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8:30 수정 : 2014.02.04 10:50

2013년 12월 말 현재, 지구상에서 마리화나를 합법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그렇다고 마리화나 흡연이 전세계적으로 ‘범죄’인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벨기에 등 서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20여 개국에서 의료적 필요에 따른 소비로 제한하거나, 처벌 규정을 아예 삭제하는 방식으로 ‘비공식적 합법화’ 조처를 취하고 있다.

낙태·동성결혼 합법화 이어 또…

2013년 6월20일 미국 언론단체 ‘탐사보도센터’(CIR)가 흥미로운 자료를 내놨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적발·압수된 마약류 가운데 89%가 마리화나다. 무려 771만kg이나 된다는데, 같은 기간 적발된 코카인 밀매는 전체 마약류의 7.4%에 그쳤다. 미국이 1971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부터 지금껏 남미 전역에서 벌이고 있는 이른바 ‘마약과의 전쟁’은 사실상 ‘마리화나와의 전쟁’으로 불러도 좋다는 얘기다.

미국 여론조사 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지난해 4월4일 내놓은 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 2명 가운데 1명(48%)꼴로 ‘한 번쯤 마리화나를 피워봤다’고 답했다. 이 기관이 1969년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마리화나 불법화에 찬성한 응답이 전체의 84%였다. 합법화 의견은 단 12%에 그쳤다. 2013년 같은 조사에서는 45%가 여전히 합법화에 반대했지만, 절반이 넘는 52%는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

2014년, 마리화나의 위상이 달라진다. 물론 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변화다. 2013년 12월10일 우루과이 상원은 표결을 거쳐, 마리화나 재배·가공·보관·판매를 국가가 전담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마리화나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우루과이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마리화나를 공식 합법화한 나라가 됐다. 그것도 국가의 ‘전매사업’으로 말이다.

법안은 상원 통과 이후 120일 안에 시행에 들어간다. 우루과이에선 늦어도 2014년 4월이면 18살 이상 성인으로 일정한 절차에 따라 등록만 하면 마리화나를 한 달에 40g씩 정부기관에서 구매할 수 있게 된다. 개인이 재배하고 싶으면 역시 등록만 하면 최대 6그루씩 마리화나 묘목을 키울 수 있다. 정부가 지정·운영하는 마리화나 흡연소도 등장할 예정이란다. 외국인에겐 공급을 제한하고, 국경 밖 유통도 엄격히 금지된다.

우루과이 정부는 왜 마리화나 합법화를 선택한 걸까?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 새, 그 나라가 수상하다. 2012년엔 남미 국가로선 드물게 낙태를 합법화했고, 2013년엔 동성결혼까지 합법화했다. 서구적 잣대로 보면, ‘진보의 리트머스시험지’를 모두 통과한 셈이다. 이 모든 조처를 주도한 호세 무히카(78) 대통령은 2013년 12월13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루과이가 특별히 진보·개혁적인 건 아니다. 일련의 합법화 조처는 모두 논리적인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마리화나만 해도 그렇다. 이건 뭐, 진보적이고 뭐고 할 문제가 아니다. 마리화나를 불법화하면, 소비자들은 밀매조직을 통해 비싸고 위험한 방식으로 구입해야 한다. 암시장이 형성될 것이고, (마약조직 등) 이익을 취하는 세력도 생기기 마련이다. 합법화로 이런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과도한 흡연으로 몸을 망친다면, 이 또한 규제할 것이다. 음주와 마찬가지다. 매일 위스키를 한 병 이상 마시면 환자 취급을 받는 법이니까.”

무히카 대통령은 2009년 11월 대선에서 집권 좌파연대(프렌테 엠플리오) 후보로 나서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됐다. 앞서 2005~2008년엔 중도좌파 성향의 타바레 바스케스 대통령 정부에서 농축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그가 우루과이 주류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1990년대 초반 인민참여운동(MPP)을 창당하면서부터다. 1994년 하원에 진출한 그는, 1999년 선거에서 상원으로 무대를 옮겼다. 2004년 대선에서 좌파연대의 후보로 나선 바스케스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 노릇을 한 것도 그가 이끈 MPP였다. 그해 그는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했다. 정작 흥미로운 건 정치권에 진출하기 전 무히카 대통령의 이력이다.

무히카 대통령은 1935년 5월20일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 외곽에서 농사를 짓는 평범한 유럽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무난한 청소년기를 거친 청년 무히카가 1950년대 중반 처음 정치권에 발을 디딘 것은 우루과이의의 대표적 보수정당 국민당이었다. 국민당과 무히카 대통령의 관계는, 물론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6군데 총상 입고 살아난 사나이

1950년대 중반 이후 세계적인 농산물 수요 급감으로 농산물 수출국인 우루과이 경제는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중산층의 삶의 질도 곤두박질쳤다. 이런 가운데 쿠바에서 날아든 혁명 소식은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다. 1968년엔 남미뿐 아니라 유럽 전역도 ‘혁명의 기운’이 넘실댔다. 이 무렵 무히카는 이른바 ‘투파마로스’라고 하는 신생 게릴라 단체에 가담한다. 이 단체는 ‘모비미엔토 에 리베라시온 나시오날’(MLN·조국해방운동)로 불리기도 했다.

