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8:36 수정 : 2014.02.04 10:51

장수씨의 오토바이 가게는 온통 시커멓다. 손님들의 오토바이 엔진오일을 갈아주며 조금씩 흘린 기름방울이 배기가스 찌꺼기와 함께 배어 시멘트 바닥을 새까맣고 폭신한 지층으로 만들었다. 철제 앵글에 판자를 놓아 만든 선반과 파란색 공구통도 30년치 검은 기름때를 먹었다. 심지어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는 커다란 개도 검은색이다. 아내와 남이 되자 2남1녀의 자식들도 남이 된 지 10년. 장수씨의 아들 노릇을 해온 세 번째 개, ‘마루’다.

이렇듯 검정투성이인 가게 한구석에 화창한 하늘색이 생뚱맞게 삽입돼 있다. 지상의 누군가가 까마득히 높은 고도를 날고 있는 장수씨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실사 현수막, 큰 액자, 창문 틈이며 책상 유리 밑까지 빼곡히 들어차 푸른색 공간을 만들어냈다. 장수씨는 바람만 좋으면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경북 청도에서 울산까지 날아간다. 사진 속 장수씨는 바람에 실려 어디까지라도 날아갈 수 있는 단풍나무 씨앗처럼 가뿐해 보인다.

1980년 장수씨는 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자 (주)코오롱에 입사해 기계설비 일을 시작했다. 작은 사고로 다쳤는데 산업재해 처리는 고사하고 도리어 책임을 지고 쫓겨났다.

“노동조합 같은 건 꿈도 못 꾸던 시절이지. 우리 세대가 희생양이야. 나라에 아무 기반도 없었고, 만날 야간작업 하고 그랬는데. 일할 수 있었으니까. 일할 수만 있어도 좋았으니까.”

22살에 첫딸 “찌랄, 두렵기는”

1978년 석유파동을 시작으로 근 2년간 물가는 미친 듯이 치솟았고 일자리는 없었다. 경기도 부천으로, 또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떠돌 때, 첫사랑 여자친구가 임신했다. 집에 갇힌 여자친구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도망쳤다. 입사지원서를 낸 대흥기계에 가까스로 취직했다. 책임질 기반을 얻어 다행이다 싶었다. 1982년 여름, 그렇게 첫딸이 태어났다.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빠가 되고 가정을 꾸리는 일이 두렵지 않았을까.

“아빠 되는 두려움? 찌랄, 두렵기는. 아, 돈 벌어오면 되지. 나이가 많고 적고, 아빠 되는 데 훈련된 사람이 어디 있노.”

그러다 친척 소개로 (주)대림혼다에 들어갔다. 그때 오토바이 수리 기술을 처음 배웠다. 몇 년이 지나 요령이 생겨 회사를 다니며 부친의 집에 딸린 점포에 ‘우성오토바이상사’를 열었다.

그 첫딸이 32살이 되는 동안, 오토바이 기술과 가게는 장수씨 곁에서 필요할 때마다 아낌없이 내주는 나무였다. 회사 생활에 지쳐갈 무렵, 봉급보다 훨씬 많은 벌이로 퇴직을 ‘선물’해주었다. 장수씨는 그렇게 ‘사장님’이 되었다. 아내가 아파트를 꿈꾸었을 때 꼬박꼬박 중도금을 대준 것도 오토바이 기술과 가게였다. 아내도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둘은 중산층 입성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아내가 무리해서 추진한 52평 아파트로의 입성이, 살고 있던 첫 아파트를 팔고서도 중도금 2천만원이 모자라 좌절됐다. 아내는 “집은 함부로 파는 게 아니라는데, 그래서 동티가 났다”고 한탄했다. 정말 동티를 입었는지 그때부터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았다. 오토바이 가게를 접고 아파트를 판 돈으로 동네 친구와 함께 당구장을 시작했는데 실패했다. 그 돈은 서서히, 그리고 마침내 몽땅 사라졌다. 빚도 생겼다.

그 동업자 친구가 어느 날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나타났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왔다고 했다. 장수씨는 친구 따라 강남으로, 아니 하늘로 갔다. 몰락해가는 지상의 스위트 홈을 떠나 산과 하늘에서 휴식을 얻었다.

“패러글라이딩은 딴생각을 할 수 없어서 좋아. 그날 그곳에 집중하니까, 회피라기보다 그 하나에 전념하니까, 그게 엄청 좋은 거야. 그래서 위험한 날씨를 좋아했지. 동풍이 불거나 산골짜기에서 와류(소용돌이 바람)에 싸이면 글라이더가 접혀서 반파되고 추락할 수도 있는데, 아무 생각이 안 나니까 올인하는 거지.”

그러나 ‘올인’은 하늘에서뿐이었다. 후회에 대해 묻자, 장수씨는 올인하지 못한 삶,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한 삶에 대해 말했다. 아내는 이미 계약을 했으니 돈을 내야 한다고 했고, 집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아내가 바라니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무의식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조그만 점포가 딸린 주택이나 사서 아버지 집에서 독립하는 것, 딱 이 정도만 하는 생각을 했다. 해외 개발 현장에 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의 반대로 번번이 좌절됐다.

