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8:27 수정 : 2014.01.06 16:10

“피고인은 왜 스스로 ‘흑인’이라 말하는가? 내가 보기에 ‘갈색’에 가까운데.” “판사님은 왜 스스로 ‘백인’이라 말씀하십니까? 제가 보기에 ‘핑크’에 가까운데.”(영화 <자유의 절규> 중에서)

‘투사’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2013년 12월5일 밤 8시50분께(현지시각)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외곽에 자리한 휴튼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95살. 그로부터 2시간55분 뒤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이 텔레비전 생방송 연설에서 “조국의 가장 위대한 아들을 잃었다”며 그의 죽음을 공식 발표했다.

남아공 정부는 열흘장을 국장으로 엄수했다. 장례식에 앞서 그의 주검을 운구해 사흘 동안 일반에 공개했고, 12월10일엔 성대한 영결식까지 열었다. 그의 장례 절차에 참석한 세계 각국의 전·현직 국가 수반만도 100명을 넘어섰다. 2005년 4월2일 숨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을 뛰어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대하고 또 장엄한 의례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만큼, 그의 삶을 축하하는 이가 많았다. 그의 삶 자체가 말 그대로 ‘자유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27년여에 걸친 수감 생활 때문만은 아니다. 석방 이후 집권 시기까지 그가 보여준 용서와 화합의 나날이 되레 인류의 가슴을 동하게 했다. 그러니 그럴 만했다. 유엔이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세계 만델라의 날’을 제정한 것도 벌써 4년여 전의 일이다. 살아, 이미 신화였다. ‘인류의 스승’ 반열에 올랐으니, 죽어 추앙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격식이나 규모 면에서, 만델라의 장례식은 절대 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열흘 동안 이어진 전세계 언론의 ‘호들갑’을 지켜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헛헛했다. 한 위대한 인간의 투쟁만으로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만델라가 수감돼 있는 동안에도, 남아공 흑인들은 자유를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다. 끝없이 이어지는 언론 보도를 지켜보면서, 문득 그가 떠올랐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의 엄혹한 시절, 자유를 절규했던 또 한 명의 걸출한 투사 말이다.

만델라 투옥 당시 앞장서 흑인해방 투쟁

스티븐 반투 비코는 1946년 12월18일 남아공 이스턴케이프주 긴즈버그에서 태어났다. 만델라는 남아공의 주류인 코사족에 속하는 템부 부족의 왕가 출신이다. 역시 코사족 출신이지만, 비코의 아버지 음진가이 매튜 비코는 하급 공무원이었다. 어머니 엘리스 맘케테 비코는 백인 집안의 가정부 노릇을 했다. 2남2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그를 아버지는 법률가로 키우고 싶어 했지만, 비코가 4살 되던 해인 1950년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비코의 어린 시절은, 만델라와 달리 유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부는 곧잘 했다. 1964년 지역 명문 러브데일고교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비코의 앞길은 비교적 순탄해 보였다. 하지만 고교 입학 직후 형 카야가 흑인 인권단체 아자니안인민해방군(포코) 활동에 간여한 혐의로 ‘아파르트헤이트 경찰’에 체포됐다. 비코 역시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퇴학 처분을 당해야 했다. 비코가 ‘해방투쟁’에 눈뜬 것도 이 시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탈주 마리안힐의 가톨릭계 성프란치스코 칼리지로 옮겨 중등과정을 마친 비코는 나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직후부터 학생운동에 뛰어든 비코는 진보적 백인이 주도하던 ‘남아공대학생연합’(NUSAS)에 맞서 흑인은 물론 인도계 등 이른바 ‘유색인종’ 출신을 중심으로 ‘남아공대학생기구’(SASO) 설립을 주도했다. 이미 그 무렵 비코는 코사어는 물론 영어·아프리칸스어(남아공 백인 공용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단다.

‘검은 것은 아름답다.’ 1968년 SASO 초대 의장에 선출된 비코는 ‘흑인의식화운동’(BCM)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학생운동권을 조직하기 위해 남아공 전역을 분주히 오갔다. 당시 그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단다. “친구, 지금 그대로 자네 모습이 좋네. 이제 그만 자네도 사람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게….”

1970년에 들어서면서 그는 이미 남아공 더반을 중심으로 벌어진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됐다. 같은 해 동료 학생운동가인 은시키 마샤라바와 결혼까지 했다. 학업을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탈대학 당국은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1972년 그를 퇴학시켰다. 그는 같은 해 남아공 흑인총회(BPC) 명예회장에 오르며 저항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소수 백인 정권은 독특한 처벌 규정을 고안해냈다. 이른바 ‘금지처분’이다. ‘금지된 인물’은 동시에 1명 이상과 얘기를 나눌 수 없다. 공공장소에서 말을 하는 것도 ‘금지’된다. 거주지를 벗어나는 것도, 집필을 하거나 언론 등 외부와 인터뷰하는 것도 ‘금지’다. 해당 인물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도, 개인적인 얘기를 나눈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도 ‘금지’된다. 1973년 2월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는 스티븐 비코에게 ‘금지처분’을 내렸다.

