단을 존속시키고 부조리한 세력을 퇴진시키기로 결심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에 따르면 ‘이타적 자살’인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보기에 그의 분신은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핍박받는 민중의 눈에 그의 분신은 선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유인물이 붙어 있는 방. ‘박근혜 퇴진’을 유언으로 남긴 이남종의 침묵이 공간을 짓누른다. 사흘 뒤 다시 찾았을 때는 떼어지고 없었다(왼쪽). 이남종의 초등학교 졸업 사진(동그라미 안).
분신자살은 은폐된 자살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군중의 시선을 의식한다. 이는 군중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의 반영2이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대중에게 체제의 부정의를 설파하여 저항의 의미체계를 제공하는 행위3가 된다. 그리하여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말처럼 “비록 육신은 소멸했지만, 그 죽음은 망각되지 않고 공동체에 의해 의례적으로 기억”되고 혁명의 밑거름이 된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1994년 ○○월○○일 고인의 일기 중

2013년 12월30일. 청년은 편의점 근무를 교대하고 렌터카에 올랐다. 다음 근무를 대신할 ‘알바’까지 구한 상태였다. 교대했던 편의점 동료는 아무런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월급을 미리 정산해놓았다는 말에 의아했을 뿐이다. 월급날은 15일이었다. 청년은 5시간을 달려 서울 명동성당에 도착했고 이튿날 오후 1시에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을 지났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평화시장 노동열사의 얼굴을 직접 보고 마음의 결심을 굳혔으리라. 광주에서 서울까지 이틀간 청년이 이동한 흔적이 내비게이션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2013년 12월31일 오후 5시. 청년은 서울역 고가도로 위에 차를 세웠다. 사람들 눈에 띄기 쉬운 곳에 ‘박근혜 퇴진, 특검 실시’가 적힌 현수막을 펼쳤다. 미리 준비한 압축톱밥으로 방어막을 친 뒤 쇠사슬을 몸에 감았다.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경찰에 전화를 걸어 차량 통제를 요구했다. 가까이 오면 불을 붙이겠다고 경고했다. 그러고는 조금 뒤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은 찰나에 청년을 삼켰다.

보수언론과 경찰은 우발적 분신이라고 뜻을 오도했지만 청년이 오래전부터 결심한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내비게이션에는 12월27일에도 광주를 출발해 충남 천안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일주일 전 동생에게 자신의 차를 사용하라고 당부도 해놓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 편의점에는 이미 인터넷을 통해 주문한 10개들이 압축톱밥 상자 27개가 배달된 상태였다.

분신 전 만난 대학 친구에 따르면 청년은 현 정국에 굉장히 분노했다고 한다. “네가 정치인이라도 되느냐”며 핀잔을 들었을 정도다.4 가족 누구도 몰랐던 사실이다. 어머니는 “어제도 용돈 주고 갔는디, 말일까지 쓰라고. 쫌 있다 더 준다고 했는디…” 하며 장례식 내내 넋을 잃었다. 청년은 형에게 “행복하게 잘 살아”, 동생에게 “엄마를 잘 부탁해”, 국민에게 “일어나십시오”라는 유서를 남겼다.

글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오다인 인턴기자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 <한겨레>, 2014년 1월25일치 14면 ‘르포- 분신 이남종씨 흔적을 찾아’ 참조.

2 노성환, ‘한국 분신의 상징적 의미’, <비교민속학> 제12집, 1995.

3 이창언, <분신자살의 구조와 메커니즘 연구>, 고려대학교 한국사회연구소, 2009.

4 <한겨레>, 위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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