“뒷덜미에 뭐가 채워진 느낌 있잖아. 집안에서 외동이고, 그러니까 장손이다 가장이다, 안 보이는 줄에 매여 있었던 거지. 올가미에 딱 묶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부정하면서도, 이번에 아들이 캐나다에 워킹인지 뭔지(워킹홀리데이)를 가는데, 내가 먼저 할아버지·할머니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자고 하는 것도 봐. 내가 어릴 때부터 아부지가 그러는 게 참 싫었으면서도, 조상이니 뿌리니 하는 말이 은연중에 내 속에 파고들어 있는 것 같아.”

동티는 나라까지 뻗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왔고, 부부는 몰락한 자영업자가 되었다. 부부는 애초부터 성정이 잘 맞지 않아 싸움이 잦았다. 거기다 경제적 문제까지 겹치니 불화는 더 극심해졌다. 그 시절 둘은 갈라서는 것으로 마지막 테이프를 끊으며 사회 표본집단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돈 벌어오는 일이 아버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장수씨의 아버지 노릇은 불가능해졌다. 사회 안전망 대신 장수씨를 보호하고 밑천을 대던 오토바이상사가 없으니 ‘땅바닥을 박박 기며’ 살았다.

결국 장수씨는 오토바이 가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재개발이 되면서 장수씨 부친 앞으로 토지보상금이 나왔다. 전처와 자식들이 집으로 들어왔다. 숨통이 트이나 싶었는데, 보상금을 둘러싸고 가족들이 엉겨서 싸워댔다. 전처는 다시 집을 나갔다. 장수씨도 자기 몫만 챙겨 나왔다. 아이들과 늙은 부모만 집에 남았다. 빚을 갚고 세를 얻어 오토바이 가게를 열고 겨우 자기 앞가림을 했다. 자식들이 등록금이니 학비 문제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장 귀여워하던 둘째딸이 밀린 고등학교 육성회비 때문에 찾아왔을 때였다. 장수씨는 사랑 없이 돈만 달라고 하는 전처에 지쳐 있었다. 게다가 월말에 부품값을 겨우 치른 때였다. 뿔따구가 났다. 그래서 ‘너거 엄마한테 가서 캐라’며 쫓아버렸단다. 둘째딸은 새천년과 함께 고등학교 월사금 때문에 우는 아이가 되었고, 자식들은 발길을 끊었다. 장수씨와 자식들의 상봉은 어머니 장례식 때 이뤄졌다.

“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미안하지” 하면서 장수씨는 자신도 그때 너무 힘든 시기였다고 털어놓는다. 중간에서 자신을 “돈만 주면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전처에 대한 원망을 하나둘 보태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분산해본다.

“한 사람과의 인연이라는 것, 나는 원래 인연을 잘 안 맺어. 누구를 잘 안 만나. 친구를 쉽게 사귀는 편도 아닌데, 한 사람, 그 한 사람과의 이별이 디~이기 서글픈 거 있재.”

헤어짐, 그 허무함… 부양, 그 협소함

그랬지만 장수씨는 두 명의 여자를 더 만났다. 한 사람은 장수씨와 결혼해서 함께 자기 아이들을 챙기기 바라서 헤어졌다. 요령이 생겼다는 장수씨는 두 번 다시 이 덫에 걸리지 않는다. 부양, 책임지는 사랑으로 한정된 협소한 관계의 덫. 장수씨는 책임보다는 의리가 좋단다. 또 다른 사람은 장 볼 때 무거운 것 들어주는 정도만 하면서 혼자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관계란다. “돈 부족한 것 채워달라 카면 아 있나, 그날로 끝, 은행 융자 추천해주지.”

그래도 가족 없이 혼자는 외롭지 않느냐고 물었다.

“꼭 혈육으로 국한할 필요 있나? 같이 있으면서 남이 되는 게 제일 슬프지. 나는 이 말이 참 좋그든. ‘100년 살 것도 아닌데 한 사람 따뜻이 하기가 왜 이리 힘들꼬.’ 이 말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 누구 하나 따뜻하게 못해주는데….”

장수씨, 진짜 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누구 한 사람, 진짜 누구 한 사람 진실한 벗 만들기가 힘들고, 누구 하나 따뜻하게 해주는 게 힘들어. 연탄불 한두 장은 몸을 데워주기라도 하지. 불우이웃돕기는 쉬워. 자기들을 위한 일인 거지. 정말 다른 이를 따뜻하게 해줄 수 있을까?”

장수씨,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다.

모두가 사라진 뒤에도 늘 곁에 있던 오토바이 가게는 이제 밑동이 다 드러났다. 건물 주인은 이사 비용도 안 주고 나가라고 하는데 그냥 버티고 있다. 장수씨는 사실 못 버티겠단다. 그는 젊었을 때 몸을 함부로 굴려 성한 곳이 하나 없다. 대부분 오토바이 사고였다. 주변 사람들은 늙으면 고생한다고 입을 댔다. 그때마다 장수씨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아슬아슬하게 비껴온 자신의 운명을, 회복이 빠른 젊은 몸을 장난스레 자랑하기 바빴다. 4년 전 사고는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게 만들었다. 의식을 잃은 동안 장수씨의 카드로 결제된 병원비가 9800만원이다. 3~4년간 병원비를 갚기 위해서 오토바이를 고쳤다.