MLN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무장조직이었다. 정치적 선전과 게릴라 전투를 통해 ‘혁명’을 추구했다. 이 단체가 채택한 전술은 이른바 ‘무장 선전·선동’이었다. 최소한의 무장력으로, 상징성이 큰 곳을 공격해, 최대의 홍보 효과를 노리는 방식이다. 숨을 곳도 없었다. 쿠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 같은 산악지형이 우루과이엔 없었다. 그러니 수도 몬테비데오 도심에 스며들어야 했다.

대낮에 버젓이 식료품 운반트럭을 덮쳤다. 빼앗은 식료품은 빈민촌에 고루 나눠줬다. 은행을 털어 돈과 함께 회계조작된 장부를 들고 나왔다. 돈은 빈민촌에 나눠주고, 장부 내용은 언론에 흘렸다. 당국은 한편으로 MLN 게릴라를 쫓으면서도, 그들이 공개한 내용에 대한 수사도 벌여야 했다. 중요한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엔 라디오 방송국을 급습했다. 축구 대신 ‘혁명의 대의’가 생중계됐다. 해군사관학교를 점거해서는 생도들을 도열시켜놓고 ‘침착하게’ 무기고를 털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펼침막을 걸어놓고 사라졌다. “여기, 인민이 다녀가다.” 1969년 1월1일 첫 거사를 벌인 이래, MLN이 ‘로빈후드 게릴라’란 별칭을 얻기까지는 그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부의 소탕작전이 조금씩 강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 3월 무히카가 한 술집에서 동료와 ‘접선’을 시도하는 모습이 ‘정보망’에 걸렸다. 이내 경찰이 들이닥쳤고,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는 6군데나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온전히 회복하기까지는 1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그 새 그는 함께 수감된 동지들과 끊임없이 소식을 주고받았다. 1972년 벌어진 이른바 ‘푼타카레타스 파옥 사건’은 이런 ‘노력’의 결실이었다. 탈주에 성공한 정치범 대부분이 이내 체포됐다. 무히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는 새 MLN의 활동 방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잇따라 외국인을 납치해, 수감된 동지들과 인질 교환을 시도했다. 정부가 끝내 협상을 거부하자, 미국인 인질 1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조직을 이끌어온 온건한 지도부가 대부분 투옥되면서, 더 젊고 강력한 이들이 조직을 이끌기 시작한 게다. 결국 우루과이 정부는 1972년 초반부터 정규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군은 사로잡힌 게릴라 조직원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참혹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불과 몇 달 만에 MLN은 사실상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 이미 1968년부터 계엄령에 기대 정국을 유지해온 호르케 파체코 대통령은 이 무렵 헌정 중단 사태를 선언했다. 정치·경제적 혼란이 극에 이르렀다. 이듬해 6월 마침내 군이 전면에 나섰다. 의회는 폐쇄됐고, 이때부터 우루과이는 ‘민군복합체’란 기이한 형태의 군부독재 체제로 접어들었다.

1980년 11월 군부가 밀어붙인 개헌은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민정이양을 내세우고 버티던 군부는 결국 1984년 선거를 치렀다. 중도개혁 성향의 콜로라도당 훌리오 마리아 상귀네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이듬해 집권하면서, 12년 세월 우루과이를 옥죄온 군부독재도 막을 내렸다. 14년 남짓 독방에 감금됐던 무히카도 마침내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됐다. 그는 2012년 11월 과 한 인터뷰에서 “초기 2년은 우물 속에 갇혀 지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개구리며 벌레 따위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돌이켰다.

1994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무히카는 낡은 스쿠터를 몰고 첫 출근을 했단다. 당황한 주차요원이 물었다. “오래 계실 건가요?” 그는 이렇게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 참 좋겠습니다만….” 정치인 호세 무히카의 최대 강점으로는 ‘동네 아저씨’ 같은 친근한 이미지가 첫손에 꼽힌다. MLN 게릴라 시절의 ‘로빈후드’ 이미지 역시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대통령 취임 이후 그가 보여준 행보 역시 이와 꼭 맞아떨어진다.

무히카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몬테비데오 외곽에 자리한 침실 1개짜리 옛 집에서 부인과 단둘이 생활하고 있다. 그의 낡은 농가 맞은편 비포장도로에 차를 대고 지키고 선 사복 경관 2명이 경호인력의 전부란다. 그는 대통령궁을 노숙인 쉼터로 탈바꿈시켰고, 호화로운 대통령 별장은 아예 팔아치워 국고에 귀속시켰다.

운전도 직접 한다. 해외 순방 때는 전용기 대신 일반 민항기 이코노미석을 이용한다. 대통령의 한 달 월급 1만2500달러의 90%는 빈민과 중소기업인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몬테비데오의 식당가에선 다른 손님들과 뒤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점심을 먹는 무히카 대통령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단다. 우루과이에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라는데, 지구촌 전체로 보면 전례가 있을까 싶은 문화다. 그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남들한테 나처럼 살라고 하면, 아마 날 죽이려 들 것”이라며 웃었다.

월급 90% 기부… 이코노미석 타는 대통령

무히카 대통령은 2014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우루과이 헌법은 5년 임기의 대통령직 연임을 금하고 있다. 다시 출마하려면, 5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미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는 이미 “임기가 끝나면 정계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금을 받아 생활할 테지만, 적어도 급여가 줄어 불편할 일은 없을 터다. 2012년 6월 열린 ‘유엔지속가능개발회의’(리우+20)에서 연설에 나선 무히카 대통령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가난한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정작 가난한 사람은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이 필요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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