비코의 거주지는 그의 고향과 가까운 이스턴케이프주의 킹윌리엄스 지역으로 제한됐다. 귀향 이후에도 그는 저항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흑인의 자긍심을 일깨울 수 있는 풀뿌리 조직을 여럿 설립하는 한편, 양심수 석방과 교육·인권 사업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백인 정권의 온갖 탄압에도, ‘흑인의식화운동’은 갈수록 영향력이 커졌다. 1976년 6월16일 소웨토 지역에서 벌어진 항쟁의 불씨를 만들어낸 것도 그들이었다.

이 무렵 비코의 활동을 생생하게 담은 영화가 한 편 있다. 영국 영화감독 리처드 애튼버러의 1987년작 <자유의 절규>(Cry Freedom)다. 덴절 워싱턴(비코 역)과 케빈 클라인(도널드 우즈 역)이 주연한 이 영화는 흑인 인권운동에 무지했던 진보적 백인 언론인이 흑인의 친구가 돼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흑인의 인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저항운동에 비판적이던 우즈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폭압을 경험하면서 저항운동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1977년 9월, 포트엘리자베스 날씨 맑음/ 모든 것이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곳 교도소 619번 방/ 아 비코, 비코, 비코 때문에/ 아 비코, 비코, 비코 때문에/ 이흘라 모자, 이흘라 모자/ 그가 죽었다/ …/ 밤에 잠을 청하면/ 핏빛 꿈을 꾸게 된다/ 바깥세상은 온통 흑백이다/ 오로지 한 가지, 죽음의 색뿐이다/ 아 비코, 비코, 비코 때문에/ 아 비코, 비코, 비코 때문에/ 이흘라 모자, 이흘라 모자/ 그가 죽었다/ …/ 촛불은 입으로 불어 끌 수 있다/ 화톳불은 입으로 불어 끌 수 없다/ 일단 불이 붙은 뒤에는/ 바람은 되레 불길을 키운다/ 아 비코, 비코, 비코 때문에/ 이흘라 모자, 이흘라 모자/ 그가 죽었다/ …/ 세계의 모든 눈이/ 이제 지켜보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영국 가수 피터 가브리엘의 1980년 곡 <비코> 가사 전문)

1977년 8월18일 조직사업을 위해 비밀리에 거주지를 빠져나온 비코는 이스턴케이프주를 채 벗어나지 못하고 포트엘리자베스 지역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적발됐다. 1967년 발효된 테러방지법 제83호에 따라, 그는 곧장 현지 윌머 경찰서에 딸린 산람 구치소 제619호실에 갇혔다. 모진 고문이 이어졌다. 22시간 남짓 뭇매가 퍼부어졌다. 젊은 육신도 당해내지 못했다. 이윽고 육중한 몸집의 경관이 곤봉을 치켜들었다. 비코가 외마디 비명도 없이 쓰러졌다. 두개골이 함몰됐다. 비코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백인 경찰의 곤봉에 32살 때 요절

경찰은 당황했다. 구치소 의료진은 곧장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겁먹은 경찰은 ‘도주’를 걱정했다. 의식도 없는 비코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채 여러 날을 그대로 방치했다. 1977년 9월11일 마침내 결정이 내려졌다. 경찰은 의료시설이 설치된 프리토리아 교도소로 이감을 결정했다. 의식이 없는 비코는 알몸인 채로 수갑을 차고 랜드로버 차량 뒷좌석에 실렸다. 그렇게 1100km를 달렸다. 이튿날인 9월12일 프리토리아 교도소 병원에 도착한 그에게 의료진은 사망선고를 내렸다.

아파르트헤이트 법무부는 망설이지 않았다. 사망 원인을 쉽게 발표했다. ‘장기간 계속된 단식투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됐다’는 게다. 누구도 믿지 않았다.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장례식이 서둘러 준비됐다. 남아공 전역에서 장례식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경찰은 도로를 막고 나섰다. 프리토리아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봉쇄를 뚫고 2만여 명이 참석했다. ‘장엄한 최후’였다.

‘응코시 시켈렐리 아프리카!’(신이시여,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 비코의 장례식장에서 메아리친 합창은 넬슨 만델라의 장례식에서도 울려퍼졌다. 해방된 남아공의 국가다. 그 노래를 이은 것은 ‘센제니 나?’(대체 우리가 뭘 했지?)였다. 영미권을 대표하는 저항가요 ‘위 셸 오버컴’(우리 승리하리라)의 아프리카판이다.