장수씨는 54살이 되었고, 사람들 말처럼 늙음이 찾아왔다. 100kg가량의 오토바이를 끌어올려 해체하고 미세한 부속들을 매만지는 일이 이제는 버겁다. 얼마 전에는 글라이더를 타고 착륙하다 발을 잘못 디뎌 갈비뼈가 여럿 부러졌다. 괜찮다 싶어서 일을 하다가 부러진 뼈가 폐를 찌르는 바람에 25일간 입원했다. 장수씨만의 무용담은 여전하다. ‘조금 쉬면 되잖아요’ 하니, 세월 모르는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아, 점빵문 열어야 하니까’라고 툭 내뱉는다.

그래서 장수씨는 요즘 저 푸른색 공간에 가 있는 일이 더 많아졌다. 장수씨는 공인된 자격증을 가진 23년차 파일럿으로 관광객들을 태우고 체험비행을 할 수 있다. 혼자서 충분히 먹고살 수는 있다. 마음 같아선 오토바이 가게를 후딱 정리하고 싶다. “다른 삶을 살기엔 내 나이가 많지.” 족쇄 같던 가족이 없어졌는데 이젠 나이가 그를 잡는다.

장수씨는 이제 예전과 달리 “무데뽀가 아니라 계산을 때릴 수 있다”. 늘리고 늘려도 밥벌이로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는 기간은 5년이 빤하다. 한 사람 더 태우니 장비도 두 배로 무겁다. 온갖 근육을 움직이며 바람을 타야 하는 일은 더 이상 레저가 아니라 노동이다. 오토바이 가게를 접는 것은 영 불안하다. 사람을 써서 이어가는 것이 맞을까? 이부자리에 들어서도 ‘푸른색이냐 검은색이냐?’ 생각이 골똘하다. 다 늦게 고3 학생처럼 진로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탓인지, 장수씨는 글까지 끄적이고 싶어진단다.

“내 마음에, 머릿속에 이렇게 애틋한 것이 많은데, 그것들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쉽지가 않더라고.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 문학적이지 않고 유식하지도 않지만 그런 걸 뽑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애틋하거든. 글라이더를 타고 들판에 내리면 코스모스가 피어 있어. 그거 사진 찍고, 그러고 있으면 주위 사람들은 웃기다고 큭큭, 이상하다고 그러지. 감성, 가을 카면 떠오르는 거 있잖아. 이문세 노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그런 노랠 들으면 나는 거기 가 있는 거 같아.”

학창 시절에도 선생님들이 만든 세계가 뭔지 모르게 자신과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야단맞다 교무실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는 장수씨.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아버지가 돼버린 남자, 목 뒷덜미에 줄로 매어져 있는 것 같던 가족, 피로 이어진 그 줄을 다 끊어내지 못해 바로 오늘 산소에 벌초하고 돌아와 내 앞에 앉은 장수씨. “남기고 갈 게 뭐냐”며 다 벗어던진 듯하면서도, 집을 지키지 않아서 가족 앨범이 버려진 일, 추억을 물려주지 못해서, 양친이 깨끗하게 검은 머리에 옥빛 한복을 입고 찍은 그때 그 사진들을 영정 사진으로 쓰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모습, “추억은 나쁜 추억이든 좋은 추억이든 다 살아야 해” 하며 전처에 대한 추억의 줄을 한켠에 꼭 잡아둔 모습이 영락없이 여러 줄에 의지한 패러글라이딩과 똑같다.

내가 장수씨에게 “푸른색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하려는 찰나, 성질 급한 장수씨는 내일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어야 한다며 인터뷰를 어서 끝내자고 재촉한다. 장수씨, 아직 오토바이 가게 못 놓았나보다. 장수씨는 가족이 다 떠나고 혼자 남은 그 집으로 혼자서 돌아갔다. 나도 얼른 돌아섰다.

코스모스 핀 들판에 그를 내려주길

장수씨는 32년 전 어느 날 밤, 자신의 몸속에서 수천만의 정자를 빼내 그중 하나를 여자친구의 난자와 결합해 수정란 하나를 만들었다. 운이 나빴는지 좋았는지 그 수정란은 여자친구의 자궁에 떡하니 착상돼 배아가 되었는데, 그게 바로 나다. 장수씨는 내 가족관계등록에서 부(父)의 자리에 등재된 54살의 남자다. 아버지보다는 장수씨가 더 편한 호칭인 사이다. 가족이라기보다는 제사 준비와 벌초 팀원이랄까. 서로에게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는 관계다. 다만 내가 바라는 바는, 장수씨가 단풍나무 씨앗처럼 가벼이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동풍이 불지 않았으면, 서풍받이의 산이 뒤에 우뚝 서서 그를 무사히 코스모스 핀 들판으로 내려주었으면 하는 한 가지다.

글 배사은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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