“대체 우리가 뭘 했지?/ 우리 죄는 우리가 흑인으로 태어난 건가?/ 우리 죄는 진실이야/ 그래서 저들이 우리를 죽이지/ 아프리카여, 돌아오라/ …/ 우리가 뭘 했지, 우리가 뭘 했냐고?/ 우리가 뭘 했지, 우리가 뭘 했냐고?/ 우리가 뭘 했지, 우리가 뭘 했냐고?/ 대체 이 나라에서, 우리가 뭘 했냐고?/ 보어인(남아공 백인)은 개야/ 보어인은 개야/ 보어인은 개야/ 보어인은 개야/ 흑인으로 태어난 게 죄지/ 흑인으로 태어난 게 죄지/ 흑인으로 태어난 게 죄지/ 이 나라에 태어난 게 죄야/ …/ 대체 우리가 뭘 했지?/ 흑인으로 태어난 게 죄야?/ 진실을 말하는 게 죄겠지/ 그래서 우릴 죽이는 거야/ 아프리카여, 돌아오라.”

비코의 친구가 된 백인 언론인 도널드 우즈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망명해, 그의 부검 사진을 공개했다. 온몸이 멍투성이인 채로, 두개골은 함몰된, 참혹한 죽음의 배후를 세상에 알렸다. 비코의 의로운 죽음은 선잠에 취해 있던 국제사회를 깨웠다. 그해 유엔은 무기 금수 조처를 포함해 남아공에 대한 제재를 시작했다. 넬슨 만델라는, 살아 갇힌 것으로 투쟁의 상징이 됐다. 스티븐 비코는, 죽어 묻힘으로써 저항의 몸짓이 됐다.

1990년 2월12일 석방된 넬슨 만델라가 부인 위니 만델라의 손을 잡고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었을 때, 전세계가 격정의 박수를 보냈다. 소수 백인 정권과 치열한 협상 끝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고, 사상 첫 민주선거를 거쳐 1994년 5월10일 그가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지구촌은 ‘무지갯빛 미래’를 낙관했다. 그로부터 20년여, 죽음을 앞둔 ‘마디바’(넬슨 만델라의 출신 부족 이름으로, 흔히 존경을 담은 애칭으로 사용)가 바라본 조국은 어떤 빛깔이었을까?

“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건가? 내 나이 벌써 팔순을 넘겼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이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것이란 확신 속에, 그저 웃으며 무덤으로 향하도록 해줄 순 없는 건가? 오랜 세월 고문을 당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참아가며 싸워온 ‘자유’가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2013년 9월 초 남아공 최대 도시인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한 출판기념회에서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투쟁에 앞장선 공로로 1984년 일찌감치 노벨평화상을 받은 투투 대주교다. 그의 분노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는 굳이 지목하지 않아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집권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중진들이 행사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날 투투 대주교는 백금(플래티넘) 광산으로 이름난 남아공 북서부 마리카나 지역에서 벌어진 탄광노동자 학살 사건을 거세게 비판했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경찰의 선두에는 백인뿐 아니라 흑인 경찰도 서 있었다. 최루탄을 피해 인근 야산으로 달아나던 노동자들의 등 뒤에서 반자동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도 그들이었다. 34명의 노동자가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탓할 건 우리 자신뿐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해마다 회원국의 소득과 교육 수준, 평균수명 등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항목의 점수를 종합 평가해 발표한다. 이른바 ‘인간개발지수’(HDI)다. 이 지수는 ‘1’에 가까울수록 삶의 질이 높다는 얘기다. UNDP가 2013년 3월에 내놓은 ‘2013년 남아공의 HDI’는 0.629, 조사 대상 187개국 가운데 121위에 그쳤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직후인 1995년에 남아공의 HDI는 0.650이었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철저히 닫혀 있던 노동시장의 문이 열렸다.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던 흑인 노동자들은 한꺼번에 시장으로 몰렸다. 하지만 일자리는 ‘거기’ 없었다.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에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숙련된 기술도, 높은 교육 수준도 없었던 흑인들에겐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사라졌지만, 흑인과 백인의 ‘생산성 차이’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넬슨 만델라, 타보 음베키, 제이컵 주마.’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집권한 3명의 남아공 대통령은 모두 아프리카민족회의 출신이다. 이렇다 할 ‘대안’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가? 숱한 부패 의혹에도, 주마 대통령은 2014년 대선에 다시 나설 기세다. 스티븐 비코는 유고집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쓴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러니, 탓할 건 우리 자신뿐이다. 언제나 우리한테 걸맞은 지도자를 갖게 마련이므로.”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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